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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훈 에세이] 영원히 꺼지지 않을 평화의 불

운영자 2006.01.25 18:11:14
조회 2670 추천 0 댓글 4

  3. 평화, 멀고도 험한 길

  
영원히 꺼지지 않을 평화의 불

  마침내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올림픽 사상 최다 참가국인 160개국 9,5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모스크바와 LA 올림픽이 반쪽 대회였던 데 반해 북한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가 참가한, 명실공히 인류 평화의 대제전이었다. 이 반쪽 난 민족이 반쪽 난 세계를 다시 하나 되게 하는 세계 문명사적 민족 대역사였다. 이 대역사의 뒤에는 남모르는 노력과 어려움과 사연들이 숨어 있었다. 한 가지는, 이런 평화 분위기를 사전에 적극 고취시키기 위해 올림픽이 열리기 한 해 전인 1987년에 서울 올림픽 평화위원회가 조직된 것이었다. 외국에 알려서 어떤 유형의 보이콧도 생기지 않게 노력을 결집시켜 나갈 위원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문태갑 서울 올림픽 성원 국민 운동 본부장이 큰 격려를 해주었고, 이후 강영훈, 김성진, 이태영, 이홍구, 정근모, 김옥길 등 많은 분들이 도왔다. 당시 서영훈 적십자사 사무총장의 추천으로 위원장에는 평생 평화 운동에 헌신한 함석헌 옹을 추대했으며, 나는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아 위원회의 실무를 진행하였다. 나는 이 위원회의 이름을 SAO(Seoul Assembly of Olympeace)라고 했는데 모든 참여자들이 ‘Olympic’과 ‘Peace’를 합친 이 단어에 대찬성이었다.

  SAO 평화위원회는 해야 할 일들을 몇 가지로 집약시켰다.우선 세계 평화에 기여한 인물이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영국 수상 등 세계 각국의 지도자, 특히 동구권의 평화 운동가들을 초빙하여 세계 평화 증진을 위한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국내에서는 윤보선 전 대통령, 한경직 목사, 윤석중 아동문학가, 이강훈 광복회 회장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올림픽을 통해 인류 평화와 민족 화합에 기여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중요한 과제는 전세계에 서울 평화위원회의 의지와 목표를 알리는 작업이었다. 문안을 작성하고 수정을 거듭한 결과 간략하게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염원, 즉 “An Appeal for Olympeace”라는 제목아래 내용을 담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을 하였고, 만약 그 취지에 찬성을 하면 서명을 해서 보내 달라고 했다. 이 일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부시 부통령을 비롯한 여러 국가 수반들과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 수많은 세계인들이 서명을 해서 보내 주었다. 이들의 서명을 모아 한 장으로 축소한 기념물은 이때 SAO의 노력을 증명하는 역사적 유물이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올림픽 공원 안에 ‘평화의 불틀(Eternal Olympeace Flame)’을 세워 영원히 꺼지지 않을 평화의 불을 밝히는 일이었다. 점화일은 서울 올림픽 개막을 닷새 앞둔 9월 12일로 결정하고, 올림픽 분위기를 평화의 축제로 승화시키는 의미 있는 행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준비 기간이 한 달도 되지 않아 올림픽 공원 내 ‘평화의 문’을 공사하면서 같이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불틀’을 초스피드로 설계했다. 기본적인 개념은 지구의를 만들어 한국이 그 맨 위에 나타나도록 하고 그 위치에서 평화의 불이 솟아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불이 솟아 나오는 꼭지점에다 테트라히드론(Tetrahedron)을 세워 21세기 지식 혁명 시대를 상징하였다. 다시 말해서 점철적인 사고, 수평적인 사고, 수직적인 사고, 그리고 평면적인 사고를 지나 이제 인류는 입체적 사고의 시대에 진입하였음을 알리려고 했다.

  정삼각형 위에 꼭지점을 하나 추가하여 정사면체인 테트라히드론을 만들면 기하학적으로 우주에서 가장 단순한 입체 모양이 된다. 그 4개의 꼭지점들은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어울리고 보완되어 말 그대로 입체적 교호(交互)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을 정점으로 한 지구의를 만들고 그 위에 테트라히드론 모양의 발화점을 세운 후 아울러 세계 평화와 입체적 지식 시대의 개막과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의 진취적인 자세를 형상화하기 위해 사통팔달(四通八達)을 의미하는 8각의 받침 구조를 만들었다.

  이 돌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 충청북도에서 각각 3톤씩이나 되는 무거운 8개의 화강석을 다듬었고, 1톤 정도로 다듬어진 돌 8개를 만들어 기초를 세웠다. 평화의 불틀을 세울 자리는 올림픽 공원 정문 쪽, 평화의 문 한가운데 광장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준비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큰 문제가 발생했다. 불이 점화되는 부분의 제작은 많은 기술을 요하여서 한국에서 쉽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특수 재질로 만들어야 하고 불이 나오는 양도 조절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술이 국내에는 없다는 얘기였다.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가스 공사 관계자와 프로판 가스통 제조업자를 수소문하여 얻은 결과는 ‘제작이 가능한 회사가 일본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일본 회사의 한국 지사가 있는 부천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제작비가 무려 2억 원이나 드는 데다 그나마 제대로 만들 자신도 없다는 것이 아닌가. 전체 예산이 고작 1억 7,000만 원인데 2억이라니.

  한편 함석헌 옹은 서울대 병원에 입원 중이었지만 행사 당일인 12일에는 잠시라도 퇴원해서 평화의 불을 지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도 같이 점화하겠다고 알려 왔고, IOC 위원장인 사마란치도 같이 점화하는 게 좋겠다는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SLOOC)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점화봉도 2m가 넘는 것을 세 개나 만들어야 했다. 물리적인 시간도, 예산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기도했다. 세계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우리 위대한 한민족의 손으로 만들어 불을 붙이고자 하는 기구인데, 그리고 예부터 손재주 좋기로 유명한 우리 민족이니, 어딘가 찾아보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곳이 있었다. 청계천 세운 상가!

  그곳에 가면 잠수함과 핵무기 빼놓고는 뭐든지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수소문 끝에 세운 상가에서 일하는 20대 중반의 청년 하나를 찾아냈다. 그는 내 설계도를 보더니 한번 해보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제작비로는 단돈 200만 원을 요구했다. 며칠 뒤 청계천과 세운 상가 서쪽 길가에서 그는 테트라히드론 모양의 점화틀을 가지고 나타났다. 길가에다 프로판 가스통을 대 놓고 불틀에 연결하여 불을 붙여 봤다. 성공이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진짜 한국인이고, 세계 평화를 이룬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9월 12일, 평화의 불 점화식. 나는 그 전날인 11일, 올림피스 깃발들을 위시한 여러 장비들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마니산에서 선녀들과 함께 성화를 채취했다.

  드디어 내 손으로 정성스럽게 설계하고 만든 평화의 불틀에 첫 불꽃이 피어오를 개막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날 평화의 불을 붙이기 위해 함석헌 위원장과 노태우 대통령, 그리고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위원장이었던 나는 아쉽게도 점화의 순간에 그 자리에 함께할 수가 없었다. 그곳까지 연결할 도시 가스관이 없어 평화의 문 동편 소나무 숲에 임시로 프로판 가스통을 숨겨 놓고 평화의 문 한 기둥 뒤에서 사인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정확한 타이밍을 놓쳐 버린다면 역사적인 평화의 불 점화식은 엉망이 될 상황이었다. 나는 평화의 문 옆에서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긴장 때문에 내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선두에 선 세 명의 점화자들이 평화의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정확하게 사인을 보냈다.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울려 퍼지는 팡파르와 함께 역사적인 서울 올림픽 평화의 메시지를 지구촌에 알리는 평화의 불이 점화되었다. 불꽃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해냈구나!’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평화의 불 점화식은 성황리에 마쳐졌다. 행사를 마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몽촌토성 서쪽, 세계인들의 조각이 전시된 곳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휠체어를 탄 함석헌 옹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여윈 뺨 위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함석헌 옹이 나를 불렀다. 내 손을 꼭 잡으며 나직이 말했다. “내가 이걸 보려고 지금까지 살았나 보네. 내 나이 여든여덟에 …….”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손은 감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1988년 추운 연말에 함석헌 옹은 세상을 뜨셨다. 인류 평화를 기원하는 불을 붙이고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지켜본 후였다. 오산고등학교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내내 오열하는 문익환 목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 또한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큰 어른이 손수 붙인 그 평화의 불이 오래오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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