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을 쓰는데에 있어 경희대 박해당 교수님의 「중국 초기불교의 이제론」이란 논문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논문 원문이 공개된 URL을 첨부합니다.
http://www.buljahome.com/songchol_file/2_folder/file2_4.htm
이 글은 기본적으로
사성제, 중도, 십이연기, 색/공, 유위/무위.... 정도의 개념은 두루뭉실하게 나마 안다고 가정하고 적은 글이므로
이들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이제 막 불교를 시작한 초심자인 분들은
공지에서 소개하는 불교 입문 루트를 먼저 챙겨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중관학파에는 '이제의 구분'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제의 구분'이란
[진제]와 [속제]로 세상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이며
이 중
[진제]란 진리, 해탈, 열반을 말하고
[속제]란 그렇지 않은 미진한 자리, 아직 깨우치지 못한 자리를 일컫습니다.
이 '이제의 구분'은 중론에도 대놓고 초장부터 등장하는 개념인데다가
반야사상(공사상)의 이해에 매우 필수적이므로 잘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학습하는데에 있어 큰 장애물이 하나 있는데...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크게 번성하며 이제의 구분에 대한 논의가 매우 활발해짐에따라
진제와 속제에 관한 여러 사상가들의 다양한 해석이 난립하고, 상호간의 비판과 논쟁 또한 상당했었다는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제의 구분'에 관하여 각 사상가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 소개되는 사상의 목차 -
<격의불교>
1. [본무의] - 축법심, 도안
2. [심무의(혹식이제론)] - 승온
3. [식함의(혹식제론)] - 우법개
4. [환화의(신이제론] - 도일
5. [연회의(연회이제론)] - 우도
<새로운 이제론>
6. [승조의 이제론]
7. [소통의 이제론]
<격의불교>
격의불교란 노자/장자 사상 등,
당시 중국에 이미 존재하던 철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불교를 이해하려 시도한 학파의 무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다음의 사상들이 포함됩니다.
1. 본무의
본무의의 '본무'란 '본질로서의 무(無)'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有)라고 할만한 것들의 근간은 무(無)라는 것이며
색과 공도 이 도식에 집어넣어 (유=색, 무=공)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단, 여기서 무(無)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 된 형태가 없는 형이상학적 본질'이란 뜻입니다.
즉 불교의 공(空)도 이런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죠.
또한 무와 유의 구분은
그저 한 현상에 대한 표현의 차이, 혹은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본무(공)'라는 우주의 시초에서 순차적으로 '말유(색)'이라는 현상계가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마치 기독교 신화가 혼돈,공허,흑암 가운데 질서가 창조되었다 말하는 것처럼요
즉, 이 둘은 서로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며
말유(색)가 나타나는 순간 본무(공)은 없어지고,
본무(공)에 닿는 순간 말유(색)는 사라집니다.
사건의 순서라든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삥삥 도는거죠.
사실 이런식의 이해는...
여러분 대부분이 '공'에 대한 개념이 아직 두루뭉술할 때 한번쯤 떠올려보는 손쉬운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그 정체가 무엇인지 똑바로 설명할 수도 없고, 형이상학적 망상에 가까우며,
실상 불교보다는 무극/태극 사상과 훨씬 유사합니다.
따라서 유/불/선의 통합을 이루고 싶어하는 증산도나 대순진리회 등이
불교의 공에 대해 떠들고 싶을 때 가장 많이 써먹는 접근법이 바로 이 접근법입니다.
애당초 고대 중국의 우주관을 가지고 불교를 설명하려다 나온 결과물이니,
유/불/선 합치를 주장하는 그쪽에서는 이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거죠.
또한, 에너지가 뭉쳐 물질이 되고, 물질을 계속 쪼게면 에너지가 된다는 상대성이론의 원리와도 매우 비슷하여
유사과학을 추구하거나, 불교가 '과학적'이라고 말하는걸 즐기는 사람들도 이런 식의 사유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사상은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는 불교에 대한 정론적 이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특징정리
1. 진제는 본무(공), 속제는 말유(색)이다
2. 진제와 속제 모두 개별적이고 존재론적인 실체로 본다
3. 그러나 진제는 속제의 본질이므로 진제의 존재론적 위상이 속제의 그것보다 높다
4. 속제는 진제의 부정, 진제는 속제의 부정을 통해 드러난다 (연역적 인과관계)
2. 심무의
심무의의 '심무'란 '마음작용'으로서의 무(無)'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有)라고 할만한 것들의 근간이 실제로 무(無)는 아니나
그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으로 '인식'되어야 하는것이고,
마음은 주관적이며 공허하므로 결국 '인식되어진 세상'도 무(無)와 다를바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여기서 무(無)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허망하다'란 뜻이 됩니다.
심무의는 불교의 공(空)을 이러한 무(無)의 정의에 대입하여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심할 점은
심무의적 진제가 그저 '속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제(공)'라는 주관적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실재하고 있음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인식되어진 세상'을 단지 하나의 '관점'이 아닌, 마치 실체가 있는 자리처럼 간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둘은 결국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며
실유(색)는 심무(공) 없이도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심무(공)에서는 실유(색)가 사라지는 등,
양쪽이 각각 독립되어 존재한다는 점에서 본무의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특징정리
1. 진제는 심무(공), 속제는 실유(색)이다
2. 진제는 존재론적인 실체로 본다, 속제는 관념론적인 실체로 본다.
3. 그러나 진제는 속제의 인식론적 수용이므로, 상호 존재론적 위상은 따질 수 없다.
4. 속제는 진제의 부정, 진제는 속제의 인식론적 부정을 통해 드러난다 (존재론적 부정이 없으므로 연역적 인과관계 성립 X)
3. 식함의 / 환화의
식함의와 환화의는 둘 다 모두 이 세상을 '일장춘몽', 즉 '꿈'과 같은 신기루라고 해설합니다.
둘 사이 차이라면, 식함의는 '꿈을 깨자~'라는 느낌인 반면, 환화의는 '꿈은 원래부터 허상이야~' 라는 뉘앙스라는 정도죠.
이 둘은 속제의 존재론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여전히 진제의 존재론적 실체는 인정하고 있으며
속제가 사라져야만 진제의 세상이 드러난다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즉, 이들에게 '진리'란 곧 '존재한다는 전도망상이 소멸된 무형무명의 실체' 그 자체이고,
따라서 열반이란 그저 세간 모든것이 공허하고 의미없다는 것을 깨닫는데에 있게 됩니다.
특징정리
1. 진제는 형상의 소멸(공), 속제는 형상의 나타남(색)이다
2. 진제만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본다
3. 그러나 진제는 속제의 본질이므로 진제의 존재론적 위상이 속제의 그것보다 높다
4. 속제는 진제의 부정, 진제는 속제의 부정을 통해 드러난다 (연역적 인과관계)
4. 연회의
연회의는 '연기법'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사상입니다.
즉, 조건이 모이면 그것이 현상하여 '속제'로 드러나나
조건이 해체되면 현상이 소멸하니, 이것이 곧 현상의 본질인 '진제'입니다.
그러나, 연회의는 연기법으로 드러난 속제 세상도, 연기법이 해체된 진제의 세상도
모두 존재론적인 실체로 간주하고있습니다.
특징정리
1. 진제는 조건해체(공), 속제는 조건지어짐(색)이다
2. 진제와 속제 모두 개별적이고 존재론적인 실체로 본다
3. 그러나 진제는 속제의 본질이므로 진제의 존재론적 위상이 속제의 그것보다 높다
4. 속제는 진제의 부정, 진제는 속제의 부정을 통해 드러난다 (연역적 인과관계)
자, '격의불교'가 끝났습니다.
여기에서 정리 한번 하고 가겠습니다.
눈썰미 좋으신 분들은 아마 눈치 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언급한 격의불교의 사상들은 모두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진제의 실체를 인정한다'라는 점입니다.
[본무의], [식환의], [환화의], [연회의]는 진제의 존재론적 실체를
[심무의]는 인식론적 실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올라가서 각 사상의 말미에 정리해둔 부분을 한번 다시 흝어보시기 바랍니다.)
실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즉,
'속제 없이 진제가 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며
'색 없이 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이며
'법(法)은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데아나 아트만이나 브라만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학당'이 주장하는 방식의 참나설 따위와 큰 맥락에서 다를 게 없다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해봅시다.
나가르주나는 애초에
'법(法)만은 실재하고 있다, 아트만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를 논파하기 위해 '중론'을 썼습니다.
역사적 맥락이 그러합니다.
그러니 앞서 언급한 사상들은 실상
중관학파의 실제 주장과는 정반대에 가까운 것입니다.
격의불교가 '이미 존재하던 사상'을 통해 불교를 이해해보려 많은 노력을 들인점은 치하할만하나
정작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쳐 중관학파를 오해하게 만들었으니 문제가 큽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분명 격의불교의 입장으로 '공사상'을 이해하신 분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그러한 입장에서 공사상을 따르는것은 여러분 자유이고, 저도 이 글을 통해 그 부분을 뭐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는 결코 중관학파의 입장은 아니다라는데에 방점을 찍으려 할 따름이죠.
지금부터는
[승조]와 [소통]의 이제론에 대해 살펴볼텐데
이 둘은 앞서 언급한 [격의불교]의 실체론적 접근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제의 구분에 관한 새롭고 바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5. 승조와 소통의 이제론
승조와 소통은 유사점이 많아, 두 사상의 공통된 부분을 주로 서술하고 차이점은 부차적으로 잠깐 언급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승조/소통은
속제에 유(有)를, 진제에 무(無)를 대입하지 않으며,
유와 무가 갈리며 분별되는 세상 전체를 '속제', 그리고 이들이 분별되지 않는 이면의 실체를 '진제'로 규정합니다.
(말이 복잡할 수 있으니 그림을 꼭 참조해서 보세요. 그림으로 보면 편함.)
즉,
심환의가 존재를 색, 인식을 공으로 놓고
식함의가 환상을 색, 실체를 공으로 놓고
연회의가 연기를 색, 무상을 공으로 놓은 것과는 달리
승조/소통은
존재/인식이 구별되는 것을 통틀어 색으로, 그 둘이 분별되지 않음을 공으로 놓고
환상/실체가 구별되는 것을 통틀어 색으로, 그 둘이 분별되지 않음을 공으로 놓고
연기/무상이 구별되는 것을 통틀어 색으로, 그 둘이 분별되지 않음을 공으로 놓은 것이며
이는
속제를 '어떤식으로든 분별이 있는것',
진제를 '어떤식으로든 분별이 없는것'...으로 설명한 것에 준합니다.
승조/소통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데
'속제와 진제의 구분 조차 진정한 진제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 또한 명백히 '분별'이라는 것이죠.
속제와 진제의 분별조차 내려놓은 '진짜 진제'는 아래 그림과 같이 표현됩니다....
아예 경계가 없는,
즉 그림상으로는 모든 '경계'에 'X'표가 쳐진 모습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식으로 그려놓으면
'중관사상'의 논리를 좀 더 개진하고 용이하게 서술해내는데 있어 다소 무리가 따르므로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른 방식의 그림으로 표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진제는 정확히 저 가운데 원점인 것입니다.
가운데에 자리하므로 '진제란 곧 중도'라는 중관학파의 진의를 잘 담아내고 있으며
경계선이 없으므로 저 자리에는 구분과 분별이 없습니다.
유위와 무위, 색과 공의 경계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것을 '이제의 불이', 혹은 [불이사상]이라고 말합니다.
생(生)과 멸(滅)의 분별을 부정하여 첫번째 진제(무위)를 얻고
다시 유위와 무위의 분별을 부정하여 궁극의 진제(중도)를 얻는 내용은 중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생(生, utpada), 주(住, sthiti), 멸(滅, bhanga)은 있을 수 없으므로
유위(有爲, samskrta)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 유위가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무위(無爲, asamskrta)가 성립하겠는가."
이것만 봐도 승조와 소통은 격의불교와는 달리 중론의 논리에 매우 부합하는 적절한 설명을 하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논의를 좀 더 개진시켜서
색과 공의 각 분면에서 진제인 중도를 살펴봤을 때
과연 각각 어떤식의 묘사가 가능해질지 살펴봅시다.
여기서부터 승조와 소통간의 의견차이가 발생합니다.'
승조는 이것을 두고
하나의 진리(중도)를 두고 색이니 유위 속제니하며 그 한면모를 '표현'했을 뿐으로
색,유위,속제란 '언어적 방편'일 따름이다.
......라고 얘기하고요
소통은 이것을 두고
하나의 진리(중도)를 두고 '대상이 존재한다'라는 시각을 취했을 뿐으로
색/유위/속제란 '편향된 관점'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반대쪽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마찬가지로 살펴봅시다.
승조는 이것을 두고
하나의 진리(중도)를 두고 공이니 무위 진제니하며 그 한면모를 '표현'했을 뿐으로
공,무위,진제란 '언어적 방편'일 따름이다.
......라고 얘기하고요
소통은 이것을 두고
하나의 진리(중도)를 두고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시각을 취했을 뿐으로
공,무위,진제 또한 '편향된 관점'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조금 헷갈리시죠?
제가 지금 이 둘의 차이점을 얘기 안할수는 없어서 언급하긴 했습니다만,
사실 이러한 차이는 지금 그닥 중요 한 것이 아니니
차이점 관해서는 머릿속에서 지우셔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집중해서 보아야 할 점은 이 둘의 세세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승조와 소통 모두가 속제/진제를 두고
'그저 언어적 방편(내지는 관점)으로서 중도의 진리를 설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가설한 도구(내지는 입장) 지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내용 역시 중론에 그대로 적혀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
자아(atman)가 있다'고 가설하고, '무아이다'고도 설하며, 또 '아트만인
것도 없고, 무아인 것도 없다'고 설했다"
"다른 것에 의해 알
려지는 것이 아니며, 적정하고, 희론에 의해 희론되는 일이 없으며, 분별
을 떠나고,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실상이다"
첫번째 인용문에서 '가설하고...'라는 말은 '방편삼아 임시로 설하고...'라는 말입니다.
"아트만이 있다고 가설한 것"은 첫번째 화살표 그림과 일맥상통합니다.
"무아라고 정정하여 설한것"은 두번째 화살표 그림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아트만인 것도 없고, 무아인 것도 없다"는 것은 이 둘이 모두 '방편, 혹은 관점'일 따름이며 진정한 진리는 그 분별심이 모두 탈락한 '중도'에 있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것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유위가 무위에 의해, 무위가 유위에 의해
색이 공에 의해, 공이 색에의해
서로 연기하고 의존하여 설해지는것과 달리
'중도'는 다른것에 의존하여 나타나지 않으므로 진리이며, 정견이며, 열반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 중도는 더이상 '방편'이 아니므로 '희론(말장난 혹은 말을 방편삼아 설함)'에 의해 희론되는 일이 없으며
심지어 더이상 진제와 속제의 '분별' 조차 없고, 서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이 실상입니다.
중도에서는 유위와 무위가 없으므로
연기법을 말하는 유위가 중도와 다르지 않고
무상함을 말하는 무위도 중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불이(不異)이고
중도 = 공 = 연기 = 열반 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관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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