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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도전] 2024년 4월 결산 내가 완독한 책들앱에서 작성

Choi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30 21:28:57
조회 1112 추천 13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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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3월달과 독서량을 비교를 해봤을 때 단순 권수로는 동일하지만 페이지 수로는 확실히 뒤쳐지는 것 같다. 다음 달에는 보다 더 많은 책을 읽어볼 것을 다짐하면서 이번 4월 동안 읽었던 책을 결산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1. 상실의 시대 또는 노르웨이의 숲 (ノルウェイの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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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상실의 시대 中 -

1949년 교토에서 출생한 일본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의 대표적인 장편소설 중 하나인 상실의 시대를 읽어봤다. 그는 일본 문단에서 활동한 작가이지만 일본 문학보다도 F.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카버, 커트 보니것 등 영미 문학을 더 많이 읽으며 문학가의 꿈을 키웠고, 그의 작품 세계도 주류 일본 문학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1979년 중편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風の歌を聴け)로 데뷔하였고, 그 이후로도 자신만의 특이한 작풍이 녹아든 여러 작품들을 출간하며 알음알음 이름을 알려왔다. 그러다 하루키는 여태까지 그가 애용해왔던 환상적이고 오컬트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보다 현실적인 톤의 연애소설인 본작을 1987년에 출간하는데, 이게 공전의 히트를 치며 그는 가장 인기있는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본작의 국역본 제목과 관련해서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본작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비틀즈의 노래 중 하나인 'Norwegian Wood'를 작가가 자신의 주관을 섞어 번역한 제목이었다. 초창기 본작의 한국 출판을 맡았던 문학사상에서도 처음에는 원제를 그대로 번역해서 출간했지만 판매량이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작품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안하여 재출간하자 말 그대로 초대박을 쳤다. 이후 80~90년대 대학생들의 준필독서로도 자리 잡았고, 지금도 스테디 셀러로써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평소에 나도 하루키의 명성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고,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을 원체 좋아하기도 해서 이 책을 읽어보길 벼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문학사상판이 아니라 원제 그대로 번역한 민음사판을 읽으려 했지만, 우연히 문학사상판을 중고로 팔고 있는 걸 알게 되서 그냥 옛날 번역이어도 당장 읽어보는 게 낫겠다고 판단되서 하루빨리 거래해서 책을 얻은 후 읽어봤다.

이 책은 37세의 장년인 와타나베라는 사나이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고독에 흠뻑 젖었던 그는 문득 옛날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데, 이전에 만났던 인연인 나오코가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던 얘기가 생각나 자신의 청년 시절을 글로 적기 시작한다. 때는 20년 전으로 그가 고향인 고베에서 17세 고등학생으로 지냈던 시절이었다. 그는 기즈키라는 동급생과 친구가 되었는데 그에게는 나오코라는 동갑내기 여자친구가 꼭 붙어 다녔다. 이 때문에 셋이서 만나는 일이 잦아졌는데, 처음엔 어색했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이렇게 특이한 관계에 모두가 익숙해지고 셋이서도 곧잘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즈키가 와타나베에게 평소와 같이 당구장에서 내기 게임을 할 것을 제안한다. 삼세판으로 게임을 했는데 첫 판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을 하며 와타나베가 이겼지만 나머지 두 판은 기즈키가 모든 전력을 다하며 게임을 한 끝에 두 판 모두 기즈키가 이겼다. 유독 진지하게 당구를 쳤던 게 이상했던 와타나베는 기즈키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그는 그저 오늘만큼은 반드시 이기고 싶다고만 대꾸하였다. 바로 그 다음날 와타나베에게 기즈키가 유독가스를 과다 흡입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들이 닥친다. 이는 주인공과 그의 하나뿐인 연인 나오코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 이후로 주인공과 나오코의 연락도 두절되고, 1년이 지나 와타나베는 고향을 떠나 도쿄에 있는 한 사립대학의 문학부로 진학한다. 하지만 그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대학 강의와 혁명을 부르짖지만 실상은 엘리트주의와 위선에 찌든 전공투 학생들,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의 기숙사 생활에 엄청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 때려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지루함을 극복하는 오랜 훈련을 한다고 생각하며 지루한 일상을 견뎌 나가고 있던 와중에, 우연히 도쿄 전철역에서 나오코와 재회한다. 그녀도 고향을 떠나 영어 교육으로 유명한 도쿄의 조그만 여자 대학으로 진학하였는데, 그녀는 꽤나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원래 그녀는 꽤나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던 학생들의 사이의 인기 스타였지만, 도쿄로 상경한 나오코는 옷도 검은색, 흰색 위주의 단조로운 옷차림을 하고 집 또한 가재도구가 최소한으로 있는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서로 반갑긴 했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은 채 건조한 톤으로 여러번 만남을 가졌다. 그러다가 4월 즈음 나오코에 생일이 다가오자 와타나베는 케이크를 하나 사서 나오코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케이크도 주고 레코드도 틀어 나름 생일 분위기를 내면서 나오코를 축하해줬지만,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나오코는 펑펑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안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심적인 소재는 바로 상실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죽으면서 생기는 상실감이 메인이 되는 책이다. 작품에서 주인공이라고 할만한 등장인물인 와타나베와 나오코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 다름 아닌 둘의 친구였던 기즈키의 자살이다. 이외에도 주조연 등장인물들이 주변인들의 죽음으로 인해 상실감에 시달린다. 본작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위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삶에서 동떨어진 단순한 과거에 지나치 않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녹아들어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처럼 작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교묘히 무너뜨려 놓는데, 상술했던 바와 같이 현실적인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도 퍽 몽환적인 느낌이 나기도 한다. 더불어, 꼭 죽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고 있는 인상을 줘서, 한층 더 오묘한 느낌이 연출된다.

작품이 다루는 소재가 상실감과 죽음인 만큼 본작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음울한 편이지만, 하루키의 담박하면서도 포근한 문장이 더해져서 그런지 제법 서정적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자신의 쓸쓸했던 과거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놓지만, 당시 느꼈던 쌉쓰름한 감정도 아낌없이 털어놓는 장면이 애수를 자아낸다. 또 상술한 우울함도 독자들의 기분을 밑도 끝도 없이 침잠시킨다는 느낌보다는 서서히 마음에 스며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완급조절이 잘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기대했던 것 보다 이야기가 얄팍하다는 인상이 들어 100% 만족을 하지는 못했지만, 앞서 얘기했던 바와 같이 작품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서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작품에서 모난 부분들이 몇 개가 보일지언정, 작품 내내 녹아 있는 감성만으로도 매혹적이다 보니 새삼 이 책이 왜 그렇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본작의 분량 자체가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은 편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보편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는 만큼, 평소에 책을 안 읽던 사람들에게도 한 번 정도 일독을 권장한다.

2.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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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명예, 용기나 신성함 따위의 추상적인 단어들은 콘크리트에 적힌 마을 이름, 길의 갯수, 연대의 숫자, 날짜 옆에 갖다 붙이기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말이었다. (Abstract words such as glory, honor, courage, or hallow were obscene beside the concrete names of villages, the numbers of roads, the numbers of regiments and the dates.)”

- 무기여 잘 있거라 中 -

1899년 미국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 태생의 소설가이자, 미국 근현대 문학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장편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헤밍웨이는 마초적인 성격으로 끗발을 날렸던 만큼 젊은 시절 격렬하고 위험한 활동을 즐겨했는데, 그 일환으로 제1차 세계대전 한창이던 1918년 이탈리아 적십자사에 구급차 운전기사로 자원하여 포탄이 날아다니던 이탈리아 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1929년에 출간된 본작은 소싯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집필하였던 작품인데, 전쟁의 참혹함과 허무함을 탁월하게 표현함으로써 미국을 넘어 세계 문학계에서 명성 있는 작가로 발돋움한다. 나는 이 책을 읽어보기 전에 헤밍웨이의 또다른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책의 해설을 보면 헤밍웨이의 초기작과 후기작인 노인과 바다를 비교하면서 그의 작품관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비교해 보는 내용이 있었다. 이 때문에 호기심이 동해서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본작을 찾아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자연 풍광과 함께,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텅텅 비어버린 국경지역의 마을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주인공인 프레데릭 헨리 중위는 미국인이지만, 로마에서 건축 공부를 해서 이탈리아어에 능통한 편이라 미군이 아닌 이탈리아군에 입대하여 군용 구급차를 책임지는 의무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당시 연합국이었던 이탈리아군은 동맹국의 일원인 오스트리아군과 교전하고 있었는데 전황이 좋았다가 나빠지는 걸 반복하면서 전선이 고착화되고 있었다. 전황이 경색되었던 와중에 헨리는 잠시 장기 휴가를 얻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고 온다. 여행에서 돌아와 전선의 임지로 돌아온 그는 룸메이트이자 친하게 지내던 군의관인 리날디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바로 근처 병원에서 영국인 간호사 두명을 봤다는 얘기였다. 호기심이 동한 헨리는 리날디의 손에 이끌려 간호사가 있는 병원으로 간다. 거기서 그는 캐서린 바클리라는 금발의 간호사에게 반하고 만다. 간호사는 아니고 자원봉사자라고 자기소개를 하던 그녀는 특이하게도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다녔다. 어째서 그런 걸 들고 다니냐고 헨리가 묻자 캐서린은 8년간 열애했던 약혼자가 있었는데 그사람도 영국군으로 징병됐다 솜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답변했다.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 만남을 가졌는데,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한 관계였지만 이윽고 두 사람 모두 진한 애정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공세를 가할 예정이라며, 발생할 부상자에 대비해 헨리 중위에게 구급차를 최전선에 배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하달된다. 그는 휘하 운전기사들을 이끌고 밤낮없이 최전선으로 구급차를 끌고 간다. 끝내 구급차를 최전방 야전병원으로 끌고온 헨리 일행은 강행군 때문인지 무척이나 허기졌고, 중위는 운전기사들을 위해 부대에서 먹을거리를 얻어오기로 한다. 야전병원에 주둔하던 동료 장교들의 냉대를 견딘 채 간신히 차가운 파스타와 치즈를 얻어온 헨리는 부랴부랴 운전기사들에게 가려했다. 하지만 야전병원을 책임지던 소령은 곧 있으면 포격이 시작될 예정이니 그게 끝날 때 까지 기다리라며 그를 만류한다. 하지만 기사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소령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사들에게로 향한다. 다시 재회한 일행은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털어놓고 있었는데, 그러던 와중 섬광과 엄청난 소음이 그들에게 들이 닥친다.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헨리는 끔찍한 비명소리를 듣게되고 그를 도우고자 몸을 움직이려 한다. 하지만 그는 이윽고 다리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본작은 전쟁과 사랑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격렬하면서도 차분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본작에서 주요 사건이 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참전국들은 조국의 수호화 평화, 영광을 위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며 국민들의 적극적인 입대와 참전을 독려한다. 실제로도 많은 젊은이들이 각자의 조국이 펼치는 선전을 믿고 애국주의에 고취되었고, 또 전쟁에 대한 환상도 있어서 자발적으로 입대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의 실상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서로의 명예를 위해 자웅을 겨루는 아름다운 전투가 아니라 땅 몇 평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수백명에서 수천명의 목숨을 갈아넣는 소모전이었다. 그야말로 사람 하나 하나의 목숨이 파리 목숨 같았습니다. 이런 잔혹한 전투가 몇년 동안 지난하게 펼쳐지다 보니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참전하는 군인들 사이에는 전쟁을 향한 염증과 회의주의가 만연했다. 이 책에서도 전쟁이 지니는 허무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령 주인공인 헨리 중위가 단순 참호 바깥에서 밥을 먹다가 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한 게 전부임에도 뜬금없이 전우를 도왔다는 이유로 무공훈장을 받게 된다던지,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병사도 있는 등 전쟁에서 명예를 들이미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작품 내에서 강조된다. 허무함은 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헨리 중위와 캐서린 간의 사랑에서도 드러난다. 혈기왕성한 두 젊은이가 불태우는 사랑은 꽤나 정열적이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이끌어내지는 않았다. 작가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예기치 않은 불운으로 인해 엄청난 허무감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걸 본 작품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괄목할 만한 점 바로 작품의 문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듯이 헤밍웨이는 만연체 보다는 간결체를 주로 구사하는 작가이다. 이 때문에 그가 적은 문장은 크게 복잡하지 하고 단순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작가의 취향일 뿐만 아니라 헤밍웨이가 추구하는 작품관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속에 더 많은 의미를 함축시켜야 한다는 빙산이론(Iceberg theory)을 주창했다. 이를 반영하듯이 본작의 문장들도 현학적인 단어들을 늘어놓으며 현란함을 뽐내지 않고 비교적 쉽고 일상적인 단어들로 이뤄져 있다. 등장인물들의 심상도 하나하나 다 묘사하기 보다는 인물의 행동이나 단상 정도맘 보여줄 정도로 심리 묘사를 굉장히 절제하였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문장이 굉장히 심심해 보일 것 같지만, 헤밍웨이는 간단한 단어를 구사하더라도 굉장히 세심하게 문장을 배치한다. 그 덕분에 단순한 문장에도 등장인물의 감정과 이들이 처한 상황이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책장을 넘기면서 독자들은 빈곤해 보이면서도 한없이 풍요로운 문장에 감탄하게 된다. 다만 분량이 적잖은 편이다보니 중반부 즈음에 전개가 늘어지는 게 흠이긴 하지만 전반적인 완성도는 명작의 반열에 오를만할 정도로 탁월한 편이다. 영미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망설임없이 일독을 권한다.

3.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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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쇠를 당길 때,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 홀로 독립된 생명체였다. 둘째 마디는 언제 당겼는지도 알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스스로 직후방으로 작동해서 총알을 내보냈다. 그러므로 이토를 조준해서 쏠 때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절망감과 복받침, 그리고 표적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전쟁과 침탈과 학살과 기만의 그림자까지도 끊어버리고 둘째 마디의 적막과 평온을 허용해야 할 것이었다.”

- 하얼빈 中 -

1948년 서울 태생의 소설가인 김훈이 2022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하얼빈을 읽어봤다. 그는 원래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95년 소설가로서는 제법 늦은 47세에 데뷔했지만, 칼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등의 수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한국문단에서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본작은 한국 근현대사에서도 손꼽히는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1877-1910)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암살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오래 전부터 구상해 왔고, 실제로도 안 의사와 관련된 사료를 탐독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행적을 좇고자 일본 답사도 다녀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사건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치일피일 작품을 쓰기를 미루고 있다가 2021년부터 1년 동안 투병생활을 한 이후, 죽기 전에 작품을 끝마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집필에 몰두했다고 한다. 내가 이 작품을 찾아서 읽어보게 된 데에는 작가의 전작인 칼의 노래의 영향이 컸다. 내가 이 책을 학창시절에도 인상 깊게 읽었고, 최근에도 다시 읽어보면서 마음 속에서 울림이 컸던 만큼, 칼의 노래는 제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애착이 가는 책이다. 그렇다보니 김훈의 다른 작품들에도 자연스레 흥미가 갔는데, 몇달 전 중고로 하얼빈을 판다는 사람을 우연히 발견하여 냉큼 사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1908년 1월 7일 12살 나이의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이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 도쿄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락했는데, 그 일환으로 황태자 또한 사실상 인질로 잡혀 일본에 억류당한다. 그래도 선진 문명국으로서 보호국의 황태자도 존중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이 있는 만큼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이은을 환대하면서 선물까지 하사한다. 알현을 마친 후 메이지 천황은 이토를 따로 불러 수고했다고 격려하면서도 을사조약과 정미조약 이후 조선에서 벌어지는 소요를 전해들었는지 조선에 주둔군 숫자가 적지는 않은지 염려된다며 이토를 은근히 문책한다. 자신이 소요에 대해 별도로 보고한 적도 없었는데도 조선에서의 상황을 알고 있는 천황에게서 두려움을 느낀 이토는 조금 더 일을 서두른다. 이에 조선인들의 의지를 꺾고 국제사회에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라는 점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국토 순방을 빌미로 순종 황제를 부산에 정박한 일본 군함 갑판에 들이 연회를 빌미로 들이 앉혀 사진을 찍고, 또 개성에 있는 고려 고궁터 만월대에 가서 순종과 나란히 촬영하여 언론에 배포하였다. 

한편 1907년 즈음 안중근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할 자금과 사람을 모으려 했으나,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은 채 빈손으로 고향인 황해도 신천으로 돌아왔다. 돌아와보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있었고, 아내인 김아려는 남편이 없는 동안 출산을 마쳐 첫째 아들을 안고 있었다. 이렇게 안중근의 가족에는 슬픔과 기쁨이 찾아든 동안 조선의 국운은 더욱 기울어 가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사실상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고, 이에 반발해 여러 의병들이 봉기하였지만 그때마다 일본군의 총칼에 무참히 무너져내렸고, 조선의 강토는 수만명의 피로 물들었다. 이런 상황에 가공할 분노와 증오를 느낀 안중근은 문득 이 사태를 주도한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그의 만행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인 박이듯이 그에게 각인되었다. 이에 이토를 응징하고자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그는 또다시 처자식을 두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그렇게 2년 동안 의병 활동을 하면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내 한인 신문사에 들렀다가 우연히 두 개의 보도자료를 본다. 하나는 만월대에서 순종 황제와 나란히 찍힌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최근 통감에서 사직한 그가 추밀원 의장으로서 만주 순방에 나서 하얼빈에서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을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보고 안중근은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본작의 이야기는 크게 두사람의 시선에서 진행됩니다. 하나는 이토 히로부미, 다른 하나는 안중근이다. 더불어, 이들의 주변 인물이라고 할만한 영친왕(이은), 니콜라 빌럼 신부, 뮈텔 대주교의 시선도 조명하여, 본작은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군상극의 성격이 강한 편이다. 그중 이토의 시선에서 제법 심도높게 서사를 풀어나가는 게 제법 인상 깊었다. 혹자는 침략자의 관점과 사상을 묘사하는데 적잖은 분량을 할애하는 것에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것 아니냐며 불쾌해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토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세워놓은데는 단순히 납득하는 걸 넘어서 꽤나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에서 유학하며 서구 문물을 열심히 배워왔었고, 근대 일본에서 초대 총리를 역임하며 일본 근대화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실제 그의 행적을 반영하듯이 작중 이토는 한국 총감으로 부임한 이래 ‘문명개화’란 말을 입버릇 처럼 해대고, 서울 길가에 널려 있는 분뇨를 치우는데 목을 메고, 주요 관청과 시가지에 시계를 걸어 조선인들에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를 주문한다. 그야말로 이 책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화신이자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당대의 시대정신으로서 군림한다. 이와 같이 이토는 근대화의 표상으로써 빗대어지는 만큼 근대화가 내포하는 야만성과 위선도 여과없이 보여준다. 작중에서 이토는 일본의 조선을 병탄해가는 과정을 국제질서에 따르는 당연한 현상이자 선진제국을 향한 열복으로 치장하지만, 현실은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전쟁과 진압작전을 통해 조선 민중과 의병들을 상대로 학살극을 벌이며 이뤄낸 야만의 결정체에 불과하다. 이렇기에 이토의 사상과 행적을 소상히 묘사하는 만큼 제국주의 악랄함을 고발하고 안중근의 의거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인 안중근은 이토와는 완벽한 안티테제를 이루고 있다. 이토는 여러 명사들에 둘러싸여 세상을 주무르면서도 권태에 찌들어 있는 노인이지만, 안중근은 홀로 고독히 세상풍파에 부딪히지만 열의에 젖여 이글거리는 청년이다. 이들은 최후에서조차 명징한 대비를 이루는데, 이토는 죽으면서도 온갖 추도를 받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면서 사후에서 조차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안중근은 의거 이후 다섯달 만에 사형 선고를 받아 너무나도 빠른 시간에 쓸쓸한 죽음을 맞고, 시신은 유족에게 인도되지 못한 채 감옥 내 묘지에 매장되며 고독하게 침잠한다. 하지만 일견 씁쓸한 인상만을 안겨주는 두 인물 사이의 대구야말로 안중근 의사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이토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업적에 빛날지언정, 열강들 사이에서 성행한 제국주의 시류에 편승한 위인(爲人)에 불과하다. 반대로 안중근은 자신의 가족들과 스승처럼 여기던 신부, 해외 동포들에게조차 이해를 받지 못하고 쓸쓸히 행동한 사람이지만, 시대정신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격렬히 저항할 줄 알았던 위인(偉人)이었다. 다소 비약적이고 개인적인 억측이지만 작가가 안중근의 삶에 그토록 큰 이끌림을 느끼고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인 건 안중근이 지니고 있었던 뫼르소적인 성격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하얼빈이 김훈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다소 아쉽다는 평을 들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걱정도 했었고, 실제 읽어보면서도 칼의 노래와 비교했을 때 문장의 빼어남이 조금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만 이야기 자체가 주는 단단함과 뜨거움 덕분에 나는 꽤나 만족스럽게 읽었다. 워낙 유명한 사건을 다루는 만큼 진입장벽도 낮고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기에 시간이 난다면 한 번 정도는 읽어보는 것을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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