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커리어 초창기 존이 겪었던 어려움 중 하나는,
프로레슬링 업계는 선수들을 몇몇 카테고리(box)에 따라 분류하고,
그 박스에 딱 들어맞지 않는 유형의 선수라면 성공을 거두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존의 체구는 소위 '자이언트'라고 분류되는 선수 중에도 큰 편이었지만
그들만큼 근육질이거나, 두꺼운 중량급은 아닌 체형이었다.
그랬기에 존은 항상 프로모터들에게 "스몰 가이가 되기엔 너무 크고, 빅 가이가 되기엔 너무 작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건 그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문제였다.
예를 들어, WWE는 위클리쇼를 열때마다 그 지역의 인디 선수들을 엑스트라로 고용한다.
존도 그런 선수들 중 하나였고, 무슨 역할을 시키든 그 이상을 해낼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세큐리티 가드' 역으로 쓸 인디 선수를 찾았을 때...
글세. 그들은 존에게 그런 역할을 한번도 준 적이 없었다.
왜냐면 6피트 7인치의 '세큐리티'는 실제 WWE 레슬러들을 너무 작아보이게 만들었거든.
그러다보니 존은 엑스트라로 고용되고도 촬영 막판에 밀려나
돈만 받은 채 구내식당에서 대기하곤 했다.
존은 그런 일들을 굉장히 견디기 어려워했고, 그런 상태인 존의 곁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9.
존과 나는 언제나 서로를 사랑했다. 그 사실엔 한점 의문이 없다.
하지만 (그의 정신건강이) 항상 평화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우리는 몇번을 결별하고, 다시 재결합했다. 내 가슴을 찢어놓은 적도 몇번이고 있었다.
물론 내게 폭력을 휘두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결코. 단 한번도.
그는 내가 평생의 사랑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못되게 굴 때도 있는 사람이었다. (he could be mean)
어느 순간 난 이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9년 어느 때. 우리는 또한번 결별한 상태였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너무 지쳐 있었다.
우리는 2003년부터 사귀기 시작했지만, 6년이 지나도 관계에 진전이 없었다.
그저 쳇바퀴처럼 돌고 돌 뿐. 이제는 그만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존이 -항상 그렇듯- 내게 자신을 다시 받아달라고 말했을 때, 나는 거절했다.
나는 항상 당신을 위해 곁에 있을 테고, 당신의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주겠지만, 커플로서는 이제 끝난 것 같다고.
나는 결혼을 원하고, 가정을 꾸리길 원한다고. 그게 내 해피 엔딩이라고.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닌 것 같으니, 우리 둘 모두 행복하기 위해선 이게 최선인 것 같다고 말했다.
10.
그러고 난 뒤로, 존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got help)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정신건강 문제는 단순히 표현하기엔 쉬운 문제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 부분은 존의 인생에서 참 중요한 부분이었고, 이 시기가 그의 유산으로 제대로 남길 바란다.
사람들이 존을 기억할 때, 그가 오랜 트라우마와 맞선 것이
그가 보인 가장 용감한 행동이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몇몇 부분은 존의 사적인 부분이기에, 이 글에서 모든 디테일을 다루진 않겠지만
존의 가장 큰 트라우마는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받은 정신상담에서 존이 가장 큰 도움을 받은 부분이기도 하다.
존의 아버지는 그의 영웅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그가 2001년 11월 타계했을 때, 존은 무너졌다. (나와 존이 만나기 몇달 전 일이었다)
존은 끔찍한 상실감을 겪었다.
시간이 지나며, 존은 그 상실감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block out) 식으로 방어기제를 세웠다.
정신상담은 존이 그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버지를 잃고 나서, 존은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이 존을 무엇보다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존을 그것보다 더 두렵게 만든 것은,
언젠가 자신이 아버지처럼 일찍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누군가를 남겨두고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공포.
남겨진 가족이 그런 상실감과 고통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 트라우마 때문에 존은 그동안 결혼을 원치 않았고, 아이를 갖고 싶지도 않아했다.
거짓말하지 않겠다. 이 글을 쓰면서 참 복잡한 감정이 올라온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존을 인생 내내 두려움에 떨게 만든 가능성이,
그가 간신히 극복하는데 성공한 공포가, 결국 마지막에는 현실로 닥쳐왔다는 것이.
진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하지만 난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자신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려 한다.
내게 단 한번만 기회를 준다면, 최고의 남편, 최고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약속하던 그 사람을.
그리고 그는 정말로 최고의 남편이자, 최고의 아버지였다.
11.
그 뒤로 몇 년은 태풍과도 같았다.
존과 나는 커플로서 진전을 맺었고, 마침내 행복을 느꼈다.
아마 그 행복에서 나온 에너지가 존의 커리어를 한발 나아가게 하는데도 도움을 줬던 것 같다.
그는 점차 "브로디 리" 캐릭터에 자신감을 얻었고, 경기력도 발전했다.
명경기를 여럿 만들며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제대로 모멘텀을 받던 시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러 인디 단체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치카라, 드래곤 게이트, ROH 등등.
훌륭한 선수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목슬리, 클라우디오 카스타뇰리 (세자로), 타일러 블랙 (세스) 등등 말이다.
물론 그걸 "성공했다"고 말하긴 좀 어려웠다.
그는 여전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로체스터 교육학군(school district)의 사무원으로 일했다.
레슬링은 여전히 겸업에 불과했고.
하지만 처음으로, 분명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12.
내 레슬링 커리어를 이야기하자면... 짧게 말하고 넘어가겠다.
얼마 전 루비 소호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도 10년만 나중에 레슬링을 했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이 대목에서 확실히 말해두겠지만,
그게 내가 루비만큼 재능이 있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었다.
나는 루비 소호, 브릿 베이커, 베키 린치, 사샤 뱅크스같은 지금 세대의 선수들과는 비견조차 될 수 없었다.
그들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고, 나는 한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슬퍼지곤 한다.
10년 전 내가 몸을 담았던 시기의 프로레슬링 업계는
솔직히 나를 씹던 껌처럼 단물만 빨고 뱉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는 너무 오랫동안 뻔한 수작질과 속임수에 시달렸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태도와, 농담거리 취급과, 진귀한 물건 취급을 받는 나날들을 너무 오래 겪었다.
프로레슬링에 대한 사랑을 잃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프로레슬러가 되겠다는 꿈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말았다.
13.
그리고 우리에겐 아이가 생겼다.
2011년 봄이었다. 그 시기에 나와 존의 레슬링 커리어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상승세에 놓여 있었고, 나는 꺾이고 있었다.
나는 인생의 다른 진로를 찾기 시작했고, 그게 꽤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아메리칸 이글 (패션 브랜드) 지점의 매니저 일을 얻었다.
이건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얻은 안정적인 수입처였다.
내 수입은 꽤 괜찮았다.
존이 커리어를 이어가는 동안 가족을 부양할 정도는 되었다.
메모리얼 데이 다음 화요일. 처음에는 숙취인 줄 알았다.
다음날 임신 테스트를 했고, 의사의 상담을 받았다. 100% 임신이 확실했다.
오만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존에게 말해야겠네.
난 그날 밤 존에게 중요한 소식을 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존이 통화로 내게 말했다. "나, 일자리에서 짤렸어."
씨발! (Fuck!)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오늘은 도저히 말 못하겠네.
목요일은 우리의 '데이트하는 요일'이니까, 그때 좋은 분위기에서 말해야지.
하지만 그날 저녁, 존은 자신이 이번주 주말에 3일 연속 드래곤 게이트 USA 쇼에 부킹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3일 연속으로 열리는 쇼였고, 그는 마지막 날 메인이벤트를 맡을 예정이었다.
당연히 다음날 아침에 바로 출발해야 했다.
씨발! (Fuck!)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이번주엔 도저히 말 못하겠네.
3일 내내 운전해야 하는데, 지금 이런 소식을 전했다간 분명 밤을 설칠거고,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
드래곤게이트 쇼가 끝나면 그때 말해도 늦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일요일 밤, 존은 굉장히 좌절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내 레슬링 커리어가 끝장났어."
존은 메인이벤트에서 심각한 무릎 부상을 입었고,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씨발! (Fuck!)
그때 깨달음의 순간이 왔다. 계속 이럴 수는 없다고.
'완벽한 순간'이 오기만을 계속 기다릴 순 없었다.
그래서 며칠 뒤, 우리는 집에서 TV를 보며 쉬고 있었다.
존이 내게 물었다. "여보. 덱스터 볼 준비 됐어?" (인기 미국 드라마)
내가 말했다. "나 임신했어."
그는 곧바로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옆방으로 걸어 들어가 문을 거세게 닫았다.
10분 정도 정적이 흐르고, 그가 돌아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덱스터 볼 준비 됐어?"
그리고 그는 미소지었다.
14.
2011년 연말, 존은 조이 머큐리에게 전화를 받았다.
당시 조이 머큐리는 NXT의 전신 격인 FCW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존에게 트라이아웃을 받아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존은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고.
WWE가 부르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 존은 무릎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다행히 그의 무릎 부상은 처음에 두려워한 것처럼 엄청 심각하진 않았다.
간단한 수술과 몇달의 휴식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무릎 부상과 내 임신 소식, 그리고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겹쳐서
그가 오랫동안 시달려온 불안감과 두려움, 좌절이 다시 재발하고 말았다.
그가 내게 말했다. "난 이제 레슬링에선 한발 떼야 할 것 같아."
"난 이제 32살이고. 거기(FCW)에서 가장 나이든 사람일 거야. 엄청 부끄러울 거라고. 벽에 쓰인 글씨도 제대로 못 읽는 아저씨 꼴이 되고 싶진 않아."
나는 그를 구멍이 뚫릴 듯 바라보며 말했다.
"존." 내가 말했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들어본 가장 병신같은 말이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해봐. 이건 트라이아웃이야. 당신이 읽어야 할 벽에 쓰인 글은 '한번 해보시오.' 밖에 없다고."
15.
2012년 1월 17일, 첫째 아들 브로디가 태어났다.
브로디는 예정보다 조금 일찍 태어났다. (조산)
다행히 남편은 제때 트라이아웃을 마치고 출산의 순간에 함께할 수 있었다.
그날, 우리 셋은 함께 병원에 있었다.
그때가 내가 브로디를 처음 안아본 순간이었다. 미숙아라서, 보통의 경우보다 조금 오래 기다려야 했다.
브로디를 안고 있을 때, 존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존은 전화를 바로 받지 않고 음성사서함으로 가게 놔뒀다.
그리고 메세지를 받은 순간,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헤이, 존. 나는 존 로리나이터스라고 하네. 이 메세지를 받으면 편할때 다시 전화를 걸어주게.
우리는 자네에게 WWE 신인 계약을 제안하고 싶네."
몇달이 지나고, 우리는 플로리다로 이주했다.
(계속)
총 4부 예정
댓글 영역
치킨도 시켜먹고 한창이여...
리허설도 하고 틧보니까 어제 새벽까지 연습 햇던데 머단해
프갤러는 갤러리에서 권장하는 비회원 전용
갤닉네임입니다. (삭제 시 닉네임 등록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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