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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꼴갤 문학] 늙은 허용투수의 슬픔모바일에서 작성

SMai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7.28 10:00:02
조회 3389 추천 48 댓글 11



7월 22일

사직구장은 언제 와도 즐겁소. 시원한 청록의 그라운드는 아무리 계절이 바뀌어도 항상 잘 가꾸어지고 구김도 없어 덕아웃에 앉아 바라볼 때면 마치 신호등이 영원한 초록불로 빛나는 것처럼 여겨져 나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한없이 달리고 싶은 황홀감에 쌓인다오.

나는 이 사직구장을 사랑하오. 그것은 사직구장이 롯데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오. 아아, 롯데여. 나는 지난 14년간 한 번도 롯데를 사랑해보지 않은 적이 없소. 설령 오푼이에게 56호 홈런을 허용케 하고, 소아마비 타법을 쓰는 자에게 200안타를 허용하게 할 뻔했더라도 말이오.
그리고 롯데도 나를 사랑하고 있음이 틀림 없소. 지난 수년간 무어라 자랑할만한 큰 활약을 한적이 없는 나를 내치지 않고 품어주는 것을 보면 분명한 일이지요. 이 사실을 상기할 때면 나는 롯데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오.

여름은 한없이 덥소. 내리쬐는 태양열이 인간의 이성마저 얼음처럼 녹게 하여 불쾌증에 걸리게 한다오. 불쾌증이란 인간의 모든 감정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것이오. 롯데와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그리하여 그런 생각이 싹틀 기미가 보이면 우리는 덕아웃에 앉아 시원한 음료수를 들이키며 속을 씻어낸다오. 그러면 곧 개운해져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되찾는다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인간, 특히 프로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이라오. 그러나 반대편 덕아웃에 앉아 있는 저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오. 연신 닭같은 대가리를 흔들어 땀을 흩뿌려대며 불쾌증을 내고 있소. 야구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날씨 때문이기라도 한 듯 말이오. 특히 저 세이콘이란 자는……. 나는 보기만 해도 밥맛이 떨어지는 기분이라 고개를 돌렸소.

저들은 우리와 경기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우리를 질투하기 시작했다오. 어쩐지 저들이 그 불쾌증을 앞세워 우리에게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염려되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나로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앞으로의 3연전이 걱정되지만 정말 닭대가리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을 할리는 없지 않겠소?

7월 24일

닭대가리들이 결국 일을 내고야 말았소. 민호에게 불쾌증을 쏟아낸 것이오. 닭들은 지난 이틀간 그에게 수차례 위협구와 빈볼을 던졌댔소. 그가 한 번씩 돌덩이 같은 공에 맞을 때마다 나와 롯데는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과 함께 사색이 되었는데, 기어코 꺼먼 오골계 새끼가 150이 넘는 공으로 다시금 그를 때려버렸소. 우리의 덕아웃은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마저 잊고 물벼락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가라앉고 말았소. 그대도 알다시피 민호는 롯데의 주장인데 그에게 빈볼을, 그것도 세 번이나 던졌다는 것은 롯데에게 불쾌증을 대놓고 쏟아버린 것이나 다름 없지 않겠소? 아아, 나의 롯데여. 분노에 치가 떨렸소.

나는 언젠가 닭들에게 복수하겠노라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소. 내가 비록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둔 늙은이긴 하지만 아직 나의 팔과 어깨는 튼튼하다 자부할 수 있소. 마음만 먹으면 여전히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것이오. 그것이 지금까지 나를 사랑해준 롯데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함부로 불쾌증을 부려대는 저 불한당들에게도 합당한 응징일 것이오. 비록 나 또한 불쾌증을 부린 것이니 비난을 면치 못하겠지만 후회는 없을 것이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소. 바로 그 날 내가 등판을 한 것이오. 타석엔 수염난 닭이 서 있었고 나는 그를 응징의 제물로 삼기로 마음 먹었다오. 아쉽게도 민호는 교체되어 덕아웃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기에 포수석에 앉아 있지 않았소. 그의 보는 바로 앞에서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모습을 못 보이는 게 유감이었다오. 민호 대신 교체되어 들어온 포수는 나의 대의를 헤아리기엔 너무나도 어려 타자 바깥쪽으로 빠져 앉아 미트를 갖다대었소. 그러나 나는 미트를 쳐다보지도 않고 냅다 몸쪽으로 직구를 꽂아넣었소. 이를 악물고 던진 강력한 직구였다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수염난 닭은 온몸을 비틀어대며 간신히 피했다오. 그래서 나는 그 다음 공을 더욱 깊이 쑤셔박았소. 그러나 이번에는 일찌감치 나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아예 타석 바깥으로 피해버리는 게 아니겠소? 결국 나의 시도는 미수로 그쳤다오. 그러나 그가 약삭 빨랐다느니, 민첩했다느니 하고 생각하진 마시오. 그것은 단순히 그들 자신이 불쾌증을 즐겨하는 고수이기 때문에 미숙한 나의 시도가 간파당한 것 뿐이라오. 심판이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소.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서서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수긍할 작정으로 퇴장까지 각오하고 있었소.

그런데 그는 그저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하지. 임마." 하더니 그냥 가버리는 것이 아니겠소? 그가 나의 편을 들어주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오. 심판의 눈에도 닭대가리들의 하는 꼴이 보기 싫었던 모양이오. 비록 한스럽게도 응징은 실패로 끝났지만 틀림 없이 강력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오.

경기가 끝나고 그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소. 위에서도 적어내려왔듯 내 자신부터 불쾌증을 아주 혐오하는 사람이기에 나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은 감수하고 있소. 나와 롯데를 싸잡아 비난하는 자도 있었지만 벤치의 지시는 따로 없이 순전 나의 의지로서 일구어낸 일이기에 롯데가 비난 받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임을 알아주시오.

그러나 그대도 잘 알다시피ー내 입으로 직접 하기는 쑥쓰러운 말이지만 나는 언론에서 \'정글 속의 순둥이\'니 \'온실 속의 화초\'이니 하고 떠들어댈 만큼 온화한 사람이오. 그런 내가 닭대가리들과 같은 짓을 하길 선택한 심정은 오죽했겠소? 지난 14년간 나를 감싸준 롯데가 당하는 것을 볼수만은 없었다오. 그러니 그대만은 나의 심정을 헤아려주시오. 지금은 나를 노리고 있는 여론의 날카로운 칼날에 곧 닭들이 찔려 고개 숙일 테니.


출처: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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