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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플) 혹한

명워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9.21 20: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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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추웠던 겨울이었다. 눈조차 내리지 않을 서슬퍼런 추위는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많은 목숨을 해쳤다. 나날이 늘어가는 동사자의 숫자에 인강전의 불빛은 꺼질줄 몰랐다. 낮에는 수라도 물린채 조계문서를 살피고 삭풍이 불어오는 밤에는 야장의차림으로 피해를 줄일 방안을 떠올리기 위해 골몰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몸이 쇠해지고 병마가 침투했다.



어느날 한낮에 왕은 첨성대의 천문박사를 친견하기 위해 가다가 쓰러졌다.



열이 화로에 올려놓은 듯 들끓었다.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떨어질줄 몰랐다. 궁안이 벌집을 쑤신듯 난리였다. 관리들은 죄다 비상이었다. 상장군 유신은 화랑들과 함께 하늘에 제를 지냈고 시위부령 알천은 전국의 실력있는 의원들을 수소문했다. 사량부령 비담은 매일 밤낮으로 왕의 곁을 지켰다.



신하들 모두가 바늘구멍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누구도 불가에 귀의한 태후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왕의 병환을 들은 마야는 그날로 석불 앞에 꿇어앉았다. 벼랑을 깎아 만든 석불 앞에서 찬 바닥 위에 비단홑겹을 입고 빌었다. 주변의 여승들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마야의 두 눈은 얼어붙은 새벽 공기 사이로 석불을 올려다보며 빌었다.



‘딸을 버린 고약한 이는 저입니다. 성골의 대를 끊은 죄인도 저입니다. 허니 부처님. 황상을 살리시고 저를 데려가십시오. 이 죄많은 목숨 아낌없이 내어 놓을테니 황상을... 그 불쌍한 여식만큼은 빼앗지 말아주십시오.’



마야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고개를 조아렸다.




열흘이 넘도록 열감기를 앓은 왕은 가까스로 깨어났다. 급보를 듣고 입궐한 만명이 식은 땀이 말라붙은 왕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았다. 잔뜩 말라 까칠하게 갈라진 왕의 입술 사이로 쓴 약을 흘려넣었다. 왕은 깨어난 이후로도 이틀이나 누워있고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동안의 고초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왕이 베개에 등을 받치고 상체를 일으켰다.



“참으로 천운이 함께하셨습니다.”



만명은 주름진 뺨에서 눈물을 찍어냈다. 왕은 힘겹게 웃었다. 열흘이 넘도록 깊은 잠은 잔 왕은 제것이 아닌 양 뻣뻣해진 사지를 꼼지락거리다가 말했다.



“태후께 연통을 넣어주시겠습니까?”



덕만의 말에 만명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덕만은 멋쩍게 웃었다. 다 큰 여식이 어미를 찾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실은... 쓰러진 동안 꿈을 꾸었습니다. 태후... 어머니께서 아픈 제 곁을 지켜주고 계셨습니다. 죽은 유모와 함께요.”

“폐하...”



덕만의 말에 만명이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덕만이 불길처럼 번지는 불길함에 잿빛얼굴로 변했다. 덕만이 손을 뻗어 만명의 왼손을 덥썩 잡았다. 병자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틀 전... 태후께서 독감으로... 승하하셨니다.”



 늙은 노인의 몸은 삭풍을 견디지 못했다. 열흘간 찬 바닥 위에서 기도를 올리던 노인은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여인의 희생이 왕의 소생을 야기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됐든 왕은 깨어나고 노인은 명을 달리했다. 만명의 말이 돌도끼처럼 덕만의 머리를 내려쳤다. 만명의 손을 붙잡았던 덕만의 손아귀에서 힘이 쓸려내려갔다.



‘아직 아픈거야. 환청이야. 모든 것이 거짓이야.’



덕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리질쳤다. 머리 한 구석으로 밀렸던 병마의 혼돈이 전염병처럼 온 몸으로 퍼져들어갔다.



덕만은 병상에서 까무라쳤다.




장례는 한달간 지속되었다. 얼음 위에 받쳐진 태후의 시신 앞에 문무백관이 고개를 숙이고 조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왕은 상복으로도 정무를 보살펴야했다. 병마를 이겨내 용상에 앉은 왕은 상주의 염치가 없었다. 다시 쓰러져 국정을 마비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꼬박꼬박 올라오는 수라를 꾸역꾸역 삼켜야 했고 몸을 보하는 탕약을 챙겨 먹어야했다. 왕 대신 태후의 외손인 춘추를 보내 상주역할을 하도록 해야했다. 왕은 태후의 딸이기 이전에 백성의 어버이였다.



그런 왕을 올려다보는 신하들은 그녀의 의연함에 입을 모아 칭찬했다. 누구도 독하다고 말하는 이 없었다. 왕이란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를 잘 아는 이들은, 예컨대 사량부령이나 시위부령, 상장군같은 신하들은, 호수처럼 고요한 왕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걱정했다. 왕의 얼굴은 고요한 대신 창백했다. 창백한 왕의 얼굴은 사람의 것보단 하얀 탈 같았다. 왕은 탈을 쓴 사람같았다. 그 속에 검게 타버린 심장을 숨겨놓은 것 같았다.



태후의 발인일, 왕은 친히 장례가 치러지는 절로 행차했다. 하얀 상복을 입고 상여를 뒤따라 태후의 시신이 땅에 묻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동요없이 발인을 지켜본 왕은 환궁하던 황제연을 갑자기 돌렸다. 태후가 지내던 절로 향했다.



왕은 태후가 늘 기도하던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왕이 부처의 앞에 섰다. 문이 열린 틈 사이로 사량부령, 시위부령, 상장군이 불안한 눈빛으로 왕의 뒤를 지켰다.



왕은 가운데 모셔진 부처를 올려다봤다. 바위가 벼락에 깨지듯 덕만의 절규가 터졌다.



“대체 내가...!”



덕만의 목소리에 바닥을 내려다보던 세 남자의 시선이 방 안으로 향했다. 덕만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당신께 무엇을 그리 잘못하였습니까!!”



온 몸을 뒤틀어 악을 쓰는 덕만의 두 눈빛이 불볕처럼 부처를 쏘아붙였다.



“내가 당신께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부모가 날 버리게 하고...!!”



갑작스런 분노로 온 몸에서 경련이 일고 있었다. 머리뼈 이곳 저곳에 파도처럼 하얀 울분이 자잘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내 언니를 빼앗고...!! 날 더러..., 날 더러...!!”



덕만은 오욕에 젖어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이 혼미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깨문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덕만은 신음소리를 섞어 말했다.



“두번씩이나... 어미를 잡아먹게 하는 겁니까...!”



온 몸의 혈관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분노로 인해 두 눈에서는 눈물조차 흘러내리지 않았다. 대신 바짝마른 눈동자에 부처상이 비쳤다. 눈 앞에 평온히 앉아있는 부처는 변함없는 미소로 덕만을 내려다봤다. 자신의 분노에도 미동없는 미소에 덕만의 머리가 핑 돌았다.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던져놓고 사람좋은 미소로 화답하는 부처의 얼굴에 머리 속이 하얗게 젖어내렸다. 덕만은 답답한 가슴을 쾅쾅 치다가 시야에 담긴 촛대를 집어들었다. 덕만이 부처를 향해 촛대를 던질듯 들어올리자 바깥에서 알천과 유신이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두 남자는 덕만의 팔과 몸을 붙들었다.



“폐하, 아니되옵니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부디 내려놓으시옵소서!!”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그제야 두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덕만의 울음은 대나무 숲을 닥친 바람처럼, 갯바위에 부딪친 파랑처럼 웅장하고 자잘하게 대웅전을 몰아쳤다. 그러나 두 신하는 덕만의 몸을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왕즉불. 왕이 곧 부처다.



부처와 왕을 동일시 하여 왕권을 다지려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왕의 뜻이었다. 이제와 왕이 부처를 깨부신다면 기껏 구축해놓은 왕권에 큰 흠집이 생길 것이다. 유신은 끓어오르는 애잔함을 쇠사슬로 붙들어놓으면서 덕만의 팔을 붙잡았다.



한데 뒤엉킨 세 사람의 그림자가 한참동안이나 들썩였다 떨어졌다. 덕만의 손에서는 마침내 촛대가 떨어졌다. 덕만은 턱 밑에서 올라오는 숨을 몰아 쉬며 몸에서 떨어진 알천을 매섭게 노려봤다.



짝.



마른 덕만의 손바닥이 알천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한번도 알천을 무례히 대해본적 없는 덕만의 폭력에도 알천은 동요없이 고개를 숙였다. 덕만은 소리쳤다.



“네가 막았어야지!”



덕만의 분노가 이번에는 유신에게 닥쳤다. 덕만이 좌측에 선 유신의 가슴에 주먹을 내리쳤다.



“네가 목숨을 걸고 막았어야지! 나의 신하라면서, 네 놈들의 왕이라면서!!”



오래된 훈련으로 몸이 다져진 유신에게는 무리없는 충격이었다. 도리어 유신의 가슴을 내치는 덕만의 몸이 휘청거렸다. 덕만은 주먹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네놈들이 막았어야지...! 내 어머니를... 살려줬어야지...!”



덕만이 알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도리어 흔들리는 것은 덕만의 몸이었지만, 덕만은 혼미한 절규를 쏟아냈다. 실이 끊어진 연처럼 흔들리던 덕만의 목소리가 힘없이 잦아들었다. 아스라이 정신을 놓은 덕만의 허리가 부러진 나무처럼 꺾였다. 뒤로 쓰러지는 덕만의 어깨를 유신이 재빠르게 받쳤다. 붉게 얼룩졌던 덕만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제야 바깥에서 지켜보던 비담이 문지방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폐하...! 폐하!!”

“정신 차리시옵소서, 폐하!”

“게 아무도 없느냐! 어의, 어의를 불러라!!”



유신이 알천에게 덕만을 업혔다. 백지장처럼 가벼운 덕만의 몸이 알천의 등에 힘없이 업혔다. 덕만의 몸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차가웠다.



실신한 상태로 황궁에 돌아온 덕만의 몸은 다행이도 무사했다. 어의는 덕만이 충격을 받아 쓰러진 것일 뿐, 옥체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덕만의 몸을 침상에 뉘여놓고 밤 중에 퇴궐하던 유신은 돌길을 걸어가다 뒤에 걷던 비담을 돌아봤다.



“자넨 왜 폐하를 말리지 않았나.”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던 비담이 말없이 두 눈을 치켜 유신을 보았다. 갑작스런 비난에 중간에 가던 알천도 걸음을 멈췄다.



“누구는 좋아서, 부처를 깨부시고 싶은 폐하의 마음을 몰라서, 세상을 원망하는 폐하의 운명을 몰라서 폐하를 말린 줄 알아? 폐하께선 이 나라의 임금이야! 임금이 자기 기반을 무너뜨릴 순 없네. 그걸 알기에 나도, 알천도 목숨을 걸고 폐하를 말린걸세. 혼자서만 폐하를 이해하는 듯, 폐하의 모든 것을 응원한다는 듯 굴지 말란말일세!”

“네가... 그 심정을 알아...?”



비담은 차갑게 말하고 한발짝, 한발짝 앞으로 걸어나갔다. 얼음 송곳처럼 차갑고 뾰족한 말이 비담의 목구멍에서 터져나왔다.



“화랑으로 태어나, 화목한 부모 밑에서 귀하게 태어나, 부족할 것 없이 자란 네놈이... 부모에게 버려진 마음을, 부모의 죽음 위에 자란 자의 마음을... 안다고...?”



비담은 유신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착각하지 마라, 유신. 내가 섬기는 분은, 폐하이지 이 나라의 왕이 아니야...! 네 놈이 연모와 충성을 동시에 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게도 그걸 강요하지말란 말이야.”



유신의 멱살을 놓은 비담은 그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신라의 동토를 얼어붙게 한 동장군의 추위는 임금의 몸과 마음을 해친 것도 모자라,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굳은 바위같던 사내들의 정성마저도 정으로, 망치로 잔인하게 깨부시고 지나갔다.






-


봄볕에서 말했던 쓸려고 했었다는 상플이야

덕만이에게 더 힘든 상황을 쓰는게 싫어서 안썼었는데 부처한테 따지는 덕만이 모습 그려보고 싶어서 쓰게됐지ㅠㅜ

덕만이에게 너무 잔인해서 상플 중에서도 그저 누군가의 악몽이라고 생각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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