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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과 저곳 사이 어디도 아닌

뫼르달(61.78) 2017.08.20 18:47:14
조회 449 추천 4 댓글 1

 어떤 책이야?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맞아 너는 소설만 읽었잖아?

 

 K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손에 들린 봉투를 들춰봤다. 

 

 정말이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살 책은 아니잖아? 굳이 못 살 이유도 없지.


 그녀는 두툼한 패션 서적과 사진집을 들고 있었다. 독립서점에서 끼워 파는 엽서 몇 장도 있었다. 무명 디자이너가 편의점이나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번 돈으로 펴낸 책일 것이다. 한 자라도 더 많이 담으려고 애쓴 노력이 느껴졌다. 그런걸 K같은 사람들이 하나씩 사주는 것이다. 학벌 좋고 부유한 부모를 둔 젊은 패션 피플. 그녀는 유행 타는 교양서적을 꼬박꼬박 챙겨읽고 틈틈이 김연수, 김영하, 하루키를 읽었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브랜드를 입고 여름철이면 먼 나라로 휴양을 떠나곤 했다. 그녀가 휴가를 떠나면 나는 데이트 비용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넌 그런 거 관심 없는 줄 알았어.  '그런' 거?  국가라니, 정치, 사상, 뭐 기타 등등.  나는 뭐 자연인이냐?  고매한 문학 청년은 어떠니?  


 웃음이 나왔다. 우리의 첫만남을 떠올렸다. 그녀가 다가온 것은 내가 자연주의 소설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밀 졸라'였다고 기억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마침 K도 '그런 것'들에 한창 열을 올리던 상태였고, 내가 문창과에서 상경계열로(K는 경영학과이다) 전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불쑥 말을 걸었다.


 너 문학하던 애라며? 


 응, 이라고 했는지 아니, 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대답을 할 수 없었던가? K에게 나는 무엇일까. 난 그저 그녀의 책장을 장식하는 팔자좋은 단편소설일까. 가능성이라는 것은 한 번 나타난 후로는 절대로 0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의심은 꼬리가 아주 길다. 그리고 의심이 깃든 마음에는, 사랑이 머물 수 없다. 프시케를 떠난 에로스처럼. 스스로를 향한 의심은, 그건 정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다. 


 너를 사랑할 수는 없겠어. 물론 속으로 뱉은 말이다. 슬쩍 K의 손을 잡는다. 따뜻하다.


 그녀는 값비싼 옷들로 치장하고 몇 권을 책들을 읽는다. 수석이나 차석으로 졸업한 후에는 승승장구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치졸해진다. 학자금 대출도 데이트 비용을 위한 아르바이트도 없는 대학 생활. 누군가에게 그건 정말 소설같은 이야기다. 내 자취방에 K를 초대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고매한 문학 청년 좋지. 생활력이라곤 없어서 누군가의 후원을 기다리는 거야. 책임질 수 있어? 

 

 K는 싱긋 웃으며 어깨에 기댄다. 그녀에겐 이런 말들도 농담이다.

 너를 사랑할 수는 없겠어. 다시 속으로 뱉는다. 그리고 서글픈 마음이 든다. 우린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이다. 물음을 던지면 울음으로 돌아오던 많은 밤들 동안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오들오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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