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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창작] [반짝임] 천 개의 노래가 되어앱에서 작성

니코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2.11 16:34:35
조회 1087 추천 33 댓글 7

														

1

"다이아쨩은 졸업하면 뭐 할 거야?"

같이 기말 대체 조별과제를 하던 동기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는 나에게 물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 아니냐고 말하려던 찰나, 나도 이번이 마지막 학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는 전혀 갑작스러운 질문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동기들 중 몇몇은 벌써 취직했고, 또 다른 몇몇은 인턴을 하고 있고, 그보다도 많은 수가 스펙을 쌓기 위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과실에 앉아 느긋하게 조별 과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하던 그녀 자신은 그렇다 쳐도, 나는 굳이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 질문에는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를 향해 눈을 살짝 치켜 뜨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이, 조금 있으면 졸업인데 좀 가르쳐 주라~"
"떨어지세요. 과제 하고 있잖아요."
"얘기해 주면 내가 다이아쨩 몫까지 해 줄 테니까."
"제 몫은 제가 합니다."

들러붙어 오는 그녀를 손으로 밀어내고는 다시 노트북을 만진다. 논문을 검색하고, 그 내용을 인용한다. 발표할 사람을 위해 조사한 내용의 요점을 따로 적어 놓는다. 옆에서는 동기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쭉 내밀고 있다. 이럴 바에는 그냥 말하고 편해질까, 그렇게도 생각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말을 한 다음 어떤 반응이 돌아오던, 나는 그녀를 싫어하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데, 이렇게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정해진 레일 위를 걷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누마즈로 돌아가 가업을 잇기로 되어 있다. 누군가는 나를 새장 속 새에 비유하며 동정하고, 누군가는 나를 미래가 탄탄한 금수저라고 하겠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계 없이 말이다. 1년 전까지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상관 없었는데. 그 일이 일어난 뒤부터 남들이 나의 미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이 싫어졌다. 아니, 그냥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이 싫어졌다. 미래를 얻지 못했던 누군가가 계속 생각나서, 미래라는 단어 자체가 싫어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빠르게 손을 움직여 논문의 조사를 끝내고는 일어났다.

"제 몫은 다 끝냈으니까 이만 돌아가 볼게요."
"다이아쨩 또 도망친다! 어차피 이 다음에 일정도 없으면서!"
"아뇨, 내일은 오랜만에 고향에 가야 해서요. 가서 짐을 쌀 거예요."
"그치만 내일 수업 있는데?"
"수업보다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과실 안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내가 턱의 점을 긁지 않는다는 것으로, 내 말이 진실임은 그녀에게 이미 전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 부분은 자신이 더 이상 파고들면 안 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말했다.
과실이 있던 건물을 나오니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엘 듯이 불어왔다. 12월 중순의 도쿄는 이미 완연한 겨울이 되어, 1월에 다가올 추위를 예고하고 있었다.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취해 있었고, 캠퍼스 내의 벚나무들은 이파리를 진작에 떨어뜨리고는 겨울을 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 나무들도 계절이 지나면 눈꽃을 틔우고, 이파리가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겠지. 누마즈에 있는 그녀와는 달리 말이다.

"정말 싫네요..."

나는, 누마즈에 가는 것이 싫다.

2

일반적인 대학생의 자취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갈함 속에서, 도마 위에서 칼이 춤추는 소리가 울린다. TV에서 나는 소리가 무슨 노래라도 되는 듯이, 내가 쥐고 있는 칼은 마치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박자를 두고 움직였다. 그 규칙성을 깬 것은 자취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루비, 다녀왔어요."
"언니, 오늘은 좀 빠르네?"
"루비의 저녁이 기대되어서 빨리 왔어요."

언니는 그 말을 하며 점을 긁었다. 물론 그것을 보기 전부터, 나는 이미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내일은 우리가 근 1년 만에 누마즈에 가는 날이니까. 서로 이미 알고 있기에, 누구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된장국에 넣을 채소를 썰었다.
언니는 조용히 외투를 벗어 정리해 놓고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 건 샤워를 하고 나서 해도 될 텐데, 빨리 끝내버리고 잊으려는 듯이 짐부터 싸고 있다. 역시 자매는 닮는 모양이다. 나도 학교에서 돌아온 다음에 가장 먼저 한 게 짐 싸는 일이었으니까. 얼마 안 되는 짐이 든 캐리어를 볼 때마다 내일 누마즈에 간다는 것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누마즈에서 하루를 난 뒤에는 도망치듯 다시 떠날 것이라는 사실도.

"이번 러브라이브는 정말 기대가 되네요."
"그러게요. 본선이 끝나고 결승만을 앞두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TV에서는 캐스터들이 한창 러브라이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본선이 끝날 시기가 되었나. 최근에는 기말 준비로 바빴으니까, 본선 무대는 보지 못한 채로 남겨 두고 있었다. 누가 진출했는지 스포일러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특히 이번 본선에서는 이 그룹의 성장세가 돋보였죠."
"네. 전 회에서는 지역 예선에서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우승 후보로까지 점쳐지고 있어요."
"4년 전의 아쿠아와 같은 전철을 밟는 건가요?"

아쿠아. 아쿠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뇌에서 보내는 전기 신호가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정신을 되찾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아픔이었다. 식칼에 베이는 건 몇 년 만일까. 아쿠아에 있던 시절에는 식칼을 거꾸로 쥐기도 했었지. 분명 행복한 기억일 텐데, 이제는 아쿠아라는 이름을 듣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아쿠아라는 이름을 떠올려버린 뇌에서는, 계속해서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루비, 반창고 여기 있어요."
"...아, 언니. 고마워."
"나머지는 제가 만들까요?"
"아니야. 언니는 앉아서 쉬고 있어."

언니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반창고를 가져다 주었다. 분명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속으로는 나만큼이나 동요하고 있겠지. 아쿠아의 누구에게 아쿠아라는 단어를 들려 줘도 같은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언니는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 캐리어 앞에 앉더니, 멍하니 캐리어의 빈 자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손가락 끝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시 칼을 잡았다. 칼을 잡는 것만으로 아쿠아의 기억이 떠올라 버린다. 그 시절에, 크리스마스 전날 즈음에 같이 요리하던 카난쨩과 요우쨩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채소를 마저 썰기로 했다. 카난쨩은 지금 어디쯤 와 있으려나. 요우쨩은 오늘 하선한다고 했던가. 내일 그녀들을 누마즈에서 만나는 것은, 별로 기대되는 일은 아니었다.

3

역 근처의 저가 호텔로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는 가운을 대충 걸친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진다. 짐은 풀어 봤자 내일 아침에 다시 싸야 할 것을 알기에, 굳이 풀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럴 때만큼은 자취방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지만, 1년에 채 두어 달도 육지에 발을 붙이지 않는 내가 그러는 건 사치다.
수 개월 간 항해를 하며 쌓인 피로도 있고, 내일은 바빠질 것 같으니 그대로 침대에서 잠에 들려 했지만, 휴대폰이 나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벌써 12시가 되어가는데도 머리맡에서 끝없이 울리는 진동에 짜증을 느끼며, 나는 휴대폰을 집었다. 하나같이 학교 동기들이 보내는 카톡이다.

와타나베, 진짜 안 오게?
여기 술안주 진짜 미쳤어
안 마시면 다시 배 타고 후회한다?
지그미라도빠ㅎ리오ㅑ

아, 이 녀석은 벌써 갔구만. 이런 걸 보고 있으면 왜 해적이 럼주를 달고 살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라고 딱히 술이 마시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술은 좀 센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내일이 그 날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동기들과 술을 퍼마시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당연히 취해서 밤새도록 토할 때까지 마실 것이고, 5시쯤에는 감기는 눈을 막지 못하고 잠들어 버리겠지. 그래서는 6시 반에 출발하는 기차를 탈 수 없다. 설령 제대로 일어난다고 해도 그런 꼴로는 고향에 갈 면목이 없다. 그것보다도, 그녀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불쌍한 눈으로 보며 이해해 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진짜 슬퍼서 마신 게 아니라도, 오해를 살 만한 모습을 보이는 건 역시 아닌 것 같다.
나는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바꿔 놓고, 내일 아침 5시에 알람을 맞춰 놓았다. 6시 반 차를 타면 누마즈에는 10시 정도에 떨어지려나. 가서 부모님을 잠깐 뵈고, 바로 토치만으로 가서 짐을 풀겠지.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애초에 토치만으로 가기로 한 것도 꽤나 큰 고민 끝에 한 결정이었다. 원래는 우리 집에 묵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쿠아 모두가 모인다면 토치만이라고 생각했기에, 막판에 토치만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웃으면서 들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역시 한 잔 정도는 마실까."

내일 일을 생각하면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약간만, 아주 약간만 마시자. 다시 옷을 챙겨 입기도 귀찮아서, 호텔의 냉장고 안을 열어 본다. 캔 콜라와 생수의 옆에는 250ml 아사히 캔맥주가 3개 정도 놓여 있었다. 추가 요금은 좀 붙겠지만 어쩔 수 없나. 나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고는 문을 닫았다.
침대에 다시 앉아 휴대폰을 보니, 벌써 58분이 되어 있었다. 읽지 않은 카톡의 99+ 표시는 무시한 채로, 나는 휴대폰으로 일기예보를 보았다. 시즈오카현 누마즈시, 흐림, 강한 바람, 강수확률 30%. 1년 전의 그 날도 우중충한 하늘이었다. 아마 비가 온다고 했었는데 오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하늘은 우리를 위해 울어 주지도 않은 채로, 그저 무심하게 자신이 할 일을 했다.
휴대폰의 시계가 59분으로 바뀌자, 나는 자리에서 맥주와 휴대폰을 들고는 창가로 향했다. 바깥은 아직도 밝게 빛나며, 그 곳에서 아직도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잔업이라니, 이건 블랙 기업의 횡포야'라던가, '드디어 퇴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만약 지금의 삶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 주고 싶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보니 이미 12시 1분이었다. 정말, 바보요우다. 12시에 딱 맞춰서 마시려고 했는데. 내가 캔의 뚜껑을 따자, '취익'하고 탄산의 소리가 조용했던 방 안에 울려퍼진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치카쨩, 건배."

4

도쿄에서 누마즈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젯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서인지 고속버스에 앉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누마즈역에 도착해 있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꺼내고,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곧이라도 비가 내릴 법한 회색 하늘 아래 누마즈역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한다. 강산이 변하려면 10년이 걸린다고 했던가. 우리는 1년 만에 이렇게나 변해버렸는데도, 누마즈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쿠아 단체 메시지방에 짤막하게 글을 남긴다. 누마즈역 도착했어. 순식간에 메시지 옆의 숫자가 줄어든다. 8, 7, 6, 5, 4, 3, 2, 1. 전부 확인한 모양이다. 나는 우치우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엄지를 움직여 이전에 보낸 메시지로 스크롤을 휙휙 올리고 있었다. 1이라는 숫자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는 듯이, 모든 메시지 옆에 존재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올라가면 숫자가 없는 메시지가 나올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 휴대폰 화면을 껐다. 어차피 내용은 알고 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이라도 새긴 듯이,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었다.

'오랜만에 다같이 만났으면 좋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의 나는 참으로 이기적이었다. 1년 전의 그 날 이전에, 나는 한 번도 누마즈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 각종 콩쿠르에서 한창 상을 휩쓸고 있던 시절이었고, 스케쥴은 항상 연습으로 꽉 차 있었다. 정작 나에게 그 꿈을 되찾아 준 사람은 누마즈에서 나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꿈을 자신이 노력한 결과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아쿠아의 모두들 비슷했다고 생각한다. 모두들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었고, 그 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여유가 생기면. 그 때 만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치카쨩은 항상 다같이 얼굴이나 봤으면 좋겠다고 카톡을 보내곤 했다. 다들 누마즈를 떠나고, 혼자 우치우라에 남아 있으려니 쓸쓸했겠지. 다들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항상 어영부영 넘겨 버렸다. 누군가가 시간이 되면 누군가는 안 된다고 말했다. 모두가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 다음에 만나자고 말했다. 다른 멤버의 스케쥴을 핑계 삼아, 자신이 누마즈에 돌아가지 않는 것을 합당화했다. 마치 명절에 지방에 내려가는 것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생각해보면 꼭 모두 같이가 아니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시간이 되는 사람은 되는 대로, 안 되는 사람은 나중에 따로라도 들렀으면 좋았을 것이다. 내가 연습을 하지 않는 날에 하루 정도 빼서 토치만에 들렀더라면. 코믹 마켓 일정을 하루 줄이고 우치우라로 갔더라면. 콩쿠르가 끝난 뒤 뒤풀이를 제껴 두고 치카쨩을 만나러 갔더라면. 그랬더라면 치카쨩의 태양과 같은 미소를 볼 수 있었을 텐데. 다시는 보지 못할 그 미소를 떠올린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아가씨, 버스 안 타요?"
"아, 아뇨. 죄송합니다."

버스 기사님의 말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이다. 과거의 나는 선택을 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치카쨩이 그렇게 허망하게 갈 줄 알았더라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5

오랜만에 버스를 탔더니 엉덩이가 아프다. 옛날이었더라면 하늘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났을지도 모르겠지만, 1년 전의 그 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헬리콥터를 타는 것을 그만두었다. 헬리콥터만 보면, 어떻게 해도 그 날의 긴박함이 떠올라 버리고 만다.
그 날, 나는 이탈리아에서 허겁지겁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 날도 스케쥴은 꽉 차 있었다. 오전에는 오하라 본가의 경영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하청 업체의 이사와 미팅이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난 뒤의 밤에는 다시 경영수업이 이어질 것이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어리광을 부린 만큼, 나는 그만큼 힘내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나를 한시라도 가만히 놔두지 않으려는 듯이 옆에서는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밥을 먹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울리는 휴대폰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처음 보는 사람의 전화가 오는 경우는 일상다반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모르는 번호의 앞에 일본의 국가번호가 붙어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귀중한 아침 식사 시간을 쪼개어 전화를 받아 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마리쨩... 마리쨩..."
"죄송합니다. 누구시죠?"
"치카가... 치카가...!"
"치캇치가?"
"교통사고..."

왠지 익숙한 목소리를 한 휴대폰 너머의 사람은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한 채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혼란스럽게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 사람의 말이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치카가. 교통사고. 두 단어 사이의 관계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기로 치캇치는 면허조차 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우리에게 비밀로 면허를 따고 동네 마실을 나갔다가 가벼운 접촉사고를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고등학생 때는 자주 그랬으니까. 오랜만에 떠올리는 그 시절의 추억. 나는 약간 향수에 젖은 채로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치캇치가 교통사고요? 그럴 리가."
"히끅... 흑..."
"사고가 났다면 '이야~ 저질렀네~'하고 카톡을 했겠죠. 바로 한 시간 전에도 다들 보고 싶다고 카톡도 했는걸요?"
"그 바보치카가... 죽었단 말이야!"

바보치카. 아, 휴대폰 너머의 사람이 누군지 이제서야 알겠다. 미토 언니였다. 하지만 이미 쉬어 버린 그 목소리에서는, 언제나의 활달하고 호탕한 그녀의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미토 언니가 저렇게까지 흐느끼는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쿠아가 러브라이브를 우승했을 때도 눈물을 찔끔 흘리며, 치캇치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웃던 사람이었다. 이제서야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은 나는, 휴대폰 너머로 그 믿기 힘든 소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었다.

"치캇치가... 죽..."
"다른 애들한테도 전화 돌리고 있어..."
"지금 당장 갈게요. 내일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빠르게 전화를 끊고 달려나갔다. 이건 치캇치가 우리를 보고 싶다고 꾸민 몰래카메라일 것이다. 우치우라에 다같이 모이면 치캇치는 집 안에서 '몰래카메라 대성공!'이라는 판넬을 들고 웃으며 나타날 것이다. 정말, 치캇치도 어쩔 수 없다니까. 이번만큼은 속아 주는 수밖에 없겠네. 나는 머릿속에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진행하며, 집 앞에서 기다리는 리무진에 타고는, 숨돌릴 틈도 없이 말했다.

"공항으로! 빨리!"
"하지만 아가씨? 오늘은 본가로 가셔야..."
"내 말 안들려? 밟으라고!"

나는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일주일 동안의 스케쥴을 전부 치워 버렸다. 스케쥴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항상 치캇치와의 전화에서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스케쥴이 너무 꽉 차 있어서 갈 수 없을 것 같다고만 했는데. 나에게 만나자고 하는 의지만 있었더라면 언제든지 이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1년 전의 일을 생각하며 가로등이 잔뜩 생긴 바닷가의 도로를 걷던 나는, 토치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토치만에 오는 것도 1년만인가. 옛날이라면 나에게로 뛰어들며 환영해 줬을 시이타케도, 그 1년 동안 많이 늙었는지 개집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사실 1년 전에도 내가 누마즈에서 다시 떠날 즈음에는 이런 느낌이었다. 아쿠아의 멤버들이 토치만으로 정신없이 달려올 때마다 그녀들을 반겨주던 시이타케는, 3일이 지나자 주인의 죽음을 깨달았는지 개집 안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자 하품을 하며 귀찮으니 빨리 가 보라는 눈치를 준다. 아니면 단순히 나를 보기 싫었을 수도 있고. 주인이 필요로 할 땐 보이지도 않더니, 무슨 낮짝을 하고 기어왔냐고 묻는 것일 수도 있다. 으르렁거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시이타케도 이제는 할머니가 다 되었다. 낳았던 강아지들도 토치만에서 기르기에는 너무 많아, 누마즈 여기저기에 분양했다고 들었다. 이제는 집 안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며, 하늘이 데려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치캇치에게도 그런 미래가 있었을 터인데. 평범하게 일하다가, 평범하지만 누구보다 치캇치를 아껴 주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기르다가, 독립을 시키고 나서는 툇마루 위에서 햇살을 받으며 녹차를 마시는 느긋한 삶을 보낸다. 간혹 찾아오는 아쿠아 멤버들을 환영하며, 서로의 고등학교 시절 앨범을 꺼내어 '지금은 주름이 자글자글하구만' 같은 농담을 던진다. 그렇게 천수를 누리다가, 어느 날 살짝 아파서 모두를 부르고, 모두의 앞에서 마지막으로 할 말을 남기고는 흙으로 돌아간다.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미래를, 치캇치는 1년 전에 빼앗겼다.
나는 어느새 개집 앞에서 쪼그려 앉은 채로 울고 있었다. 용서해 달라는 말만 연발하고 있었다. 아직 치캇치의 제단도 채 보기 전인데 이렇게 울어서야, 그 때는 어느 정도로 울지 예상도 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그렇게 울고 있으니,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너희 탓이 아니야."
"...시마 언니."
"자신을 탓해도 가슴만 아플 뿐이야. 여기 있다가는 감기 걸릴 거야."
"몇 명이나 와 있나요."
"카난쨩 빼고는 다 왔어. 아와시마에서 잠깐 부모님 뵈고 오겠다 하던데."
"그런가요..."
"카난쨩은 하나마루쨩이 픽업해 오기로 했어. 자, 빨리 들어가자."

나는 시마 언니에게 이끌려 토치만으로 향했다. 내가 토치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시이타케는 개집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6

"아, 어서 와."
"응..."
"마리, 벌써 울었구나."
"그러는 요시코도 눈시울이 빨간걸."
"이건 어제 밤새서 과제해서 그런 거야."
"여전히 거짓말이 서투르네."

1년 만에 보는 마리와 농담을 하듯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서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토치만 안에 깔린 무거운 중압감에 찌부러져 버릴 것만 같아서. 계속해서 코끝에 맴도는 향의 냄새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아서.
여기 있는 아쿠아 멤버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살아 있을 때 더 만나 주지 못한 죄책감. 치카보다 자신의 일을 더 중요시했다는 죄책감. 비록 우리들이 치카를 죽인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곧 방에서 미토 언니가 나와 마리를 데리고 제단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서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기 있는 멤버들 모두가 겪은 일이다. 제단을 장식하는 치카의 얼굴을 보면 저럴 수밖에 없다. 제단 위에서, 치카는 과거와 같이 빛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치카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같이 바보같은 장난을 하며 웃었던 시절이 생각나서, 대학교에 간다는 우리들을 웃으며 배웅해주던 그 치카가 생각나서 눈물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잠깐 바람 좀 쐬러 갈까?"
"요우..."

나는 요우와 함께 토치만 앞 해변으로 걸어나왔다. 이 해변에도 참 많은 기억이 있었다. 0표를 얻고 분해서 울던 치카, 다같이 체력단련을 할 때 웃으며 달리던 치카, 종이비행기를 접어 수평선으로 날리던 치카, 모래사장에 Aqours를 새기고는 바닷물에 쓸려나갈 때까지 바라보던 치카. 누마즈의 어디를 가도 치카와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누마즈에 있을 수 없다. 너무나도 약해서, 치카에 대한 죄책감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살 수 없다.
한참동안 나와 같이 바다를 바라보던 요우는 재킷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 했다. 바닷바람이 강해 몇 번이나 실패했지만, 결국에는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치카가 봤으면 싫어했을 텐데.

"담배 피우기 시작했구나."
"응, 항해학교가 좀 힘들어야지."
"...1년 전에는 안 피웠잖아."

요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담배연기를 쭉 빨아들여 폐 안에 머금고는, 다시 뱉어낸다. 단지 그것의 반복이었다. 담배를 즐기는 표정은 아니었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진짜 더럽게 맛없게 핀다. 요우는 담배를 피우며 토치만 쪽으로 걸어가더니, 거의 필터까지 태워버린 담배를 근처의 재떨이에 비벼 껐다. 치카와의 추억이 깃든 바다를 더럽히고 싶지 않다는 듯이.

"다 피웠어?"
"한 대만 더 태우고 들어갈게. 먼저 들어가고 싶으면 가도 돼."
"아냐."

탁, 탁, 탁. 라이터에 불티가 튀어오르고, 요우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문다. 담배연기를 쭉 들이켜다가, 콜록거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럴 거면 왜 피우냐고 물으려던 찰나, 다시 담배연기를 들이쉬는 요우를 보고는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자살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면 치카가 슬퍼할까봐 그것조차 하지 못하고, 담배를 태우며 빨리 하늘이 자신을 데려가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요우는 담배로 자신의 목숨을 태우며, 치카에게 공양하고 있었다.

"나도 한 대 줘."
"요시코쨩, 담배 안 피잖아."
"그냥 달라면 줘."

요우는 내 입에 담배를 물리고는, 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연기를 쭉 들이쉬자, 버틸 수 없는 고통과 뜨거움이 몰려온다.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피는 거냐고 생각하며 기침을 하다, 담배를 입에서 떨어뜨려 버렸다.

"아아, 아깝게."
"콜록, 콜록!"
"처음엔 다 그렇긴 하지만... 왜 달라고 한 거야?"
"...이걸로 공범이네."

나는 살짝 미소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요우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둘 중 누구도  이 상황이 재밌거나 기뻐서 웃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담배연기처럼 씁쓸한 웃음이, 토치만 앞에 있었다.

7

아와시마에서 다시 누마즈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나는 배 끝부분에 기댄 채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바람이 강하다. 파도소리도 거칠다. 내가 유학을 가 있는 호주와는 많이 다른 환경이었다. 호주의 바다는 따뜻하고, 파랗다 못해 에메랄드빛을 띠고, 파도는 서핑을 하기 좋을 정도로 높으면서도 거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쪽 바다가 더 끌리는 것은 왜일까. 나고 자란 곳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녀석에게 호주의 바다는 너무 과분하다고 느끼는 면도 있었다. 소꿉친구 하나 제대로 봐 주지 못한 여자에게, 호주의 바다는 너무 상냥했다. 이 정도로 거친 바다가 나에게 딱 맞는다.
리코쨩이라면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나. 과연 이 바다는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우리에게 뭐라고 화를 내고 있을까. 성난 파도가 다시 한 번 올라오더니, 배에 부딪혀 부서진다. 저 파도가 나를 노리고 있었다는 건 역시 자의식 과잉이겠지.
점차 가까워지는 선착장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갈색 머리에 조그마한 체구, 하나마루다. 누구보다 기계와 멀리 살 것만 같았던 그녀가 졸업하자마자 면허를 딴 것은 예상 외였다. 자동차를 타고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다고 하던 그녀는, 1년 전부터는 본가의 절에 귀의해 있었다. '진정한 답은 바깥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닐까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스스로 누마즈에 속박되었다. 그녀 나름의 속죄일 것이다. 나는 배에서 내려 하나마루의 차로 걸어가며, 그녀와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난쨩, 너무 늦어유. 다른 멤버들은 다 왔지라."
"미안, 미안. 혹시 세이라씨보다도 늦진 않았지?"
"그쪽은 밤 늦게 오게 될 것 같다던디유."
"그렇구나."

딱 두 명이 탈 수 있는 경차에 몸을 구겨넣는다. 경차가 밑으로 살짝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안전벨트를 맨다. 차 안은 먼지로 가득차 있었다. 근 1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별로 닿지 않은 것이겠지. 하나마루는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았지만, 속력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기껏해야 20km 정도이려나. 그녀가 초보운전이라거나, 차가 고장났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촉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뒤에 차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이 쪽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그 날, 트럭이 20km를 밟았더라면 치카는 죽지 않았을 테니까.
나와 하나마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앉아 있었다. 막상 옆자리에 앉으니, 하나마루와 단둘이서 이야기할 주제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아쿠아 때도 1학년과 3학년은 좀 친해질 필요가 있다고 한 마디를 들었다. 그 말을 한 것도 치카였나. 치카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를, 그녀를 잃고 나서야 새삼스레 깨닫는다. 좀 과도할 정도로 가로등이 많이 서 있는 해안도로를 바라보며, 나는 이 어색한 침묵을 깨 보려고 했다.

"가로등이 많이 생겼네."
"마리쨩이 기부한 돈으로 세운 거유."
"...얘기만 했으면 나도 도와줬을 텐데."
"이것도 마리쨩이 치카쨩네를 설득한 끝에 한 거유. 아쿠아 명의로 기부하면 치카쨩이 죽었다는 게 대대적으로 퍼질까봐, 오하라 그룹 명의로 협의를 봤슈."

나에게도 알리지 않다니 약간 서운한 감정은 들었지만, 치카네가 그랬다면 어쩔 수 없다. 치카네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TV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오는 연예인의 소식들에서, 그 연예인을 위해 쓴 기사는 없다. 사람들은 연예인이 행복하게 사는 뉴스보다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뉴스를 좋아한다. 연예인이 비극적으로 죽었다면 대중과 매체는 그것을 슬퍼하는 척 하며 자신들의 안주거리로 삼는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것을 보는 가족들은 어떤 심정일까. 그럴 바에야 아예 알려지지 않는 편이 낫다.

"다 왔슈."

나와 하나마루는 차에서 내렸다. 상쾌한 바닷바람이 아닌 매캐한 연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토치만 쪽을 바라보니, 요우가 한 손에 담배를 들고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요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쪽에 손을 흔들었고, 곧 요시코도 뒤를 돌아보았다.

"늦었네, 카난."
"늦었지."
"안쪽에 갔다 와. 카난쨩만 끝나면 성묘하러 갈 거니까."
"그래."

늦었다. 치카의 미소를 다시 보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 늦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8

우리 집으로 가는 동안 아쿠아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여덟 명이 모였는데도, 처음 보는 사이만큼이나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동안 걸었을까. 이윽고 절에 도착할 즈음에, 루비쨩이 울음을 터뜨렸다.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모두들 루비쨩과 같은 기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눈물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고 있었다. 절에 귀의하면서 치카쨩의 곁에 가는 것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이 날은 달랐다. 아쿠아의 모두와 함께하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 지 왔슈."
"다들 온겨?"
"그려유. 준비해놓은 공물은 어디 있어유?"
"저기 있잖여. 음복에 쓸 사케도 들고 가그라."
"고마워유."
"무릎이 아픈 거 보니 비가 올 겨. 우산 필요혀?"
"아녀유."

할머니가 가리키시던 곳에는 귤 9개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귤 농장에서 어제 따서, 따뜻한 곳에서 약간 숙성시킨 귤. 가장 맛있을 시점이다. 코타츠에 틀어박혀 소라게같은 모습으로 귤을 먹던 치카쨩을 생각하며, 나는 비닐봉지에 귤과 사케를 담았다.
모두를 데리고 절 뒤편으로 가자, 언제나의 풍경이 있었다. 수도 없이 놓여있는 비석들. 내가 절에 귀의한 후에 세워진 것도 있는가 하면, 언제 세워졌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것도 있다. 세월의 풍파에 이름이 지워져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비석도 있다. 여기에서 매주마다 비석들을 닦으며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실감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리라는 것도. 치카쨩은 조금 빨리 갔을 뿐이라고 이번 1년 동안 생각했다. 그것을 슬퍼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3달 전부터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치카쨩의 묘를 보고 눈물을 참을 수 있게 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도, 아직도 치카쨩의 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얼마 걷지 않아,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치카쨩의 묘 앞이었다. 정확하게는 타카미 가의 가족묘겠지만, 거기 있는 수많은 이름들 중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녀의 이름밖에 없었다. 1년 전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은 다른 이름들보다 확실히 또렷했다.
치카쨩을 위해, 묘 앞에 향을 피우며 소리내어 기도했다. 불경도 외어보고, 기도문도 외어보았다. 어떤 신이라도 좋으니 치카쨩이 행복해지게만 해 달라고 빌었다. 내 뒤에서는 모두가 엄숙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가 끝나고, 나는 술을 한 잔 따라 비석 앞에 귤과 함께 놓았다. 이제는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이다.

"...역시 우리는 치카쨩이 있어야 모일 수 있구나."
"치카쨩, 내년에도 올게. 이 날이 아니더라도 배에서 내리면 꼭."
"치카쨩... 히끅... 자주 못 와서... 미안해..."
"치카, 편히 쉬어."
"치캇치..."
"치카씨, 내년부터는 자주 뵐 수 있겠네요."
"치카, 내일 호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올게."
"치카쨩, 오랜만에 다같이 모여서 좋았어유."

볼에 차가운 물기가 내려앉았다. 눈물인가 해서 눈을 만져 보니, 눈물은 뜨거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치카쨩이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아서, 우리는 한참동안이나 하늘을 보고 있었다. 강한 바람이 벚나무를 흔들었다. 이파리 없는 가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9

'하나!'

놀라서 벚나무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나뭇가지끼리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이 소리는 분명히. 분명히 치카쨩의 것이었다.

"둘!"

리코쨩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로, 손으로 V자를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원형으로 모였다.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들렸어?"

리코쨩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카쨩은 이름 그대로 천 개의 노래가 되어 우리의 곁에 있었다.

'제로부터 1에, 1에서부터 그 너머에! 아쿠아! '

바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치카쨩의 목소리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선..."

우리는 모두 눈물을 삼키느라 다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조차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애써 내려와 준 치카쨩을 위해, 우리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샤인!"

치카쨩의 비석 앞에 놓아둔 술잔에, 눈이 떨어졌다가 녹아 사라졌다.



아쿠아로는 개그밖에 써본 적 없는 거 같아서 시리어스 도전
근데 아쿠아도 이제 짬이 꽤 되다 보니 웬만한 소재들은 거의 사용이 끝나서 구상에 애를 좀 먹음
원래는 배를 탄 요우와 여관에 있는 치카의 거리를 소재로 써볼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선원의 연인 마이너카피인 거임
그래서 아쿠아의 거리감을 늘려 놓고, 치카가 얼마나 아쿠아에 소중한 존재였는지 생각해 보기로 함
결국 얻은 결론이 수명물, 근데 죽어가는 걸 그린 작품은 너무 많으니 오히려 죽은 후를 그려보고자 했음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라 죽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참 아팠음

이야기는 9개의 단편이 모인 형식
각 편마다 화자가 바뀐다는 게 포인트
9편의 화자가 누구인지는 독자에게 맡김

제목은 천 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노래에서 따 왔음
치카는 千歌, 즉 천 개의 노래로 해석함
눈치가 좋은 사람들이라면 제목에서부터 치카가 죽었다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을 거임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다음에는 가벼운 니지 ss 생각중
여기까지 읽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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