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칠이 뱅골에 식량원조를 거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두 거짓.. 2차대전 당시 독일 U보트에 대한 파훼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영국의 군함 & 상선들은 보이는 족족 유보트에 의해 격침을 당했었고, 유럽 전역이 독일에게 넘어가고 영국 본토마저 폭격으로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지중해~수에즈 운하를 건너 머나먼 인도까지 식량을 보급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 했음..
게다가 그 당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실론 해전,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에 연달아 패배 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던 뱅골만에 쉽게 접근하기 조차 어려웠음..
(※ 참고: 이러한 전쟁으로 인한 지원의 어려움은 비단 인도 만이 아니었는데, 따라서 일본에 의해 41년 싱가포르가 함락 되었을 때나, 42년 호주의 시드니와 다윈 항이 공격을 받았을때 처칠은 마찬가지로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처칠은 당시 인도 뿐만 아니라, 영국본토 방어, 소련에 대한 물자지원,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황 까지도 계속 신경 써야 했다)
또 처칠에 의해 호주, 캐나다의 식량지원이 거부됐다는 괴담이 있지만, "캐나다"의 경우엔 안전한 보급루트 확보의 어려움과 최소 2달 이상의 긴 운송시간이 때문에 거절된 것으로서, 처칠은 남반구인 "호주"가 더 전략적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였고, 처칠의 요청으로 영연방 소속인 호주에 의한 식량지원이 이루어 졌음..
(Mahesh Dutt, 1944; Ghosh, 1944; N. S. R. Rajan 1944; Mansergh vol III 1971; Mansergh vol IV, 1973 p 358)
그리고 이후 처칠의 간청으로 영국의 해외령과 타 인도 지역에서도 긴급 식량지원도 이루어졌는데, "약 26만 4천톤의 쌀 & 25만 8천톤의 밀과 밀가루 제품 & 5만 5천톤의 귀리" 등이 뱅골에 지원 되었음.. (참고로 당시 식량 1톤은 인구 5.75~8.2명을 1년간 부양할 수 있는 양..), (Famine Inquiry Commission: Report on Bengal (1945), p.54-55)
미국의 유명 사학자 Arthur Herman 은 "처칠이 없었어도 기근은 악화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 하며, "처칠과 그의 내각이 기근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을때, 전쟁에 대한 노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논평 했다.
처칠이 당시 美 "루스벨트" 대통령에 보낸 서한:
"작년에 벵갈에서 심각한 기근이 있었고, 최소한 70만명이 죽었습니다. 군수물자 수송을 줄임으로서, 1944년 첫 9달동안 호주로부터 35만톤의 밀을 인도로 보내도록 지시 했습니만, 이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수송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신 마당에 추가로 부담을 드리기 죄송 스럽지만, "일본"에 대항하는 우리의 공동작전에 인도의 안정적인 상황이 필수적 임을 감안하여 "호주"에서 인도로 밀을 운송하기 위해 더 많을 배들을 할당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 I am seriously concerned about the food situation in India….Last year we had a grievous famine in Bengal through which at least 700,000 people died. This year there is a good crop of rice, but we are faced with an acute shortage of wheat, aggravated by unprecedented storms….By cutting down military shipments and other means, I have been able to arrange for 350,000 tons of wheat to be shipped to India from Australia during the first nine months of 1944. This is the shortest haul. I cannot see how to do more.
I have had much hesitation in asking you to add to the great assistance you are giving us with shipping but a satisfactory situation in India is of such vital importance to the success of our joint plans against the Japanese that I am impelled to ask you to consider a special allocation of ships to carry wheat to India from Australia….We have the wheat (in Australia) but we lack the ships. I have resisted for some time the Viceroy’s request that I should ask you for your help, but… I am no longer justified in not asking for your help )
(출처: 美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전시문서 모음집 "Churchill and Roosevelt, The complete correspodence" 제3권 117페이지)
2. 영국이 인도에 있던 식량을 이동해서 본토로 수탈했다?
이 역시 왜곡된 내용.. 당시 인도국경엔 버마가 있었는데, 버마는 일본군에 의해 이미 점령 된 상태였음.. 당시 일본군은 동남아 현지에서 약탈을 통해 식량을 조달하고 진군을 했었는데, 버마 국경근처의 식량을 안전한 인도내지로 이동시키는 것은 당연한 조치..
이것도 버마 인접 지대인 치타공 지역에 한정하여 이루어진 것임.. (Bayly and Harper (2004), pp.284-285)
그리고 쌀이 주식이 아닌 영국이 쌀을 수탈 할 이유도 별로 없을 뿐더러, 혹자의 음모론에 따라 영국이 정말 인도인을 증오하여 학살하려 했다면 2백여년의 긴 통치기간 동안 왜 하필 운송도 사실상 불가능 한 2차대전 와중에 굳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의문임.. 또한 식량을 뺐다면 영국군 역시 뱅골에서 철수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조치 일텐데, 영군군은 당시 "임팔 전투"를 비롯하여 인도의 최전선 국경에 여전히 남아 일본군의 전진을 막기 위해 계속 싸우고 있었음..
게다가 당시 인도는 무려 250만명이 브리티시 인디언 아미에 자원입대 하여 영국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 했었는데, 영국이 일부러 자기편에 서서 싸우고 있는 인도 군인들과 공장에서 열심히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현지인들을 팀킬 시킬려고 식량을 수탈하여 인위적인 기근을 만들었다..?? 행여나 그로 인해 인도 내부에서 반영주의 라도 커져 폭동이라도 난다면 일본과의 전쟁에선 필패 일텐데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음..
(※ 참고: 전쟁으로 인한 식량난은 영국본토 역시 마찬가지 였는데, 때문에 영국은 1939년 부터 배급제를 시행하고 가급적 개인의 정원이나 시민농원 등에서 농작물을 심어 자급하는 운동을 장려 하였으며, 전쟁초기 계란은 임산부에게만 지급이 되었다)
3. 그럼 벵골대기근의 주요 원인은?
- 첫째, 가장 큰 원인인 자연재해.. ① 1942년 10월 뱅골 연안에서 발생한 사이클론과 이후 발생한 3번의 해일로 "14,500명의 사람이 사망하고, 약 250만의 이재민 발생과 19만 마리의 가축이 폐사 했으며, 곡물과 "경작자, 상인, 소비자"들이 보유하고 있던 식량 재고분도 손실을 입었다고 함.. (※ 해일로 뱅골지역 1,200km2가 휩쓸리고 홍수에 의해 1,000km2 지역이 침수 됐으며, 바람과 폭우로 인해 1,200km2 지역이 광범위 한 피해를 받았다고 함 - Famine Inquiry Commission 1945a p32, 65, 66, 236; Mansergh1971 p357)
② 또 동기간 갈색 점 포자 라는 병충해까지 퍼졌는데, 이로 인해 일부 벼 품종의 50%~90%를 못 쓰게되어 주식인 쌀 생산량을 급감 시켰음..
- 둘째, 인도 지자체간 보호무역.. 당시 영국은 인구 4억 인도를 불과 1천명 미만의 영국 공무원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 1935년 제정된 인도정부법 (The Government of India Act)에 따라 국방과 외교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자치권을 인도 지자체에 이양함.. 여기서 문제가 발생 했는데, 원래 인도는 전통적으로 "중앙정부 통제국가"가 아니였고, "종교갈등"도 뿌리 깊던 나라였음..
뱅골에 기근이 발생하기 직전, "펀자브" (Punjab), "첸나이" (Chennai) 등 힌두교 기반의 지자체들은 자기지역 우선주의 및 보호무역 으로 뱅골에 식량수출을 거부 했고, 이것이 기근의 피해를 가중 시켰음.. (Braund p12 (citing Government of India letter to all Provinces dated 13 February 1943.)) 또한 힌두교 엘리트들은 무슬림이 대다수인 동뱅골에 많은 땅을 소유 하고 무슬림 소작농들에게 임차를 주고 있었는데, 동뱅골에 쌀부족 현상이 발생하자 그 기간동안 쌀거래 통제를 통해 큰 이윤을 취하게 됨..
(※ 참고: 인도대륙은 영국령 시절에도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약 500개가 넘는 토후국들이 존재했고, 영국이 직접통치한 지역은 일부에 불과했다)
- 셋째, 일본군의 버마점령.. 당시 버마는 아시아 최대의 식량 생산지 었고 인도의 주요 쌀 수입국가 였음 (인도전체의 약 15%).. 특히 뱅골은 인도의 서북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버마와 국경을 바로 맞닿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의 다른 어느 지역 보다도 버마에 대한 식량 의존도가 특히 높은 지역이었음.. 일본의 버마 침공으로 버마로 부터 쌀 수입이 불가능 해지고, 설상가상으로 약50만의 버마 피난민 마저 뱅골에 대거 몰려 들면서 쌀 수요는 폭증하고 쌀 가격 역시 69%이상 폭등하게 됨..
- 넷째, 인도 지자체의 행정능력 미비.. 당시 인도는 추정 기반의 후진적인 "통계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비슷하지만), 이로 인해 평균 30~40%의 오차가 빈번했고, 기근때는 오히려 생산량이 증가했다는 잘못된 보고를 올려서 피해를 가중 시켰다고 함..
- 다섯째, 뱅골의 인구과밀과 농업의존 경제구조.. 뱅골의 꾸준한 인구증가로 인한 인구과밀과, 대부분이 농업에 의존했던 경제구조 (1/2 ~ 3/4 인구가 종사) & 세계최저 수준의 낮은 생산성은 뱅골을 근본적으로 빈곤과 기근에 취약한 지역으로 만들었음.. 따라서 버마로 부터 쌀수입이 이루어지 전까지는 한 해 농사를 망치면 수만명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인도의 형국이었음..
(※ 참고: 인구통계에 따르면 1901년~1941년 동안 뱅골 인구는 무려 43%가 증가함 - Famine Inquiry Commission 1945a, pp. 4, 203)
(※ 참고: 뱅골에 속한 "방글라데시"는 현재도 전세계 1천만 이상 국가 중 인구밀도 1위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 여섯째, 전시 인플레이션.. 옆나라 "버마"가 일본에 의해 점령 당하고, 인도 "칼커타" 역시 일본에 의해 폭격 당하는 등 전쟁위기가 고조되자 뱅골은 인도의 어느 지역보다 군수역량이 집중 됐는데, "칼커타" 등 주요도시엔 군수업체에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와 수십만명의 연합군으로 넘쳐 났다고 함.. 임시 비행장 등 군사시설 건설을 위한 대규모 공공자금이 시장에 투입 되었고, 인도의 낮은 생산성이 시장의 높은 수요를 따라 잡지 못하자 결국 "전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곡물가격 역시 폭등 했다고 함.. 이로 인해 정부는 1942년 6월 쌀 가격 고정제를 통해 시중가 보다 낮은 가격의 쌀을 공급하려 했으나, 이는 현지 판매자가 쌀을 재고로 비축 하거나, 암거래 시장에서 거래되는 결과를 초래 하였으며, 수출 금지 정책과 더불어 이후 4개월간은 안정된 가격을 유지 했으나, 10월에 발생한 "태풍과 해일"로 인해 다시 쌀 가격은 폭등 했다고 함..
- 일곱번째, 만연한 부패와 암거래.. 1943년 9월 군대가 나서서 본격적으로 구호활동을 펼치지 전까지 정부의 구호활동과 원조의 영향력은 시골빈민에게는 거의 미치지 않았고, 이는 인도 관료의 부패함이 주요 원인으로 종종 지원받은 물품의 절반정도가 "암거래 시장, 친구, 친척"들 손에 흘러 들어가 사라졌다고 함.. (There was also rampant corruption and nepotism in the distribution of government aid; often as much as half of the goods disappeared into the black market or into the hands of friends or relatives - Brennan 1988, pp. 552, 555, 557; Greenough 1982, p. 169; Famine Inquiry Commission 1945a, p. 75)
4. 기근으로 인한 피해는..?
우선 인도 아대륙은 적도 이북에 위치하여 북부-히말라야 산맥, 중부에-데칸고원이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찜통 형태의 지역이며, 여름철 몬순시즌의 강우량으로 대부분의 물 공급을 의존 하고 있었음.. 그에 따라 농업의 풍흉 & 지역별 가뭄/폭우 편차가 일반적인 모습 이었고, 인도의 높은 농업 의존도 & 인구과밀과 맞물려 기근과 그에 따른 대거 사망은 수천년 인도사의 고질적인 문제였음..
(※ 참고: 기근은 "화학비료, 생명공학"이 발달하기 전인 20세기 초 까지만 해도 근대화 된 유럽에서 조차 그 문제가 완벽히 해결된 것이 아니였음.. 인도 무굴제국 역시 "1630년 데칸 대기근"으로 200만명이 사망 했으며, 조선 역시 "1670년 경신 대기근과 1690년 을병 대기근"으로 수백만이 아사 당함.. 그리고 90년대 북한 역시 기근으로 최소 40만~100만의 국민들이 사망함..)
또 일설에는 뱅골 대기근때 무려 "700만"이 죽었다는 루머가 있으나 터무니 없는 선동이고, 최소 150만~최대 400만 (최근 추정 약 210만)이 사망 했다고 함..
그리고 사망자 중 절반은 식량이 충분히 보급 된 1943년 12월 이후 각종 질병에 의해 사망 했는데, 홍수, 열악한 위생상태, 기후, 오염된 식수, 면역력 악화로 인한 "콜레라, 말라리아, 세균성 이질, 천연두" 같은 전염병 및 수인성 질병에 의해 사망했음..
(Half of the victims died from disease after food became available in December 1943 - See Dyson (1996) and Maharatna (1991) for a review of the data and the various estimates made)
특히 "말라리아"는 뱅골지역에서 질병으로 인한 사망의 가장 큰 주범이였으며, 43년 7월부터 44년 6월까지의 말라리아로 인한 평균 사망자 수는 과거 5년간의 매달 평균치보다 125%가 급증.. 특히 43년 12월달엔 평균 사망자 수의 203%까지 폭증 했다고 함..
(※ 참고: 1918년 스페인 독감 당시 인도는 전체인구의 약 5%인 1,200만~1,700만명 가량이 사망 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재해 피해는 인도 독립 이후에도 "서부 뱅골, 바하르 주, 마하라슈트라 주, 구자라트 주" 등 인도 각지에서 꾸준히 지속 됐는데, 비록 43년 뱅골에서 만큼의 대규모 피해는 아니나, 1967년 인도 바하르 주 (Bihar) 에선 가뭄으로 2,553명의 공식 사망자가 발생 했으며, 2013년 "마하라슈트라 주" (Maharashtra) 에선 가뭄으로 약 1만여개 넘는 마을이 피해를 입었으며, 660명의 농민들이 집단자살 하는 사태까지도 발생 했었음.. 또한 "Times of India"에 따르면 2009년 "마하라슈트라 주"에선 약 45,000명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인해 사망 했다고 보도 하고 있음..
5. 그럼 "처칠 학살설"은 왜 생겼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모든 선동의 시작은 무케르지란 인도의 여성 소설가 때문.. 2010년 자신의 소설인 "처칠의 비밀전쟁"을 발간 하면서 책에 있던 역사적 검증 없는 내용들이 네이버의 유명 나치추종자 유저에 의해 국내에도 선전이 되었고, 그것이 결국 미스터리 방송인 서프라이즈 까지 방송이 되어 마치 사실인 것 마냥 한국 블로그나 유트브 등에 퍼지게 된 것이 원인...
방송에선 역사학자라 소개 했지만, 무케르지는 인도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 했고, 이후 美 렌셀러 폴리테트닉 공대에서 "물리학 석사"를.. 시카고 대학에서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최근엔 "Scientific American" 이라는 美 과학지에서 7년 넘게 에디터로 일했던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경력의 사람이라는 것이 팩트..
(Madhusree Mukerjee is a journalist and author of "Churchill's Secret War. Trained as a physicist from University of Chicago, Madhushree took to Science Journalism and served on the board of editors of Scientific American for seven years)
처칠을 비난하는 그녀는 아직까지도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일으킨 것과 같은 대기근의 원인을 처칠에게서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무케르지 책의 기술은 대체로 당시 인도 외무장관이 었던 "아메리" (Amery) 가 일기에 남긴 "처칠과의 사적인 대화" 에 초첨을 두고, 그를 "인종차별자"로 규명하여 히틀러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음..
(※ 참고: 처칠이 태어난 시기는 19세기로 제국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시 백인들의 우월주의는 어느정도 보편적인 시대상 이었다 - 이러한 예는 흑인을 가장 열등인종으로 생각한 인도의 간디 에게서 조차 잘 나타난다)
(※ 참고: 평소 처칠의 냉소적 이고 직설적인 화법과 그에 따른 인도인에 대한 몇몇 발언은 그를 "인종 차별자"로 인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정치인의 사적인 생각이나 발언이 반드시 정책과 연결되지 않는 경우는 무수히 많으며, 1919년 암리차르 폭동 당시 처칠은 영국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민간인에게 발포를 명령한 "레지날드 다이어" 대령에 대해 1920.07.08 하원연설에서 "이는 영국 근대사에 전례가 없는... 괴물 같은 사건" 이라며 맹렬한 규탄을 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 Derek Sayer, "British Reaction to the Amritsar Massacre 1919–1920", Past & Present, May 1991, Issue 131, p.131)
그러나 이러한 무케르지의 주장은 ① "처칠과 호주에 의한 식량원조 사실"에 의해 완전히 모순적이게 되며, ② 또 그녀의 책에는 "유럽과 아시아 전역이 전쟁 중" 이였다는 사실과 "독일"이란 단어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고, ③ 마찬가지로 인도 지자체간 비협조와 인도관료의 부정부패에 대해선 거의 언급이 없으며, ④ "일본"의 경우엔 오히려 인도의 "반영 민족주의자"와 결부시켜 좋은 동맹으로 묘사하는 등의 편향성을 보여주고 있음..
심지어 그녀가 주로 인용한 인물인 "아메리" 조차 당시 "퀘백 회의" (Quebec Conference)에서 "캐나다의 군사용 선박을 줄여, 인도로 식량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 함을 인정" 했음에도 무케르지는 이러한 사실은 함구 하고 있으며, 가장 큰 아이러니는 ① 처칠이 1943년 10월에 "뱅골에 기근을 종식시켜 줄 새로운 총독"을 직접 임명하여 긴급조치를 취하게 했다는 것과, ② 또 1944년 2월 14일 전시내각에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뱅골에 추가 식량지원 방법을 알아 보라고 명령"
악명높은 나치빠 선동인데 반박해도 반박해도 사라지지가 않노....
이새끼 반박하면 저새끼가 들고오고 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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