대기오염으로 인해 하늘의 푸른빛은 물론이고 햇빛조차 보이지 않는 곳. 이자벨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있는 고층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이자벨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없다. 오염된 대기를 걸러 호흡할 수 있게 해주는 정화마스크와 보안경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숨을 쉬는데 불편함이 없었고 기침이 나거나 목이 따가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서야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얀색 장갑. 몸에 딱 맞는 정장. 머리에 돋아난 뿔과 날개, 꼬리까지.
이자벨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아, 이제 나 인간이 아니었지.”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방금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난 분명 나자릭에서..
이자벨은 악마인 자신이 어째서 리얼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느끼며 공허한 도시를 정처 없이 걸었다. 도시는 신물나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텅 빈 눈을 한 인간들이 살기 위해 비척대며 돌아다니는 공간. 누구는 직원의 휴식따윈 전혀 존중해 주지 않는 회사를 원망하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출근을 했고, 어린 고아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몸을 떨면서도 어른들의 자비따윈 기대하지도 못한 채 죽음만을 기다렸다. 모두가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했으니- 그들 중 그 누구도 미래에 헛된 희망을 품는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뿔과 날개를 단 악마가 버젓이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그 누구도 돌아보지를 않는다. 테러는 물론이고 별의 별 일이 하루 걸러 일어나는 세상이었다. 분명 이상한 코스프레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서로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세상. 그 모습을 바라본 이자벨은 고개를 돌리곤 치미는 구토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좀비처럼 줄지어 이동하는 현대인들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망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자벨은 사람들을 피해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가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게 됐다. 도시는 사라진 태양빛을 대신해 화려한 전광판의 불빛과 가로등, 네온사인으로 가득했다. 이자벨은 무감정한 눈으로 그것들을 훑다가 문득 옷가게 안의 전신거울 하나를 발견하곤 경악했다.
“……!”
붉은색 눈의 길쭉한 동공이 순식간에 축소됐다. 그도 그럴 것이, 거울에 비친 것은 아름다운 악마의 모습이 아닌, 앳된 외형의 인간 여성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짙은 검정색의 머리카락과 검정색의 눈, 성장기에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것이 분명한, 마르고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툭 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이 연약하게 생긴 여자는 삶에 그 어떤 의미조차 느끼지 못하는, 텅 비어 공허한 눈빛으로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 여자는, 이자벨이 잘 알고 있는 인간이었다. 여자의 이름은, 사토 히나. 나이는 27세.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고아 출신의 하층민으로, 미래 따위는 기대하지 않고 죽지 못해 그저 살아가는 겁쟁이 패배자에 불과한 인간이었다. 어릴 적부터 패배를 너무나 많이 경험한 탓에 감정이 황폐해져 현실에서는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고 게임과 같은 허구 속에서나 삶의 이유를 찾는 병신같은 여자. 그래, 이자벨은 이 여자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잘 알기에 미워하고, 연민하며, 증오했다. 여자는 바로 이자벨, 자신이었기에.
사토 히나. ‘이자벨 헬라 바하무트’라는 위그드라실 속 캐릭터를 연기하는,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실. 어느새 손을 내려다보자 보인 것은 고급스런 하얀색 장갑에 감싸인 손이 아닌, 여기저기가 부르튼 작고 볼품없는 손이었다. 그녀는 그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어느새 강하고 아름다운 악마가 아닌 보잘것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자신을 확인한 히나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미친 듯이 내리쳤다. 방금 전까지 분명 자신은 강인한 악마였을 터였다!! 실패따윈 경험해 본 적 없는, 오만의 악마였을 것이었다! 바로, 바로 방금 전까지!! 머리를 죄 쥐어뜯고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그러자 그 순간에도 거리를 지나고 있던- 그 어떤 순간에도 제 할 일만 반복했을 수많은 인간들이 그녀를 동시에 돌아보았다. 수 백 개의 눈이 단 한 번의 깜박임도 없이 그녀를 주시했다.
““…히나-””
“ㅆ, 씨발, 뭐야!”
그들이 동시에 입을 열어 히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히나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히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히나- 이리 와, 너도 우리와 같잖아.”
“-너도 우리와 같은 패배자잖아.”
“아니야, 아니야아니야아니야!!!! 저리 꺼져, 내게서 떨어져!!!!!”
수많은 손이 그녀의 팔을, 다리를, 허리를- 온 몸을 잡아 움직일 수 없게 바닥으로 짓눌렀다. 그래, 네게 어울리는 장소는 바닥이야. 그들 모두가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듯이 그들은 하나같이 히나에게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말로 그녀를 매도했다.
“이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병신-”
“허구 속에서나 밝고 성격 좋은 동료를 연기하는 인간 쓰레기.”
“너 같은 것은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을걸?”
“아름다운 나자릭에 너는 어울리지 않아.”
“놔, 이거 놔!!”
나는 너희와 달라! 난 이제 날 사랑해주는 동료가 있어, 나만 바라봐 주는, 날 위해서 뭐든지 다 해주는 나자릭의 아이들이 있어!! 히나는 소리치며 몸을 비틀었다.
“-히나.”
히나가 수많은 손에 포박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침내 거울 안에서 고요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또 다른 ‘사토 히나’가 거울 밖으로 걸어나왔다. 히나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자,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히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잖아, 히나- 우리를 사랑해 줄만한 사람들은 진작에 죽었는걸.”
거친 손이 히나의 목을 감싸왔다.
“그런 사람들을 전부 잃은 사람을 뭐라고 하는 지 알아?”
한없이 공허하던 그녀의 눈에 한차례 광망이 일었다. 그녀는 증오에 물든 눈으로 하나를 죽일 듯 노려보더니 그 나약한 신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힘으로 히나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히나는 질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패배자. 다시는 구원받지 못할, 패배자.”
“큭, 컥-..”
“-나자릭의 NPC들이 정말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알베도도, 샤르티아도, 코퀴토스도, 아우라와 마레도… 데미우르고스도- 모두 네가 아름답고 강한 악마- ‘이자벨 헬라 바하무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네가 실은 이렇게 불쌍하고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 ‘사토 히나’라는 사실을 알면 모두가 널 경멸할걸?”
“-큭.. 아, 니야.. 날, 이 몸을 위하겠다고 했어!! 헉, 날, 경애하고, 애,정한다고 했어!!!”
“바보, 그렇게나 패배했으면서 아직도 희망을 갖다니. 멍청하구나.”
그녀는 다정하고 차갑게 절망을 속삭였다.
“넌 그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존재들을 모두 잃을 거야. 넌 패배자니까. 결코 승리할 리가 없으니까. 왜냐하면, 이 세상의, ‘리얼’의 모든 인간들은 패배자거든. 먹고 살기 위해 수명을 깎는 인간들도, 아인즈 울 고운의 네 동료들도!! 푼돈 밖에 안되는 봉급을 받아보겠다고 시위하다 살해당한 네 부모도!!! 이미 다 죽은 세상에서 아콜로지 안에 갇혀 살면서 자신은 잘났다고 믿는 상류층의 쓰레기들도!!!!! 다, 하나같이 바보천치 패배자 쓰레기들이야.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아니야!! 아니야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헛소리 하지 마! 나-난 달라졌어, 이제 난 인간이 아니야..! 그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나약한 인간 따위가 아니라고!!”
“-정말?”
그녀는 발악하는 히나를 내려다보며 미약하게 웃었다. 번들거리는 죽은 눈이 심하게 소름끼쳤다.
“정말 그럴까? 이미 넌 한 번 저지를 뻔했는걸.”
“…?”
“모몬가 씨를, 아우라와 마레를- 네가 죽이려고 했잖아.”
“무슨…… …!!!!”
순간 히나의 뇌리에 어떠한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자신이 진심을 다하여 모몬가와 나자릭의 수호자들을 죽이려고 했던… 있을 리가 없는 끔찍한 기억이었다. 히나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들은 잔인하게도 그 모든 행동이, 그녀가 저지른 것임을 확실하게 못박아주고 있었다.
히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곧, 까만 눈에서 빛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저항하고 있던 힘마저도 사라지고, 히나의 눈이 완전히 자신과 같이 되었을 때 그녀는 공허하게 웃으며 히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봐, 히나. 그게 진짜 네 모습인걸.”
내일 당장 세상이 끝난다해도 상관없는, 삶에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인형같은 모습. 이대로 목이 졸려 죽어도 그저, 죽는구나- 하고 받아들일 지극히 비정상적인 인간.
“잘 가, 사토 히나.”
이게 너라는 인간의 말로야. 우리가 결코 행복해지는 일 따위는 없는걸.
그녀는 상냥히 속삭이며 히나의 목을 졸랐다. 히나가 산소가 부족해 결국 질식했을 때, 이자벨은 마침내 악몽에서 깨어났다.
***
“-월드 아이템에 의한 정신지배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으신 듯 하옵니다. …멍.”
“..정신지배가 풀린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헌데 어찌하여 아직도 깨어나시질 못하신단 말입니까!!”
“…이미 신체적인 외상에 대한 치료는 완료하였으며 더이상 존체 어느 부분에서도 어떠한 외상이나 상처를 발견할 수 없사옵니다. 송구하오나 제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듯 하옵니다. …멍.”
나자릭의 고위 신관이자 메이드장인 NPC, 페스토냐 왕코의 말에 수호자들이 분노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농후한 살기에 페스토냐는 고개를 숙였다. 결국 한숨을 쉰 아인즈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만두어라. 페스토냐의 잘못이 아니다.”
“하오나 아인즈 님- 소녀가 알기로는 이자벨 님의 종족은 수면이 불필요하옵니다. 헌데 사흘이나 의식이 없으시니.. 혹여라도 스스로 깨어나시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온지 염려가 되옵니다.”
알베도의 염려 섞인 말에 이번에는 수호자들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돼, 알베도!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마!!”
“흐윽… 이 모든 게 다 소첩의 잘못이어요… 이대로 이자벨 님이 깨어나시지 못하신다면 소첩도..”
“그러니까, 그만 하라니까- 샤르티아!”
“누, 누나 말이 맞아요! 그러면 안돼요!!”
“-그만!!!”
아인즈가 소리치자 서로를 노려보던 수호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월드 아이템이라지만 경성경국은 단순한 정신지배의 아이템일 뿐, 지배 이후 대상을 식물 상태로 만든다던가 하는 효과나 부작용은 들은 바가 없다. 그리고, 아무리 이자벨이 너희와 같은 동격의 100레벨이라고야 하지만, 의식도 없는 환자의 앞에서 살기를 내뿜는 것은 염려스럽다.”
“..ㅅ, 송구하옵니다, 아인즈 님!”
“-용서한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모여서 의논해봤자 나아질 것이 없어 보이니 일단은 상황을 지켜 봐야겠구나. 페스토냐, 당분간 네가 이자벨을 보살펴 주도록 해라.”
“명령을 받드옵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걱정이 되는 마음은 알겠다만 너희가 이러고 있으면 나자릭의 업무가 마비되어 버린다. 무언가 차도가 있다면 연락해 줄테니 모두 돌아가 있도록 해라.”
아인즈의 말에 걱정스런 시선으로 이자벨을 바라보고 있던 수호자들도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자벨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규칙적인 숨을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돌아본 데미우르고스 역시 방을 빠져나가는 수호자들을 뒤따라 퇴실하였다.
‘…깨어나신다면.. 분명 충격받으실 것이 분명할 것인데..’
데미우르고스는 이자벨의 감정이 동요한 모습을 목격했던 유일한 수호자였다. 그렇기에 이자벨이 아인즈와 수호자들을 공격한 일로 얼마나 크게 충격을 받을 지 그것이 염려스러웠다. 어쩌면 이번에야 말로 방에 틀어박혀 그 누구도 만나지 않으려고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자벨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번 일은 순전히 그녀를 지키지 못한 수호자들의 실책이었으므로. 지고의 존재인 이자벨에게 죄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만약, 이자벨 님이 충격받으신 모습을 다른 수호자들이 먼저 발견한다면..’
그것 역시 염려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들로서는 이자벨은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며 한 없이 올려다봐야 할 존재였다. 그런 이자벨이 충격에 빠진 모습은 다른 수호자들이나 종복들에게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리라.
판단을 마친 데미우르고스는 그의 휘하에 있었던 이자벨의 근위대장, 마몬에게 전언을 걸어 이자벨이 깨어나게 된다면 최대한 빨리 자신에게 알릴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마몬에게서 이자벨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그날 저녁이 한참 지난 이후였다.
쨍그랑!!
“나가!!! 당장 나가!!!!”
척 보기에도 값이 나가 보이는 새하얀 화병이 날아가 산산조각이 났다. 메이드들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줄줄히 바닥에 엎드렸다.
“이, 이자벨 님- 부디 진정하여 주시옵소서! 존체를 해하려는 모든 일은 이미 끝났나이다! 이곳은 안전하오니-..”
“-나가라는 말이 안들려!?”
이자벨은 공포에 질려 손에 잡히는 대로 바닥에 집어던지며 오직 자신에게서 떨어질 것을 종용했다. 아직도 아인즈를 죽이려고 했던 그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월드 아이템을 들고 나타난 아우라와 마레를 보고 느꼈던 분노를 기억했다. 그렇기에 이자벨은 결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레이피어를 빼 들고 저 연약한 메이드들을 베어 넘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마저 들자 이자벨은 말 그대로 공포에 벌벌 떨었다.
“-…됐으니 제발 나가.. 제발…… 제발, 나가라고!!!”
끔찍한 악몽을 꿨다. 악몽에서 보았던 자신이 말한 대로, 그녀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스스로 없애버릴까봐, 또다시 그런 ‘패배자’가 되어버릴까봐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이자벨이 다시 집기를 집어 던지자 메이드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자벨 님-!!”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자벨은 무례하게도 자신의 방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장신의 악마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곧 서서히 일그러졌다.
“왜, 대체 왜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아. 위험하니까 나가라고. 제발 내 앞에서 꺼지란 말이다!!!!”
“이자벨 님! …-괜찮습니다. 위험하지 않습니다. 제가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다시는 당신께는 상처입지 않겠다고, 그리 약조드렸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데미우르고스는 소리치는 이자벨의 모습에도 놀라지 않고 말했다. 자신의 모습에 겁에 질리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그녀를 조금이나마 안심하게 했다. 이자벨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려진 동앗줄을 발견한 것처럼 반색하여 데미우르고스에게 손을 뻗었다.
“…약조.. 하, 그래, 그랬지! 데미우르고스, 넌 내게 공격받지 않는 거지? 나 때문에 죽을 일은 없는 거지?? 약속했으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는거야, 맞지?”
“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안심해주십시오.”
데미우르고스는 이자벨에게 다가서며 메이드들에게 눈짓했다. 그의 눈빛을 받은 메이드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리를 피해 주었다. 먼저 데미우르고스는 이자벨의 안색을 살폈다. 이자벨은 어딘가 불편한지 안색도 하얬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사흘만에 깨어나셨습니다. 안색도 좋지 않으신 것이..”
“..내가 사흘이나 잤다고..? ……어쩐지, 아까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런! -페스토냐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아니, 아니다.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해.”
절대 접근 불가를 명령한 이자벨은 한숨을 내쉬며 몇 번이고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런 그녀를 데미우르고스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자벨 님, 어째서 그리 혼란스러워 하십니까?”
“어째서 혼란스럽냐고!? 그걸 몰라서 묻나? 내가, 내가 이 손으로.. 길드장을 죽일 뻔했다! 아우라와 마레도, 나자릭에서 차출한 서번트들도!! 거기엔 네 부하들도 있었다, 데미우르고스.”
“-이자벨 님, 그것은 당신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경성경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죄가 있다면 그것을 당신께 사용한, 죽어 마땅한 인간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당신께선.. 샤르티아를 구하고자 하신 것 뿐입니다.”
“…너는..”
이자벨은 여전히 자신의 앞에서 무방비하게 앉아있는 데미우르고스를 바라보곤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말할까 말까. 이 불안감을 드러내버리면, 절대로 돌이킬 수 없게 될 텐데. 고개를 들자 이자벨의 개인실 한 켠에 자리한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속에는, 죽은 세상을 사는 인간 하나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자벨은 이를 악물었다.
“……너는 어떻게 날 믿지? 너희의 그 굳은 신뢰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거냐, 데미우르고스.”
“…이자벨 님? 무슨 말씀을.. 지고의 41인께 창조된 자로써 주군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 단순히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거겠지. 너는,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이자벨 님..?”
이자벨은 떨고 있다는 것을 숨기고자 양 손을 깍지 껴 움켜잡았다.
“내가 아인즈 울 고운의 일원이니까. 생명마저도 마음대로 창조해내는 그런 위대한 존재니까. 그래서 나를 따르는 거잖아. 내가 만약 길드의 일원도 아니고, 이렇게 아름답지도, 강하지도 않았더라면..”
나약하고 한심한.. 너희가 그렇게 업신여기던 인간들보다도 더욱 더 한심하고 하등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면..
결국 이자벨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자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극도의 인간혐오에 시달리는 종자라는 것을. 더해서 자기혐오와 애정결핍.. 우울증 등등 정신적인 병으로 점철된 패배자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자릭의 아이들은 너무나도 빛났다. 패배라는 것은 일절 알지 못한다는 듯이, 늘 아름답고 강인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연기했다. 오만하고 제멋대로이지만 뒤끝이 없고 시원시원하며, 동료를 끔찍히 챙기는 자신의 이상에 가까운 악마의 모습을. 아인즈는 이자벨이 자신과 있을 때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연기였다.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동료의 연기.
그녀의 실체는, 그저 죽을 용기도 없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철저한 밑바닥 인생의 인간일 뿐이었다.
“만약 내가- 너희가 그렇게 하찮게 여기는 인간이라면 어떨 것 같아? 그래도 날 사랑했을까? 날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너처럼, 아니 그냥 평범한 범인보다도 똑똑하지 못하고, 사실은 무엇도 혼자서는 해내지 못하는 병신같고 추한 인간이었다면.. 너도 날 떠날거야, 데미우르고스. 난 또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잃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떠나버리는 게 나아!! 내게서 떠나, 가버려- 제발..!”
다, 쏟아내 버렸다. 이자벨은 마음을 짓누르던 짐을 속사포처럼 죄다 토해내곤 잠시 숨을 골랐다. 쏟아냈는데도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이대로 데미우르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버린다고 한다면.. 아직 이 추악함이 밝혀지기 전에, 아직 죽을 용기와 힘이 남아있을 때 이 삶을 끝내버리는 편이 차라리 낫겠지.
그러나 이자벨이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본 것은 예상 외의 모습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리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ㄷ, 데미우르고스..? 너, 울어..?”
어느샌가 푸른 보석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데미우르고스를 본 이자벨은 당황해서 반대로 눈물을 그치고 말았다.
“왜? 왜 울어..?”
“-이자벨 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그렇게나, 아파하시니까… 변치 않은 충정을 맹세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당신께서는 모르셨다니.. 모든 것이 당신의 마음을 몰각한 제 불찰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울지 마, 데미우르고스. 설마 내가 운다고 우는 거야? 응? 울지 마.”
데미우르고스가 우는 모습을 보자니 이자벨 역시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다. 일전에 그의 눈물을 봤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는 정말 창자를 찢는 고통을 삼키는 것마냥 울었다. 이자벨은 어떻게든 그의 눈물을 그치고자 서툴게 그 눈물을 닦아주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여태껏 살면서 그녀를 위해 이렇게까지 울어준 존재가 있었던가? 부모는 어릴 적 밀린 봉급을 받기 위해 시위를 하다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죽었으며, 그 이후로 줄곧 이렇다 할 가까운 사람을 사귀지 못했다. 부모의 기억은 희미했으며, 그마저도 먹고 살기위해 출근하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위해 우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생경한 것이었다.
“이자벨 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께서 위대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을 경애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데미우르고스, 너는 분명 모든 것을 가치로 판단하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성격이었을텐데. 내가 한심하고 추악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가치한 인간이라해도, 날 사랑했을 거라고?”
“제가 어찌 이자벨 님의 가치를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자벨 님과, 주군이신 41인을 보는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데미우르고스는 답지 않게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망설였다. 애초에 감정에 관한 건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그는 고심하다가 곧 알맞은 비유를 생각해내곤 입을 열었다.
“이자벨 님, 저도 당신과 같지 않을까 합니다.”
“…같다니, 무슨..?”
“그 날, 제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당신의 존재 자체만으로, 제겐 가치가 있습니다.”
-너의 존재만으로, 이미 이 반지를 받을 자격이 이 몸에겐 충분하다.
언젠가 이자벨이 불안에 떠는 수호자들을 달래고자 데미우르고스에게 길드 반지를 주며 했던 말. 데미우르고스는 용케 그것을 꺼내들었다. 이자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령 이자벨 님께서 외부의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되신다고 해도, 여전히 그 가치는 건재할 것입니다. 그 가치는 절대로 침범될 수 없는, 유일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당신을 처음 뵈었던 순간부터 그 마음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나자릭의 모든 종복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데미우르고스가 못 박듯 한 마디 한 마디를 얹어나갈 때마다, 이자벨은 끝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에서 조금씩 끌어당겨지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구원이었다. 평생을 패배자란 낙인이 찍혀 살았던 이자벨에게, 그것은 정말로 구원이었다!
“…정말..? 내게 맹세해 줄 수 있나?”
“예, 굳게.. 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맹세할 수 있습니다.”
데미우르고스의 맹세를 받은 이자벨의 눈에서 멈췄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방금 전과는 다르게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 눈물은 언젠가 이자벨에게 구원받아 데미우르고스가 흘려 낸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맙소사, 데미우르고스.. 네가 감히 알까. 네가 내게 무슨 말을 해 준 건지..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데미우르고스는 저도 울고 있는 주제에 이자벨의 그 눈물이 너무 아까워서 주워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전에 네가 좋아질 것만 같다고 말했었지? -나는.. 이미, 네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진 것 같아. 데미우르고스, 내가 너를 많이,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이자벨은 데미우르고스의 상체를 끌어안으며 그의 뒤에 있는 거울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전신거울. 그 거울 안에서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여자. 이자벨은 팔을 휘둘러 스킬을 발동시켰다. 거울 속의 인간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섬전을 바라보면서도 살고자 하는 어떠한 발버둥도 없이 공허하게 웃을 뿐이었다.
‘잘 가. 사토 히나.’
이제라도 편해지길.
쨍그랑!!! 거울이 산산히 조각나 부서져내렸다. 그 안의 인간도 마침내 그 질기고 고통스러웠던 삶의 끈을 내려놓는다.
인간- 사토 히나는 이제 죽었다. 이곳에는 이제, 악마- 이자벨 헬라 바하무트 밖에는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이자벨은 행복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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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갑자기 좀 많이 우울해진 감이 있지?
분명 이런 느낌을 싫어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긴 한데.. 디스토피아라는 리얼의 원작 설정과 이자벨의 인간혐오 기질을 좀 넣어보고 싶어서 써봤어! 다음 편은 다시 괜찮아질거야!
그나저나 갤에 팬아트 올려주신 지고의 존재이시여 감사드립니다. 지고하신 존체의 그림 실력에 머리 박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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