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뜬 눈으로 밤을 새다가 다음 날 당장 첫 비행기를 타셨다.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단행한 서울행이었다. 한나절 동안 교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시던 아버지는 끝내 등교하는 아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정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도서관이며 기숙사, 식당, 연구동 건물들을 샅샅이 훑고 돌아다녔다. 어디서도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금도 그 때 본 교정 곳곳의 건물들을 헤아리며 다 기억해 내신다.
아버지는 내 친구를 통해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알아내시곤 한달음에 그 곳으로 찾아 오셨다. 아버지가 찾아냈다는 공단 한쪽의 창고는 야학 임시교실로 사용하고 있던 장소였다. 창고 한 구석엔 망가진 사무용 책걸상이 산처럼 쌓여 있고 천장은 여기저기 뜯겨 나가 수시로 쥐가 들락날락 하는 후미진 곳이었다. 아버지는 가만히 창고 안을 둘러 보셨다. 그러다 벽에 붙어 있는 시간표에서 시선이 멈췄다. 곧 학생들이 들이닥치고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당신은 당황해서 황급히 구석의 책걸상을 밟고 천장으로 올라가셨다.
환기구도 없는 창고의 천장 위에는 거미줄과 쥐똥만 가득했다. 수업이 다 끝나갈 무렵, 나는 천장에서 바스락 대는 소리를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제주 중문의 과수원에 계실 아버지가 구로공단 후미진 창고의 천장 위에 계시리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그제서야 슬며시 천장에서 내려오셨다. 그리고 바로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당신은 아들이 행여 잘못된 주체사상 같은 것에 경도되어 섣부른 사회주의자라도 되어 있을까봐 걱정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가르친 것이 잘못된 사상이나 주장이 아닌 보편적이고 건강한 지식이라는 것을 알자 마음이 놓였다고 하셨다. 당신은 행여 아들의 마음이 약해질까봐 눈길 한 번 마주하지 않고 그 길로 고개를 끄덕이며 제주도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몇 년 뒤 고시에서 다시 수석합격을 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찾아 온 기자들에게 아버지는 그 날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나도 그 때 처음 들은 이야기였다. 당시의 심정을 묻는 질문에 아버지는 담담히 답했다. “그저 뒤에서 가만히 살피기만 했지요.” 그것이 부모로서 해 준 전부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로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기도로 키웠습니다.”
내가 학생운동을 하고 다니던 시절, 몇 년 동안이나 소식을 끊고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도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믿고 기다려 주셨다. 당시 형이 신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그것이 와전되었는지 ‘희룡이가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편입을 했다’ 혹은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그도 아니면, ‘병신이 되어 미쳐서 돌아다닌다’ 등등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을 때도 당신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믿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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