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한 새벽의 어느 병원.
조덕조, 조지 딕슨 조가 누워있는 병실.
해병대 군복을 입고있는 푸른 눈의 사내, 서킨 딕슨 조가 침대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봐요 아버지, 조지 딕슨 조... 조딕조.
난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게 너무 싫어.
서킨 딕슨 조라는 이 이름도 싫고, 여기와서 받은 조조팔이라는 이름도 너무나 싫었어.
댁은 내가 여기서 인정받기를 바란다고 했지?
당신이 동경했던 그 지옥에 갔다온다면 내가 이곳 사람이 될거라고 생각했었지?"
석딕조가 잠시 피식 웃다가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인다.
"아니, 틀렸어.
난 어디서도 받아들여지질 않더라고.
저 지옥 안의 악마들은 날 못잡아먹어서 안달일 뿐이고 내가 무슨 말을 외치던 듣는 채도 안하더라고.
이봐요 조딕조씨.
당신이 동경했던 그 세계에서 내가 깨달은건 하나야.
못 견디고 죽거나, 죽느니만 못하게 되거나...
아니면, 그것들과 똑같이 되던가 더한 놈이 되거나.
내가 뭘 선택했을까? 응?"
조지 딕슨 조가 무언가 불안감을 느낀다.
"oh... 내 자랑스러운 아들 서킨..."
"자랑...? 난 말이지... 당신과 지내온 그 모든 순간이 단 한번도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어.
지금의 내가, 지금 내 모습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아?"
"..."
"흠... 그래, 댁이 동경했던 이 지옥에서 내가 배우고 깨달았던걸 지금 당신에게도 알려줄게."
서킨 딕슨 조가 바지 벨트를 푼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느낀 조지 딕슨 조가 두려움에 물든 눈빛으로 호소하기 시작한다.
"서킨, no... no... stop!"
"오, 이런! 아하하하! 이봐, 조딕조. 한국말이 그렇게 서투르면 어떡해?
해병대에선 말이야... 그 no, stop이라는 말이 계속 하자는 말이야.
내가 그렇게 얘기할 때 마다 멈추지 않고 계속 하더라고."
조지 딕슨 조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는 의미없는 발악일 뿐.
서킨 딕슨 조는 필사적으로 기어서 병실 밖으로 나가려는 자신의 아버지를 벌레 바라보듯 바라본다.
"no... stop! 이 미친 싸이코 새끼야, 오지말라고!"
조지 딕슨 조가 절규한다.
금방 조지 딕슨 조를 앞지른 서킨 딕슨 조가 병실 문을 닫아버리고 문을 걸어 잠근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으로 조지 딕슨 조를 바라보며 말한다.
"난 내 군생활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이내 서킨 딕슨 조가 조지 딕슨 조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리고는 그의 귓가에 대고 말한다.
"...알고보니 개같은 문학이었어."
새벽 내내 병실에서는 젖은 수건으로 살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이 튼다.
조덕조가 바지가 벗겨지고 입에 거품을 문 채, 병실 바닥에 널부러져있다.
석딕조는 그런 아버지를 뒤로 한 채, 병실의 창문으로 다가선다.
환한 햇빛이 마치 자신을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아... 기합."
석딕조는 황홀한 눈빛으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자신은 더욱 해병다워지고, 아버지가 동경했던 세계를 체험 시켜드렸으니, 이제 부대로 복귀해야 할 때다.
그 날 저녁, 석딕조는 부대로 복귀했다.
선임들은 석딕조를 보며 무언가 이질감을 느낀다.
무언가, 사람이 변했다.
황룡이 평상시처럼 석딕조에게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걸어온다.
"야, 조좆빨이. 휴가 나가더니 얼굴이 아주 훤하네. 기열인 니네 애비랑 좆게이짓이라도 하고 왔냐?"
"악! 황룡 해병님의 말씀대로, 저희 아버지는 너무나도 기열이라 해병대의 방식으로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엉? 뭐라고...? 야, 이 새끼 지금 뭐라는...?"
"황룡 해병님 덕분에 조금 더 해병다워졌고, 그런 제 모습을 통해 아버지께서도 기열스러운 모습을 조금이나마 벗어내실 수 있었습니다! 황룡 해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뭐... 뭔 미친...? 이게 미쳤나...?"
보기 드물게, 황룡이 당황하며 벙찐 표정을 짓는다.
"야, 얘들아. 나가자..."
황룡은 석딕조를 애써 무시하며 실세 패거리들을 이끌고 자리를 뜬다.
"하하하하하. 빠따도 아구창도 나 홀로 집어삼키며..."
무엇이 즐거워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석딕조는 싸가를 흥얼거리며 짐을 정리한다.
그 때, 생활관으로 누군가가 들어온다.
대대장, 곽말풍 중령이었다.
"서킨 딕슨 조 이병. 지금 여기 있나? 잠시 나좀 보자고."
곽말풍이 석딕조를 데리고 대대장실로 간다.
"조만간에 방송국에서 국군 장병들과 지휘관들을 모아서 국군을 홍보하는 방송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우리 해병대도 당연히 참석할거고, 사령관님께서 직접 참석할거라고 하시더라고.
자네가 많이 특이한 케이스다 보니까, 사령관님께선 자네와 함께 방송에 나가고 싶어하시는데 혹시 생각이 있나?"
석딕조는 곽말풍이, 정확히는 사령관이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최근의 사건들로 해병대가 시끄러워진 상황에서 석딕조 자신은 사령관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자랑거리이다.
외국인 귀화자가 무려 '선택'해서 '지원'한 군종이라는 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 안팎에서 터져나오는 불만과 불안 또한 어느정도 잠재울 수 있을 터.
그런 생각을 하니 역겨움이 치솟기 시작하고...
"아하하하하하!!!"
"서킨 딕슨 조 이병?"
"아, 당연히 나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사령관님이 절 직접 지목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어... 그래...? 알아주니 고맙구만 그래. 일단 그렇게 알겠네."
그렇게 석딕조가 방송에 출연하기로 결정되고, 곽말풍은 석딕조에게 방송 일정을 설명해준다.
방송에 나가기 전날 저녁.
석딕조는 방송에 나가기 전 필요한 것들을 체크하는 중이다.
석딕조는 병영일기를 펼쳐본다.
입대 이후 꾸준히 작성해오긴 했지만, 자대에 온 이후로 그 내용은 더욱 길어졌다.
자신이 보고 겪었던 일들.
선임들의 일탈과 괴롭힘, 무책임한 간부들의 행태까지.
그 모든걸 편지에 적어 사령관에게 보냈지만 사령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비겁하다며 매도했을 뿐.
생각해보니 자신이 잘못했던 것 같다.
해병대에선 당연한 일들을 잘못이라고 적어 보냈는데 그건 너무 '기열'스러운 행동들이 아니었는가?
'기합 짜세'로써 다시 태어나고 그 내용들을 보니, 정말 낯부끄럽기 짝이 없다.
석딕조는 껄껄 웃으면서 출타용 가방에 병영일기를 집어넣는다.
그 밖에도 A급 전투복과 잘 손질된 세무워커 등등.
최고의 모습으로 방송에 나가기 위해 석딕조는 만전을 기한다.
생각해보니 아직 챙기지 않은 물건이 있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들어있을 무렵, 석딕조는 당직실로 슬쩍 들어가본다.
당직사관과 당직병, 불침번까지.
모두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져 있다.
참으로 기합스러운 해병의 모습에, 석딕조는 미소를 짓는다.
그들의 목에 걸려있는 열쇠를 조용히 빼들고, 석딕조는 어느 물품을 보관하고 있는 보관함 앞으로 다가간다.
(K-5 권총 003228 중령 곽말풍)
석딕조는 방송을 더욱 기합차게 만들어 줄 물건을 곽말풍 중령에게서 빌린다.
비록 본인의 허락을 받은것은 아니지만, 곽말풍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줄 것이다.
곽말풍의 권총을 챙긴 석딕조는 화장실에서 자신만의 리허설을 한다.
머릿속에선 어떤 이야기를 할지 떠올린다.
앞으로 해병대에 입대할 미래의 후임들을 위한 조언들이 좋을 것 같다.
사회시절 지녔던 싸제의 인간성은 당연히 버려야 하고, 가족은 당연히 버려야 한다.
똥 오줌은 요리라고 생각하고 먹을 줄 알아야 하고, 선임의 포신을 빨아야 남자로써, 해병으로써 거듭날 수 있다.
그 밖에도 기합해병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각종 행동들을 떠올리며 대사를 정리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퍼포먼스를 떠올린다.
"필승! 이병 서킨 딕슨 조, 사령관님께 보고 드립니다. 이 방송을 통해 우리 해병대가 얼마나 기합인지 전 국민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권총을 관자놀이에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한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턱 밑에도 갖다 대보고, 입 안에 집어넣어보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이 진정한 '해병'으로 거듭났음을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알리는 그만의 '수료식'이었다.
"큭... 크큭... 아하하하하하!"
석딕조는 계속되는 '기합'찬 생각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낀다.
서킨 딕슨 조는 한 명의 인간으로써,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마 죽기 전, 자신이 내지를 수 있는 마지막 절규일 것이다.
하지만 석딕조는 아직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안에서 막 눈을 떴던 그 무언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방송 날 아침.
석딕조는 점호가 끝난 뒤, 홀로 생활관에 남아 방송국에 가기 위한 짐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별안간 바깥쪽에서 누군가를 세게 때리는 듯 한 소리와 함께 고함이 들려온다.
진정한 해병으로 거듭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니 스스로가 극복해내리라 생각하며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슬쩍 밖을 내다본다.
"야, 이규일. 너 내가 우스워? 행정반 커피 딴 사람들이 못 가져가게 지키는게 그렇게 어려워?"
"ㅈ... 죄송합니다!"
행정반의 일수이자 황룡의 심복이었던 안돌격 병장이 이규일을 갈구고 있었다.
행정반의 커피믹스를 다른 선임들이나 간부들이 가져가게 놔뒀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이제 막 일병이 된 이규일에게는 그 일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웃기게도 안돌격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이규일을 갈구기 위한 구실을 마련하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맡긴 것이었다.
석딕조는 자신도 모르게 그 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창 이규일의 뺨을 때리던 안돌격이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다.
석딕조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이야, 조좆빨이. TV나간다니까 얼굴 훤해보이네. 넌 아쎄이 새끼가 여기저기 잘도 싸돌아다닌다?"
안돌격이 석딕조의 뺨을 기분나쁘게 톡톡 두들긴다.
그럼에도 석딕조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야, 이 기열새끼야. 안 그래도 아침부터 기분 드러운데 너도 쳐 맞고싶어서 왔냐? 뭘 실실 쳐 쪼개고 있어?"
계속 미소를 짓는 석딕조였지만 조금씩, 그 미소는 비틀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섬찟해 보일 정도의 미소였고, 눈빛은 알 수 없는 광기로 물들고 있었다.
안돌격은 몰론 우두커니 서 있던 이규일도 흠칫 놀랄 정도였다.
"딕조야, 오늘 방송 나간다며. 안돌격 해병님이 내게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그러는거니까 너무 마음쓰지 말고..."
"야, 닥쳐봐."
안돌격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너 계속 쪼갤래? 요새 좀 가만히 놔두니까 아주 빠졌구나? 좀 맞아야..."
"안돌격, 기열..."
석딕조의 갑작스러운 말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안돌격과 이규일이 멈칫한다.
"뭐...? 지금 뭐라고?"
"새끼, 기열!!!"
석딕조가 안돌격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꽂아넣는다.
순간적인 충격에 안돌격이 중심을 잃고 엎어지자, 석딕조가 재빨리 안돌격의 바지를 내리고 자신 역시 바지를 내린다.
그리고는 안돌격에게 '전우애'를 한다.
비어있는 복도에선 마치 자주포를 쏘는 듯 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껅... 꺼헑... 따흑... 딸따구륵...!"
안돌격이 거품을 문 채 정신을 잃고 혼절하지만 석딕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우애를 한다.
이규일은 그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절규하듯 울부짓는다.
"으아아아아! 딕조야 진정해!
석딕조 해병, 그만 해!!!
안 돼!!!
그러지 마!!!
그만 해, 제발!!!!!"
한 바탕의 전우애가 끝나고 석딕조가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지를 추스른다.
안돌격은 게거품을 문 채, 항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일규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훌쩍거리며 말했다.
"으흑... 딕조야... 왜 그런거야 대체?"
석딕조가 이규일을 바라본다.
석딕조의 눈빛이, 방금 전의 광기에 찬 서킨 딕슨 조 '해병'의 눈빛이 아닌, 막 전입왔을 무렵의 서킨 딕슨 조 이병의 눈빛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규일 해병님.
지금 이 좆같은 악마 소굴의 좆같은 개새끼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이규일 해병님께서는 유일하게 남은 '인간'이십니다.
기열도 기합도 아닌 한 명의 순수한 청년 말입니다.
충격적인 광경을 보셨으니, 더 이상은 군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의무대의 손수혁 수병을 찾아가십시오.
그가 도와 줄 것입니다."
이규일은 아이처럼 울며 그저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이제 그만 가보시고, 만약 전역이 안되고 전환 복무를 하셔야 한다면, 이 개좆같은 해병대는 다신 오지 마십시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석딕조가 각을 잡고 진심으로 '존경'을 담아 이규일에게 경례를 한다.
그러고 나서는 이규일을 뒤로 한 채, 안돌격의 옷자락을 붙잡아 화장실에 대충 집어던진다.
그리고는 당당한 걸음으로 부대 밖으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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