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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sterhood 번역 47

ㅇㅇ(121.141) 2020.03.05 22:23:35
조회 126 추천 0 댓글 2
														

01


"이쯤인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서류철의 주소를 확인한 다음 랜터카를 몰아갔다. 주차한 뒤에 눈앞의 집을 한참 바라봤다. 인버네스의 저택같은 규모는 아니지만 보통 일본식 주택보단 크다. 처음 보는 이 동네는 어린 시절 살던 마을처럼 보수적인 상류층 냄새를 풍기지는 않는다. 엄마랑 아빠가 왜 여길 골랐는지 궁금해지네.


한숨을 쉬고 마지못해 부저를 눌렀다. 오늘 여기 들를 생각은 아니었다. 음.... 사실 오늘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시간을 떼우려고 만화책을 몇 권 가져왔다. 그리고 릴리를 정말 만나고싶었다. 릴리와...


"아키라! 와 줘서 기쁘구나."


뜻밖에도 엄마가 문을 열고 나를 맞이했다.


"요."


엄마가 비켜서자 나는 신발을 벗고 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신는다. 엄마는 낯선 하늘빛 기모노 차림이었는데, 아마 여기 와서 산 모양이었다. 일터에서 정장 차림에 익숙해 진 뒤에 드레스 차림을 보니 좀 이상한 기분이다. 처음 스코틀랜드에 가서 이상하다 느꼈던 건, 엄마랑 아빠가 일본에 있을 때는 기모노를 자주 입어서였다.


슬리퍼를 다 신으니 엄마가 우아하게 허리르 숙였다.


"사토 양, 어서 돌아오렴. 재미있게 보내."

"어서 돌아오라고요?"

"여긴 처음이니까 나중에 구경시켜 줄게.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아."

"네. 엄마도요."


엄마를 따라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간다. 겉보기엔 꽤 아늑하다. 낮은 테이블과 큰 소파 두 개, 벽엔 옷장이 있고 구석엔 거대한 트리가 서 있다. 은은한 클래식이 들리는 걸 보니 서랍 어딘가엔 스테레오도 있나보다. 아빠는 짙은 색 기모노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무릎에 책을 올리고 읽고 있었다. 전형적이ㄹ어라. 다가가니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선 정식으로 인사한다.


"너도 함께해서 기쁘구나, 아키라. 새해 복 많이 받으렴."


나도 공손히 마주 인사했다.


"아빠도요.,"


엄마가 가볍게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면, 뭘 가져다 줄까?"

"맥주는 없겠죠?"

"틀렸어. 앉아있으렴. 가서 한 병 가져올게."

"...고마워요."


엄마가 걸어나가고 나는 자리에 막 앉으려는데 뒤에서 휙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문 소리가 들렸어요, 아빠. 이거..."


여동생이 조심스레 거실로 들어오는 게 보여서 곧바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릴스!"


릴리에게 다가가 그다지 배려없이 강하게 끌어안았다. 릴리가 무의식적으로 낑낑대서 한 번 더 웃음이 나온다.


아직 낑낑대는 정도군.


놀람에서 벗어난 릴리는 행복하게 나를 마주안아줬다. 잠시 그렇게 있다 포옹을 풀고 동생을 한참 훑어본다.


"음, 우아한데?"


아첨하는 게 아니었다. 눈부시게 하얀 기모노를 입은 릴리는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여기 와서 새로 맞춘 모양이다. 릴리가 미소지었다.


"안녕, 언니. 다시 봐서 기뻐. 새해 복 많이 받아."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얼마만에 보는 거지? 공부는 잘 돼 가?"

"새해긴 하지만 적어도 여섯시간은 공부할 계획이야. 아직은 예정대로 되고 있어. 나중에 얘기할 시간이 날 거야."


'우리'라고?


릴리 뒤로 문간 뒤에 반쯤 몸을 숨긴 다른 기모노 차림의 여자애를 발견한다. 그녀에게 다가가 릴리에게 한 것 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포옹을 전해준다. 그녀는 가쁜 쉼을 몰아쉬지만, 곧 어색한 포옹이 되돌아왔다.


"하나코, 안녕. 잘 지냈어? 새해 복 많이 받아."

"새,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아키라."


하나코가 불편해 하지 않을 만큼만 그녀를 훑어봤다..


"몇 달 새 본 것 중에 제일 귀여워. 거짓말이면 한 대 때려도 돼."

"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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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코가 안절부절 못하지만, 방금은 진심이었다. 하나코는 귀여웠다. 분홍색 기모노는 릴리와 멋지게 대조돼쏙, 잘 정돈된 머리카락이 목의 흉터를 가려줬다. 익숙한 앞머리가 여전히 오른쪽 얼굴을 가리고 잇었지만 그다지 거슬리지는 않는다. 기모노는 조금 컸는데, 아마 의도된 것 같았다. 낙낙한 부분이 하나코의 흉터를 잘 가려줬다.반면, 안았을 때 그녀는 조금 마른 느낌이었다. 제대로 챙겨먹고 있으면 좋을텐데.


"머리 직접 한 거야?"


하나코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 놀라웠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흉터를 가까이 드러내기 싫었던 거겠지. 뒤쪽이 조금 울퉁불퉁하긴 했지만 그래도 꽤 솜씨가 좋았다.


"색이 멋지네."


몇 주 전의 일이 떠오른다. 아빠가 갑자기 전화해서 폭탄 선언을 했었지. 부모님들은 하나코를 입양하기로 결정했엇는데, 나한테 여동생이 한 명 더 생기는 게 어떤지 물어보려고 했었다. 아빠 말투로 봐서 벌써 본인들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린 상태 같았지만, 적어도 코지 씨가 입양됐을 때의 아빠보다는 내게 많은 발언권이 주어졌다. 나는 하나코가 여동생이 돼도 상관없다고 대답했었다. 실제로 느끼는 건 좀 더 복잡하지만, 그래도 대답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릴리는 하나코가 크리스마스 다음 날 히사오랑 같이 온다고 했었다. 부모님들이 그때 이 얘기를 꺼낼거라고 했는데, 나는 한방중이건 뭐건 무조건 나한테도 소식을 알려달라고 했었다. 듣기로 하나코는 충격받아서 한동안 아무것도 못 했다고 했다. 결국 릴리가 하나코한테 생각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명분으로 나중으로 대답을 미뤘고, 압박감이 사라지며 주제가 다시 입시 얘기로 돌아갔다고 했다.


일주일 조금 안 된 일이었다.


그 사이에 하나코가 입양 서류에 사인했다면 릴리가 알려줬겠지. 아직 상황은 미해결인 모양이다.


이틀 전에 릴리는 하나코를 꼬셔서 히사오 없이 여기서 새해를 맞이하게 설득했다. 부모님과 하나코의 관계를 구축해 보려는 무언의 의도였다.


하지만 나는 하나코가 이것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했다.


"아키라?"

"어?"


엄마가 맥주잔을 들고 거실로 돌아와서 생각이 멈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어어, 아무것도 아니야.


잔을 들고 맞은편 소파에 앉는다. 어깨 너머로 릴리와 하나코를 확인하는데, 둘 다 그대로 있었다.


"얘들아, 계속 거기 있을 거야?"


아빠가 코끝에 걸친 안경을 재조정했다.


"타이밍이 좀 안좋았구나. 저 애들은 15분 전에 잠깐 쉬다 네가 도착할 때 막 공부를 다시 시작한 참이다. 지금 다시 쉬는 건 다소 무책임한 일이 되겠지."


아이고, 이 할배가 애들 관리는 잘 하는구만. 릴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두 시간만 더 하려고. 나중에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을 거야. 기대된다."

"그래, 알겠어. 열심히 하라고 둘 다."


릴리와 하나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부모님 앞에 놔둔 채 거실을 떠났다.


좋아.


"아키라. 인버네스는 어떠니?"

"좋아요, 내 생각엔. 사실 3주 전에 엄마 있을 때랑 비슷해요."


엄마는 내 대답에 눈을 굴렸다.


"그러면...네 남자친구 일은 어떻게 돼 가? 스코틀랜드에 있을 지 말 지 결정했어?"


두 달 전에 나는 유이치에게 사과했고, 우리는 다시 관계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코지 씨의 도움으로 나는 유이치를 임시 전근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는 잠시 머물면서 상황을 볼 수 잇었다.


같이 살지는 않기로 했다. 내 아파트에서 두 명이 살기엔 좀 좁았고, 또 우리 둘 다 매일 서로에게 헌신하기보다는 이전 이별 상태보다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금 떨어진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글쎄, 아직 수습하는 중이에요. 문화가 변해서 생각보다 적응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붙잡으려는 시도는 성공한 모양이에요. 음.... 꽤 잘."

"시도?"


인버네스에 간 뒤로 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하길 그만뒀다. 아버지처럼 일하다가 집에 앉아있는 삶을 벗어나기로 했다. 직장에서 사람들을 알아가는 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 같아서 피트니스 클럽에도 가입했고, 주말엔 펍 퀴즈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유이치가 인버네스에 왔을 때 나는 틈만나면 그를 끌고 다녔고, 지금 우리는 여가시간에 필요할 때 데리고 다닐 사람을 몇 명 알 정도가 됐다. 유이치가 지금 외롭지는 않을 거다.


"그냥 평범한 거요."


부모님은 내 대답같지 않은 대답에 눈썹을 치켜올리지만 캐묻지는 않으려는 모야이다. 그게 더 나을수도 있고.


"그 사람 부모님은 이사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니?"

"유이치한테 선택을 맡겼어요."


유이치의 부모님들에겐 이미 식당을 도와주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유이치를 일본에 붙잡아 두진 않을테지.


"그러면 너한테 달렸구나. 너희가 해 내기를 바란다. 다음번엔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렴."


눈이 굴러간다. 유이치는 회사 직원이었다. 저 둘이 모를 리가 없었는데."


"어어..."


엄마가 얼굴을 찡그린다.


"입이 잘 안 떨어지나보네?"

"신경쓰지 마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장거리 운전이었잖아요."


아빠가 입구쪽으로 손짓했다.


"필요하면 객실에서 좀 쉬거라."

"그래야겠네요."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고 엄마를 따라 부엌과 식당을 잠깐 둘러봤다.


"어떠니?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어?"

"....엄마가 출장갔을 때 여기 봐 주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면 아빠가 숨은 가사의 달인이었나?"

"일 도와주고, 적어도 아빠가 새 일 찾을 때 까지는 나 없는 동안 식사 봐 주실 분이 있어."


....서재는...


"여긴 낯익네요."

"옛날 방을 그대로 옮겨온 거 같지? 방이 거기보단 좀 작다 보니 어느정도는 다락방에 놔뒀지만, 전체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있는 거랑 같은 구조야."


....화장실...


"이것도 생각보다 크네요. 그때 대중탕 수준은 아니지만 몇 명은 들어가겠는데요."

"네 아빠가 더이상 향수병으로 고생하진 않으니까 그렇게 공들이진 않았어. 그래도 그이가 넓은 걸 좋아하잖니."

"스코틀랜드에서 그만큼 큰 게 진짜로 필요했어요? 두 명이서 사는데 그렇게 큰 게 왜 필요했던 거에요?"

"가끔 일본에서 사업차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잖아. 네 아빠가 그 사람들한테 호텔 대신 방을 내 줬었지. 인버네스엔 일본식 대중탕이 없으니까, 그럴 사람들은 집에서 함께 목욕할 때도 있었어. 여기는 우리 가족만 쓸 거지만."

"말이 되네요."


...다락방...


"여긴 사무실 축소판이네요."

"서재에선 네 아빠가 뒤에서 일하거나 책 보는 데니까 여긴 내차지야. 릴리랑 네 아빠 일이 해결되면 여기가 내 아지트인 셈이지."

"낡은 타자기는 왜 있는 거에요?"

"헤헤, 내가 기자 일 하던 무렵에는 이런 타자기로 기사를 썼단다. 그때의 향수가 그리워서. 물론, 실제로 쓸 때는 컴퓨터를 살 거지만."

"아."


그리고 마침내 침실에 도착했다.


"아직 인테리어가 끝난 거 같진 안네요."

"여기에 손 댈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나?"

"안방 말고 침실이 셋 더 있으니 모두 자기 방을 쓸 수 있을 거야. 릴리는 자기 방을 어떻게 꾸밀 지 몇 마디 했단다. 너도 그러면 좋겠구나."

"릴리는 거의 매주 오니까 방 있어도 말이 되죠. 근데 나는 아니잖아요."

"침실은 많아. 아직 떠오르는 게 없으면 다음에 네 아파트에 들러서 인테리어 좀 구경해 볼게."

"어..."


엄마가 놀리듯이 미소지었다.


"아니면 20년 전의 네 방처럼 꾸며줄까? 아직 생생히 기억해."

"농담이면 좋겠네요."

"나도 그럴 필요가 없으면 좋겠구나. 어쨌든, 이제 조용한 데서 편히 쉬렴. 한 두 시간 정도는 쉬어도 돼."

"시간제한도 있어요?"

"오늘 중에 근처 신사 갈 생각이거든. 내 기억으론 집안 전통이야."

"지난 몇년동안은 아니었지만요."

"우리가 여기 돌아왔으니 이젠 다시 전통이야. 네 아빠가 기대하고 잇어. 너도 갈거지?"

"글쎄요....알겟어요."

"좋아. 두 시간 뒤에 보자."


엄마가 방에서 걸어나가다 문에서 한 번 더 돌아본다.


"아, 옷장 확인해 봐. 깜작 놀랄거야."


그리고 나는 침대와 옷장, 책상 뿐인 침실에 혼자 남았다. 다른 할 일옫 없어서 옷장으로 다가가 안을 확인한다. 안에는 눈에 띄게 인상적인 붉은 기모노가 들어있어싸.


"으으... 이걸 어떻게 또 입지?"


갑자기 두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


02


"신사가 여기서 멀어요?"


아빠가 백미러 너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깝다. 금방 도착할거야."


릴리가 미소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가까운 신사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서 게임하고, 떡 먹고, 어머니의 베토벤 9번을 들으며 새해를 맞이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엄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오케스트라가 없어서 너무 싱거웠어. 교향곡을 혼자 연주하는데 제대로 음이 나진 않잖니."

"그래도 저한테는 즐거운 추억이에요. 오늘 늦게 한 곡 부탁하진 못하겠죠?"

"얘야, 미안하지만 연주한 지 오래돼서, 다시 연주하기 전에 자신이 생기도록 최소한의 연습이라도 하고싶구나. 아마 내년에는 들을 수 잇을 거야."

"아쉽네요. 새해 추억 중에서 제일 기억나는 거였는데."


엄마는 고개를 그덕이더니 갑자기 낄낄댔다.


"무슨 일이에요, 엄마?"

"내 추억을 돌아보는 중이었단다. 신사에서 사 온 그 작은 종이조각....음...오미쿠지? 너는 늘 그걸 불안해했지."


릴리가 언짢은 지 몸을 꼼지락대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무슨 얘기 하는 지 알겠네.


"릴리가 대흉을 뽑아서 신사 한가운데서 운 적 있었죠."

"언니! 그때는 3년 연속으로 대흉이 나온 해였고, 그때 나는 겨우 일곱 살이었어."

"그렇게 얘기하니 좀 미안해지네. 알지?"


엄마가 고개를 돌려 장난스레 내게 미소지었다.


"너라고 새해에 관련된 이야기가 없던 건 아니란다. 7살때 연 사 달라고 조르던 게 기억나. 그런데 조금 있다가 줄을 놓쳤고, 연은 제일 높은 나무 위에 걸렸지. 너는 그 일에 너무 화가 나서 그거 내리려고 한 달 동안 돌을 던졌지."

"세상에. 전혀 몰랐네요. 끔찍해라."


릴리가 키득댄다. 공감이나 동조보다는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다. 눈을 굴리며 릴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조용히 해. 내 인생 첫 번째 연이었는데 5분밖에 못 가지고 놀았다고. 충격적인 경험이야. 가볍게 생각하지 마."

"하하하. 나무에서 내리긴 했어?"

"아니. 어느 날 사라졌더라고. 폭풍이 불었던 거 같아. 어쩌면 그게 더 나았을거야. 아니면 아직도 돌을 던지고 있었겠지."

"두 사람 다, 추억은 저녁식사를 위해 아껴둬라. 아가씨들, 길 바로 아래가 신사 주차장이다. "


아빠가 토리이 너머 계단 옆에 차를 세운다. 주차장을 한 번 훑어보는데, 근처에 버스에서 내린 사람 한 무리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춥지 않아서 다행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오는 길 내내 조용히 있던 하나코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나코, 릴리 계단 오르는 것좀 도와줄래? 잘 못 디뎌서 굴러떨어지면 새해가 엉망이 될 거야."


하나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엄마랑 아빠가 바로 내 뒤에 섰고, 하나코와 릴리가 뒤를 이었다. 정상에 가기 전부터 북적이는 소리와 종소리가 들리지만, 토리이를 지나니 수많은 사람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으, 이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 거지? 주차장에 차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는데.""


바짝 뒤를 따라온 엄마가 바보같은지 미소짓는다.


"다 승합차인데다가, 여기 온 사람들은 보통 대중교통으로 왔어. 외국에 살다 보면 여기가 얼마나 붐비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지?"

"그래요. 어떤..."


릴리와 하나코가 도착해서 관심이 순식간에 그쪽으로 간다. 잠시 멈춰서 숨을 가다금고 있었다. 두 명의 반응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릴리는 심호흡을 하며 나무의 향기와 사람들의 소리를 즐기는 못브이었다. 반면 하나코는 한 가지만 신경썼다. 여기서 예배당 사이의 참배객들. 릴리의 평온한 모습에 하나코의 공포가 더욱 대조돼 보였다.


03


젠장!


하나코가 붐비는 곳에서 불편해 하는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인버네스의 장터에서 그녀는 사람이 많은 데였지만 그다지 큰 불편 없이 돌아다닐 수 잇었다. 물론, 그때는 기분 좋은 방학 시즌이었다. 지난 달은 정 반대였다. 어떤 식으로 불안이 작동하는 지는 잘 모르겟지만, 최근의 사건 때문에 하나코가 쉽게 불안해진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 시간 가까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서 있어야 한다면 하나코의 상태가 좋더라도 위협적이겟지.


"하나코, 괜찮아?"


릴리가 하나코의 호흡이 바뀐 걸 느꼈는지 친구에게 조심스레 돌아섯다.


"나는...괜찮아."


나는 상황을 확인하려 두 명에게 다가갔다.


"여기 꽤 붐벼 릴스. 우리 차례가 되려면 200명 가까이 기다려야 해. 좀 기다려야 할거야."

"....오."


상황을 깨달은 릴리가 고통스런 표정을 드러냈다 .


"하나코, 우리가.... 어?"


하나코를 돌아본다.


"괜찮다고 하지만 표정은 전혀 아니야, 하나코."

"제발 내 거, 걱정은 하지 말아 줘."

"걱정은 안 해. 그냥 수백명에 둘러쌓여서 한 시간 쯤 기다리는 게 너한테 좋은 시간일 지 의문일 뿐이야. 적어도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거든."

"어어어..."


하나코의 시선이 신경질적으로 방황했다. 나는 괜찮다거나 내 걱정은 말라는 게 하나코에게는 일종의 반사작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타인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한다. 하지만 거짓말을 잘 하는 편은 아닌가보다. 군중 속에서도 괜찮을 거라고 나를 속이는 데는 확실히 실패했다.


"괘, 괘, 괜찮을거에요. 저, 정말로."

"하나코, 사람들이 뭉쳐서 움직일 때 느끼는 즐거움은 나머지 사람들이 얼마나 재미있어 하는지에 달려 있어. 그룹 중에 한 명이라도 비참하게 느끼면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서 의도적으로라도 그걸 잊어야 해. 정말 완벽하게 잘 될 거라고 나를 설득하려거든 적어도 내 눈을 바라보며 얘기해."


하나코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내지 못하리라 생각이 든 모양이다.


"그냥....차에서 기다릴게요."

"모르겠네.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 거 같아."


하나코는 패닉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하, 하지만 가족의 저, 전통이잖아요. 아키라랑 릴리는 반드시..."


하나코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논쟁은 효과적으로 끝났다. 하나코가 이 문제에 대해 답을 내놓지 않는다면 건드려도 될 부분이 아니었다.


"가서 부모님이랑 얘기해 보고 올게. 무슨 얘기를 하는 지 들어보자고."


부모님에게 다가간다. 어떤 반응일지 상상이 안 된다. 하나코의 불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까? 릴리는 평소에 그 얘기는 안 꺼내는 편이었고, 나는 하나코와 따로 이야기하며 그녀의 상태를 파악해야 했었다.


"생각해 봤는데 이번 일, 두 분한테 많이 중요해요?"


부모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좀 붐비니까 다른 데 가거나, 아니면 나중에 사람 좀 줄어들면 다시 오려고요."

"사람이 많긴 해도 예년 설 만큼 바쁜 거 같지는 않다. 당장 사람 없는 데는 없을거고, 폐관도 가까워."

"그러면 내일 오는 쪽으로 돌아가는게 좋겠네요."


아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쏘아봤다.


"설날 신사에 가는 건 오랜 시간 집안의 전통이었다."

"지난 6년은 빼고요."


아빠의 눈총이 심해진다. 엄마는 의아하게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왜 갑자기? 지금까진 괜찮았잖아."


그동안은 다른 생각 하느라 이런 일이 생길 가능성을 잊고 있었다. 이걸 비난한다면 고맙게 받아들이지.


"하나코..."


엄마와 아빠는 릴리와 하나코 쪽으로 재빨리 시선을 던졌다. 이 거리세어 표정을 읽긴 어렵지만 그럽에도 비틀대는 자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두 명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무언가 깨닫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확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코랑 저 군중들?"

",...응."

"떠나고 싶어하니?"

"마음 속으로는 얼른 벗어나려고 해요. 보기만 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짐이 됐다고 생각하기 싫어하니까, 어지간하면 우리한테 맞출 거에요. 차에서 기다린다고 하는데 좋은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한 시간 가까이 우울해 하는 거 말곤 할 게 없을거에요."

"여보, 어떻게 생각해요?"


아빠는 잠시 수심에 빠져 고민하다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내게 차 열쇠를 건네준다.


"하나코를 집에 데려다 줘라. 그리고 나중에 우리 데리러 오고."

"알겠어요."


부모님과 함께 릴리와 하나코 있는 데로 돍아갔다.


"하나코,... 어.... 아빠가 차 키를 줬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갈래?"


하나코는 잠시 시선을 피하며 갈팡질팡한다. 죄스러운 표정이었다. 갑자기 릴리가 말을 꺼냈다.


"아버지...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그렇게 해라. 네엄마랑 내가 네 대신 몇 가지 더 기도하마."

"고마워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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