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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리뷰 : 나바지오의 전설

이응(119.204) 2020.02.10 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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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바지오의 전설




군부대의 조용하고 평온했던 오전 시간을 시끄럽게 만든 이들은 우르크의 나쁜 사람들이었어. 무기밀매업자들이 운 나쁘게도 교통사고를 당한 거야. 사고를 당해서도 불행하고 그 덕에 무기밀매까지 걸려서도 불행하고, 아무튼 그 나쁜 사람들의 오늘은 불행했어.

사고를 수습하고 범법자들을 현지 경찰에게 넘긴 후에 시진과 대영이 사건에 대한 의논을 하며 돌아오는데 그 앞으로 모연이 다가왔어. 시진이 자리를 비운 내내 그녀는 사고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어.

“괜찮아요? 다친 사람은 없어요?”
“단순교통사고였습니다. 다들 당황했을 텐데 괜찮습니까?”
“저희도 뭐, 응급이 일상인 사람들이라.”
“다행입니다. 전 그럼 볼일이 있어서…….”

죽은 사람도 있었고 다친 사람도 있었지만 시진은 사실을 말하지 않아. 무기밀매 사건은 모연과 상관없는 그의 일이고 군 외부인인 그녀에게 해줄 말이 아니니까. 시진은 가장 납득하기 쉬운 말로 둘러대고 자리를 뜨려 했어. 그의 부관이 사기꾼만 아니었다면.

“저기 죄송한데 와이파이 비번 좀 알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군용 와이파이는 민간인 접속이 제한됩니다. 보안규정상.”
“???”

점점 멀어지던 시진은 대영의 사기행각에 뒤를 돌아보았어. 중대장인 그조차도 모르게 언제부터 와이파이가 군용 따로 민간용 따로 있었던 건지 대영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순진한 여의사 한 명을 속여먹고 있었어.

“시내에 인터넷 카페가 있습니다. 마침 중대장님이 그곳을 지나가십니다. 태워다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영의 속내는 이러했어.

‘이 의사분’은 며칠째 중대장님을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게 만든 분이다. 지금도 중대장님은 이 분 눈치를 보고 있다. 이 분에겐 인터넷이 되는 환경이 필요하고 부대에서 안 되면 다운타운에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부대를 나가는 중대장님의 차를 타고 나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이 의사분을 중대장님의 옆에 태워 보낼 수 있다!

아주 훌륭한 가정과 논리를 순식간에 완성한 서스토이, 사랑의 오작교, 문장가 서대영은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 표정과 말투로 ‘강모연이 유시진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냈어. 아주 완벽하게도. 언제부터 본진 가는 길에 시내를 지나쳤던 건지 대영은 그 짧은 순간에 새로운 경로까지 만들어냈지. 신항로 개척에 이은 신경로 개척이랄까.

이렇게 훌륭한 부관을 봤나.

“……부중대장 뭐 잘못 먹었습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단결!”

당황한 시진이 어느새 그들 옆으로 돌아와서 말했지만 대영은 어느새 모연을 그에게 토스해주곤 장난스레 경례를 붙이고 시진이 미처 경례를 받아주기도 전에 사라졌어.

대영은 시진의 타는 속을 알고 있었어. 모연에게 다가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그녀 주위를 빙빙 맴돌며 속을 태우는 불쌍한 팀장님을 대영은 남자답게, 전우애로 도와준 거야.

어색함에 서로 눈도 못 마주치는 두 사람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싫지만은 않아. 시진은 대영의 거짓말을 바로잡고 모연이 할 헛걸음을 막아주어야 한다는 마음 속 양심이라는 놈을 지그시 지르밟고 그 입을 다물게 했어. 그리고 조용히 운전석에 올라앉았지.

하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우르크 풍경이 보이지도 않는지 모연은 새로 개업할 자신의 병원 건물 계약 문제로 바빠. 시진은 8개월 만에 자기 차 조수석에 앉아 있는 모연이 새삼 신기하고 좋은데 모연은 그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서 내심 서운하지.

모연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조금은 불퉁한 표정의 시진이 말을 꺼냈어.

“이사합니까?”
“아뇨. 병원 때려치우고 개업하려구요.”
“이사장이랑 스캔들 때문에?”
“어떻게 알아요?”
“강선생 자리 비우면 의료팀들 다 그 얘기만 하던데.”
“…….”

공항에서 모연이 의료팀들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한 여파는 이토록 컸어. 카더라가 아닌 당사자 입에서 나온 호텔 발언은 여러 사람의 입을 즐겁게 했지.

모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말들은 시진의 귀에 쏙쏙 박혀들었어. 소머즈인줄.

모연이 다니는 병원의 이사장이라는 자식이 그녀를 호텔룸으로 데려갔다가 대차게 까였다는 부분이 그 이야기의 핵심이었지.

시진은 안 듣는 척 모든 정보를 수집했고 그 얼굴도 모르는 이사장이란 놈팽이를 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좋은 남잔 아니었나 봅니다.”
“좋은 놈이었음 제가 여기 안 왔겠죠.”

순간 시진의 미간이 더 좁혀져.

그렇지. 안 왔겠지. 당신이 여기 온 건 거하게 차인 것에 대한 그 새끼의 복수였으니까.

이사장이란 놈을 모연이 마음에 들어 했더라면 시진은 이렇게 그녀를 다시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거야. 천만다행하게도 일어나지 않은 그 이가 갈리는 만약의 가정에 시진은 한층 심술 맞아진 얼굴로 말했어.

“그런 놈 만나라고 물러나 준 게 아닐 텐데.”
“만난 게 아니라……, 설명하자면 길구요. 암튼 오게 된 과정이 뭐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어요.”

사실 물러나준 게 아니라 차인 거지만 그 전후관계는 두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닌 사람을 다시 만났다는 이 믿을 수 없도록 이상한 현재야. 그것도 그 사람과 과거의 스캔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게 가장 기막히지.

누구 탓을 하겠어. 모연은 사방팔방 다 들으라고 떠들어댄 자기 입을 나무라며 이 어색한 상황을 넘기기 위한 화젯거리를 찾았어.

“저긴 어디예요?”
“멀어요.”
“내가 거리 물어봤어요?”
“…….”
“근데 지금 나한테 신경질 내시는 거예요?”
“누가요.”
“지금 신경질 내시잖아요.”
“아, 뭐가요!”

신경질 내는 시진과 그런 그가 참 어이없는 모연은 서로 약간은 냉랭하고 어색하게 예화의 가게에 도착했어.

모연은 시진의 이런 신경질이 내심 싫지 않아. 그가 신경질을 낸다는 건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에 질투를 느낀다는 거고, 그 말은 여전히 그가 그녀에게 아주 관심이 많다는 뜻이니까.

예화의 가게에 들어서며 심통 난 듯 그녀의 걸음을 맞춰주지 않는 시진을 쫓아 종종종 뛰어가는 모연의 걸음이 급해. 시진은 다른 남자를 잠깐이나마 고려한 모연에게 그렇게라도 골을 내고 싶었던 거야. 다 큰 남자가 어린애처럼…….

“여기 와이파이 되는 거 맞아요?”
“잘 뒤져보면 여기 어디 미사일도 있을 걸요?”

시진은 이제 그의 일상 속을 함께 하고 있는 모연을 신기하고 행복해하며 바라보았어.

모연이 그가 일을 하는 부대에 함께 있다고 해서 걱정했던 것처럼 곤란한 대화와 상황만 펼쳐지는 건 아니었어. 정말 다행이지. 시진은 모연을 바라보며 2주뿐이지만 함께 보낼 시간동안 이 정도의 평화만이 이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

시진은 여전히 모연을 자신의 일과는 아주 무관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기를 바랐고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 당장 그날 밤에 생길 큰 사건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 * *


본진에 갔다가 씁쓸함만을 안고 돌아온 남자에게 모연은 신경을 끌 수가 없어. 무기 밀매 사건에 대한 보고를 깔끔하게 마치고 모연이 기다리는 철물점으로 신나게 돌아오려던 시진의 뒤를 잡은 건 사령관이 직접 내린 대영의 전출 명령이었어.

대영에게 있어서는 도무지 공명정대한 평소 모습을 지키지 못하는 사령관 윤길준이 또다시 부당한 명령을 내린 거야. 사령관의 바르지 못한 부분을 대면할 때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친우를 상처 입힐 때마다 시진은 실망스럽고 답답해.

씁쓸하게 굳어진 시진의 얼굴이 못내 신경 쓰이는 모연은 도통 창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갈 땐 그리 가볍던 걸음이 올 땐 이렇게 무거워져서 왔는지 모연은 걱정스러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묻고 대답하다가 두 사람은 공통화제인 대영과 명주 사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명주와 무슨 사이이기에 모연에게서 은연중에 날선 느낌이 풍기는지 시진은 궁금하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아. 지금 중요한건 그녀가 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는 거니까.

다운타운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내내 그에게 퉁명스럽던 모연이 이제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걸기 시작했어. 시진은 그게 못내 반가워서 사령관에게 들던 원망의 마음도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 같아. 내친 김에 시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멀다던 나바지오 해변에 그녀를 데려가기로 했어.

대영과 명주의 러브스토리를 이야기해주며 시진은 선착장에 차를 세웠어. 오늘이 아니면 남은 날 중에 그 아름다운 풍광을 또 언제 모연에게 보여줄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까.

“아까 그 해변 갈 겁니다. 일 바빠지기 전에 가보면 좋을 것 같아서.”
“멀다면서요.”
“머니까. 오래 같이 있고 싶거든요. 이쪽이에요.”
“…….”

모연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는 시진의 마음이 자꾸 느껴져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자니 마음은 기쁜데 머리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해. 두 사람의 이별의 이유 중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자꾸만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가까워지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데 마음은 그런 머리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를 않지. 마음이 마음대로 되면 그게 마음이겠어.

모연의 머뭇거림에 시진이 돌아서서 그녀가 따라 걸어올 명분을 주었어. 대영과 명주의 러브스토리의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따라오라고.

모연은 못이기는 척 시진이 내민 명분을 핑계 삼아 따라 뛰었지. 아직은 마음 가는대로 해도 될 것 같았어.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걸리는 브레이크.

삼각관계.

“그러니까, 명주 아버지가 점찍은 사윗감이 유대위님이란 말이에요?”
“네.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도망갈 듯 도망가지 않는 모연에게 시진은 계속해서 이야기했어. 은근슬쩍 자신과 명주의 사이는 그저 명주 아버지의 욕심일 뿐이고 명주의 연인은 대영임을 밝혔지.

얼마 안 있으면 명주가 파병을 올 거고 그럼 그와 명주의 사이가 그냥 선후배 간은 아니라는 걸 모연도 알게 될 테니, 여기저기서 소문으로 듣고 그녀가 오해하기 전에 자신의 입으로 먼저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었던 거야.

사실 시진이 하고 싶었던 말은 다른 부분 아닌 그 부분이었어. 사윗감이고 뭐고 그건 그쪽 사정이고 명주에겐 이미 정해진 연인이 있으니 나와의 사이는 오해할 부분이 전혀 없다, 딱 그 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말이 시진에겐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였지.

하지만 모연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가 명주의 남편감으로 점찍어진 남자라는 거야. 그에 대한 감정이 미련이라기엔 짙고 진심이라기엔 두려운 상황에서 이 남자가 누군가의 사윗감으로 낙점된 사람이라니 어떤 여자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 그것도 과거에 같은 남자를 사이에 두고 좋지 않게 얽혔던 후배의 남편감이라니 정말 달갑지 않은 상황이지.

“잠깐만요. 그러니까 명주, 서상사님, 유대위님이 삼각관계라구요?”
“네.”
“지금도 유효하고?”
“네.”

보트에 먼저 타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려는 시진의 손을 외면하고 모연은 일단 물었어. 당신 손을 잡을지 말지 당신 대답을 듣고 결정하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그래서 유대위님 입장은 어떤데요?”
“내 입장이 왜 궁금합니까? 뻥 찰 땐 언제고.”

모연은 순간 아차 싶었어. 마치 제 남자 단속하는 것처럼 굴었다는 생각이 든 거야.

사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니, 아무 사이 아닌 수준이 아니라 모연은 시진을 오래 전에 차버렸지.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관계인데 그녀가 마치 내가 당신의 주변 여자관계를 모두 알 자격이 있다는 것처럼 군 거야.

멍한 사이 시진에게 손목을 잡혀서 보트에 타긴 했는데 모연은 이 무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어.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날 차놓고 왜 내 주변 여자가 궁금하냐고 시진이 책망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가슴이 싸해.

“……그냥 물어본 거예요.”
“…….”
“그냥 물어본 거라구요. 대위님 입장 안 궁금하다구요.”
“방금 표정은 되게 궁금했는데.”

시진은 내심 기뻤어. 자신에 대한 모연의 독점욕이 찰나나마 눈에 보였으니까. 그녀가 자신과 명주의 사이를 신경 쓰는 게 기꺼웠고, 아직 우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지.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장인 되실 분이 원한다고 결혼이 성사가 될 일은 아니잖아. 그것도 당사자에게 따로 결혼할 남자가 있으면 더더욱 그렇지. 이쪽에서도 그런 결혼은 사양이고.

만약 남자가 그 여자와 결혼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여자와 딴 남자의 러브스토리를 이렇게 성의 있게 뽑아낼 수가 있겠어? 이미 답 다 나온 문제를 모연만 바보같이 모르고 그래서 당신은 어떠냐고 입이 부르트도록 물은 거지.

시진은 바보 같지만 듣기엔 참 좋은 질문을 하는 모연의 입술을 연신 들여다보았어. 참고 또 참으며 살짝만 가까워져도 금방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녀를 보는 남자를 모연은 피하지 않아. 솔직히 맘에도 없는 남자가 자기 얼굴을 확 들이대면 어떤 여자가 식겁 안 하겠어. 순간 손이 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다른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지뢰를 핑계로 달라붙었다면 왜 자꾸 슬금슬금 다가오느냐고 모연은 일찌감치 그 남자를 멀리 했을 거야. 이사장도 후려치는 모연에게 시진이 하는 행동은 다른 남자들이 했다면 이미 정강이가 까이고 뺨을 얻어맞아도 한참 전에 맞을 짓이지.

이상하게도 모연은 유시진이라는 남자에게는 일찍부터 경계심이 낮았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일정 거리를 지켜줄 생각을 아예 않는 시진을 모연은 한 번도 고개 돌려 피하거나 멀리하지 않았지. 그건 그녀가 시진을 유달리 마음에 들어 하기 때문이야. 따로 애인이 있다는 후배의 아버지만 열 올리신다는 시진의 실체 없는 결혼설에 때 아닌 분노를 표출할 만큼…….

“잘 잡고 있어요. 날아가지 말고.”
“…….”

딴 여자의 남편감이라는 생각에 시진의 다정한 말도 지금은 그저 밉기만 해서 모연은 입술을 삐죽댔어.

시진은 해변으로 가는 동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모연에게 하나하나 가리키며 빠짐없이 보여주었어. 그는 마침내 그것들을 보여줄 수 있게 되어 기뻤고, 그 모든 것들을 본 모연은 방금 전의 그 샐쭉한 표정은 간데없이 솔직하게 웃었지.

이윽고 두 사람이 탄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먼저 내린 시진이 손을 내밀었지만 모연은 이제 나 정신 차렸다는 듯 차갑게 외면했어. 그리곤 혼자서 씩씩하게 보트에서 내렸지.

딴 여자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손을 그냥 막 어떻게 잡아?
저 손이 딴 여자 손도 막 잡을지 어떻게 아냐고! 이씨!

표낼 수 없는 질투를 속으로만 삼키며 모연은 걷기 쉽지 않은 백사장을 열심히 앞서 걸었어. 시진은 정말 쉽지 않은 여자구나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어.

“근데 여기 진짜 뜬금없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죠? 기절하게 예뻐요.”
“그럼 또 와요.”

모연의 마음을 끈 도로의 표지판은 실제의 아름다움을 백분의 일도 담지 못한 것에 불과했어.

하늘까지 닿을 듯 높은 절벽 앞에 생긴 모래사장도 특이했지만 그 곳에 홀로 난파되어 남은 잔뜩 녹슨 배는 더욱 신비하고 특별했지. 홀로 이곳에 남겨진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녹이 슬어 이곳저곳이 휘어지고 기울어진 배는 이 자연 속에 묻혀 있기엔 너무 뜬금없었어.

모연의 행복한 탄성을 들으며 시진은 하얗고 반질반질한 예쁜 돌 하나를 주워들었어.

“이곳 사람들은 이 해변에서 돌을 가져가면 반드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거든요. 자요.”

그의 돌발적인 일탈행동에 솔직하게 좋아해주고 기뻐하는 모연을 보고 시진은 그녀의 마음이 점점 자신에게로 가까이 오는 것 같아서 퍽 기뻤어. 더 이상은 냉랭하지 않던 차 안의 공기도, 그의 굳은 표정을 걱정하던 모연의 목소리도, 그의 뒤를 따라 걷던 작은 발걸음도, 그의 삼각관계를 질투하던 모연의 모습도, 모두 그녀의 마음이 시진에게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말해주었어.

시진은 그래서 나바지오의 전설을 이야기해주며 모연에게 돌을 건넸어. 다음에 또 ‘같이’ 오자고. 꼭 둘이 함께 돌을 갖다 놓으러 오자고. 그가 반한 여자의 손에 작고 하얀 조약돌을 꼭 쥐어주었어.

햇살에 따뜻하게 달아오른 돌을 꼭 쥐고서 모연은 배 안쪽으로 걸었어. 배 안쪽은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의 필체와 그들이 가져갔다가 도로 갖다놓았다는 돌들로 가득했어. 모연은 정말 그 전설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며 이 배에도 무언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어.

“근데 이 배는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홀려서……. 아름다운 것에 홀리면 이렇게 되죠.”

본인이 이 배라도 되는지, 마치 자기는 배의 그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말하는 시진이 재밌어서 모연은 웃으며 물었어.

“홀려본 적 있어요?”
“있죠. 알텐데.”
“…….”

모연은 자신을 바로 보며 말하는 시진에게 당황을 감출 수가 없어.

날 홀린 게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냐고 되묻는 남자의 눈빛은 그녀의 미소를 거두어갔어. 이미 끝난 사이를 돌이키려는 남자의 용기가 그녀를 당황하게 했어.

시진은 모연에게 다가가는 걸음을 늦출 생각이 없어. 8개월 전 그렇게 헤어지고 금방 괜찮아질 것 같았던 마음은 내내 괜찮지 않았어. 그런데 길다고 하면 긴 그 시간동안 잊지 못한 여자가 다시 한 번 그의 인생에 들어온 거야.

시진은 이 우연 같은 운명을 그냥 지나쳐가게 둘 마음이 이제 없어. 이건 모연을 잡으라고 하늘이 그에게 주는 기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러고 보니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잘 지냈어요?”
“…….”
“여전히 섹시합니까? 수술실에서?”

그 순간 모연의 가슴 뛰던 아름다운 환상은 깨어지고 그녀는 당당치 못한 현재의 자신을 떠올렸어. 순수를 잃은 지 오래인, 재투성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생명을 살리기 위해 메스를 들던 예전의 모연을 기억하고 ‘여전히’ 그렇기를 바라는 듯 말하는 남자에게 그녀는 기대에 부응할 대답을 할 수 없어. 그렇지 못하게 된지 이미 오래니까.

“……오해하셨나본데, 나 여기 봉사니 사명감이니 좋은 뜻으로 온 거 아니에요.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잠시 날 끌어내렸어요. 끌려 내려온 곳이 여긴 거죠.”
“…….”
“그리고 나 이제 수술 안 해요. 수술 실력은 경력이 되지 못하더라구요. 금방 돌아갈 거고, 돌아가면 다시 있던 자리로 올라가야 해서 아주 바빠요.”

하지만 모연은 그렇다고 자신을 포장할 생각은 없어. 그래서 시진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해.

난 이제 봉사와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에요.
이곳은 나에게 유배지와 다르지 않아요.
수술실에서 살던 나는 이제 없어요.
이제 난 바른 곳이 아닌 높은 곳으로 가길 원하니까.
난 당신이 안부를 묻고자 한 그 강모연이 아닌지 한참 됐어요.

“……그렇군요.”
“이거요. 나보단 대위님이 빠를 것 같아서요.”

모연은 잠시 현실을 잊고 환상에 젖어 꼭 쥐고 있던 돌을 돌려주었어. 그녀에게 시진이 주었던 진심을 그에게로 다시…….

“확인해 봐요. 진짜 돌아와지나.”

정말은 돌려주고 싶지 않아서 손 안에서만 연신 만지작대던 마음이었지만 모연은 끝내 돌려줄 수밖에 없었어.


그 전설은 당신 혼자 확인해 봐요.
난 이곳에 다시 오지 않을 거니까.




이어지는 글 : 타협할 수 없는 가치

수정 전 : 나바지오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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