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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물갤문학] 투명한 물방울에 숨은 색깔은앱에서 작성

니코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4.03 00: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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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쿨 아이돌 동호회 부실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잿빛 머리칼의 귀여운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입은 미소로 가득차, 부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부실에 들어온 사람이 나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루비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눈도 순식간에 뱀같은 눈초리로 변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경계받고 있는 것 같다. 나로서는 짚이는 데가 전혀 없는데 말이지. 나는 그것을 눈치 못 챈 연기를 하며, 눈 앞의 조그만 소녀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이런, 시즈쿠는 없는 모양이네."

"시즈코라면 런닝 하러 갔어요. 30분 정도면 돌아올 테니 나중에 다시 오세요."

"좀 쌀쌀맞은걸.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귀염성 있게 반응해 주면 좋을 텐데."

"하아... 카스밍,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거든요."

"그건 동호회가 다같이 런닝을 나갔는데 혼자 부실을 지키는 지금 상황이랑 관계가 있는 걸까?"

이런, 방금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나. 괜히 벌집을 쑤셨다. 그녀의 나에 대한 경계도가 방금 한 단계 더 올라간 느낌이다. 이제 와서 알아챈 사실이지만, 발목에 파스를 붙이고 있는 걸 보니 아마 그녀는 발목을 삔 모양이었다. 말을 꺼내기 전에 눈치챘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진 뒤, 그녀는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시즈코에게 전할 말씀이 있으시다면 제가 대신 전해 드릴게요."

"아니, 오늘은 그냥 시즈쿠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

"그럼 왜 아직도 계신 건가요."

"그냥? 여기서의 시즈쿠는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 보고 있었지. 내가 모르는 시즈쿠의 모습 말이야."

그 말의 반은 핑계였고, 반은 진실이었다. 오사카 시즈쿠. 그녀는 스쿨 아이돌을 시작한 뒤로 정말 많이 바뀌었다. 내가 모르는 시즈쿠가, 여기에는 있다. 그리고 시즈쿠를 그렇게 바꿔 놓은 것은 내 앞에 있는 작달막한 소녀이다. 내가 모르는 시즈쿠를,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는 과연 자각하고 있을까. 자신이 한 여자를 완전히 바꿔 놓았음을. 오사카 시즈쿠를 평생동안 가리던 가면을 벗겼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 버렸다는 것을.

나는 자연스럽게 부실의 문을 닫고 들어와서는, 창가 선반에 놓여있는 시즈쿠의 컵을 들고 책상에 앉았다. 어떤 컵이 시즈쿠의 컵인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뭐, 카스미쨩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는 시즈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카스미쨩이 모르는 부분까지 알고 있을지도.

카스미쨩이 내가 모르는 시즈쿠를 알고 있듯이, 나는 카스미쨩이 모르는 시즈쿠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카스미쨩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깐동안 카스미쨩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런 마운트가 무의미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마음을 숨기려고 노력하며, 카스미쨩에게 말을 걸었다.

"카스미쨩, 어차피 서로 할 일도 없는데 같이 차나 마시면서 얘기 좀 할까?"

"겍, 카스미쨩이라니, 저희가 언제부터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요."

"그치만 나카스씨라고 하기에는 너무 딱딱하잖아? 안 그래, 카스미쨩?"

"...맘대로 부르세요."

"좋아, 차는 내가 끓일게."

"되게 신나 보이시네요."

"옛날부터 카스미쨩이랑은 한번쯤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 포트에 물을 넣고 전기를 올렸다. 옛날부터 카스미쨩이랑은 한번쯤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다, 인가. 짧은 문장이었지만, 꽤나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같았다. 시즈쿠의 연극은 어떤 느낌이 드냐. 시즈쿠의 아이돌 무대는 어떤 느낌이 드냐. 동호회에서의 시즈쿠는 어떠냐. 어떻게 시즈쿠를 바꿀 수 있었냐. 시즈쿠랑은 어디까지 나갔냐. 시즈쿠는 지금 행복한 거 같냐. 시즈쿠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은 있냐. 분명 카스미쨩에게 던질 질문들이지만, 시즈쿠에 대한 내용뿐이었다. 어떤 질문부터 던져야 자연스럽게 다른 질문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심사숙고한 끝에, 나는 카스미쨩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툭 던지듯이 말을 건넸다.

"동호회에서의 시즈쿠는 어때?"

"네?"

"그러니까, 네가 보는 평소의 시즈쿠랑 동호회에 있을 때의 시즈쿠는 어떻게 다른 것 같냐고."

"카스밍은 질문이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시즈코는 시즈코잖아요?"

시즈쿠는 시즈쿠이다. 그 단순한 말 한 마디가, 내가 던지려 했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게 카스미쨩과 나의 차이였겠지. 내 앞에서 시즈쿠는 여러 모습이었다. 천재적인 연기자, 귀여운 후배, 그리고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사랑스러운 연인이기도 했다.

카스미쨩의 앞에서, 시즈쿠는 시즈쿠였다. 다른 무엇도 아닌 시즈쿠였다. 그것은 시즈쿠가 카스미쨩의 앞에서 가면을 벗은 것일까, 아니면 카스미쨩이 시즈쿠의 가면을 벗긴 것이었을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카스미쨩은 불안해졌는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방금 지었던 표정을 그녀가 봤다면, 삐어버린 발목을 끌고서라도 부실을 뛰쳐 나갔을지도 모르니까. 연기자로서는 실격이군.

"그... 선배? 카스밍, 뭔가 잘못 말하기라도 했나요?"

"...아냐, 정말 좋은 답이었어."

"그치만 카스밍 대답이라 할 만한 건 아직 하지 않았는데요오..."

"이젠 카스미쨩이 나한테 질문할 차례야."

"..."

"망설일 거 없어. 뭐든지 물어봐."

"그럼... 선배랑 시즈코는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요?"

"관계라고 할 것 까지야, 거야 연극부의 선후배 사이지."

"...거짓말 하지 마세요."

카스미쨩의 그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의 아이돌 카스밍도, 귀여운 1학년생 나카스 카스미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연적을 눈앞에 둔 한 사람의 여자가 있었다. 아하, 드디어 그녀가 왜 나를 경계하는지 알겠다. 여자의 감이라는 건 생각보다 더 날카롭구나.

나는 몸을 다시 돌려 물이 펄펄 끓고 있는 커피포트의 물을 주전자로 옮겼다. 차가 우러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 동안 카스미쨩의 질문에 대답해 주도록 할까. 나는 주전자를 책상에 옮겨놓고, 카스미쨩의 앞에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는 미소지으며 카스미쨩에게 말했다.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는데, 들어 줄래?"

2

오사카 시즈쿠.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벚꽃이 지던 계절, 비 오는 날의 저녁이었지. 그녀의 이름에 참 어울리는 날이었어. 이렇게 이야기하니 뭔가 운명적이고 로맨틱한 만남이 있을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건 내가 그렇게 들리도록 말을 꾸미고 있기 때문이야.

미안미안, 카스미쨩은 가만히 있으면 놀리고 싶어진다니까. 그리고 딱히 지어낸 말도 아니라구. 봐, 4월은 벚꽃이 지는 계절이지. 그리고 그 날은 비가 오기도 했어. 하지만 우리 둘의 만남에 벚꽃이나 비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았어. 그야, 우리는 실내에서 만났으니까. 어디냐고? 연극부 부실이지, 어디겠어. 나는 연극부 부장이고, 시즈쿠는 연극부에 오디션을 보러 온 신입생이었을 뿐이야.

봐, 4월 초에 연극부 오디션에서 만났다고 말할 내용을, 벚꽃이 지던 계절 비 오는 날의 저녁에 만났다고 하는 것만으로 꽤나 로맨틱해졌지? 시즈쿠는 이런 수사를 좋아하니까 나중에 써먹어 봐. 뭐? 카스밍의 머리로는 무리라고? 하하, 그건 좀 아쉽네.

아무튼, 그 날은 좀 지쳐있었어. 연극부에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은 예년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은데, 재능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거든. 좀 매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노력만으로는 닿지 않는 부분도 연기에는 있는 거야. 얼마나 심각했냐면, 올해는 어린이용 연극을 해야 하나 싶었다니까. 그렇게 낭만이라고는 전혀 없는, 의무감으로 이어가는 오디션에서 나는 시즈쿠를 처음 만난 거야.

내가 시즈쿠를 보고 맨 처음 한 말이 뭘까? 오디션이니까 자기소개를 시키지 않았겠느냐고? 에이, 그건 너무 뻔하잖아. 나는 시즈쿠를 처음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합격'이라고 말했어.

옆에 있던 각본이랑 부부장이 놀라서 나를 쳐다보더라고. 얘가 피곤해서 맛이 갔나, 하는 눈빛으로. 하지만 그 때의 나에게는 확신이 있었어. 지금 그 자리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말할 거야. 시즈쿠는 문을 열고 걸어와서 자리에 앉기까지 행동에 한 치의 낭비가 없었어. 손끝부터 걸음걸이, 시선 처리나 눈빛까지 이미 완성된 연기자였지. 그래, 시즈쿠는 오디션이 시작되기도 전에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을 잡고 말을 걸어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작품은 뭐고, 언제부터 연기자의 꿈을 꾸었는지, 같이 연극을 보러 가고 싶은데 이번 주말에 시간은 되는지. 그래도 오디션은 나 혼자 진행하는 게 아니니까, 꾹 참고 앉아 있었지.

시즈쿠에게는 오디션 과제로 제시되었던 오필리아의 연기를 시켰어. 아니, 시즈쿠네 집 개 말고 햄릿의 오필리아. 햄릿이 사랑하던 상대지만, 햄릿 때문에 오빠를 잃고 미친 나머지 강물에 빠져 죽는 여자. 시즈쿠랑 사귀면서 설마 그것도 몰랐던 거야? 아무튼, 우리는 모두의 그녀의 연기에 홀려서, 오디션 제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릴 때까지 멍하니 그녀를 보고만 있었어.

그건 하나의 광기였어. 신이 들려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지. 아까까지 고고하지만 귀엽게 앉아 있던 여자애가, 연기가 시작되자마자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리고는 초점 없는 눈으로 대사를 내뱉는 거야.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의 분위기였어. 더 무서웠던 건, 시즈쿠가 알람이 울리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바로 서서 우리한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던 거였지. 내가 보기에 아직 연기는 끝나지 않았지만. 그 인사마저도 연기의 일부였으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 오디션을 끝낸 시즈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고는 들어왔을 때 동작 그대로 나갔어. 그게 나와 시즈쿠의 첫 만남이야.

3

연극부에 들어온 시즈쿠는 1학년인데도 바로 주연 자리를 꿰찼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 다들 시즈쿠의 연기를 본 다음이었으니까.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어. 실력만 있는 게 아니라, 분위기도 잘 맞춰주고, 성실하고, 예의바른 후배를 누가 싫어하겠어? 모두가 이상에 그리는 후배였지.

그렇다고 동급생이랑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어. 질투하는 사람도 나올 법 한데 말이야. 아니, 나와야 정상이야. 아무리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가 있어도 그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게 당연해. 하지만 그런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지. 시즈쿠는 이상의 후배였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동급생이었어.

이쯤되면 너도 이상하단 걸 눈치챘겠지? 그래,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어. 시즈쿠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사람에 맞춰서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오디션에서의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시즈쿠의 인생 자체가 연기였던 거지. 그걸 꿰뚫어본 건 연극부에서 나밖에 없었어. 다른 사람들이 시즈쿠의 연기하는 모습에 열광할 때, 나는 진짜 시즈쿠는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졌어. 연기를 할 때도, 각본을 검수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꿈에서도 시즈쿠를 생각했어. 좀 부끄럽지만, 그 때의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얼굴이 빨간걸. 혹시 지금 너도 똑같은 상황이니? 빵을 굽다가 시즈쿠를 떠올려? 거리를 걷다가 뭘 봐도 시즈쿠가 생각나? 꿈에 시즈쿠가 나와? 시즈쿠를 생각할 때마다 막 가슴이 뛰고 그래? 부럽네, 사랑을 한다는 건.

그럼 나도 사랑을 했던 거 아니냐고? 그건 아니라고 말해 둘게. 내가 했던 건 그런 아름다운 게 아니야. 나는 말이야, 겉으로 보이는 시즈쿠의 안에 잠든 진짜 시즈쿠를 끄집어내 보고 싶었어. 그 모습을 나만이 독점하고 싶었고, 시즈쿠를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시즈쿠한테 고백했어. 물론 아까 말했던 욕망을 숨기고 말이야. 시즈쿠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일단은 연기자니까. 고백은 내가 평소에 동경하던 시츄에이션에 맞춰서 했지. 연습 후에 선배와 뒷정리를 끝내고는, 아무도 없는 교사에서 저녁놀에 맞춰 하교하는 거야. 아무런 일도 없을 것처럼 평소와 같은 대화를 이어가며 계단을 내려가다 코너를 돌 때, 선배가 갑자기 자기를 벽에 들이밀고는 고백을 하는 거지. 벽에 갑자기 밀쳐져 생긴 흔들다리 효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어보면 저녁놀 때문에 붉게 변한 선배의 얼굴. 자연스럽게 선배도 사실은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안심이 되면서 마음의 장벽이 한 칸 풀리고, 선배를 껴안으면서 자기도 좋다고 하는 거야. 그게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였어. 나, 의외로 각본가의 재능도 있나 봐.

결과가 어땠을 거 같아? 오, 자신만만한 얼굴인걸. 그런데 이걸 어쩌나. 너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성공했어. 그것도 대성공이었지. 객관적으로는 말이야. 누가 봤다면 영화의 한 장면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라. 이런, 충격받았구나. 시즈쿠가 전 여친 얘기는 안 해줬던 모양이지? 카스미쨩? 내 말 듣고 있어? 미안해, 사과할 테니까 울지 마. 지금 누가 들어오면 내가 후배를 괴롭히는 그림이 되잖아.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부터라니까. 안심해도 돼. 시즈쿠의 첫사랑은 카스미쨩이 맞으니까.

아까 '객관적으로는 대성공'이라고 말했지? 그게 문제였어. 객관적으로는 성공적인 고백이었지만, 내 주관으로는 도저히 아닌 거야. 분명 고백을 성공했는데, 마음속에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어. 시즈쿠랑 손을 잡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갈 때는 행복했지만, 헤어지고 나서는 계속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직도 손에 남아있는 시즈쿠의 온도를 느끼며 나는 생각했어.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불타는 듯한 하늘의 저녁놀을 보고 나서 깨달았지. 지나치게 완벽했다는 걸 말이야.

넌 지금 내 얘기보다는, 내가 고백을 성공하자마자 손을 잡고 하교했다는 거에 신경을 더 쓰고 있구나. 참, 너희는 '객관적으로' 진도가 너무 느려. 그것도 풋풋해서 좋기는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너는 시즈쿠가 나한테 너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해 주는지 모를 거야. 대화의 절반이 네 이름으로 시작한다니까.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가 볼까? 내 고백은 성공했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가 꾸민 극본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얼굴을 붉히던 시즈쿠는 조금 뒤에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더니, 나를 껴안으며 좋다고 말했지. 근데, 연기라는 건 박수를 치는 거랑 같아. 한 손만으로는 박수를 칠 수 없잖아? 한 쪽이 연기를 해도 다른 쪽이 받아주지 않으면 대본처럼 완벽하게는 성립하지 않지. 시즈쿠는 그 순간마저도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야. '부장님이 생각하는 사랑에 빠진 소녀'를 완벽하게 해석해서는 말이야. 참 마성의 여자야, 시즈쿠는.

근데 왜 시즈쿠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고백을 받아줬냐고? 카스미쨩도 알잖아, 시즈쿠가 왜 평소에도 연기를 했었는지. 걔는 누군가한테 미움받기 싫어서 연기를 시작한 애야. 그런데 사랑의 고백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겠어?

아니, 내가 그것까지 계산한 건 아니야. 고백이 성공한 뒤에 내린 결론이지. 나는 고백의 성공과는 관계없이 시즈쿠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어. 성공하면 사랑에 빠진 시즈쿠 본연의 소녀같은 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패하면 그것도 자기 나름대로 '부장님은 아닌 것 같아요'라는 의사표현을 제대로 한 거잖아. 근데 둘 중 어느 결과도 나오지 않은 거야.

4

내가 시즈쿠랑 사귀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랑 시즈쿠뿐이야. 이제는 카스미쨩도 알고 있네. 신기하지? 흔히 같은 부에 들어가 있는 둘이 사귀면, 적어도 부 안에서는 소문이 흘러나오기 마련이잖아? 확증은 없더라도 뜬소문 정도라면 있겠지. 그런데, 시즈쿠 때는 그런 것조차 없었어.

뭐, 서로 티를 안 냈다는 것도 있겠지만, 시즈쿠가 뒤에서 컨트롤하고 있었다는 게 맞겠지. 부장이랑 신입생이 사귄다? 무조건 안 좋은 소문으로 이어지지. 부장 쪽으로도, 신입생 쪽으로도. 그건 미움받기 싫은 시즈쿠한테는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은 일이었을 거야. 시즈쿠한테는 참 미안하다고 생각해. 마음고생도 엄청 많이 했을 거야.

우리는 남들 몰래 데이트도 매일같이 다녔어. 둘 다 연극부니까, 대체로 영화관에 가거나 연극을 보거나 했지. 시즈쿠는 내 앞에선 언제나 사랑스러운 연인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연극을 볼 때의 시즈쿠는 진실된 모습이었어. 정말 예뻤지. 연극보다는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본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해도 될 거야. 난 그 눈동자를 볼 때마다 안심했어. 적어도 이 아이가 연극을 좋아한다는 건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거든.

슬프지만, 그 눈동자를 영화관에서는 볼 수 없었어. 그때는 왜 그러는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네. 시즈쿠는 옛날 영화를 좋아하잖아? 그런데 데이트에서 옛날 영화를 보자고 하는 여자애가 세상에 얼마나 있겠어. 그래, 이번에도 시즈쿠는 미움받기 싫었던 거야. 시즈쿠가 최근 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를 놔두고 어떻게 스크린에 집중할 수 있겠어.

그런데 지금 왜 내가 시즈쿠랑 데이트한 이야기를 꺼내냐고? 자랑하려고. 아니, 진정해! 농담이라니까! 이건 시즈쿠가 바뀌기 시작하는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야기라서 하는 거야. 지금 나와 네가 이렇게 마주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지.

연극이라는 게, 영화관처럼 관이 잔뜩 있어서 골라볼 수 있는 건 아니거든. 한 번 하면 두어달 정도는 똑같은 연극이야. 다른 연극을 보고 싶으면 다른 극장을 찾아야지. 근데 그것도 한계가 있잖아. 안 그래도 연극은 가격이 좀 되는데, 멀리 나가면 교통비까지 깨지니 학생 입장에서는 힘들다 이거야. 그렇다고 영화관을 가자니, 시즈쿠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물론 시즈쿠는 좋아하는 척을 하겠지만, 그게 연기라는 걸 아는 입장에서 보면 참 안타깝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새로운 도전을 해볼 겸 해서 뮤지컬을 보러 가기로 했어.

그 동안 뮤지컬을 본 적 없었던 시즈쿠한테는 그게 신선한 충격이었나 봐.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뮤지컬 영화는 봤었던 모양이지만, 뮤지컬을 직접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대. 배우가 실시간으로 스크린이 아닌 무대에서 연기하면서, 노래를 통해 캐릭터의 감정을 자유롭게 전달한다는 그 형식에, 시즈쿠는 빠져버렸어. 오페라처럼 격식을 차리는 것도 아니고, 연극처럼 정석적인 것도 아니야. 영화처럼 배우와 관객 사이에 벽이 있는 것도 아니지. 뮤지컬에는 자유가 있었어.

뮤지컬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헤어지기 직전까지 시즈쿠는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그날 본 뮤지컬에 대해 이야기했어.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는 세츠나쨩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야. 사람이라는 게,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게 나오면 주변은 신경쓰지 않게 되거든. 그건 내가 본 몇 안되는, 연기하지 않는 모습의 '진짜' 시즈쿠였어. 너무 사랑스러워서 세게 껴안아 줬지. 껴안자마자 원래의 시즈쿠로 돌아와서 사랑스러운 연인을 연기하기는 했지만.

나는 시즈쿠에게서 진짜 자신을 끄집어내고 싶었어. 시즈쿠의 그런 모습을 더 보고 싶었어. 그 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지. 어쩌면 시즈쿠도 뮤지컬을 하면 진정한 자신을 꺼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이내 연극부에서는 뮤지컬을 하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어.

작곡이야 배경음악이랑 같이 하면 된다지만, 정작 중요한 가창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잖아. 꼭 전문적이지는 않더라도 시즈쿠에게 노래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지. 한 5초 정도 생각했으려나? 나는 시즈쿠와의 포옹을 풀고 가방을 열었어. 하굣길에 교문에서 누군가가 나눠주던 전단지. 버리기도 애매해서 가방에 넣고 까먹고 있었던 거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래, 너희가 나눠주던 스쿨 아이돌 동호회의 전단지였어.

5

그렇게 시즈쿠는 스쿨 아이돌 동호회에 들어가게 되었지. 나는 나대로 시즈쿠에게 해줄 수 있는 걸 준비했어. 시즈쿠를 위한 뮤지컬을 만들어 놓는 것. 니지가사키 연극부 역사상 처음이었지, 뮤지컬은. 꽤나 바빴어. 뮤지컬의 대본은 중간에 노래가 들어가는 만큼 연극과는 달라서 다시 공부해야 했고, 노래 같은 경우도 이번에는 배경음악과 다르게 실제로 사람이 부를 걸 상정하고 만들어야 하니까.

시즈쿠는 시즈쿠대로 바빴을 거야. 부를 두 개 같이 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지금까지 해본 적도 없는 노래나 댄스를 해야 하는데, 기초체력도 배우 때보다는 더 키워야 하고, 새로운 친구들하고 호흡도 맞춰야지. 그러면서도 다음 연극 대사는 외워야지, 연극 쪽 호흡은 또 새로 맞춰야 하지. 새로 배운 노래 부르는 법도 연극부 애들한테 가르쳐 줘야지.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어. 서로 지나치게 바빠서 가끔씩밖에 못 만나게 된 거야. 가끔 내가 동호회로 찾아와서 시즈쿠를 보고 가곤 했잖아? 시즈쿠를 못 만나서 외로웠거든. 하지만 시즈쿠 쪽에서는 그게 아니었나봐. 시즈쿠 쪽에서 만나러 와준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던가? 시즈쿠는 점점 '부장님에게 사랑받는 연인'에서 벗어나고 있었어. 애초에 시즈쿠는 나한테 마음이 없었지만.

먼발치에서 동호회에 있을 때의 시즈쿠를 보는 건 색다른 느낌이었어. 분명 그 때도 연기는 계속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해. 아니면 그냥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던가. 한 가지 확실한 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의 시즈쿠는 연극부에서의 시즈쿠나 내 앞에서의 시즈쿠보다는 훨씬 진심에 가까운 모습이었다는 거야. 뭐가 시즈쿠의 마음을 열게 만들었을까?

난 너희들이 시즈쿠를 '오사카 시즈쿠'로 봐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연극부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었거든. 누군가에게는 존경의 대상,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후배. 시즈쿠의 연기 실력이 오히려 거리감을 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로 거리를 두었다고 하는 편이 맞으려나. 하지만 너나 세츠나쨩, 엠마씨나 카나타씨는 누군가한테 거리를 두는 사람이 아니잖아. 너희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줬기에 시즈쿠는 천천히 마음을 열 수 있었다고 생각해.

특히, 너의 존재는 시즈쿠에게 있어 굉장히 컸다고 생각해. 그동안 시즈쿠한테 장난을 친다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시즈쿠를 그만큼 허물없이 대하는 동갑내기 친구는 너밖에 없었어. 반대로, 시즈쿠가 그만큼 허물없이 대하는 동갑내기 친구도 너밖에 없었지. 서로 자연스럽게 농담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그때까지 내가 알던 시즈쿠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이었는데. 솔직히, 질투했어. 시즈쿠를 스쿨 아이돌 동호회로 보낸 건 나였는데도 말이야.

그렇게 3주 정도가 지났으려나? 유난히도 맑은 날이었지. 시즈쿠가 스쿨 아이돌의 연습을 하러 가는 날이었어. 오랜만에 시즈쿠랑 데이트 약속을 잡고 싶어서 옥상 쪽으로 갔더니, 아무도 없더라고. 이상하다, 분명히 연습을 하고 있을 시간인데 왜 아무도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호회 부실로 향했어. 그런데 부실에도 아무도 없었어.

표정이 안 좋네. 그 날이 무슨 날이었는지 눈치채버린 거니? 그래, 스쿨 아이돌 동호회가 해체되었던 날이야. 그렇게 자책하지 마.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즈쿠가 그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는 알아 둬.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 봐도 시즈쿠는 보이지 않고, 연락을 해도 받지를 않아서, 결국 나는 방과후를 통째로 날렸지. 결국에는 하교 시간이 다가와서, 찾는 걸 포기하고는 아무도 없을 연극부 부실로 돌아왔더니 부실 구석에서 시즈쿠가 울고 있었어. 둥지가 사라진 새를 보는 것 같았지. 들어간 지 3주만에, 동호회는 시즈쿠한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던 거야. 이럴 때만큼은 일단 연인인 나한테 의지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시즈쿠의 옆에 앉았어.

울면서 이쪽을 바라보는 시즈쿠의 얼굴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지. 히끅이면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였어. 시즈쿠가 진심으로 우는 걸 본 건 처음이었어. 나는 저녁놀에 비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로워서, 쓸쓸해 보여서, 사랑스러워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때 내 앞에 있던 눈물범벅이 된 여자아이는, 지금까지 본 어떤 연극의 주인공보다도 아름다웠어.

이제 동호회 같은 건 잊고 나한테 의지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시즈쿠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럴 수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시즈쿠의 입술을 빼앗았어. 시즈쿠의 진심을 내 색깔로 물들이기 위해서. 그러면 시즈쿠가 조금이라도 편해지지 않을까 해서. 시즈쿠한테 있어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건 잘 알겠지만, 이건 분명히 있었던 사실이야. 합의는 없었고, 입술과 입술이 닿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심지어 5초도 안 되어서 밀쳐졌다니까. 이 정도면 노 카운트로 쳐도 되지 않을까?

시즈쿠는 나를 밀친 다음에, 자기 두 손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어. 이번에 흘린 눈물은 다른 의미였을 거야. 나한테 미움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웃어 보였어. 그리고는 시즈쿠를 꽉 껴안았지. 시즈쿠가 조금 진정될 즈음에, 나는 시즈쿠에게 헤어지자고 말했어. 나로서는 도저히 시즈쿠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겠다고 생각했거든. 나한테 시즈쿠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어.

시즈쿠는 망설였어.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있었지. 계속해서 말을 더듬다 고개를 푹 숙인 시즈쿠는, 이젠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는 그런 시즈쿠에게, 헤어져도 너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말했어.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든 시즈쿠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고, '네'라는 대답이 돌아왔지.

사실은 거기서도 거절해 줬으면 했어.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이 위기를 이겨내고 진짜 연인이 되었으면 했어. 나한테만은 앞으로도 약한 모습을, 진실된 모습을 보여줬으면 했어. 하지만, 내가 시즈쿠한테서 마지막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진심은 헤어지자는 마음이었지.

6

"그 다음부터는 너희도 아는 그대로야. 너는 있는 그대로의 오사카 시즈쿠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했고, 시즈쿠는 그 말에 구원받았지."

"이런 이야기를 왜 카스밍한테..."

"시즈쿠가 스스로 진심을 꺼낼 수 있게 한 건 너였으니까."

카스미쨩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당황보다는 황당인가. 갑자기 여자친구의 전 애인이 와서는 옛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누구나 이렇게 되겠지. 중간에 말을 끊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울 정도다. 나는 카스미쨩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시즈쿠의 내면을 끄집어내려 했지만 실패했어. 하지만 너는 시즈쿠의 내면을 인정해 줌으로써 시즈쿠 스스로 가면을 벗게 만들었지."

"..."

"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앞으로도 너는 나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니까. 시즈쿠는 행복했으면 하거든."

"역시, 선배는 시즈코를..."

"아냐."

이건 그냥 나의 욕망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카스미쨩의 다음 말을 들어버리면 내가 그동안 세워놓은 마음의 댐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말을 딱 잘라 끊었다. 그리고는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라 마셨다. 지나치게 뜨거운 물에,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우렸다. 떫은 맛과 쓴 맛만이 올라온다. 차를 목구멍으로 넘긴 다음에도 그 맛들은 여전히 입 안에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때, 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앞에는 시즈쿠가 서 있었다. 시즈쿠는 부실 안의 나를 보고 문의 명패를 다시 확인한 후, 웃으며 들어왔다. 아까까지 달리고 와서인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시즈쿠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장님! 무슨 일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너를 보러 왔다가 카스미쨩과 좀 이야기를 했지."

"그래요?"

시즈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이 카스미쨩을 향한 순간, 표정이 바뀌었다. 살짝 당황한 얼굴. 옛날이었다면 이런 표정은 보여 주지 않았을 텐데. 시즈쿠는 카스미쨩의 양 볼을 잡고는, 카스미쨩에게 말을 걸었다.

"카스미씨! 눈이 살짝 부어 있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부장님! 카스미씨한테 뭔가 하신 건가요?"

"아아, 옛날 이야기를 좀 했지."

"왜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신 거예요!"

온몸으로 '나 화났어요'를 외치며 볼을 부풀리는 시즈쿠. 나한테는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기쁘기도 했다. 이제는 화도 내는구나. 이왕이면 내가 시즈쿠를 저렇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입 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차의 쓴맛을 느끼며,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동호회가 해체된 날 기억나?"

"그건 노 카운트라고요!"

"들었지, 카스미쨩? 노 카운트라는데."

"진짜였구나, 시즈코..."

"그러니까 그건 부장님이 멋대로!"

"그래, 그래. 다른 부원들이 오기 전에 난 이만 가 볼게."

"아, 도망치신다!"

"컵 잘 썼어! 간접이지만 오랜만에 시즈쿠와 키스할 수 있어서 좋았어!"

"부장님!"

시즈쿠와 이렇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는,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오사카 시즈쿠. 천재 여배우.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로는 무엇도 될 수 없는 여자아이. 그녀는 이제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여고생이 되어 있었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화도 내는. 나는 그런 시즈쿠가...

"시즈쿠."

"네?"

"...지금, 행복하니?"

나는 부실을 나가며 문을 닫기 직전에 그렇게 물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그녀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몸은 돌리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여유있는 선배를 연기하도록 하자.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연기다.

"네! 저, 동호회에 들어와서 다행이예요!"

"그렇구나. 그럼 됐어."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문을 닫았다. 텅, 하고 복도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시즈쿠에 대한 내 마음도 이렇게 닫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쓰기는 진작에 썼는데 생일선물로 올리고 싶어서 일주일 넘게 킵해둔 작품
생일에 올리기에는 좀 어두웠나 싶기도 하지만
애니 이전의 '착한 아이를 연기하던' 시절의 시즈쿠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음

애니 2화 뜨자마자 연극부 부장이 꽤나 주목을 받았는데
나도 부장이 풍기는 분위기는 후배를 아끼는 것과는 좀 다르지 않나 생각했었음
1화에서도 '이제 연극부에 더 집중할 수 있겠네'라고 말하고
8화에서 흑즈쿠 가면 벗은 다음 시즈쿠를 바라보는 표정은 후련함이나 대견함만으로 표현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음
여기서 부장은 사실 옛 연인이고 동호회, 특히 카스미를 질투하고 있다는 회로 발동

시즈쿠의 색을 끄집어내려 했던 부장과
시즈쿠가 색을 꺼낼 수 있게 해준 카스미
형태는 달랐지만 둘 다 사랑이 아니었을까
부장의 고백씬과 실연씬은 일부러 비슷한 상황을 연출함

그동안의 줄글은 첫 장과 마지막 장처럼 1인칭이지만 문어체로 서술을 했는데
이번에는 액자식 구성을 써서 부장이 직접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구어체로 써봄
이야기를 듣는 카스밍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재밌을 거라 생각함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다음에는 가볍게 돌아올 것 같음
여기까지 읽어줘서 고맙다

시즈쿠쨩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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