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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레딧 주가 폭등 사례로 보는 '데이터'의 중요성
네이버가 그동안 일본, 동남아에서 쌓아 온 데이터 양과 퀄리티가 아시아 시장에선 레딧보다 가치 있음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이거 생각보다 판이 커지는 거라 일본 대가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기 시작21년부터 같이하기로 했으니 하던대로 협력하면 되는데 이제와서 데이터만 꿀꺽하겠다는 종특 왜구 노략질 발동! (태국) 개인정보 유출했으니까 아 그냥 다 내놓으라고 빼애애애액 떼쓰는 상황'보안이 걱정되면 시발 느그꺼만 쳐먹고 꺼지시고 나머진 우리가 할게' 이런 선택도 고려해볼 수 있는 상황인데 '그분'이 나설 기미도 보이지 않음최악의 상황은 지분값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강탈각 그동안 저지른 짓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보고 있고네이버 입장은 쉽게는 줄 수는 없다는 상황왜냐하면 라인이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 온 '데이터'가 진짜니까시마이
작성자 : ㅇㅇ고정닉
영국군으로 복무한 홍콩인들
홍콩 군사복무단 Hong Kong Military Service Corps (HKMSC, 香港軍事服務團) 중국인들이 영국군에 복무한 역사는 꽤 오래됐다. 1857년 2차 아편전쟁 당시,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인도인 병사들에 대한 불신도가 높아진 영국 원정군이 광둥성에 살던 객가인들을 쿨리로 고용하여 병참부대를 운영했던 것이 시초다. 2차세계대전 때는 수백명의 홍콩인들이 영국군에 협조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일부는 말레이 반도와 버마까지 가서 싸웠다.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냉전이 시작됐을 때, 영국은 더 이상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니었다. 전후복구 때문에 군축은 확정됐고 그동안 키워온 군사력은 줄어들었다. 그 많던 식민지들은 하나둘 씩 독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동의 진주인 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령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중국대륙이 공산화될 것이 확실시되자, 영국 정부는 홍콩방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중 현지 중국인들을 모병하여 전투부대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고, 이것이 HKMSC의 시작이었다.홍콩 영주권이 있는 홍콩인들은 누구나 입대신청이 가능했다. 18주의 훈련기간을 거쳐 '대영제국의 군인'이 되는 순간부터 4년 의무복무를 해야했다. 장기신청으로 최대 22년까지 복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구르카처럼 단일부대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카투사처럼 홍콩 주둔 영국군 각부대에 소대 단위로 배치됐다. 광둥어와 영어가 능통했던 HKMSC 대원들은 영국군이 현지인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소요사태가 많았던 50~60년대에는 HKMSC는 홍콩주둔 영국군의 귀중한 인재풀이었다.1960년대 HKMSC의 총 병력은 약 6,000명에 달했다. (주: 참고로 당시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최대 4~6만명에 달했다.) 이후 중공과의 화해무드가 진전되자 홍콩주둔 영국군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었고 HKMSC의 인원수도 조금씩 축소됐다. 이후 70년대를 거쳐 HKMSC 부대규모는 1,500~1,600명 가량으로 고정됐다.HKMSC는 당대 홍콩경제 수준에 비해 매우 좋은 조건의 직장이었다. 일단 병사들의 월급은 홍콩인들의 평균월급보다 30~40% 더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70년대에 입대한 한 기수는 18주의 훈련을 견디다 못해 일부 훈련병들이 첫휴가 때 나가서 복귀하지 말자고 모의를 했었다. 하지만 수료식과 함께 받게 된 첫 월급봉투에 담김 480 홍콩달러(주: 당시 홍콩 사회초년생의 평균월급이 350 홍콩달러.)를 보고선 'God save the Queen!'을 연창하며 유니언잭에 대한 충성심이 폭발했다고 한다.게다가 홍콩인들에게 영국군의 이미지는 엘리트집단이라는 의식이 강했다.(주: 반대로 홍콩경찰은 부패문제로 인해 인식이 좋지 않았다.) 군병원의 복지수준도 민간병원보다 훨씬 좋았다. HKMSC 전역자들은 금융권 보안업계에서 0순위 스카웃 대상이었다.하지만 이와 다르게 인지도와 입대 경쟁률은 생각보다 낮았다고 한다. 일단 홍콩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계 인구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다. 많은 중국인들은 자녀들이 군인이 되기 보다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길 원했다. 과거 그들이 보아온 군인들, 청나라나 내전기 군벌들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였다. 그들의 눈에 군인이란 사람이 할 짓이 못됐다.그리고 높은 수준의 영어실력도 필요했다. 영국군은 구르카병들에게는 명령을 이해하는 최소한의 문해력만 요구했으나, 현지 통역이 주임무였던 HKMSC 대원들에게는 중급 이상의 언어구사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HKMSC 입대 자원자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영어성적이 높은 이들로 이뤄져 있었다. 보통 이정도 영어실력을 가진 홍콩인들은 금융권 같은 화이트칼라 직업군으로 갔다. 당시 학교 선생들은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사정으로 인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취업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차선책으로 HKMSC에 입대하는 것을 권하곤 했다.HKMSC에 문제가 있다면 훈련시절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홍콩이 워낙 좁아서 군인프라 시설을 많이 확충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HKMSC대원들은 상당수의 주특기 훈련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까지 날아가서 교육 받고 왔다. 일부 성적 우수생들은 사관후보생이 되어 샌드허스트 단기입교 기회도 받았다. 헌병대의 경우 런던 경시청에서, 의무 주특기들의 경우 런던 의과대에서 부검을 실습했다. HKMSC는 홍콩방위 뿐만 아니라 1990년 걸프전에도 영국군 소속으로 소수가 참전했고 키프로스에 PKO 활동을 하러 가기도 했다. HKMSC에 입대한 대부분의 홍콩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복무했다. 영국군 내부에서도 HKMSC에 대한 평판은 꽤 좋은 수준이었다.HKMSC는 1993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새로운 기수를 받지 않았다. 1997년 홍콩반환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이 되자 HKMSC는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일부 대원들은 다른 영국군 부대에 개별로 복무하였으나 이들 역시 1997년 6월 30일, 홍콩주둔 영국군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전부 전역처리 됐다.당시 HKMSC 전우회는 영국법원에 자신들도 구르카병들처럼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했다. 마지막 홍콩 총독이었던 크리스토퍼 패튼도 영국의회에서 '이들도 대영제국에 충성을 바친 이들이니 부디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국적 선발제도(BNSS)에 따라 HKMSC 전역자들 대부분은 이 국적취득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1997년 당해 영국국적을 취득한 HKMSC 전역자들은 15년 이상 복무했던 노병 159명 뿐이었다. 이후로 약 10여년에 걸쳐 HKMSC 전우회는 지속적으로 HKMSC 전역자들의 영국국적 취득 캠페인을 펼쳤다. 하지만 2019년까지 고작 350여명만이 영국 여권을 발급받았을 뿐이었다. 이후 홍콩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영국정부가 이민법을 파격적으로 개정하여 홍콩인들이 영국국적을 취득하는 절차를 간소화해주면서 HKMSC 재향군인들도 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날이 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많은 재향군인들이 세상을 떠났고 상당수는 호주나 캐나다, 뉴질랜드 같은 다른 영연방 국가로 이민을 떠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에서 HKMSC 흔적은 점차 사라져갔다. 이들이 쓰던 부대병영은 헐리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곳은 HKMSC 전우회 말고는 아무 곳에도 없다. 이들의 경력은 현재 중국에서 제대로 된 군복무로 취급되지 않는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일본 역사왜곡 기록 삭제한 윤정부...jpg
https://youtu.be/EMCH053rogM?si=kJOlSsxmbemwaLLM 한일회담 앞두고‥"독도 일본 땅" 기시다 발언 발간물서 삭제 (2024.05.30/뉴스데스크/MBC)정부가 발간하는 한일 관계 현황 자료에서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대한 내용이 대폭 삭제되고 축소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이렇게 개정된 2023년 판은 지난해 한일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발간됐는데요."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했던 일본 기시다 총리의 외무상 시절 발언 기록도 석연찮은 이...youtu.be외교부가 발간한 <2018 일본 개황>에 들어 있었던 '역사왜곡 사례' 항목이 <2023 일본 개황>에서 빠진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빠진 내용을 보충할 생각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지난 30일 정례브리핑에서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올해 일본 개황 자료를 종합적으로 보완하여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라며 "최종본에는 말씀하신 여러 사안들이 골고루 수록될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지난해 3월 15일에 발간한 것이 최종본이 아니었다고 해명한 것이다.지난해 12월에는 국방부가 발간한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에 "독도 문제 등 영토분쟁도 진행 중에 있어"라는 등 일본 측 입장을 반영한 표현이 들어간 것이 문제가 됐다. 그달 28일 국방부는 교재를 회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에 유리한 자료가 발행된 뒤에 논란이 터지면 뒤늦게 수습하는 일이 윤석열 정권하에서 횟수를 더해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일본 개황>, 왜 3월 15일에 공개했을까외교부가 2019년 1월 30일 공개한 <2018 일본 개황>에서는 'PART 6 한·일 관계' 밑의 '6. 참고자료' 편에 '일본의 과거사 반성·역사왜곡 언급 사례'가 있었다. 이 중에서 역사왜곡 망언을 표로 정리한 '역사왜곡 언급 사례'는 258쪽부터 283쪽까지 있었다.그런데 지난해 3월 15일 공개된 <2023 일본 개황>의 'PART 5 한·일 관계' 밑의 '06. 참고자료'에는 과거사 반성에 관한 발언도, 역사왜곡에 관한 망언도 나오지 않는다. '일본의 과거사 반성·역사왜곡 언급 사례'라는 것이 목차에도 나오지 않는다. 2018년에 이어 5년 만에 나온 이 자료에는 한일회담·재일교포·청구권·어업·평화선·문화재에 관한 개략적 설명이 제시될 뿐이다. 한일 간의 식민지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에 과거사에 관한 반성이나 망언이 양국 관계의 주요 이슈가 될 때가 많다. 일본 당국자가 반성의 태도를 보이느냐, 망언을 하느냐에 따라 특정 시기 한일관계의 양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발언들은 한일관계를 이해하는 지표로 작용한다. 1996년 이래의 <일본 개황>이 이런 발언들을 정리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2023 일본 개황>이 공개된 2023년 3월 15일은 전범기업의 강제징용 배상책임을 윤석열 정부가 떠안기로 하는 제3자 변제 방침 때문에 나라가 들썩일 때였다. 그달 6일에는 박진 외교부장관이 이 방침을 공식 선언했고, 그달 16일에는 윤 대통령이 이 방침을 들고 도쿄를 찾아갔다. 그날 윤 대통령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오므라이스를 놓고 러브샷을 했다.2018년판 자료가 2019년 1월 30일 공개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개황을 꼭 3월 15일에 공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임수석 대변인도 위 브리핑에서 "매년 정례적으로 발간하는 외교백서와는 다른 성격의 자료"라며 "작년에 발간된 개황 자료는 부정기적으로 발간된 것"이라고 말했다. 2023년판에 대한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의 상세 설명에 따르면, 이 자료는 공개되기 보름 전인 3월 1일 발행됐다. 삼일절에 발행된 자료를 한일정상회담 전날 공개했으니, 윤석열 정권이 날짜 선정과 관련해 한일관계를 의식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과거사 반성에 관한 발언이든 역사왜곡에 관한 망언이든, 일본의 과거 악행에 관한 발언이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를 찾아가기 하루 전날 공개된 자료에서 이런 발언들이 사라진 것은 이를 거론하지 않고 싶어 하는 윤석열 정권의 태도를 반영한다. 역대 한국 정부와의 차별성을 일본에 보여주고자 하는 의중이 없었다고 보기 힘들다.기시다의 '독도 망언'을 한국 정부가 지우려 하나그런데 자료를 삭제한 것이 꼭 한일관계 자체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2018 일본 개황>의 '역사왜곡 언급 사례'를 읽다 보면, 기시다 총리의 이름이 유난히 자주 등장한다. 이 파트에서 독도에 관한 망언을 가장 많이 한 당국자는 바로 외무대신 시절의 기시다 총리다. 외무대신이 아니라 독도대신이었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그의 독도 망언은 20회나 된다. 두 번째로 많은 아베 신조의 독도 망언은 7회다. 아베와 기시다 중간에 총리직을 수행한 스가 요시히데의 발언은 4회 소개돼 있다. 2위 아베, 3위 스가를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독도 망언이 기시다에게서 나왔던 것이다.2018년판에 나오는 2013년 3월 28일 당시의 기시다는 국회 외교연설에서 "말할 필요도 없이"라는 단호한 표현을 써가며 "한국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하게 전달하고 끈기 있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발언했다.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런 뜻을 한국에 분명히 전달하겠다고 국회에서 다짐을 했던 것이다.2015년 3월 19일 참의원 외교방위위원회에서 나온 기시다의 발언은 상당히 공격적이다. 이날 그는 "독도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히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한국에 의한 독도 점거는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채 이루어지고 있는 불법 점거"라고 비판했다.그는 2017년 3월 29일에는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한국은 왜 말이 없느냐?'라며 한국을 두드리는 메시지를 띄웠다. 이날 그는 '일본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연맹(영토의련)'을 거론하면서 "독도 문제를 한국 측에 제기하고 있으며 영토의련이 공개 질문장을 한국 국정 관계자에게 송부하였다고 설명 받았으나 한국 측이 동 질문장에 회답하지 않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한 뒤 "이 점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이날 그의 발언은 '응답하라 한국이여'로 압축될 수 있다.일본 개황에 소개된 기시다의 독도 발언은 외무대신의 공식 의견이지만, 상당부분은 개인 소신에도 기초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전반적인 정치성향에서는 보수로 분류되지만, 독도와 관련해서만큼은 그 어떤 극우보다도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점이 그의 잦은 독도 망언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해마다 2월 22일에 일본 시마네현이 주최하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중앙정부 대표가 참석하는 관행이 생긴 것은 2013년 2월부터다. 두 달 전인 2012년 12월 26일 기시다가 외무대신으로 취임한 뒤에 일어난 일이다.2013년 3월 2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기시다 외무대신은 극우정당인 일본유신회의 사쿠라우치 후미키 의원으로부터 독도와 쿠릴열도 두 곳에 관한 질의를 받았다. 그런데 기시다는 한 가지에 대해서만 답변했다. 러시아와 분쟁 중인 쿠릴열도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답하지 않은 채 독도를 되찾는 문제에 관해서만 대답을 해주었다.2021년 9월, 스가 요시히데 자민당 총재 겸 총리대신의 후임을 뽑는 선거운동이 있었다. 이때 출마한 후보들인 고노 다로, 기시다 후미오, 노다 세이코, 다카이치 사나네 중에서 독도에 대해 가장 명확한 입장을 피력한 인물은 기시다였다.다른 후보들도 다들 강경했지만, 기시다는 거기에 더해 구체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 문제를 제소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의례적으로 독도 망언을 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계획'을 갖고 망언을 해왔던 것이다.일본발 망언 중에서 한국인들을 가장 크게 분노케 하는 것은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망언이다. <2018 일본 개황>에서는 기시다 총리가 그런 망언을 가장 많이 한 것으로 정리됐다. 독도에 관한 망언만 놓고 보면, 기시다 후미오는 아베 신조보다 한국인들의 미움을 더 많이 받기에 충분하다.윤석열 정부는 기시다의 망언을 대거 삭제한 <2023 일본 개황>을 윤 대통령의 도쿄 방문 직전에 공개했다. 기시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을 악화시킬 만한 내용이 그 속에 많이 들어 있었던 것과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다.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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