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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숨겨야 했던 천재 과학자...jpg
소련이 숨겨야 했던 인재 세르게이 코롤료프에 대해 알아보자 세르게이 코롤료프(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영어론 Sergei Kololev로 쓰이는 이 사람은 러시아의 과학자로 구 소련의 ICBM 및 인공위성 개발에 기여하고 러시아가 현재 알차게 운용 중인 소유즈 로켓을 개발하였으며 러시아의 우주계획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천재과학자이다. 코롤료프는 1906년 12월 30일 제정 러시아,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러시아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1918 ~ 1920년 사이 러시아는 매우 혼란 스러웠다. 유럽엔 1차세계대전 진행 중이었고 러시아에선 볼셰비키 주도의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한 지라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공립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그 기간동안 코롤료프는 집에서 혼자 독학을 해야했다. 또한 이 기간동안 배식공급도 끊기는 일이 허다해 코롤료프와 그의 가족들은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고 티푸스와 독감 등은 흔히 걸리는 병이었다. 코롤료프는 그럼에도 학문에 매진하여 1924년 키예프 공대 항공공학과에 입학하고 곧 이어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 대학으로 옮겨 항공기 설계공학으로 학부를 졸업한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의 상위권 대학중 하나인 바우만 공대 당시 그의 지도교수는 소련의 유명한 항공기 설계자 투폴레프였는데, 투폴레프는 훗날 소련군의 폭격기와 수송기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러시아의 방위산업체의 설립자가 된다. 졸업 후 항공기 설계국에서 일하면서 그는 취미로 틈틈이 로켓을 독학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의 재능을 알아본 공산당은 그를 소련의 로켓연구소 제트 추친력 연구 그룹으로 전근시킨다. 이 곳에서 코롤료프는 치올코프스키 로켓방정식을 유도해 낸 러시아의 천재 로켓과학자 치올코프스키를 만난 뒤 그에게 큰 감명을 받고 제트추진 연구그룹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치올코프스키는 분사 가스의 속도와 로켓 엔진 점화/연소/종료 시의 질량비가 큰 만큼, 큰 속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치올코프스키 공식으로 수식화하여 최초의 로켓이론을 완성한다.) 치올코프스키 로켓 방정식 제트 연구소에서 일하던 중 1933년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엔진 개발에 성공한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곧 제트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된 코롤료프는 한동안 잘나가는 듯 싶었으나… 그의 승승장구를 시기하던 동료 발렌틴 글루쉬코는 그가 주도한 몇 개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버린 것을 빌미로 1938년 그를 국고낭비 혐의로 고발한다. (그를 국고낭비로 고발한 동료 엔진과학자 글루쉬코 박사) 때마침 운이 지지리 없게도 소련엔 대숙청 광풍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스탈린: "동무,동무는 국가 예산을 부당하게 낭비하고 있소." 체포된 코롤료프는 10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의 수용소인 굴라그로 끌려간다.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감금 되어있는 동안 코롤료프는 치아를 모두 잃고 심장병에 걸리고 와이프가 이혼을 통지하는 등 온갖 고생을 다하게 된다. (굴라그 강제노동수용소의 수감자들.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끌려간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노동만 하다 죽으란 것과 같았다.) 소련 공산당이 자국의 유능한 과학자를 수용소에 처박아두는 동안 나치는 천재과학자 브라운의 주도하에 탄도미사일 V2 로켓을 성공적으로 개발하기에 이른다. (나치의 로켓프로젝트의 책임 연구원이었던 브라운 박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미국이 포섭하여 훗날 미국의 아폴로 계획을 이끈다.) 그리고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하고 2차 대전이 드디어 종결된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우주권을 진입했던 나치의 V-2 로켓은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입장에선 너무나도 매력적인 무기임에 분명했다. 코롤료프를 허위 고발한 동료 글루쉬코는 소련군이 노획한 나치의 V2로켓을 뜯어보고 V2로켓복제를 위한 연구를 반복하지만 제대로 된 복제품 하나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읔고 글루쉬코는 탄도로켓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은 소련에 단 한명 뿐이란 것을 깨닫고 상부에 보고한다. "V-2로켓의 비밀을 완전히 풀 수있는 사람은 코롤료프 뿐이오." 6년 만의 석방, 그리고 로켓과의 재회를 위해 코롤료프는 곧 사면되어 V2로켓을 연구하기 위해 독일로 보내진다 소련의 과학자들 그리고 납치된 나치의 과학자들은 석방된 코룔로프를 중심으로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중대한 임무를 하사받는다. "양키들에게 뒤쳐질순 없다. 우수한 소련제 로켓을 만들라." 코롤료프는 철저한 분석끝에 V-2로켓 카피에 성공하고 곧 이어 개량버전인 R-2 발사에까지 성공한다. R-2로켓은 V-2로켓보다 2배의 사정거리를 보일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실험 속에 여러 번의 실패가 있었고 매 실패마다 코롤료프는 소련 공산당의 협박과 압박에 시달린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1953년 코롤료프는 사거리가 1200km에 달하는 R-5 중거리 로켓 개발에까지 이른다. (러시아에서 아직도 우주비행에 알차게 쓰이고 있는 R-7 로켓) 마침내 1957년 여러 개의 엔진을 하나로 묶는 클러스터링 기술을 활용하여 세계 최초의 ICBM인 R-7 개발에 성공한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 실험 발사된 R-7은 약 6000여 킬로를 비행하여 캄차카 반도의 표적에 정확히 떨어진다. 이 R-7 로켓은 소유즈 로켓으로 개량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로켓이란 “로켓계의 폭스바겐”이란 칭호도 붙었다. 무려 1500회에 달하는 발사기록을 가지고 있다. 마침 같은 시기 미국도 ICBM 계획인 아틀라스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는 중이었다. 이를 알고있던 흐루쇼프 공산당 제1서기장은 코롤료프에게 한가지 제안을 한다. "지금 미국놈들이 로켓발사에 번번이 실패하고 있을 때 우리가 재빨리 저 우주공간으로 먼저 인공위성을 날려봅시다." 몇 달 내로 인공위성 발사가 잡혀있던 만큼 많은 과학자들이 불가능 하다고 여겼으나 코롤료프는 그가 일생을 받쳐왔던 연구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코롤료프는 공모양의 인공위성에 “동반자”라는 뜻의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러시아 로켓과학의 아버지 치올코프스키의 탄생 100주년이었던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싣은 R-7로켓이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비록 승전국이긴 했어도 과학기술력은 아직 미국에 한참 딸린 농업국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우주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미국인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한 예로 당시 1957년 워싱턴DC의 소련대사관에서 열렸던 "로켓과 인공위성" 이란 학술세미나에 전세계에 모였었는데 세미나가 끝난후 열린 파티에서 미국의 로켓과학자들이 소련의 과학자들에게 한 질문을 한다. 미국: "소련의 로켓개발은 어느정도 진척이 되고있나?" 그러다 술에 취한 한 소련과학자가 너스레를 떤다 소련: "아주 조만간 우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거다." 미국: "아주 조만간이 대략 얼마인가?" 소련 "일주일? 길어야 한 달안이다." 이 말을 들은 미국의 과학자들은 전부다 코웃음 쳤다. 농업국가수준인 소련이 어떻게 미국을 앞지를수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스푸트니크 발사 당시 뉴욕타임스의 기사) 이를 두고 "스푸트니크 쇼크"라부르는데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무시하던 소련이 이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주에서 핵무기를 떨어뜨릴 수 있게되었다며 큰 충격에 빠졌다. 그 후 거듭된 연구로 많은 데이터를 축적한 코롤료프는 불과 6개월 뒤인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을 태워 세계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낸다. (세계최초로 인류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아가다. 미국인들은 또 한번의 충격에 빠진다.) 소련에게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타이틀을 뺐긴데다 세계 최초 유인우주비행사 타이틀까지 빼앗긴 미국은 허둥지둥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세운다. (케네디는 부랴부랴 유인 달탐사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그리고 1960년대 끝나기 전에 달에 인류를 보내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케네디: 우리는 달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소련도 대단했지만 미국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기어코 1969년, 모두가 불가능할거란 유인 달탐사에 성공함으로써 소련을 앞지르는 발판을 만든다. (닐 암스트롱의 명언 "개인에겐 작은 한걸음이지만 인류에겐 위대한 도약이다") 그 후 소련은 달 탐사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소련의 유인 달 탐사 프로젝트에도 코롤료프는 핵심연구원으로 투입된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의 지나친 재촉과 업무 압박과 과로에 시달리던 코롤료프는 1966년 온 몸에 퍼진 악성 종양을 제거 받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나 수술 중 핏줄이 터지면서 큰 출혈이 시작되고 수용소에서 감금 당시 약해진 코롤료프의 심장은 금새 무너졌다. 인공호흡 또한 수용소 시절 부러진 턱뼈로 인해 불가능했다. 결국 1월 4일 소련의 로켓과 우주개발을 이끌었던 천재 과학자는 숨을 거둔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공산당은 이러한 천재과학자가 살아있는 동안 외부에 알려져 기술이 새어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소련의 우주개발에 위협을 느낀 CIA가 여러 차례 코롤료프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기에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이러한 결정을 내린다. "그는 소련의 영웅이다.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아선 안된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존재는 비밀에 붙쳐졌다. 그는 소련의 위대한 과학자이자 우주시대 개막의 아버지였지만 정작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죽어서도 그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고,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되서야 그의 업적이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이 흐룬 후 러시아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모스크바 근교의 도시에 그의 이름을 붙혔다. (러시아의 도시 코롤료프) 코롤료프는 미국의 브라운, 중국의 첸쒜선과 함께 소련을 대표하는 로켓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각각 러시아, 미국, 중국 우주개발의 핵심이었던 천재 과학자들. 코롤료프, 브라운, 첸쉐썬) 현재 러시아에선 그의 업적을 기려 그의 얼굴을 넣은 다양한 우표를 발행 중이다. 사후 그는 성대한 장례식 후에 소련의 국가영웅들만 뭍히는 크렘린 광장 벽무덤에 "무한한 에너지, 강철과 같은 의지, 끝없는 상상력을 겸비한 로켓공학자"라는 찬사와 함께 안치된다.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중요) 윤명진 던파 복귀 이유 feat 넥슨 2분기 IR 자료
- 관련게시물 : 블라인드) 금강선, 윤명진 사내평가....JPG- 관련게시물 : 평사원에서 CEO로 "게임업계 이명박", 윤명진윤명진 던파 복귀 이유를 2분기 넥슨 및 던파 IR 자료 중점으으로 분석해보려 함https://ir.nexon.co.jp/en/ 여기 가면 IR 프레젠테이션 자료 다운가능(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dnfqq&no=8153772) 1분기 IR 자료 분석 참고하셈/일단 제일 주목할만한게, IR 자료 제일 첫장, 현재 넥슨의 1순위 우선순위가 중국던파의 흥행임.뒤에 자료를 보면 나오겠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 가장 대목인 1분기 중국 매출은 곤두박질 쳤고,작년말 - 현 2분기 까지 중섭에서도 수많은 패치와 이벤트가 있었지만 선계 직후인 작년말의 중국던파 유저이탈 이슈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것 같음환율이슈는 제외하고도, 예상했던대로 1분기 매출은 YOY 대비 30퍼센트 가까이 추락했고 던파는 1분기가 가장 대목이기에1분기 영업매출이 빠진 폭만 봐도 올해 중국던파 매출은 작년대비 10% 하락한게 확정인 상태임.사실 중국던파도 그렇게 한국던파도 그렇고 현재 인게임 경제상황은 최악이라고 분석되는데 (오늘자 던파꾼 골드 시세 670 선계이후 꾸준한 하락세)그 과정에는 성장이 유의미한 게임의 동력이 되지 못한게 크다고 봄.중던도 현재 3월즈음부터 한던과 동일하게 성장할인 90% 이벤트가 진행중이어서 현재기준으로 성장만으로 재화를 소모시키는건 힘든데설령 이벤트가 끝나고 성장비용이 복귀된다 한들, 한국 빨강돌 유기 이슈에서 예견가능하듯이 성장메타는 주차를 하는게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것이고오히려 성장비용의 부담으로 플레이 인식이 떨어질 가능성이 큰 상태. 진퇴양난이라고 봄2분기에는 사실상 중국던파 업데이트에 신캐 말고는 큰 이슈가 없기때문에 본질적으로 던파 부진의 문제인 경제불안정 이슈는 해결이 안될것 같지만신캐 프로모션과 여름이벤트 (+ 넥슨 이벤트) 가 동시에 진행되면 작게나마 반등을 노릴 수 있을것 같음 장표상으로 6월부터는 여름이벤트가 진행되고 7월초에 정규업데이트가 나올것 같은데앞서가는 한국 던파가 6월 말쯤에 디톡스로 주요 업데이트를 발표할 일정이니 디톡스에서 보여주는 이번 여름 신규컨텐츠와 구조개선및 앞으로 메타에 대한 개발자 인식 가 상당히 주요한 이슈가 될 것 같음.혹자는 7월에 여름업데이트하면서 리셋을 할 것 같다고 하는데, 시기상 이번여름에 리셋하는건 말이 안되고(악수이긴 하지만) 한번더 에픽로드 같이 성장메타에 대한 완화이벤트를 해서 신규유저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안개신, 깨어난 숲에 진입할수 있도록로드맵을 짤 것 같음 (그 후 나벨이후 새시즌 빌드업)일단 던파 IP만 보자면, 중국던파 모바일은 성공적으로 런칭을 마쳤고장표에서 대놓고 카잔과 오버킬을 보여준다는건 나머지 IP 들도 어느정도 개발을 마무리 한 단계라고 보임.다만 카잔은 명확한 BM이 존재하는 RPG가 아니라 소울라이크류이기에 유의미한 돈줄이 되기는 힘들것 같고 오버킬도 원작 던파를 뛰어넘는 매출을 기대하기는 힘들것으로 보임IR자료 참고해보면 위짤이 어느정도 신빙성이 생기는데결론만 말하면, 현재 중국던파는 위기상황이기에 대표이사가 디렉팅 해서 진두지휘 한다고 보면 됨 ㅡ그런데 대표이사라는 자리가, 그 어떤 회사를 가도 직접 프로젝트를 디렉팅 하는 자리가 되면 안될 뿐더러,윤명진은 던모 카잔 등등 너무 많은 프로젝트에 실질적으로 관여하고 있고현재 던파 인게임경제 이슈가 박살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성장메타 설계 미스로 ex) 무골베 5만, 파죽마 3억 등, 유저가 성장에 투자한 비용의 가치를 한없이 절하시켜서 성장동력이 사라진 것인데. 그 디렉터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면 신뢰가 생기기 힘들것 같음.ㅡ디톡스때 윤명진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하반기 업데이트 로드맵을 지켜보고 목소리를 더 내보는것도 좋을 것 같음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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