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캐넌은 미 국무부 외교관으로 활동했고, 1933년은 모스크바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46년 캐넌은 유명한 긴 전문 "Long Telegram"을 작성해서 국무부로 보고서를 올려 소련 팽창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다가올 냉전에 대한 선견지명을 보였다.
기자 - 1933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열기 위해서 당신을 파견했습니다.
캐넌- 당시의 우리 상황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16년동안이나 미국은 러시아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했다. 양국 정부간에 어떤 관계도 없었다. 바로 루스벨트가 이같은 교착상태를 깨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내가 루스벨트의 동기를 추정해 본바, 그 동기들 중 하나는 그가 일본의 중국 침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소련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우리가 중국 본토에서의 일본을 견제하는데 러시아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중국 본토 깊숙이 진출한 상황이었다. 일본은 많은 중국영토를 정복했다.
기자 - 루스벨트와 스탈린에 대한 생각은?
캐넌- 나는 전쟁 동안 루스벨트가 러시아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 대체로 비현실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루스벨트가 스탈린 처럼, 엄청나게 전략적으로 영리한 사람을, 매우 악마적인 사람이었다고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진면목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스탈린 뛰어난 연기자였고, 그가 각종 회담에서 서양 지도자들을 만나게 될때, 그는 대단했다 : 조용하고, 상녕하고, 이성적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 결론은 "이 사람은 정말 위대한 지도자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배후에는 매우 다른 스탈린이 있었다.
찰스 볼렌은 내 후임으로 소련대사가 된 사람인데, 그는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다. 그가 내게, 자신이 회담에서 스탈린의 참모들이 지도자가 승인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행동하는 것을 몇번 보았는데, 그러자 스탈린이 그들을 쏘아보면서, 눈이 이글거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렇게 갑자기 스탈린의 내면에 야수의 본능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자 - 스탈린에 대해서는?
캐넌- 그는 매우 자제하고, 매우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손님에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하고, 자리에 앉으라고 친절하게 권했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주의깊게 경청할 줄 알았고, 외관상으로는 매우 이성적으로 그들의 질문에 답변했다.
하지만 한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스탈린은 병적으로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에게 우정을 표현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같은 변태적인 대응은 그를 보러온 외국 정치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스탈린에 충성한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스탈린은 그들을 처벌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대우했고, 그들은 이에 놀아났다. 나는 수많은 서양인들이 그를 만나고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을 들었다 : "글쎄요,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기자 - 냉전이 스탈린의 국내정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스탈린은 자신이 추진하는 일들의 대중적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매우 억압적인 정책들인 경우가 많았고- 그가 인민의 다수, 보통 사람들 그리고 당원들을 설득해야만 한다고 느꼈고, 이를 위한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러시아는 외국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음모에 직면해 있다. 특히 영국 그리고 독일이었다. 바로 이들 외세가 스파이 활동, 소련 산업에 대한 사보타주 등으로 소련 정부를 약화시키는 음모를 진행 중이다.
물론 이같은 음모설에는 어떤 진실도 없었지만, 스탈린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만약 소련인들에게 러시아가 위협받는 국가라는 점을 믿게 만들지 못하면, 소련체제의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다양한 재판을 벌였다 : 샤흐티 재판 [샤흐티재판이란? 1928년에 있었던 최초의 소련의 공개재판이었다. 코카서스 북부의 샤흐티에서 석탄 채굴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자, 소련 당국이 광산 기술자들을 소련경제에 대한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 이들을 공개재판했다], 독일 기술자들에 대한 공개 재판. 이 기술자들 중 한명의 반-소련 행위의 배후에는 영국이 있었다고 주장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세의 음모를 강조하면서, 스탈린은 서양과 좋은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날려버렸다. 왜냐하면 서양이 음모론에 대해서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스탈린의 행동은 서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자는 주장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기자 - 1937년 소련의 대숙청에 대해서는?
캐넌- 나는 3개의 재판중 하나에만 참석했다. 나는 한 재판에 참석한 이후 재판 기록 참고를 통해서, 스탈린이 자신의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 그에게 비밀리에 반대한 자들이라 그가 느끼는 자들 그가 제거하는 중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나는 러시아에서 오랜 경험을 통해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발생한 일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재판정에서 그들을 볼수 있었고, 그들의 창백한 얼굴, 그들의 떨리는 입술, 종잡을수 없는 시선들을 보았다. 비록 고문당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 분명하고, 그들의 가족들로 고초를 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지옥을 체험한 것이었고, 그들은 이 재판이 그들의 인생의 마지막 시간들이라는 점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러시아를 어느정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는 완전히 조작된 사건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이는 재판이 아니었다. 판결은 이미 막후에서 이미 내려졌던 것이다. 당시 재판에 초대받아 참석했던 다른 서양측 참관인들 중 다수가 이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 유감이다.
기자 - 어떻게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테러가 확산되었는가?
캐넌- 키로프 살인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살인 사건은 당시 진행 중이던 어떤 분위기에 대한 대응이었다. 1934년 늦여름에, 나는 스탈린이 불현듯 당중앙위가 자신을 투표를 통해서 공직에서 날려버릴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뛰어난 전술가였던 스탈린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 "음, 동무들, 물론 여러분들 중에 이제 내가 떠날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점을 알고있다. 그리고, 만약 이자리에 있는 분들 중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어찌 그것을 고려하지 않겠습니까?" 이 발언은 동료들에게 대한 스탈린 언어 테러였다. 왜냐하면 그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만약 자기 혼자, "나는 우리가 스탈린 동지의 발언을 받아들이고, 그가 물러나게 해야한다"고 말했는데, 나머지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죽은 목숨임에 다름아니다는 사실 말이다.
기자 - 제2차세계대전 동안의 미국의 소련 정책에 대해서는?
캐넌- 이 시절동안 나는 거의 신경과민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정부가 전시의 필요 때문에 소련에 대해서 양보에서 양보를 거듭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미국 군부는 다음을 주장했다 : "글쎄요. 우리는 개의치 않습니다. 소련에게 그들을 기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주도록 약속해야 한단 말입니다." 미국 군부는 그렇지 않으면, 스탈린이 히틀러와 따로 강화조약을 체결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나는 이것이 현실적인 공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는 이같은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튼, 우리 미국이 내가 스탈린에 대한 품위없고, 환심을 사려는 방법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기자 - 소련의 비타협성을 경고한 긴 전문 "long telegram" 에 대해서는?
캐넌- 워싱턴에 내게 "현지에서 보는 소련 정부의 동기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수 있는가?"를 질문해 왔다. 나는 워싱턴 당국자들이 전쟁 동안 잊었던 사실을 상기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문제의 핵심이란, 소련 당국자들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통해서) 서양을 희생시켜 가면서 히틀러와 거래했었던 자들과 같은 사람들이고, 미국에 대한 소련의 견해는 바뀐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때로 내가 보낸 전문이 워싱턴에서 열정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놀라고 충격받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점에서 위험이 있었다.전문에서 내가 이 전문에서 우리가 러시아와 전쟁을 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더욱 강조했어야만 했다고 후회한다. 전문에서 내가 주장한 것은 러시아와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가 기존에 해왔던 것과는 매우 다른, 러시아를 상대하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기자 - 스탈린과의 타협도 가능했다고 보는가?
캐넌- 물론 오늘날에는 당시에 그랬던 것 보다 스탈린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으며, 현재 우리는 당시에 그가 매우 "방어적" 이었음 deeply defensively minded 을 알고있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고, 나와 미국 우파 및 군부와 가장 이견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 사실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스탈린을 방어적인,신중한 사람으로 보았다면, 미국 우파는 스탈린을 군사적 위협을 통해서 광분하는 공격적인 자로 보았던 것이다.
나는 바로 이같은 관점때문에 매우 심각하고 용서할 수 없는 정책적 오판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러시아는 파괴된 국가였다. 독일이 러시아 산업의 절반을 파괴하고, 건물,철도,도로 등 모든 것을 파괴했다. 당시 러시아는 새로운 전쟁을 도발할 입장이 아니었고,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미국 당국자들은 스탈린이 단순히 빼앗긴 영토를 획복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정도로 영리한 정치인이라는 점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 재점령은 단시 시작에 불과하고,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탈린은 알았다.
나는 전후에 미국 장군들 한명이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글쎄, 만약 우리 미국이 약점을 보인다면, 러시아가 5-6일 안에 장벽을 돌파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장군은 러시아가 그것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때문에 4천만 독일인이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게 될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스탈린은 그들을 통치할 행정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자 - 왜 미국은 전후에 소련을 적으로 간주했을까?
캐넌- 미국인은 전시 경험을 통해서 우리 앞에 거대한 적이 있고, 이 적은 미국에게 해로운 일이라면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 미국의 적이 히틀러의 독일에서 유럽에서의 적인 소련으로 변하게 되면서, 우리는 러시아에 대한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에게는 적이 하나고, 동맹은 다수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적은 완벽한 악마여야 하고, 우리에 대한 모든 악행을 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적에 대한 전시의 극단적인 생각이 평화시에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이것이 바로 냉전의 주요 동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
기자 - 냉전의 종말에 대한 소감은?
캐넌- 봉쇄정책을 입안한 사람으로, 내가 소련의 붕괴에 대해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렇다. 봉쇄의 대안은 소련과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련과의 군사적 충돌에서 어떠한 좋은 점도 보지 못했다. 현대전에서 승자란 없고, 모두가 패자가 된다는 것이 나의 전쟁관이다.
내 생각에, 봉쇄정책은 그것을 이해했다고 믿었던 자들 그리고 그것을 전적으로 군사적 개념으로 오인했던 사람들 때문에 왜곡되었고, 이같은 왜곡 때문에, 냉전이 40년동안 이나 불필요하게 오래 지속되었다고 생각한다.
출처 : An interview with George Kennan
1998년 미국 CNN이 방영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서 조지 케넌이 한 발언들
국무부 하급관리였는데 우연히 올린 보고서가 마셜 눈에 띄어서 초특급 승진한 봉쇄의 아버지
그 시대를 타고난 인물이지
댓글 영역
노잼 - dc App
열등감 쩌네
ㅋㅋㅋㅋ현실ㅋㅋ
이미 몇번 본 글
ㅇㅇ는 갤러리에서 권장하는 비회원 전용
갤닉네임입니다. (삭제 시 닉네임 등록 가능)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