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의 꿈 이론에서 등장하는 일곱가지 주요원형

현명한 노인

현명한 노인은 융의 용어를 빌면 초자연적 개성이다.

꿈에서 이 원형은 마법사나 의사, 교수, 성직자, 교사, 아버지 같은 권위있는 인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꿈에서 이런 원형이나 이런 인물의 가르침이 등장할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손이 미치는 곳에 한층 높은 수준의 의식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마법사나 무당같은 초자연적 개성은 의사(擬似) 신성으로서, 우리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끌 뿐 아니라 그 단계에서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융은 일평생 자신의 초자연적 개성과의 관계를 누렸다. 그 개성을 융은 필레몬이라 불렀으며, 그와 더불어 자주 대화를 나누고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트릭스터

트릭스터는 반(反)영웅의 원형이자 “신의 원숭이”로서, 동물과 신성한 존재의 정신이 합쳐진 형태이다. 융은 이를 연금술에서 형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메르쿠리우스에 비유했는데, 그는 음흉한 농담과 사악한 장난이 가득한 자이다. 이따금 그림자의 일면을 보여주는 트릭스터는 꿈에서 어릿광대나 익살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자는 자신을 조롱하는 동시에 자아의 자만심, 그리고 자아의 원형적 심상인 페르소나의 자만심을 조롱한다. 나아가서 트릭스터는 놀이를 방해하고 책략을 폭로하며, 꿈속에서의 즐거움을 망치는 불길한 인물이다. 또한 트릭스터는 그림자의 경우처럼 변형을 뜻하는 상징이다. 자아가 허영심 때문에 지나친 야망을 품거나 오판을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자주 등장한다. 트릭스터는 제압하기 힘든, 무정부주의적인 존재이다.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인간이 외부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즉, 깨어있는 시간대의 생활을 다루기 위해 쓰는 가면이다. 원래는 매우 유용하고, 병적인 것과 거리가 있지만, 우리가 진정한 자아로 착각하여 지나치게 페르소나에 동화될 경우에는 위험성을 드러낸다. 페르소나는 꿈에서 허수아비나 뜨내기, 황량한 풍경, 사회추방자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벌거숭이가 되는 꿈은 종종 페르소나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림자

융은 그림자를 “어느 누구도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는 존재”로 정의했다. 모든 실체는 그림자를 던지는데, 융이 보기에 인간의 영혼도 예외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모든 인간은 자기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거나 꿈꾸는 것보다는 전반적으로 뒤떨어진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융은 그림자를 자아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측면으로 보았다. 이 측면을 억압하고 의식으로부터 멀리 격리시킬수록, 이 측면이 “부지불식같에 갑자기”분출하는 걸 막을 가망성은 줄어든다. 융은 이러한 “인간 본성의 심연”을 제대로 주목하게 만든건 프로이트의 공이라 여겼다. 우리들의 교화된 겉모습의 이면에 숨어 있는 그림자는, 개인과 공동체와 국가의 이기적이고 난폭하고 때로 야만스러운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림자는 탐욕과 공포를 먹고 살며, 소수집단을 박해하여 희생양으로 만드는 증오심의 형태로 외부에 투사되기도 한다. 꿈에서 그림자는 대체로 꿈꾸는 이와 성이 같은 사람으로 타나나며, 종종 협박을 가하는 악마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림자를 완전히 제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그림자는 종종 강풍이나 총탄 앞에서 끄떡도 하지 않는 인물을 통해 모습을 보인다. 때로는 모든 장애물을 타넘어서, 정신의 막다른 골목과 으스스한 지하실까지 우리를 추격해온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형제나 누이 같은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우리가 보고싶지 않은 물건을 들이대거나 듣고 싶지 않은 얘기를 건네며 앞을 막아서는 이방인의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그림자는 강박관념이 강하고 자율적이고 소유욕이 강하다. 따라서 우리들한테 강한 두려움이나 분노, 도덕적 격분을 유발시킨다. 그럼에도 융은 그림자가 본래 나쁜 존재는 아니며, 다만 “다소 열등하고 원시적이고 비위에 잘 맞지 않으며 다소 거북한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림자를 수용하여 그것과 융합을 이루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하는 불유쾌한 메시지 가운데 간접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게 섞여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어린이

신성한 어린이는 우리를 개체화로 유도하는 재생력의 원형이다. 신성한 어린이는 진정한 자아의 상징, 존재의 완전성의 상징이다. 이의 반대 개념은 융의 용어를 빌리면 “의식의 한 조각에 불과한, 숨겨진 사물들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유한하며 제한 작용을 하는 자아이다. 꿈에서 신성한 어린이는 대체로 아기나 유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순진무구하고 연약하지만 동시에 신성불가침의 존재, 막강한 변형력을 지닌 존재이다. 어린이와 접촉하는 걸 통해 예전의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그리고 한때 소망했던 미래의 자화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모든 인간은 남성적인 잠재력과 여성적인 잠재력 모두를 내면에 지니고 있다. 아니마는 남성이 지니고 있는 “여성적인”분위기와 반응과 충동을 뜻하며, 아니무스는 여성이 지니고 있는 “남성적인” 책임과 믿음과 영감을 의미한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자아 속의 “비아非我”가 그러하듯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광대한 잠재력의 영역으로 유도하는 영혼안내자의 역할을 행한다는 사실이다. 신화학에서는 아테네, 비너스, 트로이의 헬레네 같은 처녀여신 내지 뛰어난 미모의 여성을 통해 아니마를 묘사한다. 반면에 아니무스를 상징하는 건 헤르메스, 아폴로, 헤라클라스 같은 고상한 신이나 영웅이다. 꿈에서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이러한 고귀한 형태나 여타 강력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났을 경우에, 이는 일반적으로 내면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합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 작업을 경시하게 되면 위와같은 원형들이 외부로 투사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상향의 연인을 물색하게 만들거나, 비현실적이게도 동료나 친구들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만든다. 이러 원형들이 무의식 생활을 독점하는 걸 방치한다면 남성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감정이 과잉된 사람으로 변하게 되고, 여성은 무자비하고 완고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일단 개체화 과정이 시작되면, 그 순간부터 이런 원형들은 안내가자 되어 꿈꾸는 자를 내적인 가능성의 영역 속으로 접근하게 해 준다.

위대한 어머니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발달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원형이다. 꿈과 신화, 종교에서 이 이미지가 널리 등장하는 건 어린시절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만이 아니라, 성정과 번식을 소중히 하고 촉진하는 모든 것의 원형, 지배하고 탐식하고 유혹하고 소유하는 모든 것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어머니의 에너지는 신성하고 영묘하고 순결한 동시에, 어둡고 원시적이고 신비하며(즉, 대지에서 생겨난 것이며) 농업적이다. 대지의 어머니는 수확을 가져오는 존재로서 추앙받았다. 늘 양면가치를 드러내는 위대한 어머니는 여성의 신비와 권세의 원형으로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더없이 고귀한 경우에는 천국의 여왕, 더없이 탐욕스러운 경우에는 수메르 지방의 여신 릴리스(황야에 살며 어린아이를 습격함)나 고르곤(머리털이 뱀 모양이며 그 눈을 보는 사람을 돌로 변화시킨다는 세 자매괴물)중의 메두사, 또는 신화와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마법사나 하르피(여자의 얼굴과 몸에 날개가 달린 탐욕스러운 괴물)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어머니라는 꿈 상징이 추상적인 원형보다는 꿈꾸는 이와 그 자신의 어머니 사이의 관계 표현에 보다 가깝다고 보았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대부분의 꿈에 세 사람-꿈꾸는 이 자신과 여성 하나와 남성 하나-이 등장하며, 대부분의 경우에 세 인물 사이의 관계를 관류하는 주제는 질투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꿈속의 여성과 남성은 꿈꾸는 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타나낸다고 보았으며, 세상의 남자와 여자들이 각각 고통을 겪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여러 측면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꿈의비밀>-데이비드 폰테너-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