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킷 총은 왜 활을 대체하게 되었나? ㅡ 16세기 잉글랜드의 사례.
레딧발 정보글이지만 출처가 명확해서 어느정도 신뢰할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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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머스킷이 활을 대체하게 되었는지는 복잡한 소재고, 워낙 세계적으로 예외들이 많아 딱 이러한 이유라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보통은” 궁병 개개인의 기량이 총병보다 높게 평가된 경우는 없었던 듯하다.
유럽에서 표준이었던 석궁병이 아니라 장궁병을 다수 운용한 잉글랜드의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화기가 보다 구형의 사격 무기들을 대체한 이유로 1)가격, 2)훈련 난이도를 드는 것은 몇몇 지역에서 참일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튜더 잉글랜드에선 사실과 달랐다. 16세기 내내 궁술 훈련을 의무화하는 법제가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고, 주목 장궁 가격은 정부에 의해 통제되었기 때문에 화승총 한 정보다 값쌀 수 있었다.
잉글랜드군의 현대화는 느린 축에 속했다. 잉글랜드군이 처음 화승총을 운용하기 시작한 건 1530년대에 들어서였고, 1544년 헨리 8세가 프랑스 원정을 감행할 때의 잉글랜드 군대 주력은 아직도 전통적인 궁병과 미늘창 중보병의 조합이었다. 헨리는 자신이 이끄는 군대가 기술적으로 낙후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가며 란츠크네히트 용병대 등, 장창과 화승총을 장비한 비싼 외국 용병들을 고용했고, 한편으로는 잉글랜드 징집병들 중 신무기를 다루겠다고 자원하는 자들에겐 비싼 봉급을 주겠다고 공언하였다.
1544년 불로뉴쉬르메르 2차 공성전의 사례를 살펴보면, 성채를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산병전들에서 잉글랜드 궁수들은 프랑스 보병들에게 “화력”이 밀렸다고 여겨진다. 한 웨일스인 장교는 “웨일스인이나 잉글랜드인이 이토록 낙담하고 기세가 죽은 광경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 어느 병사도 적이 핸드건을 쏴대는 근처에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17세까지 궁술 훈련을 받은 후 군에 입대하여 화승총을 지급받은 잉글랜드 병사 험프리 바윅은 “나는 장궁을 쓰는 아군이 특출한 성과를 내었다는 말을 들은 적 없다. 하지만 내가 여러 산병전과 조우전에 참여하며, 아르퀘부스와 피스톨 탄환에 시체가 되어 쓰러진 이들을 본 적은 숱하게 많다.”라며 주장하였다.
전투에 프랑스 측에서 참전한 지휘관 블레즈 드 몽뤽 원수는 전투 초반에는 잉글랜드 군대의 용맹을 두려워하고 존경했지만, 얼마간 산병전이 진행된 후 잉글랜드군에게 겁먹을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원수의 말에 따르자면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 화승총병에 비해 “사거리가 몹시 짧은” 무기들로 무장했으며, “여태까지 본 어느 나라의 군사보다 쉽게” 총병을 이용해 쫓아낼 수 있을 거란 전망을 보였다. 헨리 8세의 전쟁이 끝난 후, 잉글랜드 군대 내의 총병 비중은 갈수록 증가해 마침내 1595년, 장궁이 공식적으로 군에서 퇴출되었다.
16세기 말 잉글랜드 군사학계에서 최대 논쟁은 장궁 대 총의 싸움이었다. 수많은 서적과 책자들이 해당 주제를 다루며 현재 우리에게 당대에 장궁의 장단점으로 손꼽힌 점들을 알려 준다. 존 스미스 경과 토마스 디그스 같은 소수파는 “전통적으로 잉글랜드 무기”인 장궁을 퇴출시키자는 안을 꺼려하며, 크레시 전투와 아쟁쿠르 전투 같은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며 장궁의 효용을 옹호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실전을 맛본 로저 윌리엄스 경, 바나비 리치, 윌리엄 개러드 같은 자들은 장궁을 “민병대의 무장 정도에나 쓸모 있을” 기물로 취급하거나 “화승총의 수효가 부족할 때에만” 같이 운용할 보조 무기로 보았다.
논쟁의 최대 쟁점은 각 무기의 기술적인 장단점이었다. 장궁 폐지론자들은 머스킷 총이 가장 뛰어난 궁수보다 몇 배는 긴 사거리를 가지며, 엄폐물 뒤에서도 보다 쉬이 사격할 수 있고, “어림짐작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산술을 통하여” 겨냥하고, 보다 맞으면 초래하는 피해가 컸으며, “비록 장궁이 더 빠른 사격이 가능한 건 사실이지만 머스킷에도 파편탄이나 한 번에 많은 탄환을 장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로이스 슈워어에 따르면 총기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당대에도 “더 숫자도 많았고, 더 설득력 있었다.”
프랑스와 저지대의 전쟁은 계속 진행되었고, 야전에서 잉글랜드 장궁병의 전과는 계속 지지부진했다. 또 다른 잉글랜드인 로버트 배러트에 의하자면 “전쟁은 화기가 도입된 이후로 대격변을 겪었다. 대포, 머스킷, 칼리버와 피스톨을 이름이다. 몇몇 이들은 활을 존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전의 일상을 겪는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극렬한 장궁 옹호론자인 스미스 경조차 이러한 전과는 무기 탓이 아니라 지휘관의 그릇된 결정 탓이 아닐까? 라며 활을 계속 두둔하였지만, 장궁병이 잉글랜드 군대 내에서 저조한 성과를 보였다는 점은 인정하였다.
이 저조한 성과를 변명하는 흔한 설명은 16세기 말엽 잉글랜드는 “제대로 된 궁수”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총 옹호론자들이 총을 우월하다고 주장할 때의 근거 중 “궁술 훈련도가 날로 감소하고 있다”고 말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는 보통 궁병이 쇠퇴했다기보다는 총이 우월하다는 증거로 곁들여져 말한 것이다. 극렬 총 옹호론자 바윅의 예시를 들자면, 자신 또한 활을 어릴 적부터 배웠음에도 총을 쥐어 주니 고작 4주 만에 화승총 사용법을 터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주장에는 맹점이 존재했다. 정작 옹호론자들이 써먹지를 않았다. 존 스미스 경은 장궁병의 기량이 도태했다는 말을 낭설 취급하며 무시했다. 그는 모든 시대에도 특출하게 뛰어난 명궁은 으레 나타나기 마련이란 사실을 옳게 지적하였다. 더욱이, 튜더 시대인 1545년 난파선 메리 로즈에서 발견된 인골 중 오 분의 일이 어릴 적부터 훈련받은 궁수의 특징인 뒤틀린 골격의 보유자였음도 참고해 볼 만한 정보다. 잉글랜드 궁술을 연구한 스티븐 건은 여러 사례를 종합하여, 궁술 훈련은 서서히 침체되었지만 16세기 동안 느리게 감퇴했으며, 궁병의 기량이 확 떨어지는 변곡점 등은 없었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이때의 장궁 옹호론자들 중 가장 극성인 이들도 화승총 “대신” 활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논쟁은 장궁을 “화승총과 혼용해도 되는가?”의 문제를 두고 일어났다. 로저 윌리엄스에 의하면 스미스 경 등은 “장궁병 가운데 일부만이 훌륭한 궁술 실력을 보유한다면, 그들을 계속 궁병으로 유임시키고 나머지를 화승총으로 무장시켜 운용하자.” 등의 타협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덮어 놓고 장궁을 아예 퇴출시키자는 바윅 등의 극단파가 논쟁의 승자였고, 1595년 잉글랜드 추밀원은 현재 군대에 궁병으로 복무하는 병사 전원이 “화승총으로 재무장하거나, 훈련받지 않은 다른 병종들, 예컨대 공병들과 함께 분류될 것”을 지시하였다.
출처 목록.
1차 사료.
『프랑스의 원수 블레즈 드 몽뤽의 회고록』, 블레즈 드 몽뤽(1500-1577)
『개인이 운용하는 화기의 위력과 효과, 그리고 장궁과 궁술의 장애에 대한 간결한 담화』, 험프리 바윅(1592)
『전쟁에 대한 간단한 담화』, 로저 윌리엄스 경(1590)
『군사를 업으로 하는 자의 전쟁학』, 윌리엄 개러드(1591)
『활 대 총』, 존 스미스 경(1591)
『메르쿠리우스와 잉글랜드 병사의 즐겁고 훌륭한 대담』, 바나비 리치(1574)
『현대 전쟁의 이론과 관습을 대담으로 풀어냄』, 로버트 배러트(1598)
2차 사료.
『장궁과 아르퀘부스 : 근세 잉글랜드의 무기 기술과 기술 교환』, 저베이스 필립스(1999)
『튜더 초기 잉글랜드의 궁술』, 스티븐 건(2010)
『근세 잉글랜드의 화승총』, 로이스 슈워어(2016)
『엘리자베스 시대의 군사과학』, 헨리 주니어(1965)
『르네상스기 유럽의 무기와 전쟁』, 버트 홀(1997)
『활 대 총 주석본』, 원작자 존 스미스 경, 편집자 어니스트 히스(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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