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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번역] 점자성서) 눈과 불씨앱에서 작성

Psychedelic_surrea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3.31 09:32:30
조회 1751 추천 20 댓글 21
														

* 말이 점자성서지 점자성서 요소는 한 0.2% 첨가되어있습니다. 전혀 딴 소리 뿐이니 바지 내렸다면 다시 올려주세요. 물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알아서 상황을 생각해낼 수도 있겠어요.

** 개인의 프롬뇌와 병신뇌와 망상이 치사량으로 함유되어있습니다.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눈과 불씨가 서로를 안았다.

거인들의 산령. 한 빛바랜 자가 돌바닥 위에 조용히 걸터앉아있었다. 얼핏 축복에 앉아있는 것 같기도 한 그 흔해보이는 모습은 그러나 외양과 달랐다. 축복 옆에 피워진 모닥불이, 빛바랜 자가 진정 앉아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널린 거인 전쟁의 흔적을 꿰뚫고 있는 가시나무들은 기이하게도 태우고 또 태워도 사그라드는 법이 없었지만, 동시에 활활 타오르며 그 불길의 혀를 낼름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 수피를 덮은 잉걸불만이 조용히 일렁일 뿐이었다.

빛바랜 자의 외향은 기이했다. 눈가리개와 손끝이 뾰족한 금속 장갑, 그리고 가죽 갑옷에 천 바지의 조합. 나름 실용적이면서도 자신만의 멋과 고집을 포기하지 못한 그 모습에서는 오히려 묘한 철없음이 묻어나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앉아있던 것일까, 검은 가죽이 눈에 다 덮여 새하얘질 지경이었다.

그런 빛바랜 자의 옆에 한 사내가 걸터앉았다. 우스꽝스러우리만치 거대한 철 삿갓에 다 해진 갑옷은 틈새의 땅 곳곳을 유린하는 피의 데미갓의 하수인들을 하나하나 사냥해온 자의 명예로운 전흔, 혹은 그 이상으로 올곧고 순수한 마음을 내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이제 거기 없었다. 철 삿갓의 촘촘한 살들 사이로 얼핏 내비치는 눈은 샛노란 혼돈의 불로 가득 차 문드러진 지 오래였다.

"오랜만이군요. 거인들의 산령의 처음과 끝에서 만나다니, 시적인 만남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딱히 원한 건 아니야. 말했지만, 그냥... 조언이 듣고 싶었어. 아니면 그저 가슴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이미 꽤나 많이 거듭 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경황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부정할 수는 없겠는걸."

빛바랜 자와 사내는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적막. 모닥불만이 조용히 일렁였다. 축복이 있는데도 굳이 불을 또 피워놓은 것은 「황금」에 대한 거리낌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리운 기억, 아련한 추억, 막연한 이끌림일까.

빛바랜 자가 입을 열었다.

"...그, 여기로 부른 이유는..."

"압니다. 그 불씨의 소녀 때문이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직감입니다. 분명, 그대는 이 샤브리리의 말에 별 관심이 없으셨지요. 올바른 왕이 될 길은 그 소녀 대신 그대 자신의 살로 불을 붙이는 것이라 저는 말했지만, 그대는 처음부터 왕이 될 생각 따위 없었습니다. 그대는 처음부터 자신이 무엇 때문에 움직이는지조차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때문에 그 소녀를 살릴 생각도 없었던 것이겠죠. 그저 한때 「거대한 하나」를 품었다는 이유로 세 손가락과 함께 옛 신의 유적에 매장된 일족, 그 선율에 마음이 동한 것 아닙니까."

빛바랜 자는 아무 말 없이 손 위에 앉은 잠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대가 그 여정에서 처음으로 만난 은인, 그대를 도와온 조력자에게 최소한의 마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저 먼 곳의 황금 나무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던 적이 꽤나 있었지요. 이곳에 오고 나니 사명을 빼앗겨 떠난 그 소녀가, 그리워지기까지 한 겁니까?"

"잘 알고 있네.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히. 하지만 이야기의 절반 뿐이야. 나머지를 설명해볼게."

빛바랜 자와 혼돈의 사도는 자세를 풀었다. 분명, 긴 이야기가 되리라.

불씨가 눈을 녹여갔다.



"맞아. 비록 멜리나에게 그닥 강한 감정은 느낄 수 없었어. 분명 매력 있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어째서일까. 그래서 올바른 왕이니, 가련한 소녀를 살리자느니, 별 관심 없었지. 그 선율에 이끌렸던 것도 사실이야. 그래, 가슴 속에서 무언가 타올랐지. 안에서부터 녹여갔어. 그래서 세 손가락에게 안긴 거야. 복수, 절망, 슬픔, 저주, 비탄, 분노, 눈물, 비명, 고통... 모두 느꼈고, 모두 받아들였어. 그 많은 마음과 그 거대한 원초를 이 몸으로 끌어안았어.
녹아내리고 사라지고. 기분 좋았지.
그런데 사라지고 나서야 깨닫는다고 해야 하나? 정작 멜리나가 없어지니까..."
빛바랜 자는 적절한 표현을 찾는 듯 말 끝을 흐렸다.

"...공허했지. 분명 필요한 것은 전부 짊어진 줄 알았는데."

눈에 덮여 차가워진 장갑이 돌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그저 조금 아릿한 정도였어.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뭔지 모를 빈틈을 채우고 싶었지. 그냥 막연히 그러고 싶었어. 하지만 방도를 몰라 헤매던 차에 정보가 적힌 두루마리를 하나 봤어. 모그가 섬긴다는 그..."

"진실의 어머니 말이군요." 샤브리리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경멸하는 투가 섞여나왔다. "피와 생명의 외부신. 분명 그녀를 섬기는 모그의 하수인들을, 이 그릇이 사냥하고 다녔죠."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물론 내가 유라랑 엄청 친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어쨌든, 탐색 끝에 모그윈 왕조의 피늪 속에서 그 외부신의 고향 세계를 찾았어. 피와 짐승으로 가득 찬 도시였지. 나는 그 도시에서 전승으로 내려져오는 의식을 행하고 싶었어.
생명과 영혼을 복제할 수 있다는, 의식을."

샤브리리는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세한 과정은 기억이 안 나. 모든 게 꿈을 꾸는 듯 지나가서... 온통 푸른 연기와 붉은 액체가 뒤섞이는 와중에 멜리나를 생각하며 그 기억을 담은 룬을 안에 뿌려넣고 그 속으로 나도 몸을 던졌지. 정신을 차려보니 축복으로 돌아와있었는데,
옆에 멜리나가 있었어.
근데 거기까지야 뭐, 내가 바라고 또 예상했던 결과니 그렇다 치고, 그런데 그 다음이 예상 밖이었어."

빛바랜 자는 잠시 숨을 골랐다. 조금 숨이 달려보이는 그 모습은 긴 이야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기억 속의 무언가 때문일까, 샤브리리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삿갓 밑에 감춘 채 빛바랜 자를 지긋이 응시했다.

"나는 복제된 멜리나가 외향만 멜리나에 새로운 인격을 가지고 있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같은 인격에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어.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인형이나 꼭두각시처럼 명령에 복종할 줄 알았지.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경악하더니 말 한 마디 없이 사명의 칼날을 꺼내들고 달려들더라고."

"...호오?"

"겨우겨우 제압하기는 했지. 너무 당황하기는 했지만 검은 칼날들과 움직이는 방식이 아주 비슷해서 몸이 먼저 움직여주더라고. 그래도 위험했지만 어떻게든 꽁꽁 결박해놓기는 했단 말씀. 하지만 중간중간에 나에게 지나가듯 뱉은 말들을 생각해보면 확실해. 그 복제본은 복제되던 시점까지의 멜리나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어."

"...요컨대, 완벽한 복제라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이론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늪지대 인간」이라는 이론이었죠. 한 황금률 원리주의 학자가 토론 중에 제안한 내용이었습니다. 지금은 화산관에 몸을 담았지만, 확실히 천재였지요." 

"...그게 뭐야?"

"그대가 에인세르 강 유역, 리에니에 지하에 봉인된 일체의 신성이 내뿜는 부패의 늪 위를 걷다 그 때문에 죽었다 가정해봅시다. 그 순간 근처에서 싸우던 용인병의 빙뢰가 늪에 어떠한 작용을 일으켜 그대와 똑같은 몸, 똑같은 기억과 똑같은 마음을 지닌 자가 태어납니다. 그 복제는 그대가 부패에 죽지 않았다면 했을 만한 일을 하고, 했을 만한 말을 하고, 세상은 본래의 그대가 죽었다는 것조차 때문에 눈치채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그 부패 속에서 태어난 복제는 그대인가요? 아니면 그저 복제일 뿐인가요. 그대는 죽은 것일까요, 아니면 죽지 않았을까요."

"네가 그 늪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는데?"

"부패의 신의 규율은 생명과 죽음, 순환과 윤회의 규율이지요. 그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굴레, 고통의 악순환은 「거대한 하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존재입니다. 예전부터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되었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의 그릇이 직접 본 기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요."

빛바랜 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경악 속에 빛바랜 자는 샤브리리가 무수한 그릇들을 옮겨다니며 오랜 세월을 존재해왔음을 다시금 떠올렸다. 분명 그 동안 자신이 직접, 그리고 그릇들의 기억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얻은 지식들의 양은 가히 막대하리라.

"...어쨌든, 과정은 좀 그래도 결과적으로 나는 멜리나를 되찾은 셈이 되었지. 근데 문제는 의식과 기억도 그대로라 내가 세 손가락에게 안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점이야. 계속 날 죽이려 들었지. 토렌트에 태우고 어디로 다닐 때마다 차가운 독설을 듣는 건 한두 번은 견딜 수 있어도 수십, 수백번은 버거운 일이야."

빛바랜 자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생존일 뿐이었어. 어떻게든 계속 데리고 다니면서 내가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했지. 온 몸을 꽁꽁 묶은 다음 입을 막는 편이 제일 확실하긴 했지만 그랬다간 만 년이 지나도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았어. 그래서 먹을 걸 왕창 확보한 다음 경치 좋은 축복을 골라서 거기 한참 머물렀어. 멜리나...의 복제는 결박을 좀 늦추고 입에 물린 재갈도 풀어줬지. 지쳤는지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
그리고 그 축복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모르겠어. 처음에는 대화로 풀어나가보려 했지만 결국 내가 미친 불을 품었다는 사실까지 대화가 다다르고 나면 어김없이 파국이었어. 그런 일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반복되자 나도, 조금 지쳤지."

빛바랜 자는 얼굴을 찡그렸다. 샤브리리는 그 표정과 주름 속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다음은... 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빛바랜 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멀리서 파란 불꽃이 튀고 부리와 이빨과 주먹이 오고가며 깃털과 털이 나부껴도 이 위에서는 들리지조차 않았다.

"후회해, 이 다음은. 구슬리든 타협하든 협박하든 끝까지 말로 해봤어야 했는데."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말씀인가요."

"그냥 몇 대 때리는 정도였으면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지. 온갖... 방식을 동원했어. 심지어 내가 당했던 것들을 근원 삼아 행하니 죄책감도 없었지. 달팽이라던가, 지렁이라던가... 나도 당했는데, 넌 안될 게 뭐냐는 식이었어. 호박색 별빛을 넣은 정약까지도 먹여봤다고. 그 셀브스 놈의 기술을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애초에 효과조차 없었지. 오랜만에 달콤함을 맛본다면서 고맙다고 실컷 놀림만 당했어."

"...반신이 아닌 주신의 분신이기에 그 운명까지는 묶을 수 없었다는 것이군요."

"응?"

"아닙니다. 계속하시지요."

"뭐,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서늘하면서도 사근한 말투로 아직 용서해줄 수는 없지만 미친 불을 잠재울 방법을 같이 찾아보자고 하더라고."

"반신 미켈라의 금침 말입니까."

"맞아. 나도 시간의 틈새에서만 쓸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잘 모르는 그거. 설득력 있었고, 덤으로 너무 갑자기 따뜻하게 말하지도 않아서 속임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오산이었지. 결박을 풀어주고 줄을 사리고 있는데 바로 목을 좀 깊게 베였어.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정말 당했을 테지. 풍차 마을에서 만났던 그 흑염의 사도보다 힘든 싸움이었지만 어떻게든 다시 묶어놓는데는 성공했어.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마음 속의 밑바닥이 사라진 느낌이었어."

"그렇다는 건?"

"수단을 가리지 않게 되었지. 그 어떤 것에도 거리낌이 없게 되었어."

빛바랜 자는 자신이 한 일들을 설명했다. 샤브리리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표정이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는 틈새의 땅에 샤브리리가 유일할 것이다. 눈만이 차분히 내리며 불씨를 덮었다.

"...데리고 다니면서도 살아남겠다는 소기의 목표도 사라지고 그저 쾌락을 추구하고 본능에 충실하며 노리개처럼 써먹고 가지고 놀았다는 말이군요. 이성의 끈을 놓고서 한때 황금 나무를 불태워 쓰러뜨릴 불씨였던 소녀를 그리 떨어뜨릴 줄이야, 의외의 면모가 있으시군요."

샤브리리는 웃음을 조금 흘렸다. 그 소리에는 분명 가볍게나마 조롱이 섞여있었다.

"...조용히 해. 이 부분은 더 이상 말하기 싫어. 하여간 그런 나날들이 계속되자 멜... 멜리나는 마음을 잃었어. 마치 셀브스, 아니 피디 놈의 꼭두각시들처럼 눈에 초점이 없이 가만히 서있다 끌면 끌려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그런... 존재가 되었지. 그래도 데리고 다니고는 있었는데, 며칠 전에 진짜 멜리나를 만나버렸어."

빛바랜 자는 다시 숨을 골랐다. 저 멀리서 오랫동안 계속되던 싸움은 까마귀들의 승리로 종결된 듯했다. 잉걸불이 내리는 눈을 끌어안았고, 샤브리리는 잠자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공기가 일렁였다.

"도읍 하수구였어. 모퉁이 너머에서 누군가 달리길래 숨어서 고개만 내놨는데 멜리나가 있더라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길래 처음에는 날 죽이러 오는 건가 싶었는데 더 자세히 보니 흉조의 아이들이 대여섯씩 무리지어서 쫓아오는 걸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거였어. 일단 숨었다가 멜리나는 지나보내고 흉조들만 처리했지. 이제 흉조들이 쓰는 공격 같은 건 눈 감고도 피하니까. 그리고 진짜 멜리나가 사라진 쪽으로 가봤지. 별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어. 거의 확실히 일어날 또다른 싸움이니, 대화니. 그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었어. 다만 잊고 있었던 게 하나 있었지."

"당시에 「늪지대」의 멜리나도 같이 있었군요."

"...그래. 더 최악인 건, 진짜 멜리나가 복제를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눈치챘다는 거야. 안 그럴 수가 없지.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뻔한데. 묘하게 소극적이고 움츠러드는 자세와 움직임, 멍과 상처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산발, 다 해지고 찢어져 살이 옷보다 더 많이 보일 지경인 복장, 항상 내려가있는 시선까지. 솔직히 전투 때문이라기에는 분위기부터가 달랐어.
거기서는 대체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조차 안 나. 진짜 멜리나가 뭐라 말했더라? 해방? 존엄? 기억? 어머니? 모르겠어."

"진짜 멜리나는 그대의 복제를 죽이려 들었고 그대는 지키려 들었군요."

"아, 맞아. 그랬지. 어쨌든 우리 셋 다 하수구에서 살아남아 나오긴 했어. 진짜 멜리나도 어디론가 사라졌거든. 부상도 그리 심해보이지는 않았고. 축복왕에 같이 맞서 싸울 때보다도 실력이 더 늘었는지 솔직히 조금 버거웠어. 그 이후 진짜 멜리나가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
그리고 여기부터가 널 부른 이유야. 나는 솔직히 복제된 멜리나를 꺾으려 온갖 더럽고 추악한 짓거리들을 자행했어. '그럼 설마 이런 짓도?'라 생각했다면 그 열 곱절은 심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했지. 처음의 목표였던 생존도 사라지고 나중에는 그저 한 마리 야수가 사냥감에게 그리하듯 가지고 본능에 충실하게 가지고 놀았던 것도 인정해."

눈 덮인 장갑은 어느새 돌에 세 갈래의 고랑을 내고 있었다. 얼마나 긁어댄 것일까. 샤브리리는 미친 불의 현신이 돌판에 찍어댔던 광기의 흔적, 그 지문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나는 옛 은인이자 친구, 동반자를 유린하고 모욕하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좋은 기억들까지 말끔히 지워버린 건가? 아니면 그저 복제본인 것을 알기에 아무런 책임도 죄도 없다 생각하고 채워지지 않을 고독의 갈증을 견디려 잠시 환상에 빠져 터무니없는 짓을 벌였을 뿐인 건가? 나는 해방자로부터 마음 꺾인 노예를 지킨 악인인가, 아니면 살인마로부터 옛 전우를 지킨 수호자인 건가? 둘 다인가? 멜리나는 지금 무엇으로서 어디 있는 건가, 거인들의 산령의 장난감? 아니면 틈새의 땅의 다른 어딘가의 암살자? 나는 무엇이지? 죄인, 아니면 외톨이?"

샤브리리가 오랫동안 붙어있던 입술을 뗐다. 그 목에서 나오는 어딘가 뒤틀려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유라의 것이면서 동시에 유라의 것이 아니었다.

"그 부분은 이 샤브리리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 정해서도 안되지요. 다만 이 말을 드리겠습니다. 그대는 장차 왕이 될 자. 「불씨」입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뭐라고 좀, 그러니까, 제발..."

빛바랜 자는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아 신음했다. 장갑에 쌓여가던 눈이 확 쏟아졌다. 샤브리리가 몸을 숙여 속삭였다.

"무엇을 후회하지요?"

빛바랜 자가 신음을 멈췄다. 머리 위에 다시 잠자리가 내려앉았다.

"짧게나마 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오래 전, 시랍에 덮인 한 여인의 육체를 그릇으로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3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자이더군요. 호기심에 찾아가보았습니다. 카리아의 기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부하나 분파의 일원이었는지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며 정말 당신이냐는 둥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이내 주문으로 냉정을 되찾는 모습이 인상에 깊게 남았습니다."

이번에는 빛바랜 자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내 자세를 고쳐잡아 다시 몸을 말고 무릎을 안은 채 앉은 빛바랜 자의 모습에서는 성숙함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헌데 그 다음이 기묘했습니다. 꽤나 지적이었는지 그 통찰력으로 그릇 안의 제 정체를 파악해내더군요. 그러자 경계하면서도 사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의 얼굴과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해준 데에 감사를 표한다」고. 그것은 감사의 말이었습니다."

"...뭐?"

빛바랜 자는 허벅지에 파묻은 얼굴을 들어 경악한 눈으로 물었다.

"「진짜이든 아니든, 조금이나마 그리움을 달래주어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지요. 꽤나 재밌는 자였습니다. 허나 제 요는 이것입니다. 그 정체가 무엇이건,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그 존재가 당신에게 무엇이냐는 것뿐입니다. 저를 보십시오. 이 몸은, 이 갑옷은, 그릇은 한때 「유라」라 불리었던 사내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대에게 유라인가요?"

빛바랜 자는 고개를 떨구어 망설이다 쥐어짜내듯 대답했다.

"...아니. 너는 샤브리리지."

"그렇지요. 어찌 보면 늪의 유라이며 늪의 샤브리리이기도 한 저는 그러나 그대에게 있어 그저 샤브리리일 뿐입니다. 오래 전 눈이 뭉개져 최초의 미친 자가 된 그 존재와 지금의 저는 분명 다르겠지만, 그대에게는 별 차이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저기 저 소녀는 그대에게 있어 무엇이지요?"

샤브리리의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는 나신에 망토만 걸친 소녀가 서있었다. 그 눈에는 빛이 없었고, 빛바랜 자의 부름에 쇠사슬을 딛고 걸어오는 움직임에는 생기가 없었다. 빛바랜 자는 홀린 듯 말했다.

"...멜리나는 절대 아닌 무언가."

"이 세상에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체성입니다. 인형, 노예, 전사, 방직공, 사냥꾼, 첩자... 그러나 목적 없이 그저 태어날 뿐인 것들에게는 정체성이 없습니다. 이름도, 성격도, 꾸밈도, 그 수많은 허상들은 정체성을 얻으려는 존재들의 처절한 발버둥입니다.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고 갈라놓으려는 절박한 시도입니다. 그대는 본인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씨의 소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복제는 오히려 원본과 너무 동일하기에, 조금의 오차도 없기에 멜리나라는 정체성이 있으면서도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에 이 소녀가 무엇인지는 제가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겁니다. 말해보시지요. 이 소녀는 무엇인가요?"

빛바랜 자는 생각하는 듯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났다. 샤브리리가 침묵을 깨려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빛바랜 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 앞에 선 알몸의 소녀를 보고서도 아무 말이 없던 빛바랜 자는 돌연 패링 대거를 꺼내 멜리나의 왼팔을 세로로 죽 그었다. 선혈이 배어나오고 흘러 떨어져도 소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빛바랜 자는 조용히 안대를 벗었다. 그 밑의 눈은, 「미친 불의 왕」의 것이었다. 샛노란 혼돈의 불에 뭉개져 진물을 조금 흘리고 있는 그 눈은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고요해졌다.
소녀는 이내 쓰러져 죽었다. 그 위로 눈이 덮여갔다.

"...내 사명의 방해자."

샤브리리는 미소지었다.

"그저 태어나 아무 의미 없이 절망하고 슬픔을 퍼뜨리다 고통스레 죽어갈 뿐인 족속들. 차라리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어쩌면 그 편보다 더 안 좋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태어날 뿐인 생명에 구차히 이유를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설명하고 이해하고 소통하고 노력해봤자 그 점은 추호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거인의 불가마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빛바랜 자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체 몇 명이 내지르는 소리일까, 그러나 빛바랜 자는 불편하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옛 왕」이시여, 「불씨」여. 몸을 던지시지요. 황금 나무를 불태우고 쓰러뜨려, 우리를 갈라놓고 멀리하는 것들을 전부 불사르는 겁니다. 모두 녹여 원초의 「하나」로 되돌리는 겁니다.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죽지 않도록."

빛바랜 자가 내민 손에 불이 붙었다. 거인의 불가마에서 맹렬히 타오른 불길은 이내 차고 넘쳐흘러 황금 나무를 태우기 시작했다.

"...불꽃과 함께 걷는 자, 언젠가 운명의 죽음을 보리라..."

빛바랜 자는 마지막으로 그리 읊조리고서 불가마 속으로 떨어졌다. 솟아오른 불기둥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샤브리리는 몸을 돌려 쇠사슬을 딛고 내려갔다.

"...아아, 세상에, 혼돈 있으라." 샤브리리는 고요히 읊조렸다.

소녀의 생기 없는 몸만이 남았고, 그 위로 새하얀 순백의 눈이 속절없이 덮여갔다. 불씨는 타올랐다.

눈과 불씨가 서로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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