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만국박람회는 강대국에겐 자신들의 나라가 얼마나 과학적, 문화적으로 선진적이고 강한 국력을 지녔는지를 과시하는 장으로 주로 활용되었다.
영국은 1851년에 최초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며 철근과 유리로 수정궁을 만들어 자신들의 선진적인 기술을 과시했고 소련과 독일은 박람회에서 국가관을 더 크게 지으려는 경쟁을 하기도 했다.
거꾸로 보면 박람회는 각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제품과 기술을 엿볼 수 있던 장이었고 후발주자 국가들에겐 어쩌면 선진적인 기술과 문화를 배우는 기회가 되는 이벤트였다
일본의 물품이 처음으로 박람회에 출품된 건 1862년 런던박람회로 우키요에, 칠기, 도자기 등을 출품하여 영국과 유럽에 자포니즘 열풍을 불태우게 했다.
이 때 일본의 문화에 대한 열풍 덕분이었는지 1867년 파리 박람회에선 프랑스가 먼저 일본에게 공식 출품을 요청하면서 일본은 이 때부터 전시관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당시 일본의 전시관)
1867년에는 아직 메이지 유신 전이라 에도 막부와 사쓰마번, 사가번이 각각 박람회에 참가하게 된다. 이 때 사쓰마번이 막부와 별도로 작품을 전시하자 에도 막부가 항의를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람회에는
일본의 곡예사들이 참가하기도 했고 게이샤 분장을 한 여성들이 차를 대접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과학기술이 서양보다 한참
열등했으므로 이 쪽보다는 자신들의 문화 관련 물품을 출품하는걸로 가닥을 잡았고, 덕분에 유럽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다.
일본은 처음으로 박람회에 '참가'하면서 서양의 열강들의 전시관을 단순히 보기만 한 게 아니라 속으로 많은 걸 깨달았을 것이다
일본이
6년 후 열리는 빈 박람회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나 이와쿠라 사절단이 박람회에 참가하고 박람회 이후에 따로 유럽 시장을 노린
기업을 만드는 활동을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일본인들에게 박람회는 단순한 전시장이 아닌 근대화를 위한 공부 장소 중 하나였다.
파리박람회를 견학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파리에 체류하며 금융의 구조에 대해 공부하고 자신의 일기에
서양 문명에 대한 감탄과 심경을 언급하고 각국 전시장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했다. 귀국 후 그는 일본의 근대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파리박람회에 참가한 일본인 곡예사들)
(차를 따라주며 방문객을 대접하던 게이샤들 그림)
이
무렵 일본은 공부성의 부속 학교로 공부미술학교라는 미술 전문 학교가 개교되고 메이지 정부는 문화재 등의 관리에도 대단히
적극적으로 나선다. 당시 일본에게 문화재나 미술품은 단순한 감상 대상이 아니라 외회를 벌어들일 수 있는 주요 수단으로 국책 사업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일본은 근대 미술까지도 국가 근대화 계획 중 하나로 본 것이다.
사실 동양쪽의 미술품이 대체로 서양에 비해 감상 수단보다 실용성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본은 이번에도 미술을 감상 수단이 아닌 외화벌이 수단 +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삼은 셈이다.
(1867년 당시 일본인 참가단들)
1873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빈에서 5번째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여전히 유럽은 18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자포니즘 열풍이 있었고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었다.
빈 만국박람회 전인 1871년 일본 제국은 만국박람회에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단일 정부로 참가하게 된다.
일본은 전시관을 준비하기 위해 따로 정부 기관를 설립하고 만국박람회가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수출을 촉진하며 서양의 우수한 기술을 배우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해 박람회 준비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전시회에 낼 예술 작품을 위해 황실과 귀족들의 소장품을 몇 달 동안 검사했고 각 지방의 중요한 특산물을 나열하고 전시용과 일본 내 보존용으로 두 점씩 준비했다. 당시 대학에서 전시회를 예행 연습하기도 했다.
아무튼 준비를 끝마친 후 일본은 41명의 정부 관계자들, 이와쿠라 사절단 등이 빈으로 출발했다.
(박람회에 참가한 일본인들)
일본은 약 1,300 평의 부지에 신사와 일본 정원을 짓고 토리이와 홍예다리, 연못 등을 배치했다. 폭포를 작게 재현하기도 했고 무녀들이 춤을 보여주기도 했다
출품작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인 외교관들에게 조언을 얻어 서양의 모방에 불과한 기계 제품이 아닌 일본 전통의 정교한 미술품과 공예품을 위주로
전시했다. 우키요에와 도자기, 칠보 부터 부채, 직물, 종이, 곰 가죽, 일본의 새나 물고기 표본, 해초와 식물까지 전시됐다고
한다.
또 서양인들의 이목을 끌만한 거대한 구조물로 나고야성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킨샤치, 4m 높이의 가마쿠라 대불 모형, 직경 2m의 북과 직경 4m의 등불 등을 준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일본식 정원과 신사로 구성된 전시관의 평판이 매우 높았고 전시물도 불티나게 팔려 일주일만에 수천 점의 물건이
팔렸다. (기념품 판매는 금지였으나 일본은 특혜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부부가 방문하기도 했다.
일본은 전시 뿐 아니라 서양을 배우는데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일본인은 각국 전시장은 물론이고 빈 시내 시외, 학교와 공장, 빈 시청 등을 모두 방문했다.
박람회 종료 후 일본관의 건물과 정원은 영국의 알렉산드라 파크사가 매입하여 런던으로 옮겨진다. 파크사는 박람회 후 메이지 정부의 국책기업인 기립공상회사와 계약해 매입한 시설을 일본 물건을 판매하는 판매점으로 썼다.
(일본정원을 짓는 모습을 그린 서양화)
(당시의 일본의 출품작들, 일본관을 묘사한 그림)
일본은 이 때 일본의 공예품이 불티나게 팔린 것을 확인하고 일본의 공예품을 본격적으로 유럽에 수출하기 위해 '기립공상회사'라는 국책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는 당시 일본 제국에게 상당한 외화를 벌어다 주었다.
또 이 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일본에 박람회와 박물관에 대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빈 박람회에 참가했던 사노 츠네타미는 박람회에 대한 보고서에 일본에도 박물관을 만들 것을 매우 강하게 주장했다.
일본은
개국 이전 에도 시대부터 이미 본초회, 물산회와 같은 자체적인 전시회들이 있었는데 빈 박람회를 기준으로 대부분 박람회나 전시회
등등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877년 메이지 정부는 우에노 공원에서 국가산업전시회라는 정부 주도의 박람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일본에게 있어 박람회는 일본의 문화를 서양 국가에게 알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공예품을 유럽에 수출하며 외화를 벌고 유럽 국가들의 선진적인 기술과 문화를 배우는 장이었다.
또
일본은 박람회를 통해 일본의 미술품과 공예품의 가능성을 확인하여 국가가 미술을 근대화의 작업 중 하나로 취급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근대 미술은 빠르게 발전해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일본이 순수미술분야로 미술품 257점을 출품한다.
일본에게 박람회는 근대화와 근대 일본 미술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박람회를 대하던 태도는 청나라와 많이 대비된다.
사실 청나라는 1851년 첫 엑스포가
열릴 때 청의 상인이 비공식적으로 참가했었고 당시에 엑스포에서 다양한 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청나라 정부는 유럽
국가들이 박람회 초청을 지속적으로 했음에도 늘 물품만 보낼뿐 오랫동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이 참가한 빈 박람회 즈음에 중국은 더 이상 동아시아를 대표하던 국가가 아니었다. 장황한 설명이 달려 있었고 유럽에서 호평받던 일본의 전시품과 달리 중국이 보낸 물품의 설명은 길어야 두 줄에 불과했다.
1876년에서야
청나라는 처음으로 박람회에 공식참가단을 보낸다. 이 때 대표인 리구이는 서양보다도 일본을 의식했던 것 같다. 다른 서양 국가에
대한 평가보다 일본에 대한 언급이 많았는데 일본의 도자기에 대해 자국것만 못하다는 등 상당히 칭찬에 인색했다.
여전히 청은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국으로의 자존심도 버리지 못했고 서양을 뒤쫒으려한 일본에 대해 비아냥거릴 뿐 나아가질 못했다.
2년 후에 청나라는 파리박람회에 다시 참가했다. 이 때 청 대표로 참가한 마젠중은 서구의 기술과 정치 교육제도를 칭찬하며 청이 천조대국이란 생각을 버려야한다고 말을 했는데
귀국 후에 고향 사람들은 그의 집을 때려부수고 마젠중은 가는 곳마다 욕을 먹고 돌을 맞아 뒤통수가 깨지기도 했다. 이 때 보수 세력들은 마젠중 같은 사람이 늘까봐 미국에 간 유학생을 귀국시켜버렸다.
1903년 오사카의 박람회(자국박람회)에 청은 각 성의 관리를 각각 파견하며 대단히 적극적으로 출품에 관여했으나 때는 늦었다. 당시의 박람회는 직접적으로 더 이상 청이 일본의 상대조차 되지 않음을 보여준 자리였다.
출처 : 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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