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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그대는 천진난만한 밤의 희망 13화

미끄럼밧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0.10 02:10:13
조회 1747 추천 26 댓글 22
														


대략 일주일만에 또 써왔다.

원래도 소설같은거 써보고 싶었는데 설정만 잡으면서 제대로 안 쓰고 있었는데 왠지 이 글 쓰면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게된 것 같네.

지금 쓰는 이 스토리 끝까지 잘 쓰고 나면 본격적으로 글 쓰는거 제대로 시작해볼까 싶어진다...

매번 재밌게 봐주는 블붕이들 고맙고 개추랑 댓글은 다음화의 좋은 원동력이 되니 항상 기다리고 있겠음.

22




문득 키보토스를 떠나던 그 날을 떠올렸다.


눈물로 보내는 학생들, 미소로 배웅해주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장소가 있었다.


그 마지막 장소로 향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여 올라가던 그 순간.


소지품 사이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나를 부르고 있는 그 진동음이.


“무슨 일이니?...프라나.”


화면의 전원을 키자, 다소 창백한 인상의 백발의 긴머리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평범한 태블릿 PC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싯딤의 상자라고 불리우는 물건.


프라나는 그 안에 탑재된 서포터 AI다.


원래는 아로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존재를 통해 이 상자와 닿을 수 있었지만 많은 사연을 거쳐서 또 하나의 AI인 그녀를 만나게 됐고, 지금 보다시피 화면 속 드넓은 수평선 사이 교실에 남아있는 것은 아로나와 굉장히 닮은 외형의 그녀 뿐이다.


“선생님, 역시 저 만큼은 마지막까지 선생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적었던 그녀였지만, 그 날 따라 유독 슬퍼하는 감정이 전해지는 듯 했다.


“선생님...부디 긍정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그녀가 끝까지 함께 하고자 했던,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또 하나의 나를 떠올리고 있는걸까.


하지만 키보토스를 떠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그녀는 선생으로서의 내가 아닌 추악한 범죄 조직의 일원으로서의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차마 그 모습을 보여줄 용기는 낼 수 없었다.


총학생회장은 나의 그 모습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녀는 총학생회장이 아니다.


그녀가 만났던 ‘또 하나의 나’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었을까.


아니, 또 하나의 나는 어쩌면 지금 여기 있는 나처럼 더러운 세계에 발을 들인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이 부딪히고 부딪혀, 나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환멸하게 될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겁한 변명으로 그 이상 내게 다가오려는 모두를 밀어낼 수 밖에 없었다.


“프라나,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형태의 이별이 아냐. 너무 슬퍼하지 마.”


나의 손이 그녀에게 닿을 수 있었다면, 그 때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 것이다.


내가 화면을 향해 누른 손가락을, 그녀가 쓰다듬의 형태로 받아들이긴 했겠지만 말이다.


“혼란, 모르겠습니다...선생님과 이런 식으로 이별하는 것은 처음이기에, 저는 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난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을테니까, 선생님 없어도 아로나랑 잘 지내야 된다?”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목표 층에 도달하고, 문이 열리자 프라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서 구슬처럼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듯 어두운 화면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고는, 복도 저 너머 총학생회장실의 방까지 향한 뒤 문 너머의 주인에게 들리게끔 문을 두드렸다.


“아로나, 나야.”


‘들어오세요’라는 인사는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선생님! 어서 들어오세요!”


그도 그럴것이,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하늘색 머리의 장발 소녀가 직접 문을 열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맞이해주었던 것이다.


그 날, 나는 그녀에게 싯딤의 상자를 넘겨주었다.


어른의 카드만큼은 본래 내 것이였다고 쳐도, 싯딤의 상자만큼은 그녀가 갖고있는것이 앞으로의 키보토스에 있어서 보다 유용하게 사용되리라.


그리 생각했었다.


프라나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모습이 지금도 신경쓰인다.


‘그녀’와는 잘 지내고 있을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지 걱정된다.


키보토스에 가기로 했으니, 조만간 얼굴을 볼 수 있게 되겠지.


나눠야 하는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리라.


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염치없는 일이지만, 그 후에는 다시 그녀의 힘을...



알람 소리가 들린다.


새벽 5시 50분 정도로 설정해놓았던가.


핸드폰을 잡기 위해 이불 너머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어제 격한 허리 통증을 겪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물론 떠올렸을때는 이미 그 통증이 다시금 허리를 강타해버린 뒤였지만 말이다.


“으아아...허리가...!”


침대위에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굴러 떨어지는가 싶던 그 때, 옆에서 조용히 자고 있던 미카가 잽싸게 옆으로 몸을 돌려 양손으로 내 상체를 붙잡았다.


“선생님...꼭두새벽부터 뭐 하는거야...”


미카가 아직 잠이 덜 깬 듯 푹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깨웠니? 미안해. 조금 일찍 일어나려다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그만...”


덜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확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끌어안아버렸다.


“미, 미카..?”


“...조금만 충전하고 풀어줄게. 아침은 나 일어나면 같이 먹자.”


그녀는 내 품에 파고드는가 싶더니 그대로 얼굴을 비벼댔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일찍 일어난것은 아니였기에 조금 더 미카와 붙어있어도 좋을 것 같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까, 숨소리와 달콤한 향기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아침은 저녁에 먹고 남은 에그 인 헬 데워먹을까?”


눈을 감은 채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그거 맛있더라...냉장고에 바게트 있으니까 같이먹자...”


비몽사몽한 채로 있는 듯 하면서도, 그녀도 서서히 잠이 깨는 듯 보였다.


그렇게 서로 바짝 들러붙은 채로 30분 쯤 지난 뒤였을까.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침을 맞이했다.


집 안 냉장고에 요리해서 먹을만한 재료는 마땅히 없었고 찬장에는 인스턴트 식품이 가득했기에 어제 저녁은 하는 수 없이 에그 인 헬을 배달시켰고, 오늘 아침은 그 남은 내용물을 먹고 있는 중이다.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미카는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길면 관리하기 엄청 힘들겠네.”


푹 담가놓다시피 했던 바게트를 꺼내 입 안으로 집어넣으면서,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르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모처럼 기른 머리 잘 관리해야지 싶었어.”


밤 사이에 누워있는 동안 푸석푸석해졌는지,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잘 빗겨지지 않는 듯 했다.


“몇 살부터 길렀는데?”


“엄청 어릴 때 부터 길렀지. 끝 부분 살짝 다듬는 정도 아니면 잘라본 적도 없어.”


그 말을 듣자, 평소에도 자주 눈길이 갔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새삼스럽게도 더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았다.


먼저 식사를 끝마치고 사용한 식기를 설거지한 뒤에 빗을 부여잡고 낑낑대고 있는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 뒤 그녀의 손에 있는 머리빗을 받아들고,


“밥 마저 먹어. 머리는 내가 빗어줄 테니까.”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내게는 생각보다 수월한 일이였다.


어떻게 묶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준 대로 한 뒤에 마지막으로 슈슈를 묶은 결과, 평소에도 자주 봤던 옆으로 묶은 미카의 경단머리가 완성됐다.


“짠, 잘 됐으려나?”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머리가 잘 다듬어졌는지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돌면서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묻는 듯 얼굴을 갸웃거렸다.


“내가 보기엔 마냥 이쁘기만 해서...네 입장에서 어떤지 묻고 싶었어.”


잠시 고민하는 척 하다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떤 모습이던 예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다른 대답을 듣고싶었는지 표정을 찡그리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이거...공주님은 조금 색다른 답을 바라고 있는거야?”


이런 부분에서 주관식적인 답을 바라는 상황이 올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다소 난감해진다.


“진짜 난감한데...나한텐 어떤 모습이던 예쁘게 보이는건 사실이라고. 정말이야.”


이제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기까지 하고 있다.


“미카, 솔직히 말해서 나는 꾸미거나 하는건 잘 몰라. 그래도 네가 어떤 모습으로 있던, 나한테는 한결같이 예뻐보여.”


말하기 다소 부끄러운 표현이였던걸까.


아침부터 얼굴이 많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난잡한 머리속에서 어떻게든 끄집어낸 대답이 과연 그녀를 만족시켜줄 수 있었을까.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표정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기대했던 대답이랑은 조금 거리가 있지만...선생님도 용기를 내서 해준 대답일테니까, 만족했어.”


다행히 안도감이 담긴 한숨을 내쉴 수 있는 결론이였다.


“...어제 그런 일이 있기도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나기 짱한테 먼저 전화 해 볼게. 한 번 진지하게 이야기 해야 될 일이니까...”


안 그래도 두 사람에게도 이야기 해야겠다 생각했던 와중, 미카가 먼저 예민할 법한 화제를 언급했다.


“두 사람한테 얘기할 생각을 안한건 아닌데...오늘 당장 해도 되려나? 두 사람도 한 달 씩이나 자리 비운 뒤에 밀린 일정 소화하는게 보통 일은 아닐텐데...”


“괜찮아. 차라리 미리 얘기해두는게 나중에 일정 맞출 때 별 탈 없지 않겠어?”


곧바로 핸드폰에 손이 가는 미카를 제지했다.


“지금은 너무 이른 아침이니까, 조금 있다가 전화하자. 지금은 어제 말했던 대로 열쇠도 맞추고, 집에서 먹을 반찬 먼저 사는건 어때? 나 입을만한 적당한 옷들도 알아보고 말이야.”


내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카도 두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에 대해 그 이상은 서두르려 하지 않았다.



우유, 채소, 주스 등 냉장고를 채울 것들을 잔뜩 사고 집에 와서 마른 빨래들을 정리하고 새로 옷들을 세탁하던 와중 문득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미카는 정리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는지 핸드폰을 집어 전화하는 것을 보아 나기사나 세이아에게 전화를 거는 듯 했다.


그렇게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는가 싶더니...


“...안 받네...”


“바빠서 못 받는 걸수도 있지. 나중에 다시 걸어봐.”


‘평소엔 전화를 못받는 한이 있더라도 곧바로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문자라도 보낸다’라고 하면서 볼을 부풀리며 불평하는 미카의 모습을 보자, 내가 없는 동안 미카의 어리광을 받아주며 난감해했을 두 사람의 모습이 머리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 했다.


물론 미카 본인이 말한 것 처럼 이곳에 온 이후로도 마냥 두 사람을 귀찮게 볶아대기만 하진 않았겠지만서도...


두 사람이 연락을 안 받는 일에 대해서는 그 때만 해도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미카에게 말한것 처럼 다른 일로 바빠서 전화를 신경 쓸 겨를도 없는거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사 온 재료들로 파스타를 만들어서 점심밥을 먹고, 내가 지낼동안 사용할 집 열쇠를 맞추고, 밖에 돌아다닐때 입을만한 옷가지들을 사러 다녀보았다.


흰 셔츠와 청바지의 무난한 조합이 제일 편하겠다 생각해서 입어보았을 때, 미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던 모습은 퍽 인상깊었다.


다른 옷들을 입어보았을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기에 결과적으로 내 옷을 꽤 많이 사버리게 됐다.


내가 가져온 돈이 상당했기에 지금 소비로 생활비를 걱정할 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과소비를 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걱정이 쌓이게 된다.


“좀 더 객곽적으로 봐줄 수 있지 않아? 옷도 너무 많이 사 버린것 같은데...”


“뭐 어때서. 선생님도 아까 내 머리스타일 두고 어떤 모습이든 예쁘다고 해줬잖아? 나도 선생님은 무슨 옷을 입던 멋있어 보일 뿐이야!”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되갚아 주긴 했지만...이 녀석, 대낮에 사람들 많이 보는 와중에 이런 부끄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하다니...


“아, 맞다! 슬슬 나기 짱한테 전화해봐야겠다...아깐 바빴다 쳐도 지금쯤이면 받겠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말을 했다는걸 자각했는지, 미카는 금방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너무 자주 전화하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이미 미카의 핸드폰에서는 전화를 걸때 들리는 연결음이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린지 1분 쯤 됐을 때.


“...또 안받네...이렇게까지 바쁠 일이 있나?”


확실히 의아한 일이다.


티 파티의 일로 바쁘던 때에도 단순한 연락조차 되지 않을만큼 두 사람이 바빴던 때는 내 기억상에도 그닥 많지 않았다.


“저녁쯤에 내가 전화해볼게. 지금은 일단 잔뜩 사놓은 것들부터 집에 갖다놓자.”


짐의 양은 나 혼자 들고 다니기에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양이였으나, 내 팔에 들린 종이 쇼핑백이 8개를 넘어갈 때 쯤, 미카가 어디선가 테이핑 된 종이 박스를 가져와서는 오늘 샀던 모든 물건들을 담은 뒤에 거뜬히 들어올렸다.


“매번 이렇게 신세지면 미안한데...괜찮겠어?”


미카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있는 나는 이 정도로 그녀에게 체력적인 부담이 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커다랗고 무거운 짐을 나보다도 키가 작은 그녀에게 맡기는 지금의 이 상황을 두고 도저히 편한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에이, 걱정 마! 내가 선생님보다 힘이 센 건 사실이잖아! 내가 짐꾼 역할하는게 너무 신경쓰이면 있다가 저녁밥은 엄청 맛있는거 먹는걸로 퉁 치면 되지☆”


맛있는 요리 한 번으로 공주님의 손을 빌린 대가를 치룰 수 있다니, 그녀는 내게 생각 이상으로 과분한 대접을 해주고 싶은 모양이다.


“이거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구만...그럼 저녁밥은 공주님이 만족할 수 있도록 두 팔 걷고 힘 내 봐야겠는데?”


그 말을 꺼내자마자 새삼스레 몇 주 전, 몇 년만에 본 미카에게 이보다 더 까칠하게 대할 수 있을까 싶었던 내 모습이 떠올라버렸다.


항상 진심을 보이며 대할 수 있는 지금이 그 때보다 훨씬 편안하다.


지금의 나는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 미카 또한 그러하리라.


그저 지금 나와 미카가 함께할 수 있는 이 행복한 때가 변치 않기를 바랄 뿐.



쇼핑을 마친 뒤, 부랴부랴 물건을 집으로 옮긴 뒤에도 미카와 잠시 동네 공원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있었기에 저녁 식사는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치뤄졌다.


식사를 마친 뒤의 시간은 저녁 8시 42분.


문득 두 사람에게 연락하기로 했던게 생각나서, 먼저 나기사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번호를 입력한 뒤 나기사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기다려보았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삐-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하루 종일 안 받네...? 진짜 무슨 일 있나?”


옆에서 지켜보던 미카도 이 쯤 되니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나 싶어 세이아에게도 전화를 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어제 전화를 건 하나코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서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하나코와 두 사람이 자주 연락할 사이도 아니니만큼 정말 큰 일이 아니라면 괜히 부담을 끼치게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미카, 혹시 지금 외출할 수 있겠어?”


“선생님. 지금 갈 생각이야?”


확신에 차 있을 내 얼굴을 본 미카의 표정이 굳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주말쯤에 가려고 했던게 조금 빨라졌을 뿐이니까. 급하게 챙길 짐들 챙겨서, 바로 기차역까지 가자.”


막상 그렇게 말했지만 나 스스로도 조금 긴장됐다.


검은 양복에게서 들은 이야기나 미카에게서 들은 이야기와는 별개로, 몇 년만에 다시 그 곳을 가는것이니만큼, 다시 모두가 알고있는 선생님의 모습으로 그 곳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긴장됐다.


몇 주 전까지의 나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살면서 다시 한 번, 키보토스에 발을 들이리라는 것을.



기차역에서 키보토스 행 열차를 끊기 위해 매표소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도중의 일이였다.


미카의 핸드폰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싶어 미카를 바라보았고 그녀도 화면에 비친 이름을 확인하고는,


“세이아 짱이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미카는 곧바로 전화를 받아 귀에 대며 통화를 시작했다.


“세이아 짱! 나기 짱도 그렇고 왜 하루 종일 전화를 안받아? 혹시 무슨 일 있어?”


스피커 너머에서 세이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지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굉장히 지쳐있는 기색의 목소리였다.


서로 몇 마디를 나누는가 싶더니 미카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조용히 전화를 끊은 뒤, 미카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미카? 갑자기 무슨 일이야? 기차표는 어쩌고?”


“미안해 선생님. 방금 전화로 들었는데...상황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안좋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야.”


미카의 발길이 멈춘 곳은 인적도 드물고 어딘가에 눈에 띄는 cctv같은 감시장치도 없는 외진 구석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런 구석진 곳에서 이야기해야 되는거야?”


“사오리, 기억하지?”


여기서 갑자기 왜 그 이름이 나오는걸까.


조마에 사오리.


수 백년 전, 트리니티가 종합학원이 되기 전 수많은 분교로 나뉘어졌던 시절, 아리우스 분교는 그 수많은 분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사오리는, 지금도 분교인채로 남아있는 그 아리우스의 일원이였다.


수많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끝까지 연합하는것을 거부한 아리우스는 연합이 성사된 트리니티로 하여금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다.


그 박해로 인해 쌓여온 악감정을 당시 게마트리아의 일원이였던 베아트리체라는 자가 이용했고, 그로 인해 나와 사오리와 그녀의 동료들은 한 때 적대하는 입장으로서 만났다.


사오리는 그 때 내게 총을 쏘았고, 키보토스의 학생들과 달리 총알조차 막을 힘이 없던 나는 그 후 오랫동안 사경을 헤맬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맞은 총상의 흉터자국은, 오랜 시간 뒷세계를 돌아다니며 쌓여온 내 몸의 흉터들 중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를 죽이지 못했고, 베아트리체가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한 채로 실패한 사오리는 그 대가로써 본인을 포함한 동료들의 신변까지 위험해지는 상황을 맞이해버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는 내 앞에 나타나 목숨을 포함한 모든것을 걸고서 동료들을 구해내기 위한 나의 도움을 바랐다.


나는 그 손을 잡아주었고 결과적으로 다시금 키보토스를 위험에 빠트렸을 수도 있을 커다란 사건을 조기에 막아낼 수 있었다.


미카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을뻔한 것을 막은 것 또한 그 때의 일이다.


그런 그녀의 이름이 여기서 다시 거론되다니...대체 무슨 일이지?


“사오리가 갑자기 왜? 이 상황에서...”


“지금 세이아 짱이랑 같이 있나봐. 여기로 오고있대.”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


“대체 지금....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거야?”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아파오려고 한다.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 전화 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말만...”


“나기사는?”


“지금 같이 있진 않다는데...나기 짱 일도 전화로는 얘기하지 못한다는 말만 들었어.”


미카가 아까부터 표정이 어두워진채 불안해 하는 이유는, 나기사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인것이 제일 크리라고 생각된다.


정보의 양이 극히 제한적이다.


서로 같이 있지 않아서 따로 연락했을 뿐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나나 미카에게 다시 한 번 연락이 와야 상황 파악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순간, 이번에는 내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들린 벨소리였기에 너무 놀라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순간적으로 떨어트릴뻔한 핸드폰을 겨우 잡았다.


곧바로 발신자의 번호를 확인했다.


나기사의 번호였다.


곧바로 수신 버튼을 눌러 스피커 활성화 버튼을 눌렀다.


“나기사니? 지금 대체 무슨 일이야?”


침착함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나 스스로 여기기에도 목소리에서 다급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선생님...우선 침착해주세요. 저는 무사하답니다. 혹시 세이아 씨와도 연락이 됐나요?”


나기사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미카도 우선 나기사의 목소리를 듣고 안심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이아 짱은 내 쪽으로 연락했어! 사오리랑 같이 있는것 같던데 두 사람 괜찮은거야?”


“미카 씨도 같이 있는겁니까...네, 사오리 씨와 같이 있다면...세이아 씨는 괜찮을겁니다.”


“나기사, 넌 지금 어디있길래 세이아랑 따로 다니고 있는거야?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아무도 말을 안해주는거야?”


부족한 정보로 인한 갑갑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기사에게 그 심정을 마구잡이로 털어놓아서는 안됐다.


“미안해...상황 돌아가는걸 하나도 모르겠다보니...나도 너무 답답했나봐.”


그녀에게 순간적으로 다급하게 굴었던 것을 사과했다.


“아뇨, 상황이 상황이니 조급해지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저희 쪽도 쉽게 말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전화 상으로는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는걸 용서해주세요. 지금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잠시 후 선생님과 만날 사람이 선생님의 궁금증을 풀어드릴 수 있을겁니다.”


잠시 후 나와 만날 사람.


지금 이 곳으로 오고있다는 사오리와 세이아를 말하는 거겠지.


“나기사, 그럼 하나만 묻자.”


“말씀하세요.”


“나와 만나려는 그 사람은 그렇다 쳐도, 너는 지금 신변 보호에 있어 안심할 수 있는 장소에 있는거니?”


사오리가 내게 전해주러 올 정보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의 안전 또한 중요한 문제다.


그것을 확인해두어야 된다 생각했다.


내 질문을 들은 나기사의 표정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 말이 끝난 뒤, 나기사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린 것으로 판단할 뿐.


“걱정 마세요. 저는 무사하답니다. 저는 괜찮으니 선생님께서는 그 분을 무사히 만나는 것을 최우선시 해주세요.”


지금 상황에서 내가 가장 기다린 한 마디였다.


그 대답을 들은 지금, 나 또한 내가 해야할 일을 할 뿐이다.


“그래. 나기사 너도 몸 조심하고, 조만간 다시 만나자. 이번엔 내 쪽에서 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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