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이도서희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이도서희의 모티브는 태평양에 있는 산호섬인 웨이크 섬. 왜 웨이크 섬인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있었던 웨이크 섬 전투에 대해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가 웨이크 섬. 구글 지도 등에서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여긴 정말 다른 곳과 동떨어진 그야말로 섬 오브 섬이다. 가장 가까운 곳이 호놀룰루와 괌인데, 그나마도 각각 3700, 2430km 씩이나 떨어져 있으며 원래 미군이 여기 주둔하고 있었지만 2001년에 철수해서 지금은 사실상 무인도라고 한다.
이런 무인도도 태평양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미국은 41년 1월에 여기에 일본의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한 기지를 세웠다. 하지만 기지라고 해 봐야 그 규모는 굉장히 작은 것이어서, 미 해병대 449명에 f4f3 와일드캣 12대, 그나마 제대로 설치된 해안포와 기관총, 그리고 1221명의 민간인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8일, 진주만 공습 바로 몇 시간 후에 일본군은 이 곳에 96식 육공 36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게 된다. 이 폭격으로 폭격을 방어하러 떠났던 4대를 제외한 섬에 있던 와일드캣 12대 중 8대가 완파되고, 이후에도 폭격은 사흘 정도 지속되었다.
11일에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상륙 작전을 시작했는데, 미군은 이에 반격을 펼쳐 이 작전에 참여했던 카미카제급 구축함 하야테와 무츠키급 구축함 키사라기를 굉침시켰고 경순 유바리는 대파시키는 등의 전적을 올려 약 325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이에 일본군은 병력을 증원했는데,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으로 귀환하던 히류과 소류, 중순 아오바, 카코, 후루타카, 키누가사 등등이 증원되고 거기에 약 1500명 정도의 병력이 더 증원되었다. 이후 22일에 이 병력들은 다시 한번 더 상륙 작전을 개시했고, 결국 같은 달 23일 웨이크 섬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리고 이 웨이크 섬 전투를 고증한 게 바로 6-4.
6-4의 편성을 보면 당시 웨이크 섬을 고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해안포를 상징하는 포대소귀와 웨이크 섬을 상징하는 이도서희, 아마도 여기에 있었던 물자 창고를 상징하는 주갤서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96식육공을 이용한 폭격은 기항대를 쓰는 것으로 구현되었고.
그리고 이 6-4 작전의 이름을 보자.
중부북해역 피코크 섬이라고 쓰여 있는데, 피콕은 공작을 의미한다. 왜 갑자기 뜬긍없이 새 이름이 붙었는가 하면 여기에도 또 사정이 있다.
사진은 웨이크 섬에 살았던 웨이크 뜸부기라는 새다. 이 새는 날개가 작아 날 수가 없었으며, 또한 작은 산호섬에 살고 있었던지라 천적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경계심 또한 별로 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군이 여기에 기지를 지을 때만 하더라도 그 수는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경에 있었던 연구 결과, 이 새는 멸종당했다고 한다.
이유는 일본군이 이 섬을 점령한 것. 웨이크 섬은 점령했지만 깡갤럼들도 잘 알다시피 일본군은 전쟁을 치루면서 제공, 제해권을 미국에게 점차 빼앗기게 되었고, 여기 남아 있었던 일본군은 그 탓에 보급이 끊겨 종전 때까지 이 새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6-4 작전 이름에 공작이 붙은 건 이를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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