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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뇌피셜] 1276년~1277년초 강서·광동 방면 공방 재구성

갓-신.(121.145) 2019.10.31 07: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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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5년 후반기 양절 방면에는 형호행성이 임안을 향해 진격했다면, 강서 방면으로는 강서도원수가 강서 공략에 나섰었다. 강서도원수에는 이전 악주에 주둔하던 아릭 카야 휘하의 병력(이항, 장영실 등)이나 몽골군에 투항한 옛 남송군(여사기 등)이 연합해 11월이면 융흥부隆興府를 점령했다.


이후 강서 각지도 점령한 강서도원수는 정확한 시기는 나오지 않으나, 원사 이항 열전을 보면 이항은 융흥부 점령 이후 강서 남쪽으로 진격해 각지의 항복을 받아냈다. 몽골군이 강서를 접수하자 광동경략사 서직량이 밀랍서를 보내 항복했고, 강서에 접한 복건의 소무군邵武軍 또한 항복했다.


이 항복 시기는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송사와 원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융흥부 점령이 1275년 11월의 일이므로 그 이후의 일일 것이고, 송사에 따르면 광동경략사 서직량이 익왕이 남송 망명정부의 황제로 즉위(1276년 5월 1일)를 듣자 망명정부의 편을 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1276년 4월 이전의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강서도원수가 강남서로 전역을 점령하고 인근 지역의 항복을 받아냈던 것이 남송 망명정부 수립 이전의 상황이다.


1276년 5월 1일, 익왕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망명정부는 오준을 강서 방면으로, 조진을 광동 방면으로 출병시킨다. 그러나 광동 방면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광동경략사 서직량이 망명정부의 편을 들기로 하자 양웅비가 전 상관인 서직량을 공격한 것이다.


양웅비를 막기 위해 서직량은 석문石門에서 권통판 이성도와 최봉군장 황준에게 막게 하나, 이성도는 싸우지 않았고 황준은 패배해 황급히 광주로 도주했다. 서직량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송사에 따르면 1276년 6월 병자일(13일)에 양웅비가 광주를 접수해서 항복한 자들에게 관직을 분배한다. 이때 석문에서 패배했던 황준만이 거부하자 살해된다. 남송 망명정부의 광동 장악은 몽골에 투항한 양웅비에 의해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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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강서로 간 오준은 광창廣昌으로 진격해 남풍南豐, 의황宜黃, 녕도寧都라는 3개 현을 점령하는 성과를 세운다. 원사 본기에서도 6월 무자일(25일)에 강서도원수가 남송 망명정부의 공세에 지원을 요청하자, 몽골 조정에서 안경부安慶府, 기주蘄州, 황주黃州에 주둔하던 군대를 빼내어 지원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강서도원수를 지원한 병력은 타추의 병력인 것 같다. 타추는 이단의 난 이후로 1270년 산동통군사로 동문병을 통군부사로 두었었고, 1273년부터 회서행원의 일원으로 아타카이, 동문병과 함께 송군과 교전했었다. 1275년 회서행원이 장강을 타고 진격하던 형호행성이 합류할 때 타추도 넘어가 송군과 교전하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회동좌부원수가 되었었다.


1276년에 타추는 통봉대부(종2품), 참지정사(종2품)으로 승진하고 회서행성의 영사領事가 되는데, 이때 그는 막 점령된 정복지인 회서를 병사들이 지랄하는 것을 막고 꾸준히 훈련하면서 안정시켰다고 열전에 나와 있다. 그가 같은 해에 강서도원수가 되었다. 안경부, 기주, 황주 모두 회서의 행정구역인 만큼, 아마 타추가 훈련시켰던 병사를 타추가 강서도원수가 되면서 차출한 것이 아닐까?


타추의 열전에서는 그가 1276년에 강서도원수가 되었다고 나와 있을 뿐 구체적인 시기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원사 본기에서는 1276년 7월 하순 중에 참지정사로 임명되었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그가 회서에서 병사들을 훈련으로 조빠지게 굴리다가 강서도원수가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니, 실제 회서의 병력 증원은 적어도 7월 하순 이후의 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한편 같은 7월에 송사 본기에 따르면 오준이 남풍에서 패배했다고 되어 있다. 이는 원사 이항 열전에도 나온다. 남송 망명정부가 수립되어 반격을 하자 이항이 따까리를 보내어 오준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송사 본기나 이항 열전이나 모두 이 일의 구체적인 시기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타추가 아무리 빨라도 7월 하순 뒤에야 강서도원수로 병력을 증원했다는 가정이 맞다면, 강서도원수의 자체적인 전력으로 오준을 격파했을 공산이 클 것이다.


송사 본기 7월자 기록에는 오준이 남풍에 패한 것 외에도 7월에 벌어졌던 일을 한 번에 서술하고 있다. 그중에 부탁이 패배하여 강서원수부에 항복했다는 내용이 있다. 5월 망명정부가 익왕을 황제로 세우면서 출병했던 이중 하나인 부탁은 6월에 구주에 가 신주信州의 호응을 얻어냈다고 되어 있다. 즉 양절로 갔던 그가 난데없이 강서원수부에 항복한 것이다.


구주는 양절이지만 그가 호응을 받아냈다는 신주는 강남동로로 강남서로와 접해 있다. 그가 병력을 모았을 곳이 신주 등으로 보이는 만큼 강서에 가까이 있고, 같은 달에 오준이 남풍에 패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부탁은 오준과 협력하거나 지원하기 위해 강서도원수과 싸웠다가 패배한 것이 아닐까? 근거는 부족하지만 짐작만 여기서 해본다.


그러나 7월 중에는 동도독同都督이 된 문천상이 7월 정유일(4일) 남검주에서 병사를 준비하는 등 송군의 또 다른 강서 공격이 한창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이 공격이 실제로 전개되려면 몇 개월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로 했다.


문천상이 강서 공격 이전에 남풍에서 패했던 오준이 다시 한 번 강서 공격에 나섰다. 송사 본기에 따르면 이 시점은 8월 중순으로, 수왕 조여역이 무주를 포위했다가 철수하면서 복건의 방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하던 시기였다.


이번 오준의 공격은 장세걸이 병력을 지원했다. 원사 이항 열전에서도 장세걸이 오준에게 병력을 증원해 10만 병력이 건창군建昌軍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이항은 따까리를 보내어 격파한다. 오준은 녕도寧都로 도망간다.


오준이 이끌던 강서 공격은 결국 이항에 보낸 병력에 의해 좌절되어 지지부진한 상태가 지속되고, 이때 양절 방면에서는 몽골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송군을 밀어내던 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9월이 되면 양절 방면의 전황은 망명정부 입장에서 더더욱 악화되지만, 광동 방면에서는 진척이 생긴다.


송사 본기에 따르면, 앞서 5월에 출병시켰던 조진이 9월이 되자 광동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한 웅비가 양웅비에 대한 공격을 벌인 것이다. 조진이 온다는 소식에 웅비가 양웅비를 공격했고, 9월 임인일(11일)에 웅비는 양웅비를 쫓아내고서 소주韶州 등을 수복하고, 광주 또한 수복한다. 이때 이성도가 마중을 나오려고 하자 그를 죽인다.


덕분에 조진은 웅비가 수복한 광주에 9월 임자일(21일)부로 도착한다. 광동을 남송 망명정부가 수복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못한다. 송사 본기에는 9월 중에 이미 장영실과 여사기 등 강서도원수의 군사가 매령梅嶺으로 향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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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으로 강서도원수의 몽골군이 진격한 것이다.


송사 본기에서는 단순히 원수 장영실, 원수 여사기로 되어 있지만 원사의 기록 등을 고려하자면 광동 방면을 공격한 군대의 사령관은 타추였던 것 같다. 그가 1276년 강서도원수가 되어 광동을 평정했다는 것이 열전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송사 본기에 따르면, 10월 조진은 웅비와 같이 광동을 수복했던 봉용을 남웅南雄으로 보내어 웅비와 함께 몽골군을 막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봉용은 전사하고 웅비는 소주로 퇴각한다. 몽골군은 소주를 포위하자 수장 유자입이 항복했고, 웅비는 병사를 이끌고 저항하지만 패배하자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다만 위 서술은 10월 웅비와 봉용의 패배와 웅비의 죽음을 압축적으로 서술한 것 같다.


원사 주전 열전에서는 소주성에 도착한 것이 11월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주성이 저항하자 주전은 용맹한 병사들을 이끌고 성에 먼저 올라 송군과 전투를 벌이며 웅비 등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는 웅비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으나, 소주성에 대한 공격이 11월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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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1월 강서도원수 타추와 휘하 여사기, 장영실 등이 광동에 공격을 펼치는 동안 반대로 남송군도 공세를 벌였다. 10월 임술일(1일) 문천상은 강서와 인접한 정주로 갔다. 그리고 10월 중에 대대적인 강서 공세를 펼친다.


이전에 이항이 보낸 몽골군에 패배를 거듭하던 오준도 이 공세에 참여했다. 그는 우도雩都를 공격한다. 그런데 문천상 휘하의 조시상과 조맹영이 녕도를 공격한다. 이것을 보면, 이전 장세걸의 지원을 받고도 패배하고 오준이 녕도로 도망친 이후로 녕도도 상실했었던 것 같다. 추속이 녕도에서 군사를 모았다는 것을 보면, 이 공세로 수복을 한 것 같지만.


문천상의 강서 공세에 강서에 호응이 잇달았다. 유수, 소명철, 진자경 등이 군사를 일으켜 합류한 것이다. 이 공세는 멀리는 나개례가 길주의 영풍현까지 탈환한다.


그러나 공세는 실패로 끝난다. 영풍현을 탈환했던 나개례는 오래 지나지 않아 패배하면서 전사한다. 녕도에서 병사를 모으던 추속은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같이 군사를 모으던 유흠, 국화순, 안사립, 안기암 등이 죽으면서 줄초상을 치른다.


12월 을축일(5일)에 오준은 서금瑞金으로 퇴각한다. 서금은 정주 코앞의 지역인 만큼 사실상 정주에서 스타트 뛰어 첫 발 내딛은 곳까지 밀려난 것이다.


이때 문천상의 송군을 상대로 한 것은 이항이다. 그런데 이항은 강서도원수부의 좌부원수였고, 강서도원수 타추와 기타 여사기, 장영실 등은 광동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를 보자면 당시 강서의 몽골군 주력은 광동에 투입되어 있었고 문천상은 그 군사적 공백을 노려 공격했으나, 실패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강서도원수부의 주 전력을 이끌고 있을 타추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아마 광동을 휩쓸고 있던 것 같다. 12월 신유일(1일)에 조진이 광주를 버리고 숨었을 정도면 당시 광동의 전황은 송군에게 재앙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사 주전 열전에서는 당시 몽골군과 송군의 교전 사례가 나온다. 주전은 유기遊騎, 즉 유격기병을 이끌던 중 영성靈星 해석문海石門에서 송군과 조우해 전투를 벌인다. 송군은 강성했지만 주전이 창을 들고 공격하여 북과 깃발을 빼앗고 적 선박을 빼앗았다. 이를 보자면 몽골군은 12월에 광동에 활발히 움직이면서 송군의 전력을 파괴하고 있던 것 아닐까.


근데 시발 영성 해석문이 어딘지 모르겠음. 갓글 검색해도 뭐 제대로 안 나오고, 내가 가진 지도에도 안 보이고. 주전이 광廣 지역에서 벌인 일이니 광 지역 어딘가는 분명한데 잘 모르겠다.


여튼 문천상과 조진은 이때 망명정부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당시 양절 전선은 11월에 이미 파국으로 끝났고 송사 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12월 무진일(8일)에 천주의 포수경이 몽골에 항복하는 등 복건의 남송의 세력이 무너지고 망명정부는 어린 황제를 데리고 바다에 피신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277년 1월에도 강서도원수의 활동은 그치지 않고 광동 곳곳의 항복을 받아냈던 것 같다. 원사 본기에 따르면 1월 계사일(3일)에 도원수의 군대의 진격에 순주가 항복한다. 송사 본기에서도 이는 교차되는 내용이다.


강서에 남은 몽골군도 진격하여 1월 임인일(12일)이 되면 오준이 서금을 버리고 도망가야 했다. 이항이 보낸 진무鎮撫 공준의 공격 때문이다. 공준이 서금에 이르자 문천상은 장주로 도주하고, 공준은 문천상 휘하의 조맹영을 격파하고는 정주를 점령한다. 강서에 망명정부의 송군은 완전히 쫓겨난 것이다.


오준은 문천상처럼 도망가지 않고 정주로 돌아가 몽골군에게 갔다. 그리고 항복한다.


1월 중순에 강서에서 문천상의 송군이 완전히 쫓겨난 후에도 강서도원수는 광동 곳곳의 항복을 받아냈다. 원사 본기에 따르면 1월 정미일(17일)에 매주의 전영지가 항복하는데, 송사 본기에서는 정사일(27일)로 되어 있다. 둘 중 하나는 오기인지, 아니면 원사의 날짜는 전영지가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한 때고 송사의 날짜는 실제로 항복한 날짜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신일(18일)이 되면 조주가 몽골에 항복한다. 당시 남송 망명정부는 조주 남쪽의 갑자문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굉장히 위험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조주의 항복은 일시적인 것으로, 아마 당장 눈앞에 몽골군이 들이닥치자 항복하는 척 한 것 같다. 송사 본기에 항복한 내용 뒤에 곧바로 계축일(23)에 망명정부에게로 돌아왔다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강서도원수의 군대는 이제 광주로 향했다. 송사 본기에 따르면 2월에 몽골군이 광주에 이르자, 조진이 도망간 탓인지 현인縣人 조야강이 성을 들고 항복했고 이어 광동의 여러 고을이 항복했다고 되어 있다.


광주 점령 이후로 강서도원수의 군대가 철수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1277년 강서도원수였던 타추가 강서도 선위사가 되었다가, 선위사를 폐지하고 강서에 행성을 설치하면서 소재지를 공주贛州로 하고, 타추를 행성우승 겸 강서행성사가 임명했기 때문이다. 강서도 선위사가 된 것은 시기가 불분명하나 본기에 따르면 행성우승이 된 것은 7월의 일이다.


3월에도 이후 광동의 지방이 항복한 기록이 있다. 원사에 따르면 3월 임인일(13일) 광동의 조경부肇慶府, 신주新州, 봉주封州가 항복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지방의 항복에 강서도원수가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한 것 같다.


아릭 카야는 평장정사로서 광서를 정벌하고 마무리가 되자 아릭 카야 열전에 따르면 정강부靜江府, 소주昭州, 하주賀州, 오주梧州, 옹주邕州, 융주融州에 군대를 남기고서 철수했다고 되어 있다. 이중 하주賀州와 오주梧州는 광동과 접하는 지역으로 조경부, 신주, 봉주와 인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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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릭 카야가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 언제인지는 열전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참고가 될 것이 본기에 있다. 3월 신묘일(2일)에 광서 정벌을 마쳤기에 광서에 선무사를 설치와 담주로의 복귀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시위군은 쿠빌라이가 있는 수도로 복귀하고, 나머지는 정강, 담주, 악한 등에 주둔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그렇다면 늦어도 3월 초순에 조경부, 신주, 봉주 인근에 몽골군이 광서의 영역화를 위해 주둔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에 더해 호광행성이나 강서의 선무사가 광동의 해당 지역의 수비를 담당했다고 볼 만한 기록이 있다.


사격이 자신의 열전에 따르면 그는 광서의 10개 주, 광동의 3개 주를 점령하는데 싸웠다는 내용이 있다. 이 3개 주가 신주, 봉주 등을 가리키는 것일까? 구체적인 지명은 나오지 않지만 신주, 봉주가 광서와 가까운 만큼 개연성은 충분하다.


원사 사격 열전에 뒤이어지는 내용은 이렇다. 광서 정벌이 완료된 이후 사격은 선무사로서 광서를 관리하던 중 점령지의 봉기가 잇달아 벌어지면서 몽골군은 당혹하고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다. 광서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호광행성측에서도 논의가 있었다. 조경부, 덕경부德慶府, 봉주를 버리고 그곳의 군사를 합해 오주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오주는 아릭 카야가 군사를 주둔시켰다는 6곳 중 하나인 만큼 몽골의 광서의 주요 주둔지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에 사격은 반대한다.


즉 이 내용을 보자면 광서를 정복했던 호광행성이 광동의 행정구역인 조경부, 덕경부, 봉주의 군사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호광행성이 직접 광동의 일부를 점령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던 것일까? 사격이 광동 3개 주에서 싸웠던 기록을 보면 가능성 있다.


그렇지만 강서도원수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확정 짓기는 힘들 것 같다.


위에서 12월에 광동에서 송군과 교전했던 주전의 열전에 따르면, 그는 1277년이 되자 광서의 정강부 공략에 참전하여 그곳에서도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그는 이전에 강서도원수 휘하로 강서 점령에 참여했었고 이후 광동 공략에도 참여했던 이가 광서에 아릭 카야의 군대가 맡던 정강부 공략에 투입된 것이다.


그렇다면 강서도원수의 전력의 최소한 일부는 1277년이 되자 광서 정벌 중인 아릭 카야에게 증원되었다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여기에도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가 없지만, 강서도원수의 전력이 광서로 지원을 가거나 혹 양측이 협력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주전 열전은 그 뒤에 양광兩廣이 평정되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광동이나 광서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묶은 것이다. 이 표현은 광동과 광서 정벌군이 서로 연관되어서 나타난 것일까? 다만 강서도원수 타추의 경우는 단순히 광동만, 아릭 카야는 강서만 평정했다고 열전에 설명하는 만큼 단순히 그가 광동과 광서 모두에 투입되어서 나온 표현일 수가 있다.


결국 강서도원수가 2월 광주 점령 이후로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재구성하기가 힘들다. 철수한 것은 분명하나 그 시기가 불명확하다. 적어도 1277년 전반기에 이루어진 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강서도원수의 전력이 최소한 일부가 광서에 투입된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기, 진로, 과정을 알 수가 없다.


광서를 정벌하던 아릭 카야의 군대가 3월 중순에 조양부, 신주, 봉주의 항복을 받아냈던 것일까? 와전히 확정짓는 것은 몰라도 개연성은 꽤 있는 것 같다. 다만 직접 항복을 받아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이 지역의 투항을 받아낸 이후로 호광행성이 이 지역을 통제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강서도원수의 광동 정벌은 적어도 2월 광주 점령까지는 확실하고, 그 이후 행적은 불명확하나 적어도 광동 전역을 일시적으로나마 제압한 것 같다. 아마 그 때문에 남송 망명정부는 광동의 연해에 머물면서 내륙으로 들어가지 못하다가, 송사 본기에 따르면 5월에야 장세걸의 병력이 조주潮州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 강서도원수의 광동 정벌은 완전한 영역화로 적의 전력을 완전히 파괴하고 대규도 주둔군을 남기기보다는 항복을 받는 것에 주력한 것이 아닐까 싶다.


타추 열전에서 광동 평정과 관련하여 무력으로 파괴하기보다는 외교적인 부분을 강조한 것이나, 조주가 항복하고 나서 금방 망명정부의 편을 든 것, 이후 장세걸이 조주를 차지할 때 딱히 몽골군의 대응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등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이다.


그 동안 문천상을 상대로 하던 좌부원수 이항 등 강서에 남아 있던 강서도원수군은 무엇을 했을까?


1월 복건의 정주를 점령했지만 정주의 전력 일부를 철수시킨 것 같다. 원사 본기에 2월 임오일(23일) 길주와 주무의 성을 허무는 등의 내용 뒤에 정주를 지키던 군마를 서금현을 수비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서금현은 정주와 접하긴 하나 강남서로에 소속된 만큼 후방으로 더 빼냈다는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히는 모르겠다. 일단 당시 몽골군 정황을 살펴보자.


정주를 지키던 군마를 서금현으로 이동시킨 것은 2월 하순이다. 이 당시 광동과 광서 지역은 몽골군에게 한창 제압되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왜나면 위에 언급했듯이 3월 신묘일(2일)에 광서 정벌을 끝냈다는 보고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원정에 동참한 1만의 시위군(근위군)의 복귀를 지시하는 등 일부 전력의 철수와 수비군 주둔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또 원사 본기에서 3월 을미일(6일)에 복건로의 장주, 천주가 항복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송사에 따르면 천주가 항복한 것은 12월의 일이지만, 앞서 복건 전역 글을 쓰면서 내가 짐작했던 것, 즉 장주를 항복 받아 복건 전체의 항복을 받아낸 것을 서술하며 천주 항복도 한 번에 서술한 것이라면, 몽골군의 입장에서 복건 평정이 이때 마무리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복건 공세를 주도했던 동문병은 자신의 열전에서 4월에 그가 임안에서 쿠빌라이를 알현하기 위해 도성으로 이동했다는 내용이 있다. 즉 그는 전선에서 철수한 것이다. 그 외에도 철수 시기는 나오지 않으나 아라칸, 장홍범 등도 쿠빌라이를 알현했고, 카라다이 같은 인물은 양절의 경원부에 주둔한다.


강서도원수 타추가 철수한 것은 시기가 불명확하나 1277년 전반기 중일 것으로 개인적으로 예상하는데, 만약에 굳이 시기를 꼽자면 남송과의 전선에서 대대적인 철수가 이루어진 이 때가 아닐까 싶다.


시기적으로 따질 때 정주의 군마를 서금현으로 재배치한 조치는 이 대대적인 철수 과정과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 끝났다고 여겨서 철수한 것인지, 혹은 결국 황제를 잡지 못하였으니 전선을 축소시켜 방비를 강화시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혹 송군의 태세가 심상치 않아 한 발 물러가 방어를 강화한 것이 아닐까? 내가 보기에는 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실제로 이후 문천상이 전력을 모아 강서에 대한 공세를 펼치긴 한다. 그러나 송사 본기에 따르면 문천상이 매주를 점령하면서 전력을 모으는 것은 3월 중의 일이다. 이에 흥화군을 지키다가 죽은 진문룡의 조차 진찬이 거병해 흥화군을 장악한다. 이후 문천상이 강서로 진입한 것은 4월의 일이다.


즉 서금현으로의 전력 이동은 모두 송군의 공격이나 공격을 준비하기 이전 시기에 벌어진 것이기에 송군의 공격 태세에 의한 철수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오히려 진찬의 흥화군 점검이나 장세걸이 5월에 조주를 장악하고 7월 천주를 공격하여 3개월 간 포위하다가 몽골군의 지원에 물러갔었던 것을 보자면, 복건에 몽골군이 대대적으로 철수하자 송군이 반격할 여력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정리하자면 이렇다.


몽골의 강서도원수부는 1275년 후반기에 강서를 공략해 점령했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으나 소무군과 광동 등 인접한 곳의 항복을 받아냈었다.


그러나 1276년 5월 1일 복주에서 진의중,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 등이 모여 익왕을 황제로 즉위시키면서 강서로는 오준을, 광동으로는 조진을 출병시킨다.


이에 광동경략사 서직량은 남송 망명정부의 편을 들려고 하자, 서직량의 지시에 항복문서를 강서도원수부로 전달했던 양웅비가 광동을 공격해 6월에는 광주까지 장악한다. 이 때문인지 조진이 광동으로 진입한 것은 9월의 일이다. 어쩌면 8월에 장주와 흥화군에 있던 2차례의 반란이 조진의 광동 진입을 늦췄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오준은 6월에 광창으로 가서 주변의 3개 현인 녕도, 남풍, 의황을 점령한다. 이에 강서도원수부는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몽골 조정은 회남의 전력을 강서로 증원할 것을 지시한다. 다만 이 증원은 빨라도 7월 이후에야 이루어진 것 같다.


7월에 오준은 남풍에서 몽골군에게 패배한다. 이때 6월에 구주로 갔던 부탁이 7월이 되자 몽골의 강서원수부에 항복했다고 송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오준이 몽골군에게 패배한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준은 8월에 장세걸의 지원을 받고서 건창군을 점령하려고 했으나 이 역시 몽골군에 의해 저지당하고 패배한다. 동문병 열전에 따르면 장세걸은 양절의 태주에 있다고 되어 있어 이전 양절 방면 글에서 장세걸이 몽골군의 반격에 물러간 뒤 오준의 강서 공격을 지원해준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 적이 있다. 근거가 부족하여 확실하지는 않다.


9월 중으로 광동의 정세게 변화가 생긴다. 조진이 광동으로 온다는 소식에 동완 사람인 웅비가 봉용과 함께 양웅비를 공격해 몰아내고 광주와 소주 등을 수복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양웅비는 광동 전역을 강력히 통제하지 못한 것 같다. 조진은 9월 중에 광주에 진입한다.


그러나 이미 9월에 강서도원수 휘하로 보이는 원수 여사기와 장영실이 광동으로 갈 수 있는 매령으로 진입하고 있어 조진은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광동을 공격한 강서도원수는 이때는 타추로 9월 중 혹은 그 이전에 강서도원수가 교체되면서 타추가 훈련시켰던 회남의 전력이 증원된 것 같다.


강서도원수 타추 등 강서도원수의 주력이 광동을 공격할 때, 문천상은 10월 1일 정주에 가서 10월에 강서에 대한 공세를 펼친다. 이 공세는 멀리는 길주 영풍현에 이르고 공격 과정에서 호응을 받아 전력을 강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세는 강서에 남아 있던 좌부원수 이항이 주도한 방어에 좌절되었다. 영풍현 점령은 일시적인 성과로 곧 지휘관마저 전사하면서 상실하고, 녕도를 점령한 뒤에 그곳에 전력을 모으던 중 몽골군의 공격을 받아 참패한다. 우도를 공격하던 오준은 12월에 서금현으로 철수하면서 강서에서 거의 쫓겨난 형세에 처한다.


반면 광동을 공격한 강서도원수는 커다란 성과를 거둔다. 10월 남웅주에서 웅비와 봉용을 패배시키고 봉용을 죽였으며, 11월에 소주성을 공격해 함락하면서 웅비를 죽인다. 12월 1일에 조진은 광주를 버리고 도망쳤고 12월 동안 강서도원수군은 송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다음해인 1277년 1월 순주, 매주, 조주 등의 항복을 받아내고 광주로 진격한다. 그러나 조주는 금방 망명정부의 편을 다시 든다. 2월이 되자 강서도원수군은 광주마저 점령한다.


1277년 1월이 되면 송군은 강서에서 완전히 쫓겨난다. 몽골군의 공격에 서금현마저 상실하면서 정주로 퇴각하는데 정주마저 몽골군이 점령해버린다. 오준은 몽골군에 항복하고 문천상은 장주로 도주하면서 문천상의 첫 강서 공격은 완전히 종결된다.


그러나 2월 하순에 몽골은 정주의 군마 일부를 서금현으로 배치하는데, 아마 당시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대대적인 철수 과정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강서도원수군이 광동에서 적어도 적지 않은 수가 철수한 것 같은데,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277년이 되자 일부는 광서로 가서 아릭 카야의 광서 공략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3월에 광동의 서쪽 지역인 조경부, 신주, 봉주가 몽골군에 항복하는데, 이것이 아릭 카야가 주도한 호광행성의 광서 공략군이 주체로 받아낸 것 같지만 강서도원수군도 함께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지역은 광서 공략군이 이곳에 주둔군을 남기며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3월 몽골군이 전 전선에서 대규모 철수가 있은 뒤, 문천상은 광동의 순주를 점령하면서 전력을 재정비한 것 같다. 문천상의 순주 점령이 있자 흥화군도 진찬에 의해 송군의 세력으로 넘어간다.


비록 남성 망명정부는 첫 공세에 참패를 겪고 몽골군을 피해 바다로 도망가야 했지만, 몽골군이 황제를 사로잡지 못하고 전력을 크게 철수시키면서(아마 76년에 있던 시리기의 난이 연관된 것 같다.) 남송 망명정부는 다시 한 번 반격의 기회를 손에 넣게 된다.



다음은 광서 방면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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