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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리뷰?/긴 글 주의) 더 넓은 세상을 위한, 유방암과 짝사랑

m(61.255) 2016.10.01 10:00:03
조회 4011 추천 218 댓글 62




미친듯한 길이 주의.........








젠더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자면, 혹자는 남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도 한다. 이 명제의 참과 거짓은 일단 차치해두고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경위를 생각해보자면, 사람은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일 테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고, 아파 본 사람만이 명의가 된다는 말이 있고, 불경일사 부장일지(不經一事 不長一智)라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자신이 이해 가능한 삶의 스펙트럼이 있고, 그 너비는 꽤 고유한 것이어서, 너와 내가 다른 것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이 스펙트럼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이화신이 유방암에 걸리는 것은 가장 주제의식이 명확한 설정이다. 생물학적으로 유방은 남녀 모두에게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며, 대다수의 수컷들은 본인의 가슴을 절대 '유방' 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대다수(혹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에게만 발병한다고 알고 있는 유방암이 남자에게, 그것도 남들보다도 더 유달리 남성성에 집착하던 이화신에게 발병하는 것은 이화신의 고유한 스펙트럼, 즉 삶에 대해 그가 견지하던 이해의 범주를 완전히 깨부수는 사건이다. 그는 사회생활은 물론이며 남녀관계에서도 남성적인 것이 우월하다 믿었고 그래서 굳이 여성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던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명백하게 남성우월적이다. 간혹 극단적인 마초들이 그렇듯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꺼려하거나 여성의 커리어를 평가절하하고 업신여기지는 않지만, '여성의 일' 에 대한 그의 인식은 사실상 '여건이 안 되면 얼마든지 그만두고 선 봐서 시집이나 가도 되는' 정도에 머물러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표나리의 일기예보를 꾸준히 지켜봐 왔고 그녀가 장단음 딱딱 지켜가며 명확한 어조로 예보하는 것을 높게 사기도 하지만, 동시에 표나리가 방송 사고를 낼 때면 "그러니까 내가 선 봐서 시집이나 가랬지!" 하고 소리지르는 것 역시 그의 본심이다. 힘 없는 기집애가, 윗사람들에게 혼쭐이나 나 가면서, 굳이 애써 이 정글같은 회사에서 버텨낼 필요가, '여자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멜로의 측면으로 넘어와서, 이화신은 그 전까지 짝사랑이나 질투의 감정을 몰랐던 인물이다. 사실 이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장르에서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설정이다. 모 대중가요 가사처럼 '여자는 알았어도 사랑은 잘 몰랐' 던 남자 주인공들은 많다. 생물학적 나이는 잔뜩 먹었어도 일생일대의 진실한 사랑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남자들은, 일종의 드라마적 클리셰다. 하지만 이화신의 사랑은 이와 유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하고 있다. 그건 이 드라마가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을 기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화신이 이제껏 그 '깊은 사랑' 을 몰랐던 이유는, 주변에 여자가 없었기 때문도 아니고 본인이 여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도 아니다. 까놓고 말하자면, 남성적인 것이 유리하다고 믿는 잘난 마초에게 연애는 그저 '남자' 의 입장에서 나 좋다는 여자를 취사선택해 만나는 것에 가까웠을 것이라 충분히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화신에게 애끓는 짝사랑의 경험이 없는 것은, 그가 짝사랑할만한 여자를 못 만나서가 아니라, 스스로 짝사랑하는 약자의 입장을 거부한 것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동안 이화신은 남성으로서 자신이 머무르는 세계에 만족했고, 그 시각을 넓히려는 시도를 굳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표나리를 짝사랑하게 된다. 표나리를 사랑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유방암 때문은 아니지만, 자신이 유방암 못지 않게 자존심 구기는 '짝사랑' 을 하고 있다는 걸 납득할 수 있었던 건 유방암의 공이 크다. 예전의 이화신이었다면, 나한테 관심 없단 여자 따위 쿨하게 접어 던져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았을 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유방암 수술 이후의 이화신은 기꺼이 그 체면 구기는 짝사랑에 온몸을 던진다. "뭐든지 다 해줄게, 사귀자" 고 표나리의 사랑을 구걸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화신의 이런 변화를 '일생일대의 인연을 만나서' 와 같은 이유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화신과 표나리 사이에 둘만 모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있던 운명의 끈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표나리가 세상에 둘도 없는 너무나 특별한 여자여서 이화신이 표나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온 우주를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도 아니다.(물론 나리는 특별하다!) 그저, 이화신은 자신의 병을 가장 먼저 알아봐주었고 그 병 앞에서 기꺼이 조력자이자 공범(?)이 되어준 살뜰한 여자에게 반했을 뿐이다. 그 여자의 아이스크림 같은 부드러움과 아름다운 마음과 해사한 웃음에 마음을 홀딱 빼앗겼을 뿐이다. 특별하지만 흔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화신은 사랑을 배워나간다. 과거의 염문설을 성가셔했던 그가 이제 자신의 짝사랑을 사내에 동네방네 소문 낸다. 3년 전에는 미처 몰라봤던 표나리의 마음을 한탄스러워하며 오밤중에 깡통을 찬다. 누군가의 조건 없는 관심과 사랑이 실은 성가신 것이 아니라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처음으로 짐작이라도 해 봤을 테다. '이화신이 표나리를 짝사랑한다' 라는 가십거리 하나가, 자신에게는 '기자님 화이팅!' 으로 돌아오는 그 별거 아닌 소문이, 주어와 목적어가 바뀌었을 때에는 얼마나 더 잔인했었는지도 어렴풋이나마 눈치챘을 지 모를 일이다. 3년 전에 표나리가 자신에게 품었던 마음은 지금 애가 닳아 죽을 것 같은 자신의 마음과 매한가지였을텐데, 동료들은 그 마음을 '예쁜 여자, 돈 많은 여자 질릴 때 한 번 데리고 놀' 아도 될 것으로 치부했다. (물론, 3년 전에도 이화신이 그 말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이제 이화신은, 짝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게 웃음거리로 도마 위에 올라가서는 안 될 것이라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된다. 이건 적어도 3년 전의 이화신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 굳이 무슨 빛깔인지 명명해서 자신의 스펙트럼에 넣으려지 않았던 감정들이다.



그래서 이화신이 "3년 전에 이 말을 했었다면 어땠을까. 미안해. 너무 늦게 알아서." 라는 예고의 대사는, 늦게 알은 그것이 3년 전 표나리의 짝사랑이든 표나리의 아나운서에 대한 꿈이든 상관없이 값지다. 그만큼 이화신이 세상을 보는 화각이 넓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고는 언제나 낚시성이 짙으므로 저 대사의 의미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궁극적으로 이화신은 아마 둘 다 미안해할 것이다. 표나리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표나리의 꿈을 알아주지 못한 것도. 한때는 좀 수선스럽게 느껴졌던 표나리의 사랑이, 어린 애가 그린 '사랑해요 표나리' 그림조차 지나치지 못하고 다 사들여 벽에 붙여 놓고 들여다봐야 할 만큼 진지하고 애끓는 마음과 같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배웠기 때문이다. 한때는 그냥 고생하지 말고 때려치우고 시집이나 가라 싶던 표나리에게도 자신과 다름없는 꿈이 있다는 지극히도 당연한 사실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병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통해 사람을 배울 것이다. 


인생은 언제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지리멸렬한 경험들을 통해, 대체로 자신이 겪어본 만큼만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스펙트럼에 교집합이 있다는 뜻일 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내가 알아보는 빛깔들을 너도 알아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서로의 빛깔로 서로를 칠하는 일들일 지도 모른다. 빨간 빛을 빨간 빛이라 부르는 사람과 빨간 빛이라 부르지 않는 사람 간의 간극은, 무한히 넓기 때문이다. 이화신이 표나리를 통해 매일매일 더 넓은 세상을 보는 삶을, 기원해 본다.







출처: 질투의 화신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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