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거기까지.

내가 뒤에서 다가오는 걸 깨닫지 못할 정도의 집중력은 칭찬해 주겠지만, 양손으로 눈을 가렸으니까 그만 포기하고 펜을 놓도록 해.

"언제 급한 상담이 생길지 모르니까"라니.....점심의 휴식은 의무거든? 쉬어야 할 때 쉬지 않는 사람일수록 중요한 때 도움이 안 되는 법이야.

당신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해.

그런데 오늘 점심은 이미 정했어? 아니라고? 다행이네. 그럼 얌전히 나와 함께 해 줘야겠어.

실은 린 선배와 함께 가고 싶은 가게를 몇 군데 점찍어 뒀거든. 하지만 혼자 가면 예습이 안 되고, 가능하면 다양한 메뉴를 맛보고 싶으니까....

어차피 홀몸인 사람들끼리, 딱히 상관없잖아?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럼 갈까.

오늘의 타겟은 시라토리 구의 오피스빌딩 옥상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야. 카야 대행이 매일 자비로 배달시켜 먹고 있으니까 맛은 보장해도 좋아.

배달비를 경비로 처리하려고 했을 때는 어떻게 손봐 줄까 생각했지만. 

난 BLT를 시킬 테니까 당신은 다른 걸로 해 줄래? 모처럼이니 나눠 먹고 싶은걸.

응......

그래. 린 선배와 같이 갈 때의 예행연습으로서, 야.

-카야가 배민 쓰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겼다

-거리감 가깝지 않아?

-린쨩을 구실로 삼고 있지 않아?

-상사를 구실로 쓰는 건 그만두라고. 아코도 아니고

-아코와 달리 나중에 린쨩이랑도 같이 갈 것 같긴 함

-은근히 지금까지 없었던 위치구만.....

-묘하게 가까운 거리감으로 보좌하는 여사친.....

선생님은 지금부터 샬레에 상주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겠어.

어째서냐니....바쁜 몸인데 일부러 트리니티나 밀레니엄이나 게헨나에 갈 필요는 없잖아?

그 쪽에서 오도록 해 줘.

그리고 샬레 당번은 희망자가 늘었으니 반 년 주기의 로테이션으로 할게.

나는 보좌로서 바로 곁에 있을 테니까 회계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불러 줘.

-(아~이번 주차 배드엔딩 확정이네)

-아니 재무실로 돌아가

-응...지금이 비밀금고를 노릴 찬스

-코유키, 총학생회 재정으로 채권을 마구 발행해버려. 재무실장 책임으로 할 테니까

-니하하....싫어요

밀레니엄의 회계가 샬레의 장부를 관리?

하아.....당신, 샬레가 총학생회의 조직이란 자각이 없는 거야? 재정상황이 타교에 누설되는 일이 있어선 안 돼.

자, 나도 도울 테니까 빨리 손을 움직여.

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저는 총학생회 재무실장, 오키 아오이라고 합니다.

밀레니엄 학원, 세미나의 회계 담당이신 하야세 유우카 님께, 당번에 대해 연락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리게 됐습니다.

본인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

본인이셨군요. 그럼 솔직하게 용건을 전달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제가 선생님의 보좌를 담당하게 되었으므로, 샬레의 당번 업무는 무기한 중지입니다. 네. 말씀대로 직접 출장을 오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유우카 님에겐 바쁘신 와중에 선생님을 도와 주신 점에 대한 감사와 함께.....? 네? 근거, 말인가요?

총학생회 회칙 제 31조 4항 2호입니다. 학원에 업무협력을 요청할 경우, 자의적인 이익을 유도하지 않게끔 충분히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업무내용에 부정은 없었습니다만, 향후에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특히 최근에는, 수상쩍은 음성작품으로 상당히 벌었다던가?

금년도의 수지보고가 기대되는군요.

그럼 이만 실.....하아. 알겠습니다. 선생님, 유우카 씨가 당신과 얘기하고 싶대.

난 커피를 타 올 테니까 그 때까지 잘 얘기해 둬. 평소대로 블랙이면 되지?

-무적인가

-니하하하.....유우카 선배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어요.....

-뭐어...확실히 최근의 밀레니엄은 좀....

-실제로 유우카에겐 수상쩍은 음성으로 쌓아올린 명성이 있으니까....

벌써 이런 시간이네....저기, 점심은 뭘 먹고 싶어?

"여름 채소와 카르파치오를 얹은 냉파스타".......내가 말을 잘못 했네.

『지금부터 손이 많이 가는 건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샬레의 냉장고 안에 있는 걸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점심 메뉴를 생각해 줘.』 이거면 될까?

토요일은 식당도 영업하지 않고, 매번 외식하는 것도 엥겔 계수상으로든 영양가적 측면에서든 부적절해.

아, 그래? 당신이 만든다고? 그럼 좋아. 내가 메뉴 선정을 도와 줄게. 

그럼......갓 구운 하드브레드와 달걀 하나를 통째로 쓴 양파 그라탕 수프, 메인디쉬는 농어 허브 구이. 샐러드는 야채를 매쉬드한 소스로 만들어주면 좋겠어. 디저트는 블랑망제에 커피는 늘 마시던 걸로.

..........농담이야.

그렇네, 둘이서 만드는 게 빠르겠지. 그럼 내가 닭고기를 구울 테니까 샐러드를 접시에 담아 줄래? 

스프는 적당히 남은 걸 쓴다 치고, 주식은 식사량이 많아질 것 같으니까.....

"치즈 리조트."

응, 괜찮은데? 맛있겠는걸.

비타민이 부족하니까 과일을 넣고 싶은데.....당신, 파인애플 껍질 까 봤어? 처음이야? 그럼 같이 해 보자.

뭐든지 경험이 중요하니까.

-아오이...거짓말이지?

-아앗 유우카가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어!

-니하하....유우카 선배, 제가 점심 만들게요.....

-유우카! 정신차려 유우카! 현실을 봐라!

-후우카 씨! 정신 차리세요 후우카 씨! 현실을 보세요!

어떻게든 휴일에 일하고 싶다면 개인실의 단말로 가능한 범위에서 하도록 해.

그럼 내가 당신의 쌓인 세탁물을 정리하는 중에도 업무 보좌를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동하는 수고도 줄어드니 조금은 쉴 시간이 늘겠지.

청소기 소리는 신경쓰지 말아 줘.

그것도 당신이 평소에 깨끗하게 해 놨으면 문제없을 일이잖아?

슬슬 끝날 것 같다고? 다행이네.

그럼 커피를 타 올 테니 휴식하면서 다음에 뭘 할지 생각해 보자.

냉장고가 비었으니까 장을 보러 갈까?

오늘 장을 보고 반찬거리를 만들어 두면 내일 하루는 쭉 비겠지?

하아.....약이 들은 모양이네.

......열이 내려가고 있어.

피로가 쌓여서 그렇다고 했지만 평소의 생활 습관이 원인 아닐까?

식생활도 최근엔 보고 있으니까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알고 있거든? 학생들을 보러 갈 때 선물이라면서 과자를 사다가 당신도 먹는 걸.

경비로 처리했으니까 당연하잖아? 조금은 삼가도록 해.

게다가 당신이 아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학생들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게 된다고.

오늘도 당신의 문병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샬레를 방문하려고 했거든?

편히 자게 해 주고 싶다고 해서 돌려보냈지만.

자, 땀을 흘렸으니 옷을 갈아입자.

수건으로 등의 땀을 닦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끄앙! 유우카가 드러누웠습니다!

-아오이를 보면 유우카가 쓰러지고 노아도 스플뎀에 코유키가 간호사가 되는 거 뭐야!

-코유키....세미나의 기둥이 되어라....

-니하하...노아 선배도 좀 도와 주세요.....노아 선배....?

당신, 오늘 출장이지? 트리니티의 다과회에 초대받았다면서?

그래서 부탁인데, 차로 간다면 나도 태워 줄 수 있을까?

업무 때문이냐니, 당신도 아니고. 그 지구엔 여성용품이 다양하니까 쇼핑하고 싶은 거야.

린 선배가 연금 중이잖아? 의식주는 곤란하지 않겠지만, 화장품이나 책은 새것을 구하지 못할 테니 선물하고 싶거든.

선배, 그래뵈도 의외로 호불호가 뚜렷한 사람이야. 당신도 어설픈 걸 선물했다간 면전에서 눈썹을 찡그릴 테니 조심해.

그래서, 어때? 데려다 줄 거야? ............그래. 고마워.

그럼 돌아가는 길에도 부탁해도 될까?

전차로 돌아가려면 많이 못 사고, 곁에 짐 들어줄 사람이 한 명쯤 있어 주면 참 고맙겠는데.

그래. 당신의, 소중한, 학생의, 부탁이야.

......후후, 나도 당신을 다루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네.

저녁식사는 적당한 곳을 예약해 둘 테니까 걱정 마. 17시쯤에 벽돌 거리의 천사상 앞까지 와 주면 돼.

......정해졌네. 그럼 갈아입고 올 테니까 당신도 제대로 몸단장을 해 둬. 그렇게 삐친 머리로 다과회에 갔다간 다들 비웃을 걸?

넥타이도 비뚤어졌잖아, 정말이지......

고쳐 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밤길 조심해라☆

-총학생회에 우연히 운석이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네☆ 불여우년이

-귀여운 엘프귀네☆ 콱 뜯어버릴까

-일일이 생생한 대화하는 거 그만두면 좋겠네☆ 그만해라☆

-키키킷.....이부키, 오늘은 트리니티 지구에 가지 말고 게임이나 하자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모두 미쳐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