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유우사쿠 열전
번역 본: https://blog.daum.net/taja20/5191898
무려 98년도 글로 장장 22년전 글
장문이다 보니 시간날때 읽어보면 꽤나 재밌음
**
1.
현재 홋카이도에 있는 종합경마관광시설 ‘AERU’에는 그랑프리 우승마가 살고 있다.
1991년 아리마 기념에서 종래의 기록을 1.1초이나 단축시킨 2분 30초 6으로 달려 압승한 다이유우사쿠다.
그가 기록한 아리마 기념의 신기록은 그 후 12년간이나 깨지지 않고 지켜지다 지난 2003년 12월 심보리크리스에스에 의해서 깨어지게 된다.
원래 다이유우사쿠라는 이 서러브레드는 이 빛나는 실적만으로는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는 특이함이 있다.
그가 생애 최대라기보다 유일했던 영광의 무대인 나카야마 경마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대다수 팬들의 반응은

“뭐 하려 나왔냐?”
라는 것이었다.
아리마 기념으로 말하자면, 일본경마의 꽃이라고 할 수 있고, 1년간의 중장거리 경마를 총결산하는 경주로써
G1 전선 중에서도 예상 착순에 큰 이변이 없을 만큼 권위가 있는 레이스로써 잘 알려져 있다.
(역주, 사실 아리마 기념은 이변은 적지만, 드라마가 많았던 레이스라는 평입니다.)
그런 레이스에 어떻게 보면 잘 못 끼어 들었다라고 까지 볼 수 있는 그는 이질적인 존재였고,
이 말이 정말로 승부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물며, 그 해의 아리마 기념에는 당시 절대왕자로 일컬어지던 명마 메지로 맥퀸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15두 발주의 14번째라는 끝에서 두번째(booby)인기였던 다이유우사쿠는,
관중들의 비웃음을 사며 출주한 그 레이스에서, 메지로맥퀸을 필두로 하는 수 많은 강호들을 일거에 쳐부수어 버렸다.
그가 저지른 착순 대이변은 사람들의 아연 놀라게 하였고, 그 충격은
“세기말을 터무니 없는 말이 달렸다.”
라고 까지 일컬어졌다.
다이유우사쿠가 달린 아리마 기념은 단순한 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이름은 맥맥히 아리마기념 역사 속에 빛나는 영광과 함께 확실히 새겨져 있다.
그런 그가, 지금은 경주마로써도 씨숫말로써도 싸움을 끝내고, 관광시설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
2.
다이유우사쿠는 1985년 6월 12일 몸베츠의 우준목장(현 대겸목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노노아루코는 세계적인 종마인 Nearctic의 자식이다.
Nearctic의 자마로는 Nothern Dancer 가 압독적인 지명도를 자랑하지만,
노노아루코도 영국 2000 기니이 등에서 G1 4 승을 포함해 10전 7승을 기록하고 있는,
일류말로써 손색없는 성적을 남기고 있다.
수입 전에는 구미에서 공용 종마였던 노노아루코는, 프랑스 2000 기니이 우승마 메이린,
네덜란드 1000 기니이 우승마 게이티즈 (히시아마존의 모마)를 배출하고 있으며,
일본에 수입되고 나서도, G 2를 3승 한 카츠마윙 등 많은 중상 우승마를 배출, 꽤나 성공을 거두었다라고 평가되고 있다.
다이유우사쿠의 모마는 1승마인 쿠니노키요코로, 출산한 망아지중 다이유우사쿠 이외에는 특별히 활약한 말은 들자면,
나고야경마에서 15승을 올린 이복형제말 다이소닉(부마: 카네미노부)가 있는 정도다.
다만 그녀의 모마인 쿠니노하나는 빅토리아 컵(현 엘리자베스 여왕배), 교토 비마 특별 등에서 6승을 거두었기에, 혈통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편.
당시의 우준목장은 목장 방침으로 싼 가격의 종마로 교배해서 영세마주라도 손 쉽게 사 갈수 있는 말을 생산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서,
그 중에서 노노아루코라는 종마는 교배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에 속했었다.
(참고로 씨숫말 즉 종마를 목장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교배권을 사서 목장이 소유한 씨암말에 교배하는 방식입니다.)
쿠니노키요코에 노노아루코를 교배한 것은 우준목장의 사람들이 쿠니노키요코에 대해서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라는 증명이었다.
노노아루코를 아비 말로 해서 태어난 다이유우사쿠는 태어났을 때는 당연히 목장의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어이 너의 아버지는 대단한 말이었다고! ”
태어났을 때의 다이유우사쿠는 장래에 대한 기대를 목장 사람들에게 퍽이나 품게 했던 존재였다.
그의 마체는 밸런스가 잘 잡혀있어서, 가끔 말을 찾기 위해서 우준 목장에 찾아오던 중앙경마의 나이토우 조교사가 눈도장을 찍고,
즉시 자신의 마방이 받아가는 것으로 결정해버렸을 정도였다. 나이토우 조교사는 다이유우사쿠에 대해서
“잘 키우면 준 오픈 언저리 까지는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라고 말했었다.
'싼 말 중에서 그럭저럭 달리는 소재를 발견해 내는 데에 있어서 좋은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라고
평가 받던 나이토우 조교사의 보증은 우준목장에게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드디어 우리 동네에서도 오픈마가...)
하지만, 성장함에 따라, 다이유우사쿠는 목장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 싶었다.
성장한 다이유우사쿠의 움직임으로부터는 경주말로서의 성공을 예감케하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에 가졌던 좋은 몸체의 밸런스 조차 성장함에 따라 점차 악화 되어 버렸던 것이다.
3.
당시의 다이유우사쿠는 서러브레드로서는 상당히 늦게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6월 12일 생인 점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몸집이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체격은 동기의 말들과 비교하면 분명히 열세였었다.
체질도 약한데다가, 허리의 무름마저 심했었다.
추입으로 뛰면 금세 녹초가 되어 몸상태(체조)까지 무너졌기에,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변변히 뒤쫓게 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라고 한다.
출생 전부터 디아유우사쿠에게 기대를 걸었던 당시의 목장장은 실제의 다이유우사쿠가 너무나도 참담해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소 다이유우사쿠를 붙잡아서
“어이, 너의 아버지는 대단한 말이었다고, 너의 할머니도 6번이나 승리를 올렸단다. 너에게는 힌도스탄, 다이코타, 오버비트의 피가 흐르고 있단다.”
라고, 줄기차게 말을했다고 한다.
어떤 말에게도 장점은 있는 법이어서, 당시의 다이유우사쿠는 그런 설교도 싫은 얼굴을 조금도 하지 않고 들을 정도로 얌전한 말이었다.
다만, 그 얌전함 마저 재난이었는지, 다이유우사쿠는 동기의 말들로부터 항상 동료에서 제외 당해서, 쓸쓸히 홀로 지내는 적이 많았었다.
이와 같이, 목장시대의 다이유우사쿠의 평판은 처참할 정도의 것이었다.
마무리도 늦어, 목장에서 트레이닝센터에 무사히 보내졌을 때는 동기의 말들 거의 대부분이 경마장에서 데뷰하고 난 3세 12월 (2세 12월)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이와 같은 다이유우사쿠는 중앙경마에서 데뷰가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무엇보다, 그를 받기로 한 나이토우 조교사는 실제 성장한 모습을 보고

“당했다…. “
라고 한탄하게 된다.
입방 할 때의 다이유우사쿠는 나이토우 조교사가 일찍이 상상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 버렸던 것이다.
자신이 발굴한 다이유우사쿠의 성장을 사뭇 기대하고 있던 나이토우 조교사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내 예상이 틀렸었다. “
라고 이 말을 받기로 정한 것을 빨리도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입방한 다이유우사쿠에게, 사람들의 기대가 모일 리는 전혀 없었다.
더욱이, 다이유우사쿠는 체질이 약해서 다른 말이 먹고 있는 사료가 체질에 맞지 않았었다.
그런 난처한 다이유우사쿠에게, 나이토우 조교사는 입방해서 활약을 시작할 때까지의 잠시 동안, 마방의 사람들이 남긴 잔반을 먹였었다.
다이유우사쿠가 데뷰조차 이루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고 있을 동안,
다이유우사쿠와 같은 해에 태어난 말들은 1988년 숫말 클래식 전선에서 장렬한 사투를 펼치고 있었다.
4.

사츠키 상(G1)은 야에노무테키, 일본 더비 (G1)은 사쿠라 치요노 오가 우승했었다.
더불어 그들의 세대는 강한 세대로 알려져있어, 야에노무테키는 2년반 후에는
천황상 가을(G1)도 우승, 또 봄은 부진으로 허덕이던 사커보이도 4세로 마일 참피온 쉽 (G1)을 압승했다.
하지만, 이 세대 중에서도 정말로 강한 말은 봄 클래식 전선과는 인연이 없었던 곳에 있었다.
카사마츠(笠松)에서 온 괴물 오구리캡은 봄에는 ‘뒷 길’ 이라고 불리우는 중상 레이스에서 다른 말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차로 이기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이윽고 천황상 가을(G1)에서 고마(古馬)와의 결선을 맞이하고,
또 슈퍼클릭은 고장 때문에 휴양을 강요 받아 절치부심했던 봄과는 전연 달리,
국화상(G1)에서 개화의 시기를 맏이하고 있었다.
가을에 들어서서, 그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 화려한 세계의 뒷편에서 다이유우사쿠는 동기들이 엮어가는 사투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 있었다.
다이유우사쿠의 데뷰전은 4세 10월 (원작자는 태어난 말의 나이를 1세로 세고 있습니다. 만 나이로는 3세 해인 1988년 10월이지요.)
교토 경마장 400만엔하전 (본상금 400만엔 이하 말들이 출전하는 경마)이었고
이것은 봄의 클래식 전선에 참여 가능은 커녕 국화상(키쿠가쇼우, G1)을 1주일 앞둔 때였다.
덧붙여서, 다이유우사쿠가 데뷰하던 날, 동경 경마장으로 눈을 돌리자면,
경마 팬들의 관심은 천황상 가을(G1)에서 타마모크로스와 오구리캡과의 격돌에 들떠 있었다.

(얘네가 붙는데 다이유우사쿠따위 누가 보러 가냐고)
후에는 많은 동기의 명마들과 함께 G1 승리마로서 이름을 함께하게 되는 다이유우사쿠였지만,
데뷰전은 별도의 의미로 “평범한 녀석이 아닌” 레이스가 되었다.
강했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동기들로부터 늦어질 때로 늦어진 데뷰전, 최하에서 두번째의 인기로 출주한 다이유우사쿠는
더트 1800미터임에도 불구하고 주파 타임은 2분 06초7 이라는 “정말 대단한” 기록으로 달렸던 것이다.
덕분에 다이유우사쿠는 우승마로부터 13초나 떨어져서 장렬히 패배해 버리게 된다. 결과는 물론 꼴찌였었다.

이 타임의 차는 본래라면, 타임 오버로서 출장정지처분이 내려질 터이지만, 당시에는 데뷰전에 한해서 그 룰이 적용되지 않는 특례가 있었다.
그런 룰에 의해 구명된 후 다음 레이스로는 비공식 개최의 미승리전에 나간 다이유우사쿠였지만,
이번에는 잔디 1800미터에서 2분0초0를 기록한다.
2000미터 에서의 타임이라면 누구에게도 칭찬받을 터일 기록이지만 아무튼 역시 최하위로 끝났다.
결국 다이유우사쿠는 4세 때에는 (3세에는) 이 2전만을 남기게된다.
5.
생애 최대의 위기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전 연속으로 이런 참패로 끝난 말을 잘도 은퇴시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담당마가 잘 달릴지 어떨지에 따라 수입이 변하는 마방원들은 정직하다.
(역주: 이런 결과를 받아들여서 이성적으로 냉혹한 판단을 내려 경주마로서의 생명을 끝내게 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이 때, 어떤 사정 때문에 다이유우사쿠의 담당 마방원이 교체해야 했는데, 나이토 마방의 소속 마방원 모두가 다이유우사쿠를 담당하는 것을 싫어했었다.
결국, 다이유우사쿠는 나이토우 마방에서도 제일 어리고 이제까지 1승마를 한 마리 담당한 했고,
그외 나머지는 모두 미승리마 만을 담당하고 있어서 마방원들로부터는 “미승리마 전문”이라고 불리워지던 마방원에게 강제적으로 배당되어 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약하기도 약한 것이지만 미승리마로 5세 (4세) 가 되어버린 말은 중앙개최의 출주권 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다이유우사쿠가 다시 중앙개최(역주: JRA의 동경, 나카야마, 한신, 교토 경마장 등에서 개최되는 레이스)의 경마에 출주하기 위해서는
로컬 개최(역주: JRA의 고쿠라, 후쿠시마, 하코다테, 삿뽀로 등에서 개최되는 경마)의 조건전에서 1승을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희망이 있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으리라.
이러니 누구도 담당하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한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지방경마에 전입하는 것도, 획득상금이 제로인체로는 받아 줄 사람이 없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시기에는 나이토우 조교사도 다이유우사쿠를 승마용 말로 전출시키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마방에서 다이유우사쿠의 너무나도 투명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왠지 정에 이끌려 버리고 만다.

“좀 더 상태를 지켜 보자구.”
라고 나이토우 조교사가 생각을 고쳐먹은 것은 역시 말(馬)의 덕망 때문이리라.
나이토우 조교사가 다이유우사쿠의 마주인 하시모토 씨에게
도둑 맞고 돈 까지 집어주는 격
“소질은 있을 터입니다. 도둑 맞고 돈 까지 집어주는 격이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모양을 지켜봐 주십시오.”
라고 말해 현역속행을 청한 바램도 있어서, 다이유우사쿠는 간신히 현역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전적을 보자면, 이것은 행운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다이유우사쿠의 마명의 유래는 하시모토 씨가 다이유우사쿠의 어미말의 어비말인 “다이코터”와 자신의 손자의 이름인 “코우사쿠(幸作)“
이 둘을 합성해서 “다이코우사쿠”라고 명명하려했지만, 마명 등록시에 “코(コ)”를 “유(ユ)”로 잘못 읽혀져서 “다이유우사쿠”라고 등록되어버렸다고 한다.
왠지 이런 식의 유래의 편이 다이유우사쿠와 어울리는 것 같다.
손자의 이름을 줄려고 했던 하시모토 씨에게 있어서, 다이유우사쿠도 또 다른 손자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름을 잘못 읽혀져 버렸어도 도리가 없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한심할 따름인 손자다.
하시모토 씨는 품성이 나쁜 손자를 지켜보는 심경으로
“어쩔수 없는 녀석이구나”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다이유우사쿠를 어디까지도 따뜻하게 계속 지켜보았다.
6.
말의 은혜 갚음
이런 너무나 훌륭한 관계자들에게 은혜를 입은 다이유우사쿠는 이기지 않으면 벌을 받을 만한 처지였다.
다이유우사쿠는 5세(4세)가 되고 나서도 시원찮은 전적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해 3전 째, 통산 5전이 되는 니기타 400만 이하에서 돌연 폭주했다.
12주 출전의 10번째 인기로 전혀 인기 없던 다이유우사쿠였었지만, 11번 인기의 2착마를 붙잡고 들어와서, 연승식 316.4배 배당의 만마권을 연출한 것이었다.

(연승식 316배. 역배의 신의 시작)
그 후, 마일에서 2000미터의 거리에서 슬슬 이기기 시작한 다이유우사쿠는,
여름에는 타카마츠노미야 배(당시 G2, 현재 G1)에 출주해서, 메지로맥퀸이 우승하는 가운데 7착으로 패하였지만,
첫 중상 출장을 이루었다. 또, 900만엔하의 히라바 전에서는 한신 경마장 잔디 1200미터의 레코드를 기록한다.
(역주: 경마 게임 위닝포스트 7 상에서는 거리적성 1500~2700으로 1200미터 레이스에서 코스 레코드를 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역시 경마는 게임과 같이 거리적성을 칼같이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죠. 오직 신만이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을 듯 싶습니다.)
“마 이제 다이유우사쿠 점마 잘 달리네!”
이윽고 능력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 진 덕택에, 나이토우 조교사는 아주 신명이났고,
다이유우사쿠는 잔반이 아닌 파란 풀이며, 당근 그리고 클로렐라까지 받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 처우 개선을 얻어낸 것이다.

(잔반처리하던 다이유우사쿠가 맞냐? 다이유우사쿠는 정말 전설이다....)
7.
5세 (4세)의 다이유우사쿠의 전적은 15전 5승으로, 상금은 7000만엔 대 후반을 벌어들였다.
이 시점에서 관계자들에게 일단은 은혜갚음은 끝마쳤다라는 감도 있었지만, 다이유우사쿠가 본격적으로 강해진 것은 아직 훗날의 일이었다.
6세(5세)가 된 다이유우사쿠는 오픈, 그리고 중상전선의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특히 가을의 전적은 눈부실만한 것이어서, 5전에서 토파즈(OP)등 3승을 올렸고, 센토우루S(G3)에서도 3착에 올랐다.
천황상 가을 (G1)에도 도전하였고, 여기서는 7착으로 패했지만, 기승했던 무라모토 기수로부터는
“이정도까지 발전했습니다. 이 이상 바랄게 없네요. “
라고 “칭찬의 말”을 받았다.
그런 다이유우사쿠의 활약은 7세(6세)가 되어서도 그칠 줄을 몰랐다.
새해를 여는 첫 레이스인 교토 금배(G3)에서 톱 핸디의 1위 인기에 답하여, 드디어 염원의 중상 첫 제패를 달성한다.
덧붙이자면, 이 교토 금배는 제 4코너 조금 전에서 안장위의 우치다 기수를 떨어뜨려 기수가 없는 빈 말인 메지로마아샤스와 사투를 펼쳐,
쿠마자와 기수는 레이스가 끝나고
“빈 말도 눌러버릴 기세였습니다.”
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다음 산케이 오오사카 배(G2)에서는 화이트스톤에 이은 2착으로 분발한 다이유우사쿠였지만, 그 후 말 발굽이 터서, 반년간 휴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을에 복귀한 유우사쿠는 아사히CC(G3)에서는 16마리 출주에 7착, 교토 대상전(G3)에서는 7마리 출주에 5착이라는 부진이 이어지지게 된다.
이제까지 오랜 기간 분발해 준 다이유우사쿠였건만 역시 쇠해버린 것인가?
나이토우 조교사를 비롯한 관계자는 연령이 연령이니만큼
“이제 안되는 것인가”
라고 낙심에 빠져 있었다.
8.
도전자들
하지만 다음 출주한 스완S(G2)에서 마음먹고 후방대기 작전을 사용하자,
날카로운 마지막 직선에서의 질주로 (末脚 말각,스에아시; 差し선입, 追い込み추입 같이 마지막 코너를 돌고 나오면서 최후의 직선 주로에서 마군의 후방에서 단숨에 따라잡으면서 역전시키는 주법을 사용하는 각질) 4착에 들게 된다.
그러자 목장 모두가
“단념하는 것은 아직 일러”
라고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다이유우사쿠는 거리가 짧은 편이 좋을지도 몰라.'
'이제까지는 위치가 중위 그룹에서의 경마가 많았었던 다이유우사쿠지만, 나이가 나이이니, 한 순간의 순발력에 거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나이토우 조교사는 다이유우사쿠를 마일CS(G1)에 출주시켜 보았다.
전년도의 천황상 가을에 이은 생애 2번째의 G1 도전이었다.
그러자, 다이유우사쿠는 후방에서 마지막 결승로에서 선입으로 선행마들을 잘도 따라잡아서 강력한 멤버들을 상대로 게시판에 오르는 5착을 기록한다.
이것은 나이토우 조교사에게 있어 예상 밖의 활약이었다. (역주: 당시 레이스에서 1착마를 제외한 2~6착마는 착차가 거의 "코"였습니다. )
다이유우사쿠의 담당 마방원인 타이라씨와 주전기수 쿠마자와 기수는
“웬지 짧은 거리의 G1을 획득하게 하고 싶다.”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어, 상의 끝에 나이토우 조교사에게 스프린터즈 S (G1)에의 출주를 부탁하게 된다.
연령적으로 이것은 G1 최후의 도전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이토우 조교사의 판단은, 그들의 바램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다이유우사쿠의 차주는 스프린터즈S (G1) 일주일 전에 열리는 잔디 1600 미터의 한신 경마장 신장기념 (OP)으로 결정이 났다.
이 레이스에서 이기기는 이겼으나 설마 연투로 G1에 출주시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
다이유우사쿠에게 G1을 획득하게 하고 싶었던 타이라 마방원이나 쿠마자와 기수의 야망은 사실상 불가능해 진 것으로 여겨졌다.
사실은 이 때 나이토우 조교사의 눈은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것을 젊은 두 사람은 알 까닭이 없었다. 그들은 59킬로그램의 핸디를 달고 한신 경마장 신장기념 (OP)을 승리한 다이유우사쿠가,
아리마 기념(G1)에 등록되어져 있는 사실의 의미를 예측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9.
전통을 넘은 행운
이 해의 아리마기념 (G1)은 사츠키상 더비를 무패로 제패하여 클래식 전선을 주도한 토우카이테이오가 골절로 출주가 불가능
고마 최강으로 평가되어지던, 메지로맥퀸의 독무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 한결 같은 예상이었다.
이 해에는 토우카이테이오에 한하지 않고, 고장으로 아리마기념을 회피한 유력마가 속출한 탓에, 출주마의 층은 예년보다 얇아져 있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층이 얇아졌다고 해도, 아리마 기념은 아리마 기념이다.
중상 승리가 교토 금배 뿐인 다이유우사쿠가 팬 투표로 선출 될 리가 없다.
다이유우사쿠가 아리마기념에 출주하기 위해서는 추천위원회(당시)로부터 추천을 받을 필요가 있다.
추천위원회는 다이유우사쿠의 출주의 가부에 대해서, 제법 격론이 오고갔었다.
반대하는 측의 논리는
“이 정도의 말을 내보내서는, 전통있는 아리마 기념의 격이 떨어지게 되지 않겠는가!”
라는 것으로 모아져있었다.
그래도 다이유우사쿠는 아리마 기념에 우여곡절 끝에 추천받게 된다.
이 해 그가 교토 금배에 더해서 전주에서 톱 핸디로 오픈 특별전을 승리한 상태였던 점이 높이 받아들여진 것이 추천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더욱이, 이 해에는 등록마가 적어서, 원래대로라면 풀 게이트가 되지 않는 데다가 다이유우사쿠 마저 떨구어 버리면 출주마 수가 형편없이 적어진다는 사정도 있었다
그렇게 다이유우사쿠는 운좋게 아리마기념에 출주등록이 가능해진것이다
10.
꿈
하지만 아리마 기념을 맞이한 다이유우사쿠의 콘디션은, 나이토우 조교사의 예상조차 뛰어넘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시 한번 같은 상태로 만들려고 해도 불가능한 그런 정도의 궁극의 콘디션이었다.
나이토우 조교사는 아리마 기념을 며칠 앞둔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5번째 패널에 들어 있던 다이유우사쿠는 메지로막크인 이하의 라이벌들을 물리치며, 선두로 골인하는 것이었다.
나이토우 조교사는 조교사는 사서는 안되는 마권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꿈속에서 나이토우 조교사는 환금을 행하고 있었다.
“현금으로 하겠습니까? 수표로 하겠습니까? “
라고 물어보자 꿈속에서 그는
“억 단위의 돈은 아직 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금으로 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여, 나이토우 조교사는 다이유우사쿠와 함께 현금 다발을 말 수송하는 차에 담고서 돌아왔다. 라고 하는 것이 그 꿈의 내용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농담 반으로 친구들에게
“5번째 패널에 들어선다면 우리 말의 단승 마권을 사보게나 “
라고 농담조로 웃고 있었던 나이토우 조교사였지만, 추천선발로 다이유우사쿠가 정말 5번 패널의 8번이 되자, 본심이 되어버렸다.

나이토우 조교사가 어느 정도였었는가 하면, 아리마 기념 당일 탈 기수를 부탁하러 오카베 기수(역주: 심볼리 루돌프에 탔었던 기수 당대 최고의 기수로, 2005년 현재 활약중인 기수중에서 비교하자면 타케 유타카 정도로 보면 될 듯 합니다. WP7 전시대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기수죠. )에게 말을 걸 정도였다.
11.
은근한 야망
그리고 드디어 다가온 1991년 12월 22일, 맑은 하늘에서 제 36회 아리마 기념(G1)당일,
나카야마 메인 레이스의 출주마 이름에는 다이유우사쿠도 있었다.
“이름도 있다” 대부분의 팬에게 있어서는, 다이유우사쿠는 단지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1번 인기로 지지를 얻은 것은 예상대로 메지로막크인이어서 단승 170엔 (1.7배)의 압도적인 인기였다.
메지로막크인은 전년의 킷카상(G1), 이해의 천황상 봄 (G1)을 제패, 더욱이 2개월 전의 천황상 가을에서는 후속마를 6마신 차로 따돌리며 1착 입선하지만,
진로방해 판정으로 18착으로 강착되어 버렸다.
천황상 봄가을 연패는 환상으로 끝났지만, 현역 최강마로써 그 실력은 누구라도 인정하는 바였다.
한편, 다른 출주마를 보면, 메지로막크인에 대항할 수 있다고 여겨진 말은 찾기 힘들었다.
무패이관 토우카이테이오, 킷카상 레오다반 이라는 4세의 양웅은 고장으로 결장하고 있었다.
그 외에 G1마는 네 마리 있었지만, 이래저래 고장에서 회복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지, 거리적성이 맞지 않던지 하는 약점이 있어서,
메지로맥퀸의 우위는 부동의 것으로 여겨졌다.
2번째 인기가 킷카상 4착의 나이스네이쳐였고 그 말의 단승 배당률은 870엔 (8.7배)였다.
이것은 이 해의 아리마 기념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런 메지로맥퀸의 군계일학의 분위기 속에서, 다이유우사쿠를 돌아보면, (팬들이 마권을)“사게 할” 재료는 아무것도 없었다.
출주마 중 유일한 7세마 (6세마)라는 연령, 이제까지의 잘 달린 레이스는 2000미터까지였고,
이전 레이스는 이겼다고는 하지만 마일이라는 거리
로테이션은 가운데 1주를 쉰 상태
가을의 임전 과정은 아사히 cc-> 교토대상전-> 스완S->마일CS->OP특별->아리마기념으로 이어지는 과밀한데다가 거리도 길고 짧고 이것저것이어서
결국 단승 마권 13790엔 (137.9배)으로 끝에서 두 번째의 인기도 당연한 것이었다.
팔린 다이유우사쿠의 단승 마권은 나이토우조교사의 선전에도 관계없이 단승 전 마권의 0.6%에 지나지 않았다.
표창식에 나갈 때를 위해 준비한 정장 차림으로 나카야마 경마장에 나타난 나이토우 조교사는
“선생님, 도대체 어쩐일 이십니까?” = 노인네 정신나갔노?
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었다. (아마도 경마후 결혼예식장이나 장례식에 가야하기 때문에 정장을 입고오지 않았나라고…)
다이유우사쿠의 안장위의 쿠마자와 기수는 이날이 처음으로 나카야마 경마장 원정이었다.
덕분에 그는 경마장에 올 때, 길을 헤매기도 했다.
더욱이, 쿠마자와 기수의 동경경마장에서의 첫 기승은 G1의 오크스 였었고,
그 때 그는 낮은 인기의 코스모드림에 기승해서 우승을 하여 고액배당 마권을 만들어낸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패덕(paddock)에 모습을 나타낸 다이유우사쿠의 몸은 빛나게 윤기가 흐르는 과거최고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묵묵히 활보하는 그의 안에는 숨겨진 투지가 깊히 깊히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것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우마무스메 애니에서 다이산겐이 오오라를 뿜던 이유가 이 일 때문)
12.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는다.
메지로 맥퀸을 위한 레이스.
그렇게 될 터였던 그 날의 전투의 개막을 올렸던 것은 트윈터보와 오오자키 기수의 노도의 도주(逃げ)였었다.
홀로 뛰쳐나오는 하이페이스가 되고나서 최후에는 장렬히 무너지는 식의 경주가 일종의“약속”이라고 까지 불리워지던 개성파다운 언제나와 같은 질주였다.

(그렇다 또 이새끼다)
메지로 맥퀸과 타케유타카 기수는 하이페이스를 무시한 중단에서 대기하며 “왕자(王者)의 경마”에 임하게 된다.
다른 모든 말은 메지로막크인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레이스를 진행하여 위치의 큰 변경이 없는 채로 마군은 진행하고 있었다.
다이유우사쿠의 이름은 불리워지지 않는다.
마군은 이윽고 제3코너를 돌았고, 예견되었던 대로 트윈터보는 이부근에서 순식간에 속도를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전주에서 천황상 우승마라는 이름을 얻은 프리 클래스니가 평가의 실체를 얻기 위해서 에다 기수와 함께 진출을 개시한다.
레이스의 흐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깨닫고, 이윽고 메지로맥퀸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타케 유타카 기수는 쫓는 듯이 앞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다.
……다이유우사쿠의 이름은 역시 불리워지지 않는다.
제 4 코너 부근에서 먼저 선두에 선 것은 프리 클래스니였다.
하지만, 나카야마 스탠드에서 울려퍼지는 대환성은, 프리 클래스니에 향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왕자가 다가왔다.”
그것은 대다수의 팬의 기대대로, 확실하게 올라온 메지로맥퀸을 위한 것이었다.
수수께기의 말을 뒤에 둔체
13.
재팬컵 (G1) 의 4착 패배로 순발력 부족이 지적되어진 메지로 맥퀸이었지만, 이날은 달랐었다.
열심히 후위를 따돌리고 선착하려는 프리 클래스니도 나카야마의 직선의 급한 오르막길,
통칭 “지옥의 벽”에서는 이윽고 다리가 멈추게 된다.
“메지로 맥퀸에게는 지지 않는다. 지고 싶지 않다.”
전주의 천황상 가을에서 6마신차로 2착으로 들어왔지만 1착입선의 메지로막크인이 강착 처분을 받은 덕에
“천황상 승리마”가 된 “굴욕”을 경험한 에다 기수의 마음속의 비명도 허무하게,
힘을 다해 지친 가을의 천황상 말에게,
현역 최강마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가왔다.

“제친다”
누구나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선두의 공방에만 눈길을 주고있던 사람들의 시계에,
그때 메지로 맥퀸도 프리 클래스니도 아닌 한필의 갈색의 말이 끼어들어왔다.
“저 말은 뭐냐? “
그는 그런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단지, 제일 안쪽에서부터 홀로 마군을 돌파해오기만 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탄환과 같은 뻗어감은 프리 클래스니는 물론 메지로 맥퀸도 까마득히 능가하고 있었다.
노란모자에게 조종되어지는 그 말은, 저항하는 프리 클래스니를 지극히 간단히 물리치고 선두에 나왔다.
프리 클래스니를 대신하여 당연히 선두에 설 터였던 메지로 맥퀸은 생각치도 못하게 나타난 자객에게 완전히 걸음새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태세를 가다잡고, 다시 한번 그 말을 따라잡아 보려 목숨을 걸고 쫓아보지만,
달림새의 차이는 역연했다.
도대체 쫓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찰나에 앞으로 튀어나온 다갈색의 말은, 후속을 떨어뜨리고,
순식간에 세이프티 리드를 형성해 갔다.
대관중이 경악하는 와중에 수수께끼의 말은 그대로 골을 통과한다.

14.
이름이 불려지다.
높이 높이 왼손을 하늘로 올린 것은 쿠마자와 기수였다.
세간에 유명한 “앗 놀라운 유우사쿠”다.
다이유우사쿠는 메지로맥퀸을 1마신과 4분의 1의 차로 따돌리고 완승했다.
이것은 아무리 메지로맥퀸이랄지도 어쩔수 없었던 영원한 거리였고,
타임은 2분30초6으로 종래의 이나리원의 기록을 1초1이나 단축시킨 경이적인 레코드였다.
장내는 비명과도 같은 환성으로 떠들썩했다.
다이유우사쿠는 도중 계속 메지로 맥퀸의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트윈터보의 도주로 페이스가 달아 오르고, 트윈터보의 실속과 함께 프리클래스니나 메지로맥퀸이 뛰쳐나오면서 형성된 격심한 페이스를 치고 나온 것이다.
완연한 선입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무한한 스태미너를 자랑으로 여기는 메지로맥퀸이었지만,
이 일생일대의 귀신 같은 내달림 앞에서는 어떠한 저항할 방법도 없었다.
다이유우사쿠의 시상식은 그랑프리인 점을 고려한다면 관계자가 적어서, 다소 적막할 정도였다.
다이유우사쿠의 마주인 하시모토씨는 정말로 다이유우사쿠가 이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 나카야마 경마장에 오지도 않았었다.
하시모토씨는 나이토우 조교사로부터

“최상의 상태입니다.”
라고 보고를 받고 얼굴에 싱긋 미소는 지었지만, 본심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 날 동경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는 딸과 손녀딸에게
“가는 길에 아리마 기념에도 들리렴.”
이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졌지만, 자신은 집에서 텔레비전 관전을 하기로 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마주조차 혼비백산한 세기의 대파란은 이해의 치루어진 경마의 단승식 마권 최고배당률
그리고 아리마 기념 역사상의 단승식 마권 최고배당률 138배라는 부록을 남긴다.
(다이유우사쿠가 남긴 코스 레코드는 깨졌지만 이 기록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깨지기 힘들 것입니다.)

그날 다이유우사쿠의 담당 마방원이 저녁을 끝마치고 다이유우사쿠의 마굿간을 청소하러 왔을 때, 마구간 앞에는 메모와 맥주캔이 놓여져 있었다.
메모를 보니
“다이유우사쿠와 함께 먼저 축배를 올렸습니다.”
라고 쿠마자와 기수의 멧세지가 남겨져 있었다.
쿠마자와 기수와 다이유우사쿠는 둘이서만의 승리 기념을 하며 무엇인가를 얘기 나누었을까?
결국, 이해의 다이유우사쿠는 한해를 시작하는 금배와 끝마치는 아리마기념을 제패하여,
1991년의 중앙경마는 문자그대로 “다이유우사쿠로 시작해서 다이유우사쿠로 끝난” 한해 였다.
15.
커다란 나무 밑에서
이렇게 그랑프리 말이 된 다이유우사쿠였지만, 아리마기념에서 일생일대의 스에아시를 폭발시켜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 탓인지,
8세(7세) 때에는 6전을 했지만, 한번도 게시판에 이름이 오르는 것 조차 없었다.
이 해에 은퇴하게 된 다이유우사쿠는 은퇴후는 하치키 목장에서 씨숫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세기의 단판 승부사로써 이름을 떨친 다이유우사쿠, 생애 단한번의 폭주 후는 여유락락의 종마 생활”이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역시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씨수말의 숫자 과잉, 구조불황, 외국산 말의 대공세… 이런 요인이 겹쳐서 다이유우사쿠의 종마로서의 시작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초년도에는 아리마 기념의 인상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고, 또 하츠키 목장의 선전에도 힘입었던 탓에 13두의 망아지를 확보했었지만,
다음해 이후에는 2마리 1마리 교배수가 떨어져서, 이윽고 교배 자체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하츠키 목장의 관계자는 다이유우사쿠를 보살피는 것을 일생 계속할 생각이었다.
목장으로서는 교배하지 않는 씨숫말은 목초지와 경비가 드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야속한 것들은 입에 담지 않았다.
아리마 기념을 신기록으로 승리한 정도의 말이 노후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라고.
그런 따듯한 시선으로 감싸면서 다이유우사쿠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풀을 뜯으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16.
새로운 세상으로
그런 다이유우사쿠에게 새로운 기회가 다가왔다.
1998년 봄, 홋카이도에 일본유수의 종합경마관광시설 “AERU”가 오픈하게 된 것이다.
그 참에 관광객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다이유우사쿠를 데려가고 싶다라는 요청이 있었다.
“AERU”는 팬이 경주마와 친해질 수 있는 시설이라는 것을 모토로 하는 관광시설이다.
설립당초는 그 일환으로 종마생활을 은퇴한 명경주마의 공로마목장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씨수말로써 성공하지 못해 불우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명마들을 모아서 기른다면,
일본의 경마계의 과제인 경주마의 여생 보증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현역시대의 경주마의 팬들의 관심을 모아 “AERU”에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라는 일석 이조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제1호로써 시발점이 된 것이 다이유우사쿠였다.
이 때에는 다이유우사쿠의 씨숫말로써의 장래는 더 이상 없게 되었었다.
아직 많은 수의 망아지를 생산한 초년도의 망아지 중에서 대물이 배출된다면 부활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만,
지방에서의 활약말을 냈다고 해서, 중앙에서 좋은 성적을 남기지 못한다면 씨숫말로써의 인기는 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중앙경마에 입부한 초년도 생산 망아지로부터는 아비말의 이름을 높여줄 만한 말이 등장할 조짐은 없었다.
그렇다면, 없는 것과 진배없는 2년차 이후의 망아지는 가능성이 너무 낮다.
너무나 낮은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것 보다는, 승마용 말이 되어서라도 많은 수의 팬에게 사랑받는 여생을 보장받는 편이 다이유우사쿠에게 더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다이유우사쿠는 하츠키 목장에서부터 “AERU”에 이적한다.
다이유우사쿠가 “AERU”로 옮긴 직후, 네임플레이트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아서, 방목지에 있는 다이유우사쿠를 보고,
“혹시, 저 말이 다이유우사쿠가 아닌지? “
라고 질문하는 손님이 있었다.
이렇다 할 특징이 있다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 담갈색의 다이유우사쿠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라며 직원은 감동했다.
그 후 공로마 목장 계획은, 제반사정에 의해 대폭으로 축소되어졌지만, “AERU”에 들어온 다이유우사쿠의 처우에는 영향이 없었다.
많은 팬들을 불러 모으는 그의 힘은 “AERU”에 있어서도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후에 동지가 된 니폰 테이오와 함께 현재도 “AERU”에서 여유적적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17.
우리들과 만나기 위해서
씨수말 다이유우사쿠가 남긴 망아지는 후에 중앙경마에서 호우라이컵이 평지에서 1승
그리고 평지에서는 미승리로 끝난 우르란드가 장애물 경기로 이적해서 2승을 올렸다.
하지만, 다이유우사쿠는 그런 것들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현재는 “AERU”에서 여유적적 여생을 보내고 있다.
예전에는 아리마기념의 승리를 전하는 신문에 “터무니 없는 말이 세기말을 가로질렀다.”
라고 쓰여졌던 다이유우사쿠지만, 그는 세기말이 지나 세기초인 현재에도 건재하다.
그런 그의 일은 그곳에 있는 것 만으로 우리들에게 경마의 대단함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혹시 “AERU” 에 갈 일이 있다면,
그와 만나보길 바란다. 목장의 씨숫말들과는 달리,
다이유우사쿠는 우리들에게 만나기 위해 “AERU”에 있는 것이니까.
그는 지금도 안식의 땅에서 천천히 풀을 뜯고 있을 터이다.

(다이유우사쿠가 우승한 91년 아리마기념 영상)
1. 아쉽게도 다이유우사쿠는 13년도에 말에겐 엄청난 장수인 나이 28세로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2. 91년 아리마는 빈집논란이 있었지만 이 빈집도 제대로 못털어버린 맥퀸이 되어버렸기에 유야무야 빈집 설은 사라졌다... 맥퀸한텐 창피한 패배였으니
3. 트윈터보의 대도주는 여러의미로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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