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추운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극을 보았음. 앤이라는 캐릭터를 보면 키다리의 제루샤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데, 앤과 제루샤는 고아라는 출신과 상상하기 좋아하는 성격이 일치하고, 좋아하는 남자 애타게 만드는 것, 그 남자의 청혼을 한 번 거절했다가 그 남자가 죽다 살아나서야 청혼을 받아주는 것까지...설정상 닮은 부분이 많음. 그리고 아무래도 앤이 제루샤보다 더 어리다보니 더 엉뚱하고 수다스러우며 말괄량이 기질을 가지고 있음. 이렇게 가진 매력이 풍부한 앤이라는 캐릭터를 과연 여고생들은 어떻게 표현해낼지가 궁금해서 보게 된 극임. 결론적으로는 걸판에 제대로 낚였음. 극의 전개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음.

이 극은 4개 부분으로 나뉨. 앤을 공연하기 전까지의 도입부, 앤1 이야기, 앤2 이야기, 앤3 이야기임.

1. 도입부
이 부분에서 받은 느낌은...너무 머글극스러운데...였음. 뭔가 정돈되지 않고 코믹적인 요소들이 많이 부각되는 전개였음. 앤이 어린아이라 너무 어려서 연극 못하겠다는 여고생들이 남고생이 등장하자마자 그냥 앤으로 연극하겠다고 했을 때...너무 개그스러운 전개 아닌가 싶었고, 보여주는 군무도 유치하면서도 묘하게 집중되는 부분이 있었음. 특히 옷을 가지고 보여주는 군무는 저게 뭐야? ㅎㅎㅎㅎㅎ 싶으면서도, 옷이라는 도구를 저렇게도 쓸 수 있구나 생각보다 신선한데? ㅎㅎㅎㅎㅎ 싶었음.

2. 앤1 이야기
이 부분에서 받은 느낌은...아 이거 머글극이구나...그냥 내려놓고 보면 되겠네...였음. 남배우 2명의 말연기...개유치하면서도 절로 웃음이 나왔음. 그러면서도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던 앤의 모습을 매우 잘 묘사해냈음. 외모적인 싱크도 굉장히 잘맞았고, 수다스럽고 산만하고...그러면서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앤이 나와 있었음.

3. 앤2 이야기
솔직히 이 부분에서는 크게 받은 느낌이 없었음. 그냥 극에서 보여주는 장면 장면을 보고 즐거워하고 웃었던 것 같음. 그리고 이 앤2 이야기에서부터 내가 낚인게 확실함.

4. 앤3 이야기
여기서는 더 이상 고등학생들의 연극이 아님. 그냥 연극 버전 앤이었음. 앤3 이야기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와서야 "아...맞다...이거 고등학생들이 하던 연극이었지" 라고 알아차리게 됨. 솔직히 이거 반칙임. 고등학생이 정극 연극처럼 공연을 어찌 한단 말인가...그 동안 연극하면서 연슴 좀 했다고 이정도 수준까지 올라오면 안되지 말이야...


앤1 이야기까지는 유치하고 산만하던 분위기가 앤 3 이야기에서는 정극의 분위기로 바뀌었음에도 그걸 끝나고나서야 인지를 했다는 것이...그만큼 앤2 이야기가 이 두 부분의 연결고리 역할을 잘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임.

앤1과 앤2는 굳이 나눌 필요가 없음에도 2명으로 나누어 놓았다는 것이 앤의 배우 교체를 통한 자연스러운 분위기 전환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임. 앤1에서 앤 2로 넘아갈 때는 이번에는 앤을 누가 할까를 정하기 위해 현실로 잠깐 돌아오면서 흐름을 끊어 분위기를 환기시키지만, 앤 2에서 앤 3으로 넘어갈 때는 그런거없이 극을 진행하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배우 교체를 진행하면서 분위기를 유지시켜나감. 극을 볼 때는 몰랐는데 끝나고보니 이 부분이 좋은 연출이라고 생각됨.

다만 앤 2 이야기가 원작에서는 가장 길 것 같은데...이 극에서는 가장 짧음. 그러면서도 원작 앤의 굵직한 사건들은 많이 담아내고 있음. 길버드 머리통 후려갈기기, 다이애나 술먹이기, 다이애나 동생 구하기, 조세핀 할머니 에피소드까지...

앤1 이야기까지를 초반부, 앤2 이야기를 중반부, 앤 3 이야기를 후반부로 보면 초반부가 길고, 중반부가 짧고, 후반부로 넘어가는 식이라 내용이 부실해보이고 초반부의 머글극스러운 부분에서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함. 다만, 이게 아마츄어 고등학생이 보여주는 연극이라는 점에서 초반부에 미숙하고 어설퍼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연극 내에서 앤이 성장한 것처럼 고등학생들도 성장한 실력을 보여줌. 6명의 여배와 3명의 남배의 등장 인물 수...남배 중 2명은 실질적인 개그캐릭터라고 보면 6명의 여배와 1명의 남배가 이끌어가는 Girl판임. 이렇게 성장해나가면 다음 번에는 Girl작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