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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역사의 마당을 꿈꾸며 -끝-

운영자 2009.10.27 15:16:53
조회 16538 추천 69 댓글 118

  또 다른 역사의 마당을 꿈꾸며

 

  지루하게 끌어오던 박철언 의원에 대한 공판은 1994년 6월 27에 가서야 대법원에서 유죄로 판결이 났다. 이 사건을 사수하고 박 의원을 구속했던 나는 표면상으로는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엄청난 고독과 차가운 침묵을 동반하는 승리였다. 어쨌든 한때 검찰에 몸을 담았던 선배인 박 의원을 구속하고 현직 고검장을 구속되게 하였으니 결과적으로 나는 검찰 조직에 치명적인 상처를 준 셈이 되었다. 그것은 분명 '검찰 혁명'이라 부를 만한 지각 변동과 파문을 몰고 왔지만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나는 분명 이단자였고 문제 검사였다.

 

  슬롯 머신 사건 공판은 끝났으나 내 주위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송종의 검사장은 이미 1993년에 대검차장으로 떠났고, 신승남 차장도 서울고검으로 가 있었다. 직속 상관인 유종창 부장마저 1994년 9월 26일 정기 인사 때 순천지청장으로 전근해 가버렸다. 존경하는 선배들이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벌판에 남은 듯한 허허로움을 느꼈다.

 

  그 이전부터 나는 이 사건이 마무리되면 사표를 쓰고 나가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조직 전체가 나의 존재를 귀찮아하고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배들을 구속시킨 데 따른 어떤 형태의 책임이라도 지는 것이 조직원의 도리이기도 했다. 우리 검찰이 이 사건을 스스로 거듭나는 기회로 활용하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는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나아가서는 역사가 자기 발전의 의지를 가지고 큰 발걸음을 떼놓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박철언 의원은 공판 과정에서 또는 그 뒤 감옥에서 마치 자신을 희생양인 것처럼, 또는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는 투사인 것처럼 주장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를 수사하고 공판하면서 줄곧 그에 대해 느낀 감정은 희랍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밀랍으로 접착된 날개를 달고 에게해를 날아오르다가 너무 태양 가까이 간 결과 태양열로 인해 밀랍이 녹아 내려 날개가 떨어지면서 에게해로 처참하게 추락한 이카로스의 최후를 박 의원에게서 본 것이다.

 

  그 후 나는 강력부에 계속 근무했으나 할 일이 없었다. 별다른 일도 주지 않고 그저 쉰 것이다. 그래서 이제 검찰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안기부 1국장으로 가 있던 정형근 선배가 "잠시 안기부로 와 있는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나는 검찰을 잠시 떠난다는 것이 반가워 혹시나 잠잠해지면 검사를 계속 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판단되어 안기부로 옮겼다.

 

  안기부에서의 일도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좋은 선배 동료들이 있어 인간적으로 훈훈한 분위기가 좋았다. 모시고 있는 조특보의 넓은 아량과 세상을 보는 눈을 배울 수가 있어서 좋았고, 밖에서만 듣던 안기부의 살벌함이 안에 들어와 보니 그렇지가 않아서 좋았다. 그러나 검사는 검사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1995년 9월 21일 정기 인사 때는 스스로 안기부 파견해제를 요청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일'을 하기를 원했던 나는 진짜 소망은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그리고 나는 검찰을 떠났다. 그토록 적성에 맞다고 생각해 온 검사직을 스스로 버리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검사직은 스스로 버렸으나 검사로서의 일, 그리고 그 정신만은 꿈에라도 스스로 버린 일이 없다.


  그 '일'은 이제 또 다른 역사의 마당에서 새로운 형태로 내 어깨위에 짐지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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