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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혼돈을 흩뿌리는 자 - 28앱에서 작성

일본어잘하고싶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8.17 07:29:03
조회 423 추천 15 댓글 10
														





“하암-..”


제국의 궁정 마술사가 된 지 어언 사흘째. 이자벨은 마법성에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무료하게 하품했다.


“이ㅈ.. 헬리아 아가씨, 피곤하십니까?”

“아니- 아니다, 유리아. 내가 피곤할 리가 없지.”


유리의 걱정 어린 시선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이자벨은 짜증난다는 기색으로 제 앞에 쌓인 서적들을 응시했다. 이것은 모두 제국의 마법성이 보유하고 있는 마법에 대한 서적이었다.
이 세계는 몇 용왕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위그드라실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정작 위그드라실 마법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따라서 제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마법서들은 대부분 조금이나마 알려진 위그드라실의 정보에 인간들의 연구와 해석이 덧붙여진 전문 서적들이었다. 당연하지만 해괴한 부분이 아주 많았다. 10위계 마법의 존재를 허무맹랑한 것이라며 치부하는 것들도 있었으며, 마법의 쓰임이나 범위를 아주 틀리게 해석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이자벨은 검사였지만, 설정광인만큼 위그드라실의 세계관 설정에 대해서도 해박한 편이었다. 그것은 마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제국에서 막대한 돈을 보수로 받고 있는 만큼 성과를 내보일 필요성을 느끼며 제국의 마법서를 손봐주기로 한 것이다.


‘실은 인간들 앞에서 동물원 구경거리마냥 마법 시연을 보여주는 것이 싫은 게 더 컸지만.. 현지의 마법 지식도 알게 되고..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래, 좋은 게 좋은 거고.. 호기롭게 시작한 것은 좋았다. 나자릭 도서관, 아슈르바니팔에서 가져온 위그드라실의 마법 설정집을 정독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도 있었고.. 갈피를 못잡고 이상한 곳만 짚고 있는 제국 마법서에 담긴 현지인들의 발악을 보고 있노라면 웃기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보 수집을 마치고 막 마법서를 손봐주려고 할 때 발생했다. 아무리 설정광인 이자벨이라지만 제국에 어느 정도의 정보를 줘도 되는지, ‘헬리아’라는 고위계의, 그러나 그에 반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숫자는 턱없이 적은- 이상한 매직캐스터의 마법 지식 수준은 어느 정도로 설정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고려하면서 주석을 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제국의 문자를 몰랐다. 번역의 효과를 지닌 단안경 하나로 마법서를 읽고, 주석을 단 다음.. 다시 제국어로 번역해야 했는데.. 마법서를 읽는 건 그렇다 치고 제국어로 다시 번역하는 과정이 정말 극악의 난이도였다.

그런 짓이 벌써 3일째.. 진척이 느리고 관심도 없는 일을 붙잡고 있기에 이자벨의 인내심은 너무나도 얕았다.


‘완전히 스트레스네 이거..’


이자벨은 한숨을 내뱉으며 설탕을 한계까지 부어넣은 홍차를 들이켰다. 뜨끈하고 단 것이 목구멍을 지나가자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돈 벌어왔다고 모몬가 씨가 그렇게까지 좋아했는걸. 삼 일 만에 포기할 수는 없지. 이번 일을 끝내면 보수로 황제를 더 털어먹는거야..’


이름하여 성과급이라는 거지.. 물론, 보통 성과급이란게 고용인이 고용주한테 요구하는 느낌은 아니겠으나.. 이자벨이란 악마에겐 그저 지르크니프를 탈탈 털어서 나오는 먼지까지 싸그리 챙겨 먹을 생각 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은 이자벨이 깃펜을 들어올린지 얼마 되지 않아, 적막한 방 안에 노크소리가 울려퍼졌다. 단안경으로 마법서를 해석하고 있던 유리가 얼른 일어나 방문자를 확인했다.


“아가씨, 파라다인 공께서 오셨습니다.”

“…나 죽었다고 해.”

“…아가씨..”


플루더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이자벨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곧장 창문 밖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루더는 늘 이자벨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잠깐…-!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유리아! 어째서 나를 피하는가!”


허락도 없이 집무실로 밀고 들어오는 추레한 노인의 모습을 이자벨은 책상에 늘어진 불량한 자세로 노려보았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투 역시 더 없이 불손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으나 이미 플루더를 상대로 예의는 집어던진지 오래인 그녀였다.


“왜 피하는지 몰라서 묻습니까? 이럴 거면 노크는 왜 한 겁니까?”

“스승으로서 제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걸세!”

“아니이..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합니까… 난 당신 제자가 아니라고!!!”


이자벨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못해 터지려는 성질을 누르고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지난 사흘간 플루더의 행적은 이자벨에게는 말 그대로 끔찍 그 자체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자벨이 다룰 수 있는 마법 중 마력계는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에 한탄하더니, 고위계 매직캐스터 답지 않게 시전 가능한 마법 수가 적다는 사실에는 의문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마법만큼이나 검에도 투자한 마검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거의 기염을 토하며 발작한 것이다. 그 결과, 플루더는 이자벨을 질리도록 쫓아다니며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을 강권하기에 이르렀고, 그녀는 이제 멀리서 플루더의 옷자락만 봐도 질색팔색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내가 자네의 스승이 된다면 자네의 실력은 분명 일취월장할 것이네. 그만큼이나 검에 투자했는데도 6위계!! 6위계라니!!! 지금이라도 검을 내려놓고 마법에 집중한다면 그야말로 마법의 심연에 닿을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싫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어째서 거절하는 것인가!! 자네도 분명, 마법의 심연에 이르고 싶을 터인데!!!”

“..아니 관심없다고. 그건 댁 목표지 내 목표가 아니잖아..!”

“그럴 리가! 이 정도의 경지의 매직 캐스터가 마법의 심연에 대한 욕망이 없을 리가 없다!”

“아니 그걸 그러니까 왜 당신이 정하는 건데..”


‘이게 대화냐..? 이게 대화야?’


이자벨은 전혀 통하고 있지 않은 대화에 스트레스가 쌓이다 못해 살심마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플루더도 마찬가지였다. 수 백년을 살며 많은 제자들을 키워낸 플루더는 알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동시에 익힐 수 있는 능력들에 한계가 있다. 즉, ‘클래스 레벨’이라는 것의 존재와 그 습득의 한계를 그는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이자벨이 마력계 매직 캐스터가 아니라는 것에서 실망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이상하게 마법 능력이 떨어진다 싶더니 검을 진지하게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거의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 된 것이다.
이대로 헬리아가 계속 검을 익힌다면, 그녀가 마법을 익힐 수 있는 기회는 더욱이 사라진다. 수백년을 찾아 헤매고 헤맨 마법의 심연에 대한 실마리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플루더는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내 오늘은 결판을 짓겠네! 이 늙은이를 죽이던가, 계속 검을 익히던가 하게!!!”

“예, 그럼 그리 말씀하시니 죽여 드리…”

“아, 아가씨- 안됩니다!! 진정해 주세요!!!”


낭랑하게 잔인한 대답을 하는 이자벨의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서렸다. 그러나 유리는 알고 있었다. 표정은 웃고 있을 지언정 그녀의 눈 만큼은 싸늘하다는 것을. 유리는 그저 책상 아래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이자벨의 주먹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좋은 아침, 헬리아 씨- …? ㅎ, 헬리아 씨?”


또 다시 며칠 후- 화창한 어느 날의 아침. 여느 때처럼 동료들과 아침을 함께하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온 헤케란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내려와있던 포사이트의 다른 일원들과, 심지어는 유리아마저 불안한 기색으로 헬리아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일주일 전, 헬리아와 유리아에게 목숨을 구원받고, 그들과 같은 여관에 머물게 된 두 은인과 자연스럽게 아침을 함께하게 된 포사이트였다. 그러니 딱히 헬리아와의 식사 자리가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소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호감을 사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헬리아가 제국 마법성에 소속된 이후부터 문제는 시작됐다. 헬리아의 상태가 매일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거의.. 감추지 못한 살기가 로브 밖으로 풀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 섬뜩한 기세에 헤케란은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괜찮은 거 맞지?’

‘역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 같아.’

‘스승님이 또 괴롭히시는 걸까..’

‘뭔가 도움이 필요하신건 아니겠지요..?’


조용해진 포사이트 일행들의 사이에 여러 뜻을 담은 눈빛이 오고갔다.
자신을 향한 걱정 어린 시선들에도 이자벨은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필사적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이자벨의 섬뜩한 분위기는 당연하게도 여관 내 다른 인간들의 주목을 끌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불쾌하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을 텐데 한껏 예민해진 지금은 시선들이 송곳처럼 온 몸을 찔러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벌레들이 전신을 기어다니는 불쾌감에 토악질이 올라올 것만 같다.


‘…더는 못참아. 그 망할 늙은 인간..’


효율을 추구하겠답시고 모몬가를 마다하고 홀로 제국에 온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하필 만나도 최악의 상사를 만나게 된 것이 문제였던 걸까.. 그도 아니면 짜증나는 마법서 일을 시작해버린 것? 아니지.. 어쩌면 자신의 쥐꼬리만한 인내심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매일 마법서를 붙잡고 씨름하다가, 동물원 원숭이 마냥 인간들 앞에서 마법을 선보이고.. 하루 종일 마법 변태에게 시달린다. 그 중 무엇도 이자벨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건, 이 상태로는 현지에서의 작전을 이어갈 수가 없다. 지금 이자벨의 상태는 말 그대로 터지기 직전의 폭탄같은 상태였다. 잔뜩 예민해져서 누가 살짝 찌르기라도 하는 날에는 참고 있던 살심과 가학심이 폭발하게 될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뛰겠군… 아니겠지. 아니여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평화로운 제도의 거리를 보면 피로 물든 참변이 겹쳐보인다. 새카만 로브 차림의 자신을 힐긋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공포와 경악으로 물드는 상상을 한다. 마법의 시연이랍시고 자신을 구경하는 인간들의 면상에 검을 꽂아넣고 싶다. 이 나라 어디든 비명과 고통의 피로 얼룩지게 하고 싶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마치 금단 현상이 온 것마냥 이자벨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쌓일 대로 쌓인 스트레스와 지독한 욕구불만, 완벽하게 악마가 되어버린 정신. 그리고 이자벨 역시 이런 비정상적인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었으니.. 한 가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은 마법성에 가지 않는, 일주일 마다 돌아오는 휴일인 것이다.


“오, 늘은.. 컨디션이 안..좋아서, 먼저 가보겠다.”


간신히 살기를 억누르며 겨우겨우 한 마디 만을 토해낸 이자벨이 곧장 여관 객실로 올라갔다. 그 위태로워 보이는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하는 포사이트를 신경 쓸 겨를은 이미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달칵.


“이자벨 님..”


객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유리의 염려가 서린 목소리가 닿아 왔다. 이자벨은 말 없이 한참을 침묵하다가 답했다.


“..이 몸이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 그렇지 않사옵니다! 모든 것은 당신께 무례를 끼치는 마법성의 인간들 때문이옵니다! 약한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스러우나.. 더 이상은 이자벨 님께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힘에 부치나이다.”

“겨우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정도도 참지 못해서야 어떻게 나자릭을 이끈단 말이냐. 한심스럽기가 짝이 없군..”


이자벨의 스스로를 책망하는 듯한 말에, 유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존체를 자책하게 만든 자신의 무력함에 고통이 오장육부를 들쑤시는 듯 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휴식을 해야 할 듯 싶다. 이 몸을 대신할 위장을 보낼테니 네가 그걸 도와주도록 해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냥, 스트레스를 조금 받은 것 뿐이다.”

“이자벨 님께서 사과하실 일은 조금도 없나이다!! 유리 알파, 명령을 받드옵니다.”


기껍기만 했던 맹목적인 유리의 모습도, 지금은 그저 짐처럼 느껴질 뿐.. 고개를 끄덕인 이자벨은 그 길로 곧장 나자릭으로 귀환한 것이다.


“하아…”


익숙한 10계층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자 이자벨은 참았던 긴 숨을 토해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까. 개인실로 향하는 그녀의 앞에 슬슬 나자릭의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놀란 표정으로 무릎을 꿇는 그들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다. 단순히 밖에 나가있던 주인이 말도 없이 귀환해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이 숨길 수 없을 정도의 살기를 풀풀 풍겨대고 있으니 그들 입장에서야 얼마나 공포스럽겠는가.
그러나 거슬린다. 그것마저도 거슬린다. 눈 앞의 모든 것들이 거슬렸다. 겁에 질린 저 표정도, 그녀의 심기를 살피는 눈짓도.. 자신이 나자릭의 일원들에게 이유 없이 공포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짜증이 났다. 결국 빠른 걸음으로 방에 도착한 이자벨이 얼른 문을 닫고는 곧장 침대에 쓰러졌다.


‘정신 차려야지, 이자벨. 이러면 안되잖아, 이러면 안돼.. 아닐거야, 아니여야 해..’


시야가 온통 붉게 어지럽고,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끊이질 않았다. 주변 모든 것들이 거슬리고 살심이 이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이런 증상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벌써 이틀 째. 그녀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거나 흥미로운 설정의 소설을 읽어본다거나 노력해봤지만 종국에는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증상은 착실하게, 점점 더 빠르게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심호흡을 했다. 진정이 되질 않는다. 인벤토리에서 목구멍이 칼칼해질 정도의 단 것들을 잔뜩 꺼내 마구잡이로 입에 욱여넣었다. 전혀 효과가 없다. 그렇게 가만히 있질 못하고 방 안을 돌아다니기를 한참.. 잠이라도 자보려는 시도는 진작에 포기했다.
무언가를 원하는 것처럼 손 끝이 움찔거리고 눈 앞이 빨갛게 점멸했다. 조용한 방 안에 홀로 있으니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 테이블과 집기들을 죄다 뒤집어 엎고 싶다가도 딱 기절해버리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에 시달렸다.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 문득 본 시계는 겨우 10분이 지나있을 뿐이다. 말 그대로 고문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똑똑.

예민해진 감각에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이자벨이 귀신처럼 고개만 휙 돌려 문을 응시했다.


“이자벨 님, 메이드 화일이옵니다. 시중을 위해 왔나이다.”


이자벨이 대답이 없자 낭랑한 목소리가 몇 번 더 들리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침대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이자벨이 결국 힘 없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자벨, 님?”


방 안 가득 자욱한 잿빛 연기, 살을 저며 오는 살기와 잔뜩 흐트러진 모습의 이자벨까지. 당황한 화일의 눈과 이자벨의 눈이 마주쳤다.
당황과 공포에 젖은 연한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억눌렸다고는 해도 100 레벨 전사의 살기다. 1 레벨의 일반 메이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공포스러운 환경이었다. 떨리는 화일의 숨결이 느껴졌다. 공포가 어린 감정이 피부로 느껴진다. 이상하게도 아까와는 달리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이자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잿빛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무구하고 연약한 메이드와 눈이 마주치자, 전율이 일고 손 끝이 움찔거렸다. 탁해진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온전히 담긴 화일의 모습에 어떠한 광경이 겹쳐보였다.


아아, 괜찮아.

괜찮지?

날 위해서라면 너흰 뭐든 다 한다고 했었잖아.



“..이, 이자벨 님,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


화일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탁해졌던 이자벨의 눈동자가 퍼뜩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나자릭의 사랑스런 아이에게 어떤 광경을 겹쳐본 것인지 자각하자마자, 이자벨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나가.”

“...! 이, 이자벨 님, 송구하옵니다! 소녀는 그저..!”

“당장 나가!!!”

“송구합니다- 주, 죽여주시옵소서!!”


이자벨이 소리를 지르자, 화일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면서도 덜덜 떨면서 무릎을 꿇고 잔뜩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본 이자벨이 손 끝을 움찔거렸다. 제발 이러지 마라, 제발 그냥 나가 줘.


“마몬!!! ..아니, 밖에 아무나 화일을 당장 내 방에서 데리고 나가라!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아무도!!!”


이자벨의 일갈에 뛰어들어온 마몬이 그녀를 보고는 매우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자벨의 표정이.. 마치 공포에 질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고의 존재께선 그럴 리가 없는데도.


“화일 님..”


마몬이 무릎을 꿇고 흐느끼고 있던 화일을 부축하여 데리고 나갔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우는 그녀를 본 이자벨의 마음 역시 찢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화일을 붙잡고 사정을 설명하고 달래주기엔 그녀가 지금 느끼는 혼란감이 너무나 극심했다.


‘내가 지금 뭘 하려고 한 거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여태껏 그녀를 위해주며 헌신해 온 아이를, 동료의 자식과도 같은 아이를… ‘그런’ 대상으로 본 건가?
이자벨의 손이 벌벌 떨렸다. 외면하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이 명확해졌다. 아인즈가 이자벨의 개인 설정이 현실이 되었다고 했을 때 가장 염려했었던, 그녀 자신은 그것마저 현실이 됐을 리가 없다며 계속 외면했었던.. 한 때 그녀가 밀어붙였던 하나의 설정.


-와, 이건 진짜 오글거리는데 이거 맞아요?

-이게 바로 중 2의 정수라는 겁니다! 원래 중 2병들은 제어하지 못하는 느낌이라던가, 폭주라던가.. 참지 못하는 거거든요!

-아, 왜 그 유명한 거도 있잖아요~ 큭, 왼손의 흑염룡이..!

-크, 이거지 이거.


길드원들끼리 오글거리는 설정을 짜자고, 실없이 키득거리기 위해 한 장난에 불과했다. 애초에, 게임일 뿐이었다. 단순히, 재밌게 놀고 싶었을 뿐이니까. 현실이 될 줄 알았다면 그런 설정 따윈 넣지 않았을 것이었다! 애초에 이상했다. 아무리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이라지만 혼자서 휴식할 때마저도 괴로움이 몰려올 정도로 힘들다니.. 이자벨이 인내심이 적은 건 사실이지만 일주일만에 그렇게까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은 이자벨도 설정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외면했다. 이자벨은 아인즈에게도, 나자릭에도 민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화일을 가학의 대상으로 본 것에서 이미 이 일은 그녀의 제어를 떠난 것이다.


[ 스트레스를 받거나 욕구불만의 상태가 심해지면 악마의 본능이 깨어나며 폭주한다. ]


그 호불호 극명한 설정의 정확한 문장까지 기억해낸 이자벨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금껏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일체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던 그녀였다. 그러나, 한 때 재미로 붙였던 설정으로 소중한 존재를 다치게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자벨의 깊은 곳에 자리한 악마의 본능이 그녀의 이성을 지배하고 끝내는 고통이 되어 그녀를 뒤흔든다. 하얗게 질려 어쩔 줄을 몰라하던 이자벨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자각도 못하고 뿜어내고 있던 혼돈의 연기가 이미 방 안에 자욱했다.

더 이상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모몬가, 씨.

-..응? 이자벨 씨? 정기 연락 시간도 아닌데 무슨 일인가요?

-…저 좀, 도와주세요.. 흑.. 제발, 도와주세요…


누가 들어도 공포에 질린 듯한 목소리에, 아인즈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지금 어디에요? 제가 바로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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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여행 갔다 왔어! 늦어서 미안해!
근데 확실히 서해는 물 드럽더라. 흙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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