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가 그랜드파이널에서 최약체로 평가받고 있다는걸 알고 있다. 오래 생존했었던 것도 아니었고 플레이에 임팩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강철의 멘탈술사, 블랙가넷 TOP3 최연승'
'뛰어난 정치플레이와 지배력을 가진 게임의 법칙 준우승자 김경란'
'카리스마로 연합을 주도하며 게임을 이끌었던 임윤선'
'창의적인 9승 전략을 보여주고 정리해고에서.....

뉴스 기사 창을 껐다.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 내 수식어는 뭘까? 서울대 출신? 멘사? 공대녀? 고등학생을 가르쳤던 중학생??

'하아....'

아마도 시즌1 출연 당시의 소개 수식어랑 판박이겠지. 난 병풍 출신이니까. 당연히 지니어스에서의 활약 관련해서는 쓸 말이 없을거다. 결승에서 결합 좀 맞춘거? 정리해고에서 인턴 들고 상위 직급인척 한거?

그랜드파이널에서 내 역할은 뭐지? 똑똑한 플레이어들의 발판? 시청자에게 눈요깃거리가 되어줄 꽃병풍?

난 누구 대신 섭외됐을까? 조유영? 박은지? 이다혜? 성규? 은지원? 하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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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제 귀족 된 거죠."

사형수가 나에게 왔었다. 잠시 섬찟했어. 표정을 잘 숨겨서 다행이야. 좀비게임 때처럼 멍청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제일 데스매치 못할 것 같은 사람을 고르고 기억력 게임이나 결합이 나오기를 신에게 비는 수밖에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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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 1회전 '활약'을 칭찬한다.
표정연기 하고 사형수를 다른 사람한테 넘긴거, 그거 하나가 활약이라고?
카드 뒷면 문양의 보석을 이용해서 카드를 구별하는 거라든가, 불멸의 징표 힌트를 보고 위치와 비밀번호를 알아낸다든가, 블럭의 무게를 직감으로만 구별해내기.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이런게 지니어스 내의 활약 아니었나?

나에게 있어선 이런 것도 활약이구나. 내가 사람들에게 평가되는 모습은, 딱 이 정도인거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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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연합이 강해지는게 싫습니다."

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오늘도 살았다.
최소한 나는 3회전까지는 살아있다. 이 사람들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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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애."
"...확률은요?"
"한 70% 정도?"

멍청한 실수 때문에 죽을 뻔했구나.
30%에 걸리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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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전, 충신과 역적.

9265.

"원주율 맞구나!"

사람들이 환호한다. 아마도 충신일 사람들이. 나도 충신인척하고 열심히 환호했다.

"근데 원주율인거 알면 뭐해?"
"그러게, 원주율은 보통은 3.141592 정도만 외우지 않나?"

내 머릿속에 그간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난 그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 적이 없었지. 사형수 카드를 넘겨줘도 뒤탈이 없는 사람이었고, 멍청하게 칸을 헷갈려서 탈락할 뻔한 사람이었고, 호구같이 높은 가격을 내서 천원 연맹에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면 그것만으로 족한 역할의 사람이었다.

나도 병풍이 아니고 싶다. 도움이 되고 싶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내가 뽑은 카드가 역적 카드만 아니었다면....

"나.... ....원주율 100자리까지 알아요."
"뭐?"
"왜?"
"정문이가 원주율 백자리까지 외운대."

사람들이 나를 놀란듯이 쳐다본다. 내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제 역적들은 끝났네."

똑똑한 플레이어들은 자기들끼리 전략을 짜러 방으로 들어간다.

"정문아 여기 노트에 원주율 니가 아는데까지 적어와 줘."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노트에 원주율을 적는다.

"삼쩜...일사일오구이........"

나 뭐지? 왜 혼자 이러고 있는거지? 오현민이 원주율을 알고 있었어도 이렇게 혼자서 노트에 원주율을 쓰고 있었을까?

더럽고 치사해도 어떻게든 살아남을거다.

"육오삼오...팔구칠구..."

사람들이 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가서, 사람들이 날 필요로 할 정도로 오래 살아남을거다.
바퀴벌레처럼!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거야.

"삼이삼팔...사육이육........."

최약체 취급을 받지 않을 때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