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욱, 「새집증후군」 외 4편
< 새집증후군 >
까마귀가 훔쳐 갔어, 주먹밥
숲속에 친구가 앓아눕고 우리의 엄마는 어디 갔어
친구야, 숲이 언제까지 이어지려는지, 모르겠어, 숲은 어떻게 태어났나, 어렴풋해, 자꾸만 비스듬해지는 너를 품에 안고, 나무에 등을 기대면, 선명해지는 숲, 사납게 드러난 뿌리들, 뒤숭숭해, 모든 얽힘, 어떤 맺어짐
나까지 쓰러지면 누가 저 날치기들을 쫓아내지
지켜줄게, 우리를 먼 나라에 팔아먹을 황새로부터
도처마다 뾰족해, 두 눈을 쪼아 먹힌 나는 우주로 간다
저세상은 통증이 가셔
친구야, 두 팔로 안아 올린 너의 무게를 느낄 수 없어
밑바닥과 함께 추락 중인가보다
우리의 붕 뜬 가슴 곁을 맴도는 낙과가 탐스러운 걸
나무의 품을 떠나, 지상의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는, 녀석을 또한 결실이라고 불러본다
너 한 입 나 한 입
숲은, 누구도 가둔 적 없어, 주저앉은 울먹임을 가만히 바라볼 뿐
가끔, 숲은 스스로 갇혀버리기도 해, 숲을 받아들여야 했던 나무의 입장으로부터, 자신의 구멍에 다람쥐 가족을 키우며 죽어가는 나무의 그늘을 지나, 의심이 만연해, 바람 한 점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가 그토록 팽팽한 날에도, 새 떼는 제집처럼 숲을 드나들지, 선두의 주둥이가 허공을 찢고, 부서져 내리는 유리 조각에 눈을 감지 않는
저세상에도 눈이 내려
계곡의 메아리에 실성해 버린 칼바람이 여기까지 쫓아왔다
헤맬지도 몰라 길을 잃지는 않아
떨어진 나뭇가지를 엮어 침대로 삼자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고
고요가 찾아오고 우리의 숲은 여기 있어
< 무성한 마음 >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아이와 아빠의 아이로 갈라졌다
아빠는 주말에만 볼 수 있단다
영문 모를 슬픔의 한구석에서
미움이 돋아났다 늘 삐딱하게 자랐다
주말의 나와 평일의 내가 마주 보던 현관에서도
방과 후 홀로 앉아있던 교실에서도
어떻게 아끼면서도 외면할 수가 있죠
질문이 정답이라던 담임 선생님
즐거웠던 순간은 그만 좀 물어봤으면 했지
주로 강아지를 끌어안은 풍경, 저녁 식사를 기다리던 공복, 잠들기 싫은데 연신 눈이 감기던 땅거미
기억은 꼭 기쁨까지 슬펐는데
다가오는 마음이 곤란해 지나치는 마음은 막연해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마음도 있구나
하나뿐인 친구와 쪼그려 앉던 담벼락, 낯선 울적함을 헤아리고 싶던 간절함, 창문을 아무리 닦아도 산산조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슬픔은 결국이네, 눈앞의 예감을 지우려고 창밖의 풍경에 집착했지
우리의 유리잔에 우유를 채우던 아침, 어젯밤의 밀반죽이 이렇게나 부풀었어, 투명한 웃음을 되찾아 주던 뿌듯함
허물어지고 싶은 나는 담벼락에 기대어 두고
친구와 걷는 골목길이 좋았다 어디로든 이어지던 갈림길
나뭇가지 휘두르며 온 동네를 우리의 것으로 삼았고
이리저리 헝클어진 마음속에서 헤맬 때면
두 손을 모아 쥐었다 화분이라고 믿었다
안아주면 더 잘 자란다
어떤 슬픔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낫기도 한다
방황도 하나의 방향이 될 수 있겠죠
마음은 늘 제자리에서 무성해졌다
< 여기와 밖에 >
여기는 온통 벌판이야
풀숲에 쓰러진 나무 의자에 끈적한 여름이 묻어있어
의자 곁에 누워 여기의 바깥을 생각하네
헤맬수록 넓어지는 벌판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담벼락이 나타나면 그 너머에 집을 지을 생각이었다
멀리서도 찾아올 수 있도록 굴뚝을 높이고 빵을 굽고
식어가는 풀숲에 얼굴을 묻는다
풀잎이 풀잎에 기대어 벌판의 그림자를 품고 있어
무성한 어둠이 번져간다 어딘가로 어디로든
막다른 바닷가조차 나타나지 않은 거야
여기밖에 없는 하루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쓰러진 나무 의자는 거의 나무가 되었다
어울리고 싶은데
이쪽저쪽 부단히 가로지를 꼬리라도 자라났으면
내가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몸짓
멀리서 누군가 나타나면 힘껏 손을 흔들어 볼 생각이다
풀벌레 소리가 여기를 키우고 있어
웅크린다고 벌판이 작아지지는 않아
< 붉은 괄호 >
너는 왜 술만 마시면 세탁기에 들어가냐고
돌아버리면, 모든 걸 깨끗이 잊을 수 있냐고
투덜거렸더니 이번엔 사거리 우체통에 들어가는구나
어디로 가야 하는 줄도 모르면서
조금은 용감해진 거니
웃어넘겼어 저러다 말겠지
기분이라는 건 넉넉잡아 사흘이면 사그라드니까
나을 수 없는 기분도 있구나
깨어날 수 없는 계절이 있고
매일 아침 우체통에 쌓인 눈을 치우며 짐작해
저마다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마친 크리스마스카드 더미에
너는 뒤덮여 가네 좁은 투입구 너머
홀로 초점 없는 표정으로
그럼 모든 곳에 가보는 건 어때
정처 없도록 해
유예되던 환절기는 갑자기 찾아와
너 없는 우체통에 편지 하나를 넣기 위해
기록하고 있어
뒤늦은 꿀벌이 새로운 계절을 유행시키는 동안
짙은 장마도 짧은 기쁨도
비 내리는 거리에 나만 우산 없는 날
겨우 도착한 대문 앞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드는 일
까맣게 잊고 살던 꼬마 눈사람의 나무 팔이라 여기는 일
천천히 그늘에 말려 책갈피로 삼아
새벽잠을 설친 날엔 빈 꽃병에 꽂아두기도 하고
물을 주면 썩어버리니 달콤한 기대는 금물
올여름은 유난히 더울 것이란 예보에 집을 나서네
허리까지 무성해진 수풀을 쓰다듬어
너의 소문처럼 떠돌던 바람이 들판을 흔들고
< 가위 >
다시는 꿈을 꾸지 않아
애꿎은 여권은 왜 잘라버렸니
안 가본 데가 없어, 어디에도 행운은 없더라
그런 나쁜 꿈은 손끝 발끝 힘을 모아서 단박에 벗어나야지
글쎄, 악몽은 턱밑까지 멱살만 잡을 줄 알지
종지부는 본인의 몫
자꾸만 번뜩이는 건 가윗날보다는 좋았던 날
그래서 전화선까지 잘라버렸니
다시는 문을 열지 않아
온몸이 방바닥에 들러붙어 버릴걸
뺨은 닿기 위해 존재하는걸
다시는 꿈을 꾸지 않아
필요한 건 충분히 붉은 다라이
한 사람을 담아내는 부피란 이토록 담담해
살가죽 밖으로 쏟아낸 만큼만 영혼으로 인정받는대
울고불고 안 해본 게 없어, 곱씹어도 봤는데
단물이 다 빠지니까 진짜 맛이 나더라
서랍을 뒤져봐도 빛바랜 사진이나 일기장 따위는 없을 거야
기록하지 않는다고 사라질 기억이라면 갈 길 가렴
들러붙은 껌딱지가 사람보다 오래 살아
필요한 건 영원히 썩지 않는 고무 다라이
함께 벌거벗은 물놀이 너무나 멀어진 이야기
나, 등에 복점이 있는 줄도 모르고 죽을 뻔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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