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마이너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창작/번역] 점자성서) 실의 알, 피의 세계앱에서 작성

Psychedelic_surrea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19 13:30:13
조회 206 추천 8 댓글 6
														

모든 것은 밑으로 떨어진다.


모든 것은 밑으로 떨어지건만, 불만은 위로 오른다. 불씨는 언제나 위를 향해 춤춘다. 나는 그 모습이 싫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온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 온 세상의 규율을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시대가 불의 시대라 불리는 것이 싫었다.


빛은 형태를 준다.


배를 타면서 보았던 먹구름. 그리고 그 위로 비치는 태양. 밑과는 달리 해가 비치는 위쪽은 구름의 형태가 선명했다. 어둠은 모든 것을 한 데 섞어 형체를 없애고 구분선을 지운다. 빛은 그 모든 것들에 형체를 주고 나누고 가른다.

나는 그 점이 싫었다. 어째서 모든 것은 구분되어야 한단 말인가. 드높은 곳과 구렁텅이, 밟는 자와 밟히는 자. 그 갈라짐이 싫었다.


지금 이 사토 위에서 여기서 너와 마주보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까.




나는 신들의 도읍에서 태어났다. 기묘하게도 지고 있지만 결코 지평선 밑으로 떨어지는 법은 없는 해가 항상 떠있는 도시. 사람들은 이 도시를 「아노르 론도」라 불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내 유년기는 꽤나 유복했다. 사용인이 있다거나 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생활에는 문제가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상 구길 일 없이 웃으며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잃고 나면 뼈가 시리도록 그리운 그런 행복 말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참 어처구니없고도 이가 갈리도록 분통 터지는 방식으로 그 행복을 앗아갔다.

어느 날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그 더러운 입들이 읊는 말들은 두려웠다. 「저주받은 피」, 「죄인의 아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노르 론도의 밑에는 「작은 론도」라는 다른 도시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이유는 간단하다.


기록에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는, 여느 일상과 전혀 다를 바 없던 어느 하루, 작은 론도에 적안의 새까만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꺼려지고 버림받고 쫓겨난, 이름도 없는 자들. 그런 이들을 암흑 속으로 이끌어간 그 뱀은 하나둘씩 자신의 기사들을 만들었다.

통상적으로는 이 대목에서 그 세력이 점점 불어났다는 이야기가 뒤따라야겠지만, 우리의 위대하신 빛의 왕께서는 웃기게도 그런 어둠의 아주 작은 기미가 보이자마자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셨다.

그러니까 도시 전체를 수몰시켰다는 말이다. 뭐 어떤 이유가 있었건 간에, 작은 론도의 대다수는 아노르 론도와 태양을 충실히 따랐던 것 같건만, 아무래도 베풀어줄 따뜻함이 다 떨어졌던 모양이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에 그렇게 하나의 도시는 수많은 슬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유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 대목에 이르러서야, 그리고 일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아노르 론도가 그리도 두려워했던 어둠이 작은 론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집어삼켰다고. 작은 론도를 공동 통치하던 네 명의 왕도, 빛의 왕에게서 직접 소울을 받은 존재이건만 전부 타락해버렸다고 한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미래를 피하려다 오히려 그 쪽으로 곤두박질친 셈이다.


멍청이들.


사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번지자 작은 론도의 어둠과 공왕들을 봉인하고 영원히 감시하겠다 맹세한 자들은 총 셋이 있었다고 한다. 붉은 두건에 붉은 옷을 입고 희생자들을 기리며 영원히 암흑을 감시한다. 그럴듯하고 멋들어진 사명 아닌가.

그러나 그 중 둘은 사명을 저버린 채 도망쳤고, 한 명만이 남아 영원한 사명을 고독히 이어나갔다고 한다.


내가 그 한 명의 후손이었다면 좋았겠건만, 나는 도망자의 후손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알아낸 건지는 알 수조차 없었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뭐가 어찌 되었건 내 머리에 씌워진 빨간 두건과 한순간에 산산이 부숴져버린 행복한 가족, 그리고 어느새 노예기사로 몰락한 내 처지는 어쨌든 부정할 수 없이 닥쳐온 현실이었으니까. 그 편이 훨씬 더 중요했다. 도망치고 싶었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노예이면서 기사라는 그 호칭이 처음에는 조금 우스웠지만, 그로써 강요되는 전투는, 뼈가 뒤틀리고 부숴지며 살이 갈라지는 고통은 웃음기의 흔적조차 앗아갔다. 그 즈음 불사자의 저주가 발현되지 않았다면 얼마 못 가 쓰러져 죽었으리라. 검은 알 같은 그 혐오스러운 표식 덕에, 나는 살아있었다.

끝이 뭉툭한 대검을 손에 받아든 그 날부터, 나는 이가 갈리는 싸움을 계속해나갔다. 목을 베고 팔을 자르고 전신을 토막내며 피를 뒤집어썼다.

비는 소슬히도 내렸다. 내 피는 거기 섞인 채 떨어져 고였다.

하루의 싸움이 끝나고 밤이 내려앉으면 나는 손목을 조금 그어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았다. 그 괴벽은 곧 내 취미이자 일상이 되었다. 고통은 느낄 수 없어도, 살아있다는 감각은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내가 죽인 자들과 같은 피를 흘리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새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익숙한 얼굴들과 만나고 싶지 않아도 계속 만날 수 밖에 없었던 역겨운 얼굴들. 그 모습과 내 처지에 한숨과 눈물을 흘리고 토사물을 뱉고 비명을 질러봐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


나는 어느샌가 다 놓아버렸던 것 같다. 그저 순응했다. 어느덧 말끔하던 얼굴은 더러움으로 물들고 피부는 윤기를 잃어 문드러져갔다. 눈에서 사라진 생기는 대신 몸으로 돌려진 듯했다. 그토록 움직이기 싫었건만 야속하게도 몸은 저절로 움직이는 듯 명령을 잘만 따르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시간 감각이 뒤틀려갔다. 하루하루는 몇 곱절로 길어진 듯 끔찍하리만치 느려졌지만 과거는 눈 깜짝할 새에 멀어졌다. 미래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미래가 있는 줄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미래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았다.

미래는 곧 미지이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미래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미래를 믿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것은 운명이었다.

주인에서 주인으로, 땅에서 땅으로, 전투에서 전투로, 고문에서 고문으로 옮겨가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정말이지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잘 자라지도 않던 수염이 어느새 밑얼굴을 온통 덮고 덥수룩하게 길어진 머리칼이 눈을 다 가릴 때까지. 아이가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될 때까지.


유난히 상냥했던 주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내 처지를 들어준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멋대로 나를 가련히 여겨 더 나은 누군가에게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저 감사드린다고 말할 뿐이었다.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건, 누구를 보았건 무슨 상관인가. 연고 없는 땅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노예기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적어도 이 땅의 구역질 나오는 자들과는 작별을 고할 수 있을 터이고, 그거면 족했다.

나는 배에 태워져 어딘가로 실려갔다. 일을 끝내고서 가만히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쉬면서 잠시나마 숨을 돌렸다. 새로운 땅이 수평선 너머로 어렴풋이 다가왔고, 바닷바람은 세차게 몰아쳤다.

잠시나마 두건을 벗고 푸석해진 머리칼에 소금 내음을 먹였다. 아주 잠깐이나마 노예가 아니라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게 문제였을까, 나는 갑자기 배에 실려있던 귀중한 베틀을 깨버렸다는 죄를 추궁당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다. 가슴 속에서 곪아가던 무언가가 끝내 끓어 터져나왔다. 나는 그 고름을 내던지듯 울부짖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억압하고 감시하면서 이 미천한 노예기사가 그런 물건에 손이나 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고 항변해보았다.

실수였다. 순식간에 쇠사슬로 팔다리를 결박당한 나는 네 분수를 알라며 하루 동안 귀족 자제의 발받침이 되었다.

그 도련님이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세상에 밑바닥이라는 게 있다면, 넌 거기 있는 거야."


모든 생각이 멈추고 모든 몸이 굳는 순간. 웅웅대는 귀는 수많은 웃음소리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일순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울분을 터뜨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몸은 그러나 결코 타오르지 않고 조용히 식어가며 불길을 사그라뜨렸다.

바닷물에 젖은 나무판자가 삐걱댔다. 나는 위를 올려다보지도 않고서 조용히, 하지만 또렷이 읊조렸다.


"...내가 세상의 밑바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느냐. 그렇게 생각하느냐. 천만에. 착각하지 마라. 나는 그저 네놈의 아래에 있을 뿐이다. 너는 무엇이 높고 또 무엇은 낮은지 추호도 알지 못한다. 밑을 내려다보면, 나에게는 지금도 보인다. 바닥 없는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이. 그러니 고대해라. 언젠가 그 속으로 너희들 모두를 끌고 들어가 엉망진창으로 부숴져주마. 피 섞인 숨을 그 얼굴에 뱉으며 웃어주겠다."


몇 순간이 흘렀을까. 항상 살아있는 바다 위에서 죽은 듯 얼어버렸던 놈들은 이내 웃음기를 거둔 얼굴에 정색한 표정을 띄우고 자신들끼리 뭐라 속삭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바다에 던져졌다.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몸부림쳤다. 일렁이는 수면 위로 오르는 거품과 무거워지는 물의 무게에 짓눌리는 몸. 다른 하수인들이 자청하여 나서도 기어코 자신이 직접 묶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물고기밥이 되었을 것이다.

겨우 결박에서 풀려나 안으로 꺼지는 듯한 가슴과 어두워지는 시야를 느끼며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갑옷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철썩, 철썩.


나는 뭍에 닿아있었다. 옷은 온통 젖은데다가 몰아쉬는 숨에 짠맛과 모래가 섞여들어왔지만, 나는 살아있었다. 아니면 불사자답게 그냥 한 번 죽었다가 알아서 해류에 밀려온 걸지도 모른다.

비틀거리며 물을 토해내고 가까스로 일어섰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 상냥한 주인이 말했던 새로운 땅인가, 아니면 이역만리의 타지인가.


전자 쪽임을 나는 다음 순간에 확실했다. 그게 아니면 갑자기 팔을 관통한 이 작살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다만 이 땅을 이제 딱히 새롭다고는 할 수 없었다. 줄 달린 작살을 던진 자의 얼굴도, 그 옆에서 통쾌하다는 듯 웃고 있는 자의 얼굴도 너무 익숙했다. 배에서 다 봤으니까.

역시 불사자야. 그 정도로도 안 죽는구나. 뭐 좋은 생각 없냐. 이번에도 웅웅대는 귀는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질질 끌려갔다.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끌려갔다.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땅 위에 기나긴 획을 죽 그어도 이제는 아무렴 좋았다. 너무 지쳤다. 계속 날아오는 돌 정도는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물건을 팔러 오는 자들, 그저 구경하러 다가오는 자들, 몸에서 기이한 불씨를 풍기는 자들, 약탈을 목적으로 습격하는 자들... 많은 자들이 오고 갔다.

이것도 운명인 걸까. 계속 되물었다.


그래, 그 해후는 운명이었다.


죽었다 다시 살기를 한참 반복한 끝에 나는 어느 도시로 끌려왔다.

여기로 내쫓아버리자. 더 갖고 놀 수 있는데 괜찮겠냐. 나중에 다시 꺼내면 되지. 뭐라 오가던 대화가 끊어지고서 나는 곧 상자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내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치켜들게 시킨 도련님은 입을 열었다. "새 주인을 만나러 가라, 노예기사야." 눈에 보인 것은 작은 화폭이었다. 그것도 억지로 뜯어낸 듯한.

놈은 내 얼굴에 그 화폭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대체 뭘 하는 건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하얀 빛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다시 눈을 뜬 나는 추운 세계에 도달해있었다. 추위가 반가울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두른 나는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딛었다. 구름 너머로 은은하게 뜬 달 밑에 교회가 하나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조금 궁금하기는 했지만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보나마나 또 온갖 괴물과 고통이 판치는 곳이겠지. 이제 두려울 것도 딱히 없었다. 새 주인이 누군지에 대한 궁금함이 더 클 지경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의자에 앉아 자기 몸의 2배는 되는 화포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고고한 분위기에 차가운 인상, 희고 긴 머리칼에는 윤기가 흘렀다. 세로 동공에 비늘 돋은 피부는 조금 특이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도련님으로도 모자라 이젠 하다하다 귀한 집 아가씨, 그것도 어린아이인가. 왜, 다음 주인은 갓난아기라고 하지 그러냐. 속으로 읊조린 나는 갑자기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안녕, 할아버지.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건가.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질문하고 싶은 것들이 몇 개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회화세계. 이번 이름은 아리안델."

"회화세계? 아리안델? 무슨 소리지?" 그냥 물어보지 말 걸, 조금 후회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짧게 끝날 이야기가 아닌 기미였다.

"화포에 그려진 세계. 춥고 어두운, 하지만 상냥한 곳. 버려진 자들이 이끌려오는 종착지이자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 소녀는 조금 웃었다.

"버려진 자들이 이끌려온다고? 벌써 틀렸군. 난 제발 좀 버려지고 싶은 신세의 노예라." 나는 날카롭게 찌르듯 쏘아붙였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버려졌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야. 단순히 누군가에게 종속되어있는가의 여부가 아니지. 바깥 세상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는 자들. 편히 몸 누일 자리가 없고 따뜻이 눈 감을 처지가 못 되는 자들. 밑으로 굴러떨어져 타인을 잃고 끝내는 자신을 잃는 자들..."

...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쯤 벌려진 입은 굳게 닫히지도, 잽싸게 움직이지도 않는 채로 굳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공기조차 얼어붙어버린 듯한 그 공간 속에서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곧 굳어있던 몸이 하나하나 타래처럼 풀려갔다.

"네가 버려진다는 게 뭔지 알고나 있나? 고통을 알고 상실을 아냔 말이다. 보나마나 오냐오냐 키워진 금지옥엽 아가씨일 네가 대체 밑바닥에 대해서 뭘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그 입으로 지껄여봐라. 어디 가능하다면 한 번 해보란 말이다!"

너무 세게 악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고 이가 빠드득 갈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알 속의 새끼 뱀 주제에 감히 그런 말을 뱉는단 말인가. 나는-

"기댈 곳은 없어.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지. 어정쩡한 자세로 다 무너져가는 기둥 위에서 눈 감고 쉬지도 못한 채 졸림에 짓눌리는 눈꺼풀을 비비다 갑자기 추락에 놀라도 어느샌가 더 낮은 곳에서 똑같은 기둥 위에 있을 뿐이야. 그런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목놓아 울고 싶어도 이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숨죽여 흐느끼게 돼. 어차피 들어줄 사람도 없으니까."

...어떻게?

"어떻게냐, 고 묻고 있는 표정이네?" 소녀가 말했다. 이 아이는, 뭐지.

"옛날 이야기를 좀 해볼까. 까마득한 과거, 주신의 소울을 나눠받은 위대한 왕들 중 고룡이 하나 있었어. 영원히 죽지 않고 변하지 않는 바위의 고룡들과는 달리 창백한 흰색에 비늘도 없고 눈도 없는 돌연변이. 고룡 전쟁에서 동족을 배신하고 신들의 편에 선 그 「백룡」은 비늘을 가지고 싶어했어. 그래서 소울을 응집해 결정체로 굳혀 자신만의 비늘로 삼으려 했지."

들어본 적 있었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유년기에 들었던, 언덕 너머에 있다는 신의 서고의 이야기...

"연구는 성공인 동시에 실패. 고룡들을 배신할 때 손에 넣은 비보, 「원시 결정」의 힘으로 끝내 동족들처럼 불사가 된 백룡은 온갖 존재를 납치해 실험체 삼아 수많은 희생을 냈고 가지지 못한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렸어. 그 망집의 끝에 수많은 부산물을 만들어냈고 그것들은 분명 업적이지만, 정작 자신이 미쳐버리고 말았지. 죽음의 힘이 만들어내는 결정을 접목하려 했던 것도 실수겠지만, 애초에 생명의 원천인 소울을 무정물에 가둬놓아 사용하려 했던 시점에서 예견된 운명이었어. 백룡은 그걸 알면서도 끝까지 달려갔던 모양이야."

소녀는 목을 조금 가다듬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금 흔들리는 듯한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울분과 슬픔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백룡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고 나자 원시 결정의 행방은 묘연해졌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백룡과 주신의 자손 되는 혼혈의 누군가가 버려진 원시 결정을 발견했어. 그 시점에서 결정은 단순히 소울을 담는 것을 넘어 생명을 싹트게 하고 있었지. 하지만 진정으로 개화하려면 한참 먼 그 생명을, 혼혈의 반룡은 언젠가 피워내겠다 결심한 모양이야. 자신의 세계에 흘러들어온 존재를 버릴 수 없다는 의무감일까, 아니면 상냥함일까. 뭐가 되었든 반룡은 다짐을 했지. 그래서 반룡 자신이 죽고 그 후손에게서 점점 옅어지는 용의 피가 어느새 용의 꼬리를 뱀의 꼬리로 바꾸어도, 그 사명은 잊혀지지 않았어."

"...어째서? 그게 운명이기 때문에? 대체 왜지?"

"솔직히, 나도 몰라. 전해들은 이야기일 뿐이니까 자세한 부분은 묻지 마."

나는 되묻지 않고 그저 자세를 고쳐앉았다.

"회화세계를 재탄시키려면, 그 수복자가 바깥 세상에서 들어온 태초의 불을 접한 다음 바깥 세상의 피로 회화세계 안에서 그림을 그려야 해. 「불을 모르는 자는, 세계를 그릴 수 없으며 불에 이끌리는 자, 세계를 그릴 자격이 없다」는 격언을 넘겨주며, 대대로 반룡의 후손들은 회화세계의 수호자임과 동시에 수복자가 되어 매 세계를 불태우고 또 수복해갔어. 과거를 알아야 하지만 매번 과거와는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사명이었지. 그래서 매 세계에는 이번 회화를 불태우고 다음 세계에 그 생명과 사명을 넘길 수복자들의 이름이 붙었어. 그리고..."

소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어째서인지 그 이야기의 결말을 알 것만 같았다. 격언의 의미는 여전히 아리송했지만.

"...용의 피가 서글플 정도로 옅어져 영락한 한 후손이, 개화하기 직전의 원시 결정을 발견한 모양이야. 그 시점에서야 그 후손은 잔인한 운명을 깨달았어. 원시 결정을 진정 태어나게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필요했던 것은 제아무리 옅어졌을지라도 백룡의 정수를 몸 안에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의 소울이었던 거야. 하지만 엄마는 사명을 잊지 않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세계를 그린 다음 나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이전의 세계와 함께 불타버렸어. 나에게 이름조차 붙여주지 못한 채로." 

...역시.

"...이번 세계는, 몇 번째일까. 아마 마지막이겠지. 그럼 첫 회화세계와 동일하게 수복자가 백룡의 후손이 아닌 세계가 되는 거야. 수미상관, 멋지지 않아?" 소녀는 힘없이 웃었다.

"왜 마지막 세계라는 거지?"

"나는 너무 늦게 깨어났어. 바깥의 세계는, 분명 이제 다 죽어가고 있잖아? 불을 완전히 꺼뜨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태우지도 못하는 채로, 우유부단히, 천천히 사그라들어가고 있잖아. 안 그래도 이미 그런 사람이 하나 들어와서, 이 세계도 바깥처럼 똑같이 썩어 문드러지며 죽어가고 있어. 「불 꺼진 재」라 태초의 불을 밝힐 수 있는데도 이번 세계의 수복자, 반룡 아닌 수복자, 「아리안델」을 기만하며 그 피로 불을 덮고 있지. 나도 반룡의 후손으로서 엄연히 세계를 수복할 수는 있지만, 나는 불도 모르고 안료 삼을 피도 가지고 있지 않아. 바깥 세상으로 나가볼 수는 있겠지만, 글쎄, 원시 결정에서 태어난 존재라 그런지 나의 이 앳된 몸은 죽지 않을지언정 더 이상 자랄 기미가 없어서 너무 약해. 이러다 태초의 불이 이 세계에서도, 바깥에서도 완전히 꺼지고 나면, 이제 이 세계의 결말은 확정되는 거지. 그럴 운명이야."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

"...내가, 보여주겠다."

소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뭘? 불을?"

"...그래. 태초의 불. 불 꺼진 재라면, 요즘은 이미 썩어넘치게 많으니까. 그리고 언젠가, 피도..."

소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왜?"

"알을 깨라. 운명을 박살내라.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는 거다. 아리안델의 피로 불을 덮고 있다는 그 불 꺼진 재를 주살하는 거다. 정 안되면 바깥 세상에서 다른 재를 끌어오면 된다. 재는 잔불에 이끌리는 법.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보면 불도, 피도 흐르겠지. 이 귀종유리담에 걸맞는 결말을 선사하는 거다."

...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장갑을 벗었다. 다 트고 굳어 흉한 손이 갑자기 부끄러웠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맞잡은 손에서 나는 새로운 사명을, 섬길 가치가 있는 주인을 보았다. 나도 운명의 베틀을 깨부수고 나아가리라. 모든 것이 얼어붙어 멈춘 채 썩어가는 세계 따위, 아무도 원하지 않아.




회화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첫 회화세계 출신이라는, 버려진 자들의 어머니, 자애로운 여신 베르카를 섬기고 백교에 눈을 뜬 나는 며칠 후 주인의 도움으로 바깥 세상에 다시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곤히 잠든 도련님들과 그 친구들, 그 하수인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린 나는 화폭을 챙기고서 곧 한 교회를 거점 삼아 불 꺼진 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 기도를 올렸다. 죄를 사해준다는 여신 베르카시여, 버려진 자들의 어머니시여. 제 조상의 원죄를 용서해주소서. 그리고 불을 지필 재를 찾을 수 있도록 가호해주소서. 우리들의 결의를, 지켜봐주소서. 우리 버려진 자들에게 힘을 주소서.

결코 짧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끝끝내 찾아낸 재는 가히 경이로울 정도의 힘을 보였다. 나와 거의 똑같은 반응을 보이며 회화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걸로 재는 둘이라며 큭큭댔던 것도 잠시, 재는 순식간에 기만자 엘프리데와 수복자 아리안델을 주살했고, 그 과정에서 교회에 모셔져있던 대접에서는 불이 흘러나와 교회를 온통 태웠다.


하지만 주인께서 불을 보았고, 그러나 거기 이끌리지 않았건만, 새로운 세계는 그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곧 깨달았다. 다음 세계의 안료는, 다음 회화의 피는, 어두운 영혼의 것이어야 한다. 멸망해가는 불의 시대의 탓일까.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고 쌓여 고인 어둠은 끝내 세상을 가득 채워 드디어 저 드높은 태양에까지 닿았다. 우리는 이내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포기할 수는 없다. 노예이자 노예 아닌, 기사이자 기사 아닌 자로서. 나는 기꺼이 섬겼다.


그래서 모든 땅이 한 점으로 떨어지며 모여 쌓이는 곳, 「퇴적지」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본 주인의 얼굴이 마지막이었지만, 그 순간은 담담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그 재에게 먼저 길을 뚫을 테니 따라오라고 한 시점에서 나는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어두운 영혼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피이지 내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어두운 영혼의 안료이지 게일이 아니다. 그래서 재에게 뒤따라오라고 부탁했다. 나는 분명, 어두운 영혼을 이 몸에 담고서 두 번 다시 자의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 돌아가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주인을 해칠 것이다. 그 전에, 재의 손에 죽어야 한다. 피만 돌아가면 된다. 그 재라면, 분명 나를 죽이고 주인께 안료를 전해줄 것이다.

퇴적지는 기이한 곳이었다. 돌바닥에서 기어나오는 습한 자들은 기이한 냄새를 풍겼다. 마치 비를 맞는 듯한, 거기 흠뻑 둘러싸여 적셔지는 듯한 느낌. 낯설지 않았다.

성과 기사들, 탑과 독, 제사장과 최후의 데몬들. 궁수와 괴물과 용과 거인과 해골들. 수많은 고난을 뚫으며 나는 처음으로 노예기사의 운명에게 고마워했다. 그 많은 경험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 퇴적지와 이 도시를 돌파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이 도시는, 무언가 이상했다. 지금에 있으면서도 지금이 아닌 것 같은, 기이한 느낌. 나는 한 침소에 도달해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알이었다. 왕녀가 알을 안고 있었다. 태초의 도시이자 추방된 난쟁이들을 위한 이 장소는, 어둠의 고리를 품은 이 곳은 알 속에 그 운명과 시간이 갇힌 채 굳어있었다.


나는 알을 깼다.

운명도 시간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알을 안고 있던 왕녀는 어느새 죽었고 건물은 무너진 채 그 너머로 끝없는 사토의 황야가 펼쳐져있었다.

다시 걸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발견할 수 있었다.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는, 관을 쓴 난쟁이 왕들.

생각할 겨를을 나 자신에게 허락치 않은 채로 달려들었다.

먹는다. 집어삼킨다. 뜯어낸다. 들이킨다. 찢는다. 마신다.

어두운 영혼이 몸을 채우는 것이 느껴진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아득하면서도 목전에 있는 것만 같고, 높으면서 낮다. 이 기이한 감각은 대체 뭘까.

바닥이 없어진다. 끝없는 심연, 무저갱의 심해. 미지의 무언가로 나는 발을 내디딘다. 먼 옛날에 느꼈던 그 감각. 마치 물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그 축축한 느낌. 가슴에 뚫린 다크링이 몸을 갉아먹어간다. 곧 자그마했던 구멍은 주먹만하게, 그리고 손바닥만하게, 끝내는 머리만큼 커져간다. 안의 어둠은 마치 알 같았던 형상을 가뿐히 깨고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깨닫는다. 눈이 번쩍 뜨이는 듯하다. 나는 주인을 위한 그릇인 동시에 어둠을 위한 그릇이다.

태초의 순간 불에 봉인된 어둠은 불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빛이 없고 따뜻함이 없는 세상으로 탈출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인간성에 묶인 수많은 자들에게 그 무한한 잠재력으로 불사의 힘을 주었다.

몸이 흉하게 뒤틀릴지라도, 그 자신처럼 알을 깨고 무언가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존재들에게 어둠의 축복은 주어졌다. 불의 봉인 탓에 그 권능은 완전하지 못했고 때문에 사명을 다하거나 마음이 꺾인 이들은 곧 이성을 잃고 망자가 되었지만, 인간성의 어둠은 변함없이 알 모양의 표식으로 각자의 사명을 축성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불가해한 운명과 계획에 모든 인간을 묶었다. 언젠가 불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알을 깨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그 그릇이다. 운명을 깨고 싶었던 나는, 여태껏 운명에 그 누구보다 강하게 묶인 채 마지막 장기말로서 조종되어왔던 셈이다.


하지만 이 갑작스런 계몽에도 나는 동요하지 않는다. 개의치 않는다. 아무렴 좋다. 아가씨에게 안료를 전할 수만 있다면, 뭐든 괜찮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짓밟힌 채, 배 위에서, 나는...

그래, 가장 낮은 곳. 하지만 나는 지금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동시에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리고 피 섞인 숨을 뱉어줄 얼굴들도 오래 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피가 부족하다. 난쟁이 왕은 더 없는 건가. 분명,


한 놈 더, 있다. 언덕 위, 나를 지켜보고 있다.


...아직, 있었나.


동류들이 무참하게 찢기고 포식당하는데도 용케 도망치지 않았다니, 뭐하는 놈인 걸까. 하지만 생각할 시간은 없다. 사정 따위 아무래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자아, 내게 내놔라, 너의 어두운 영혼을.


아가씨는 불을 알게 되었다. 불의 세계가 무엇인지 깨달으셨다. 그러나 불에 이끌리지도 않았다. 미련을 버리고 알을 깨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마치셨다.

뒤처진 것은, 이제 나뿐. 어두운 영혼을 몸에 담기만 하면, 나머지는 재가 처리해줄 터이다.

가자.


...내 아가씨의 그림을 위해.


날아올라 찌르고 베고 이제는 다 낡고 닳아 부서지다시피 한 검을 휘두르며 찍어댄다. 마지막 싸움이다. 마지막이다. 모든 것을 바쳐라. 그렇게 되뇌인다.

몸이 어느새 한계에 다다른다. 퇴적지에서부터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온 육신이 점점 부서져간다. 이 난쟁이는, 왜 이렇게 강한 거지. 하지만 의문을 품을 겨를이 없다. 다시 움직여본다. 하지만 나는 이내 사토 위에 쓰러진다.

...검 위로 피가 떨어졌다. 또, 옛날 생각에 머리가 적셔져간다. 그래, 내 피를 지켜보는 게 취미이던 시절도 있었지. 그리움, 아련함. 싸움의 한가운데에서 피어오르는 이 감정은 그러나 썩 싫지 않다. 그런데,

피가, 검다.

...아아. 이것이, 피인가.

드디어, 도달했다.

...어두운 영혼의, 피인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명쾌해지는 듯한 마음에 나는 살짝 놀란다.

그리고 너를, 마주본다. 이 사토 위에 선, 너를.

재의 귀인을.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신들의 유산이 모두 파묻힌 사토 위? 끝없는 바다 속? 어디든 상관없다. 그저,

눈을 감는다.







게일의 갑옷을 뜯기란 어려웠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고 또 수리되어온 기사의 갑옷은 그 주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완강히 저항했다.

점성 있는, 어두운 영혼에 물든 검은 피. 새로운 세계의 안료. 게일의 갑옷에 그 피를 담았다. 그것보다 더 적절한 대접은 생각해볼 수도 없었다.

어두운 영혼으로 그윈의 권능마저, 벼락마저 부리는 모습을 보인 게일이다. 옛 신들이 죽고 모든 것이 몰락해 묻힌 세상의 끝에서, 그는 이제 새로운 세계의 창조신이 되리라. 신의 피는 오직 신의 갑옷에만 담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기사의 유산을 들고서, 나는 불타는 그림 속으로 돌아갔다.

"…고마워요, 재의 사람. 이걸로 저는, 세계를 그릴 거에요.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새로운 그림에 그 이름을 붙이고 싶어요."

...내 이름은, 너무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

나는, 이름도 없고, 장작조차 되지 못한, 저주받은 불사. 더 이상 이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겠지.

"…알겠습니다. 당신도 똑같은 거군요. 그럼 이 그림에는, 재라는 이름을 붙이겠습니다. 춥고, 어둡고, 굉장히 상냥한 그림. 분명 언젠가, 누군가의 있을 곳이 되어줄 수 있을만한 그림을."

나는 힘없이 미소지었다.

"…게일 할아버지도, 언젠가는 돌아와주실까. 새로운 그림이, 할아버지의 있을 곳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갑옷과 내 눈에서, 아마 화가는 눈치챘으리라. 화가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흐르는 눈물을 보았던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치 않았다.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 나는 읊조렸다. "모든 것이 운명의 실에 묶인 꼭두각시라면 대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일까."

화가는 조용히, 그러나 쥐어짜내듯 답했다. "운명은, 거대해요. 그 베틀은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하죠. 그렇기에 우리는 거기서 의미를 찾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운명의 실이 짜낸 피륙의 무늬 대신 실 하나하나에서도, 피로써 그려진 세계의 모습 대신 그 속의 아주 작은 점 하나하나에서도, 의미는 찾을 수 있으니까."

"...그런가."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사명, 망집, 매달림, 권능, 애착... 많은 심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곧 태초의 불이 거두어지고 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될까.


태초의 불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그 순간, 나는 과연 뭘 하고 있을까.


...아직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겠지. 이제 신들의 이야기도 끝을 맺고, 불의 세계의 반대편에서 태동하려 하는 세계가 목전에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나는 그리 내뱉고 뭔가에 쫓기듯 급히 몸을 돌렸다. 이 세상의 운명을 향해 나는 나아갔다.

"...안녕히, 재의 사람." 화가는 조금의 슬픔을 담아 말했다. 뭔가 예견한 듯한 어조에는 많은 감정이 섞여있었다.


실타래가 다시 베틀에 감겨들어갔다. 피는 굳어 하나의 새로운 알이 되었다.

추천 비추천

8

고정닉 5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말머리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2864 설문 비난 여론에도 뻔뻔하게 잘 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03 - -
2865 AD 호요버스 신작 <젠레스 존 제로> 7월 4일 오픈! 운영자 24/06/05 - -
4192064 공지 갤 운영기준 및 호출벨 [15] ㅇㅇ(49.169) 24.02.10 13656 29
3962861 공지 엘든링 복지/템 운반 규칙 [76] DeusVul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7.26 25437 93
4400050 공지 프리뷰에서 나온 정보는 제목에 적지 말아주세요 [1] IvoryRhone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4.06.07 35 1
3584137 공지 프롬갤 공략, 팁, 스토리설명 등 읽을거리 모음 [61] 콜드스냅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12.09 106473 40
4400672 일반 뉴비한테 꿀팁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6 6 0
4400671 PvP 왜 뒤잡이 되나 했더니ㅋㅋ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5 16 0
4400670 일반 들크는 회차 무관하게 어렵다안햇나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4 12 0
4400669 일반 pc9 프리데 미디르 게일 잡자 lamp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4 13 0
4400668 일반 아 디시 좆버그 개씨발 진짜 이런 [4] 카리아명예기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3 32 0
4400667 코옵 pc8)재도읍3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9] 이세계트럭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3 33 0
4400666 스포❗ 들크 밀 생각하니 벌써 불안함 [1] ㅇㅇ(220.79) 01:02 24 0
4400665 일반 레날라 엉덩이로 호박알 삼키는 짤 [9] ㅇㅇ(175.120) 01:02 57 0
4400664 일반 dlc에는 출혈 내성 떡칠 해놨겠지?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1 34 0
4400663 일반 커마어떰 [4] ㅇㅇ(211.118) 01:01 43 0
4400662 일반 선행 게임 플레이 영상인가 그거이야기하는거지?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1 12 0
4400661 일반 머머리 마지막 내한이 닼소2때 아닌가 ㅇㅇ(118.33) 01:01 13 0
4400660 일반 "어우... 대가리를 하도 후려쳤더니 아파 뒤지겠네..." 감자튀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1 27 1
4400659 일반 꼴 뉴비 백왕까지 다잡았다 [4] 니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1 25 0
4400658 일반 말레 알몸 단검은 너무 고통이야 [2] Oppi1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1 22 0
4400657 일반 엘dlc전에 꼴 다깨는거 추천한다 [1] Raim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0 17 0
4400656 일반 니네 생각에 짐승의 포효가 빠른거 같냐 폭풍의 칼날이 빠른거 같냐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0 11 0
4400654 일반 묘지기 망토 파밍하는데 ㅇㅇ(61.72) 00:59 9 0
4400653 일반 엘들크 유저에 긴장감주려고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8 28 0
4400652 일반 엘데의 왕 엔딩< 나한테 조아리는 부하들만 있었어도.. [6]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7 55 0
4400651 일반 화염 싸개 빌드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3]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7 16 0
4400650 스포❗ 아트북에 이미지 뭐뭐 있을라나 [1] ㅇㅇ(1.248) 00:57 17 0
4400649 일반 꼴 돌격창은 어케 상대해야되냐 [8] rhc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7 38 0
4400648 일반 결국 꼴을 깔았다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7 16 0
4400646 코옵 pc8)말리케TH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11] 이세계트럭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5 24 0
4400645 일반 경대검 태도 기대된다 ㅇㅇ(121.175) 00:55 11 0
4400644 대회 대회) 내가 쓰는 후리존 빌드들 소개해봄(장문주의) 카리아명예기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5 33 1
4400643 일반 엘든링 특대검 양잡할거면 근력스탯 54까지만 주면됨?? ㅇㅇ(175.119) 00:55 6 0
4400642 일반 분탕충은 용서치않아요 [4] 이세계트럭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4 48 0
4400641 일반 꼴 공략 쓰던거있었는데 [1] ㅇㅇ(49.170) 00:54 18 0
4400640 일반 "언제나 그렇듯 시부야만이 이겼다." [2] 회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4 35 0
4400639 일반 맘잇신 깼다!!! [1] ㅇㅇ(59.19) 00:53 22 0
4400638 일반 잠이나 자야겟노 [4] 됴미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3 36 0
4400637 일반 역대급 미쳐버린 타격감...real 이세계트럭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3 48 3
4400636 일반 라이커드 관련해서 dlc나왔으면 좋겠음 [1] 플스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2 13 0
4400635 일반 신사냥검이랑 신살갗쌍날검 흑염회오리 붙여서 쓰는데 ㅇㅇ(114.202) 00:52 7 0
4400634 일반 슬슬 가지러 가볼까. 원피스.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0 43 0
4400633 일반 꼴 리쉬 죽이면 기적 못 사? [3] ㅇㅇ(124.51) 00:50 21 0
4400632 일반 왜 혼자 지팡이로 부지깽이 전기 쓰세요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0 24 0
4400631 일반 아 킹스필드5 존나 하고 싶다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0 43 0
4400630 일반 이건 보자마자 육성으로 욕 나오네 ㅅㅂ [4] ㅇㅇ(118.129) 00:48 98 0
4400629 일반 와씨발 오줌살짝샜노 [1] THELEM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48 57 3
4400628 복지 pc엘 왕룬 부탁드릴께요 ㅇㅇ(211.44) 00:47 40 0
4400626 코옵 pc1 빠른 말리케스 [29] 쇼파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46 82 0
4400625 복지 다크소울3 늑대의 곡검 복지 가능하신분 (114.202) 00:45 20 0
4400624 일반 엘든링 야생코옵 몇렙이 잘 잡히냐? ㅇㅇ(112.186) 00:45 19 0
4400623 일반 본인 겜하면서 욕제일 많이한게 꼴인듯 ㅇㅇ(222.112) 00:44 33 0
4400622 일반 나무 [4] ㅇㅇ(121.144) 00:44 81 0
4400621 일반 쌍왕자 못 이겨서 잔불 모으다 드디어 깨달음 [2] ㅇㄴㅇ(175.120) 00:44 39 0
4400620 일반 이것이 깊은 뿌리 밑바닥이다 컨버전스편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44 43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