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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후회 1, 2 연작.

다정독서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10.22 15:49:16
조회 239 추천 0 댓글 8

천재라. 그런 식의 천재도 있을 수 있을까. 보기 드문 재능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태생부터 빛이 나는 인간도 있다더니.
 평생을 난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야 하겠지.
하늘은 스스로를 위해 노력하는 자를 버리지 않는다더니 거짓이었나보군.


남궁세가의 폭풍대주 강희찬이 손톱달이 잠긴 세가 후원의 연못에서
술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그가 평생을 믿어오면서 노력해 온 모든 것들이
오늘 오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대공자 남궁걸과는 사사로이 아저씨와 걸아라고 할 정도의 사이다.
남궁걸이 아장아장 걸을 때 쯤 세가에 식객으로 들어와서 십여 년이
지나 세가의 중요 무력단체 중 하나인 폭풍대의 수장이 될 때까지
대공자인 남궁걸과는 남다른 우정을 쌓아왔다.


세가에 들어와 막 남궁세가 기본검인 대연검을 배울 때,
대공자인 남궁걸과 함께 익힌 것이 인연이 되어 친해졌고,
어린 남궁걸이 검술의 혹독함에 힘들어하거나,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수련에
지겨워할 때마다 시전거리를 다니며 당과를 사다 나르거나,
강호에서 있었던 치기 어렸던 시절의 모험담을 들려준 것도 그였고,
강희찬 자신이 대연검 최후절초인 웅혼비력을 깨우쳤을 때,
세가의 보물중 하나인 창궁무애검보를 훔쳐다 준 것은 대공자 남궁걸이었다.


이 나이를 먹어서, 이런 망발이라니.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귀밑머리에 새치가 가득한 나이가 되어서 고작 피어나는 어린아이의 재능에 질투를 느끼다니.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애검 평송검을 뽑은 강희찬은 허공을 향해
창궁무애검의 후삼식인 뇌격, 진격, 무격을 펼쳤다.

짝짝짝. 세 번의 박수소리가 들려 돌아본 후원의 무애정엔 한 손에 호리병을 들고
다른 한손엔 육포 조각을 들고 흔드는 속 좋은 녀석, 남궁걸이 눈웃음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아저씨에요. 전 여태까지 이렇게 깔끔한 창궁무애 후삼식을 본 적이 없거든요.
이따가 수련비무 한 번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여기 수업료도 챙겨왔는데요.”

“앉아라. 가주님께 갔던 일은 잘 되었느냐.”

“뭐, 별로요. 가주님께선 탐탁치 않아 하시더라고요.
하긴, 지난 해 무림맹에 들었을 때, 제가 좀 말썽을 피웠어야지요.
그 허락은 못 얻어 냈지만, 대신 다른 하나는 허락을 받았죠?”

“다른 일이 있었니? 제갈소저에게 청혼단자를 보내는 일 말고?”

“예. 아저씨를 제게 달라고 했어요. 이번에 소가주 책봉식을 하고 나면 제게도
소룡당이라는 정식 호휘부대가 생기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주자리는
아저씨가 아니면 싫다고 했더니 가주님도 그러마 하시더라고요.
아마 가주님도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시겠죠. 아저씨와 저 사이인데요. 뭐.”


강희찬의 가슴에 무거운 돌이 하나 얹어졌다. 절망을 느낀 사람의 곁에서,
남은 평생을 보내야 한다니. 어린 애처럼 구는 녀석에게 정이 쏠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공만으로는 자기에게 당하지 못한다는 우월감이 없어진 아저씨 조카 따위는
무인으로서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호위보다 더
뛰어난 호위대상이라니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이다.

기세를 거둬들이고, 정자로 다가갔더니 녀석은 이미 자기 몫의 술병 하나를 비우고,
허리춤에서 새 술 호리병을 하나 꺼내서 눈 앞으로 내민다.


“들어보세요. 이거 송엽주라고, 내전에 있는 걸 어머니 문안인사 갔다가
훔쳐온 건데요. 향이 너무 좋아서, 마셔도 취하는 것 같지가 않더라니까요.”

“무인이 그렇게 술을 찾아선 발전이 없는 법이다.”

“아저씨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눈에 걱정이 가득해요. 술이야
즐겁자고 마시는 건데요. 뭘. 강호의 후지기수가 술도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어디다 쓰느냐고 술을 가르쳐주신것도 아저씨면서 뭘 그러세요. 드세요.
여기 아버지만 드신다는 육포도 제가 주방에서 몰래 훔쳐왔으니까요. 하하. 오늘은 고급으로 즐겨보자고요.”


저렇게 아무 의심 없이 나를 좋아하는 녀석에게 이런 마음을 품다니.
하지만, 세상은 정말로 공평하진 않은 모양이다. 가볍고 술을 좋아하고, 여자에게 미쳐있는
저 열아홉의 홍안에겐 주어진 검에 대한 감각과 놀라울 만큼 빠른 무리에 대한 오성이
왜 평생을 노력해 온, 검술이 늘 수만 있다면 꼬마아이가 훔쳐온 세가의 검보를 훔쳐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자기에겐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속이 답답했다.

얼굴을 바꾸고서 내민 술병을 받아든 것은 이미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기였을 뿐이다. 나이든 자로서 까마득한 어린 아이의 후의를 거절할 수 없다는.


송엽주의 향은 역시나 좋았다. 그래. 검이란 원래 다른 자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질 않았던가.
세가의 앞날을 내 손으로 지키는 것도 의미는 있는 일일 것이다.
아내도 자식도 없이 검에만 매진해 온 자신에게 대공자는 자식같은 아이가 아니었던가.

강희찬이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추스르고 있을 때,
후원으로 급히 한 인영이 달려오더니 그와 대공자 앞에 부복했다. 폭풍대의 부대주 설훈이었다.


“대주, 가주께서 찾으십니다. 제왕전으로 드시랍니다.”

“그래. 알았소. 부대주는 대공자를 처소로 뫼시고, 폭풍당에서 대기하도록 하시오.”

독한 증류주인 송엽주를 한병이나 들이킨 남궁걸은 이미 취해서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그 난잡한 모습에 다시 한 번 잊었던 하늘에 대한 포한을 느낀
강희찬은 이를 악물고 가주가 기다린다는 제왕전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운기를 해서 주독을 제거해야 하나. 그냥 가지 뭐. 어차피 업무시간도 아닌터에.
술 한잔을 했다고 뭐라고 할 가주도 아니고. 자기 아들을 맡으라 부탁하려는 처지에
뭐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장로들은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뭐라 하겠지만,
빛나는 검객에의 길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나자 다른 문제들은 너무 작아보여서
지금의 절망감엔 어떤 처벌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빛이 났다. 12년을 참오했는데, 어떻게 저런 길을 보지 못했을 수가 있었을까.
찬 밤공기에 후하고 길게 한숨을 내 쉬면서, 오후에 있었던 남궁걸과의 지도 비무를
떠올린 강희찬은 저도 모르게 한 방울 눈물을 흘렸다. 50이 넘은 노강호의 눈에서
흐르는 모자란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흐르는 눈물의 맛은 짰다. 어떻게 그렇게 빛나는
재능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적어도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검을 휘둘러 온
자신에겐 남궁검가의 보물이라는 창궁무애 검보의 필사본을 너덜너덜 거려서
글자의 토씨하나도 모두 기억하는 자신에겐 보여야 했던 검의 길이 아니었을까.


제왕전은 밤이 되도 휘황하다. 저런 밝기를 얻으려면 하루 몇 개의 초가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주전 앞을 지키고 있는 위사에게 자신의 출입목적을 밝히고,
서서 기다렸다. 곧 문이 열리더니, 한상을 차려놓고 장로들과 주안상을 맞이하고 있는 가주
뇌룡검제 남궁척이 보였다. 일장로 남궁상유, 이장로 남궁헌유, 사장로 남궁세유가 들어있었다.
삼장로는 또 구민행위를 하러 간 것일까? 그나마 인간적인 삼장로가 없는 것을 확인한 강희찬은
재빨리 내공을 돌려 발바닥의 용천혈로 주독을 몰아냈다.
신발에 냄새는 좀 밸 것이지만, 어차피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니 상관은 없었다.


“폭풍대주 명을 받들어 왔습니다.”

“아, 강대주, 왔소, 거기에 앉으시오. 그저 원로에 못난 자식놈 때문에
늘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 불렀소. 한 잔 하시오.”

“괜찮습니다. 가주님. 용무만 말씀해 주시면 자리를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어른 분들이 이렇게 계신데, 말학이 끼기엔 자리가 너무 거해서...”


씁쓸했다. 나이로 치면 저들이나 나나 그다지 차이가 나질 않는데,
용무만 듣고 자리를 물러나겠다는 말에 고소를 머금은 장로 나부랭이들을 보며
화가 치민 강희찬이 고개를 더욱더 숙이고 쓴 웃음을 지었을 때, 가주 남궁척이
다소 민망한 듯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으려는 것을 일장로 남궁상유가 대신 빠르게 명을 내렸다.


“폭풍대주, 앞으로 창건될 소가주 호위대의 대주를 맡게.
원래 자네 같은 절정수위의 검사를 고작 호위대에 돌리는 것은 세가
전체로 봐서도 아까운 일이네만, 그래도 걸아 녀석이 원체 따르는
자네다 보니 어쩔 수가 없질 않나. 수고를 좀 해주게.”


용건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뭐 별다른 이견 없이 수긍을 하며 나왔다.
남궁이란 피가 그렇게 다른가. 20명의 대원들이 한 곳에 모여 생활하는
 폭풍당을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면서, 강희찬은 가주 남궁척이 뇌력검제의
명성을 얻을 때의 상황을 생각했다. 그때는 안휘에서 일어난 강력한 녹림당인
노호채를 토벌할 때였다. 강희찬이 서른 여섯이었으니. 십이년 전이의 일이고,
강희찬보다 네 살이 연하인 가주의 나이는 서른 둘이었다.


노호채의 채주 철혈노호 공심은 절정수준의 실전검술을 가진 녹림당의 거두였다.
노호채의 세가 불같이 일어난 것도 안휘자사 천현휘가 이끄는 3백의 관군을 공심이
앞장서서 싸워 패퇴시킨 후부터였다. 창궁무애검을 익힌지 4년, 강희찬은 막 절정의
꽃을 피웠을 때고, 가주는 아직 일류의 끝에서 절정의 벽을 넘지 못할 때였다.


당시의 폭풍대주는 파랑검 주천이라는 역시 절정의 50대 검사였는데,
지금의 소가주에게 폭풍대주인 내가 호위역으로 따라붙게 된 것처럼
토벌작전에서 가주의 위험을 보호하기 위해 주천이 나섰을 뿐, 실제로
철혈의 노호와 검을 겨룬 것은 바로 강희찬이었던 것이다.
노호의 검은 치열했고 임기응변이 놀라웠다.
허리에 한 번 팔에 한 번 노호의 검에 상처를 입은 강희찬이 전투중에 막 깨달은
후삼식의 첫 초식 뇌격으로 노호의 대감도를 잘라내면서 오른 팔을 날려버렸을 때
나선 것이 지금의 가주였다. 가주는 한쪽 팔을 잃은 노호를 제압하고 뇌력검제의
명성을 얻었다. 그 때의 일이 안타깝다거나 서운하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억울했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지금의 삼장로가 맡고 있던 의약전에서 가주가 다가와
슬쩍 쥐어준 소림사 소환단 하나였고, 그걸로 양심의
가책을 버렸던 것인지, 가주는 내내 떳떳했다.

흥, 고작 그런 가주의 피에서 저런 아들이 태어나다니.
휘황했다. 남궁걸이 사선으로 내리긋는 거친 검세에선 찰라를 영원으로
잡는 빛이 뿌려지고 있었다. 창궁무애검에는 어디에도 그런 식의 검로가 없는데...
혹 그건 창궁무애검이 아니라 제왕무적검이 아닐까.
하긴 걸아도 이젠 소가주의 위가 확정적이니 세가의 어른들에게 제왕무적검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왕무적검을 배웠다면 내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정말로 난 그 열아홉짜리 난봉꾼보다 검에 재능이 없는 것일까.


폭풍당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진 것은 후끈한 땀냄새였다.
사내들이 내뿜는 거친 호흡과 진한 땀냄새. 우렁찬 기합이 모두 존재하는
이곳 폭풍당은 사실 타성받이들의 집합소나 마찬가지다. 남궁씨가 아닌
절정의 검사들이 모인 세가 최고의 무력집단. 온갖 대우는 다 해주지만
그 후의의 뒤엔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타성받이들이란 계산이 있는 곳.

부대주 설훈이 무당의 경공법인 유운보를 써서 재빠르게 다가오더니 가주의 하명에 대해 물었다.


“대주님, 가셨던 일은..”

“소가주는?”

“처소의 시비에게 맡겼습니다.”

“고맙소. 신경을 써 줘서. 모두들 모이라고 해 주시오. 할 이야기가 있으니.”


기세가 우렁우렁한 장정들이 곧 폭풍당의 현판앞에 모여들었다.
오를 맞춰 두줄로 선 그들에게 강희찬은 가주의 명을 전했다.
가슴 한구석에서 아쉬움이 들었지만 사나이들의 기백에 찬 대답은 강희찬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소가주 책봉식 이후 폭풍대주의 자리를 놓게 된다는 것과 다음의 대주는
부대주인 설훈이 맡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한 강희찬은 다른 대원들을 모두 물린 후
홀로 쓰는 처소에서 오후 비무 때 남궁걸이 쓰던 검로대로 검을 휘돌렀다.
남궁가의 기본 심법인 대연심법으로는 검로의 진행방향대로 운기를 지속할 수가 없다.
아니 운기는 지속할 수 있지만, 그 기세를 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시 다른 검법이었을까. 배신감이 들었다. 적어도 남궁걸은 그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마음 약하고 정에 헤픈 그 녀석이 자신도 몰래 다른 검법을 익혀 자신을 뛰어넘다니.
역시 명가의 피는 따라갈 수 없이 비정한 것인가.


가부좌를 틀면서 심법에 집중하려 했지만, 마음이 뒤틀려져 있어서
운공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대연심법은 그야말로 큰 마음으로 포용하려는 자에게
허락된 심법, 옹졸해진 마음으론 주화입마에 걸리기 십상이다.
가슴 한구석을 찌르는 통증에 다리가 풀린 강희찬은 숨을 헉헉 거렸다.
제길. 되는 일이 없다. 창문을 열어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봤다.


인정을 해야 한다. 소가주 걸아는 천재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다.
자기를 보면서 비통해하는 사람도 분명히 세상엔 부지기수 일 것이다.
강호의 절정검객은 그것도 자기처럼 절정의 끝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래알만큼
많은 강호의 칼을 차고 다니는 자들 중 일할은커녕 일할의 십 분지 일도 못된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 가장 밝은 별도 달보다 밝지 않다. 밤하늘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달도 태양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세상에는 항상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멀리서 위맹한 소리가 들렸다.
누가 검술수련이라도 하나 싶어서 안력을 집중했지만,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래, 삶엔 검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검으론 다섯을 벨 순 있지만 천명을 벨 순 없다.
소가주는 소가주고 난 그 아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것으로 그를 상대하면 된다.
그거면 된다. 그거면 된다. 정말로.

열어놓은 창으로 별 하나가 떨어졌다.
떨어진 것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겠지.
이런 날 술을 한잔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비를 불렀다


“청아!, 청아!”

쪼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비 양청이 문밖에서 작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주어른, 주안상을 올릴깝쇼.”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초조한 심사를 겨우 시비아이에게까지 들키다니.
정말로 검사로서의 삶은 그만 둬야겠군. 칼끝이 목에 닿는 긴장으로
하루 열두 시진을 보내는 것이 검객인데, 촌각의 시간도 허투루 몸에서
긴장을 풀지 않는 것이 진정한 검객의 자세인데.

“그래라. 오늘은 한 검객이 죽은 날이다. 애도를 표해야 하니 술을 넉넉히 가져오너라.”


바람이 불어 방안을 밝히고 있던 초가 꺼졌다. 어두워진 실내를 밝히려고
화섭자를 찾다가 열린 창으로 달빛이 교교히 비춰드는 것이 보였다. 반쯤 이지러진 달이
온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검객의 일생을 마치는 날로선 괜찮군.

시비 양청이 문을 열었을 때 강희찬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달빛을 바라보며 운기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양청은 주안상을 물리고,
설훈 부대주를 찾아 지금 강희찬이 운공에 빠져 있으니
그 근처를 단속해 달라는 말을 전하고는 자기 스스로 문 앞에 앉아
조용히 운공이 마치고 새로운 기척이 나기를 기다렸다.


강희찬이 긴 운공에서 깨어난 것은 달이 저물고 새벽이 떠오르는
태양으로 온통 붉어졌을 때였다. 몇 시진을 이 상태로 있었던 지도 알 수 없었는데
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충만한 기운이 아랫배에서 느껴졌다.

문을 열고 밖을 나서자 문 앞에서 시비 양청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자신의 모습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대주 어른. 운공은 마치셨습니까?”

“아이야. 네가 여기서 호위를 섰던 것이냐?”

“호위라니요. 그저 혹시나 누가 들어갈까 앞을 지키고 있다가 잠이 든걸요.”

“수고했다. 넌 좀 들어가서 쉬어라. 내 부대주에게 이야기해서 밤까진 찾지 말라고 할 터이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죽었다는 검객 어르신은 어떻게.”

“아직은 잘 모르지만 죽을 위기에서 한발짝 고비를 넘긴 모양이다.”


폭풍대의 연무장은 남궁세가의 전체의 연무장 다섯 개 중에서도
큰 축에 속하지만, 스물에 달하는 절정의 검객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진바 무예를 닦는 통에 늘 시끌벅적한 편이다. 연무장의 한 쪽 구석에서,
평송검을 꺼내 든 강희찬은 중단세를 취하면서 대연검의 전칠초를 천천히
구사하기 시작했다. 빛무리가 검 끝에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념의 경지에 올라 천천히 시작된 검은 점점 빨라졌으며,
빛 무리들은 광폭한 기세로 공기를 찢었다.


강희찬은 결국 검강지도를 깨달았다. 검객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려는 결단과
이지러진 자기 모습을 역시 이지러진 달을 보고 인정한 것이 그에게 새로운 경지를
열어줬던 것이다. 대연검의 전 7초를 모두 마치고 평송검을 내렸을 때 그에게
다가온 것은 열 두엇의 가슴 뜨거운 사내들의 찬사였다.


마음 한 구석이 꽉 차오르는 흥분과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그래,
이젠 가슴을 펴고 걸아를 대할 수 있겠어. 내겐 이젠 걸아의 검로를 뛰어넘는
무엇이 생겼으니까. 빛나는 길에서 한걸음 떨어져 그 길을 걷는 자를 보고 있는 초라한
노검객이 아니라, 그 길에 앞서 뛰어오는 녀석을 지긋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니까.

눈을 뜨자 세상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음울했던 자신의 모습은 온데 간데 찾을 수 없었다.
뇌룡검제따위 줘 버리라지. 그래. 지금이라면. 걸아를 찾아야 했다.
지금이라면 제대로 된 지도비무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제의 나완 이미 달라진 나니까.

걸아를 찾아 소가주전으로 향했다.
무가의 소문은 빨라서, 소가주전로 가는 도중에 강희찬은 그
를 찾으러 온 부대주 설훈을 또 맞닥뜨렸다.


“대주!, 대주! 어서 가주전으로 가보십시오.”

“왜, 또 이번엔 무슨 일인가.”

“지금 가주전으로 모든 세가의 원로분들이 모여들고 계십니다.
대주께서 검강지도를 깨달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섭니다.”

“일없네. 지금은 걸아를 만나러 가야 해. 자네가 가서 전하게. 걸아를 만난 후
곧 가주전에 가겠다고. 어차피 지금 가봐야 늙은이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대기하는 것 밖에 더 하겠는가. 그리 전해주게.”

“그래도, 가주님께서..직접...찾아오란...명을...”

“글쌔 걸아를 만나는 게 지금 내겐 제일 중요하다니까.
늦는다면 심득을 잊을 지도 모르네. 깨달음이란 수유의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네만,
그 깨달음이 언제까지 계속 붙들어 둘 수 없다는 것쯤은 자네도 알 것이 아닌가. 난 시간이 없네.”

가주를 만나는 일보다 소가주 걸아를 만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은
 강희찬이 뼛속까지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지를 자랑하는 것보다,
소가주 걸아를 통해 그 새로운 경지가 어디까지 통용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소가주 전에 도착하고 얼굴이 익은 시비 앵앵을 본 강희찬은 그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을만큼 들 떠 있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소가주의
싱글거리는 얼굴에 낭패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구경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스승이란 자신을 절차탁마해서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되어야 한다.
모자라다면 가차없이 훈육의 검을 휘두르리라.


“소가주님은?”

“아직 주무십니다.”

“그럼 내가 들어가 깨울테니, 넌 네 일을 보도록 해라.”

어린 아이의 난잡한 취미를 말해주듯, 소가주 남궁걸의 방은 무인의 방이 아니었다.
공단 채단, 능라단 등 온통 비단 옷감으로 된 화려한 무복이 가득했고, 금장과 비취,
옥석들로 치장된 화려한 갑을 지닌 검들이 한쪽에 잘 정리되어 있었고, 서가엔 여우야담,
기방야록같은 음담패설책들이 꽃혀 있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쾌락에
몸을 맡기는 이런 아이가 어떻게 그런 검로를 구할 수 있었을까. 술에 쩔어
잠이 든 소가주 남궁걸을 깨우려던, 강희찬이 깨우려던 손길을 멈춘 것은 머리맡에 놓여진 서한 때문이었다.


그 아이에게 보내는 것인가. 작년 한해 남궁걸은 개봉에 있는 무림맹에
파견되어서 생활했었다. 감시역이자 보호자 역할로 강희찬 역시 따라갔었는데,
남궁걸은 거기서 만나 한눈에 반한 제갈세가의 제갈미희에게 꽤나 열중했었다.
제갈미희은 얼굴이 예뻤지만, 정식부인에게 얻어진 자식이 아니어서,
혈통과 법도를 따지는 남궁세가에서 받아들일 수가 없는 처지의 여자였고,
어제에도 남궁걸은 종일을 부친인 가주에게 제갈미희에게 청혼단자를
보내 줄 것을 청했던 것이다.


훗, 연서인가. 호사가는 아니었지만, 문득 불같았던 시절 자신도 꽤나 열중했던
그녀가 있었던 것이 생각나서, 놓여진 편지를 펴 읽었다. 술에 취해 쓴 것이라곤
믿어지지 않을만큼 정갈한 글씨체로 고고하게 사랑에 대해 적고 있는 편지는
장미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훗, 그녀도 살아만 있다면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갔을 텐데. 불같았던 사랑이었다.


그러고보면 그 때도 달밤이었는데. 정사대전이 한참이던 때였으니 20년이나
지난 일이다. 악양 마교지부를 암습하려다가 달밤이라 들키고말아서 악양 성내를
쫓겨다니다가 대갓집 담을 넘었었다. 숨어든 곳이 마침 규방이라 놀라는 규방아가씨에게
칼을 들이댔었다. 다행히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시비를 불러 내 상처까지 돌봐 준
여자였는데. 떠돌이 낭인무사에게 미래도 없었고, 도망치자
말할 용기도 없었었다. 그저 며칠일 따름이었는데...


남궁걸이 깨어난 것은 강희찬이 편지를 있던 대로 수습하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쯤이었다. 눈을 비비면서 일어난 녀석은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강희찬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아저씨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검을 들고 따라나서라. 내 오늘 대연검을 펼치다가 심득이 있어 찾아왔다.
지도비무를 해 줄 터이니 검을 들고 연무장으로 가자.”

“아이. 아침부터 무슨 비무에요. 그나저나 심득이 있었다니
축하할 일이네요. 이따가 한 잔 하러 가요. 연화각에 새로운 숙수가 들어왔는데,
소문으로는 궁보계정으론 안휘에선 따라갈 사람이 없대요.”

“어서, 따라나서지 못하겠느냐. 일어서라.”


툴퉅거리면서 따라나선 남궁걸의 재능은 여전했다. 새롭게 익힌 검강의 재주도
신묘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남궁걸의 검로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강희찬은 진심으로 절망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인데. 모든 것을 버리고서
새로 얻은 공부도 찬란한 재능 앞에선 빛을 잃었다. 지도비무는 결국 강희찬이 받고 말았다.

“아저씨, 어제와는 완전히 다르시네요. 검에서 겸허함이 느껴져요.
역시 아저씨세요. 검강까지 익히셨을 줄이야.
그럼 이제 남궁가에선...세번째 검강지도를 깨달은 분이 되시겠네요.”

“검강지도가 무슨 소요이냐....그런데 너 무슨 다른 무공을 익힌 것이냐? 제왕검법을 익히기 시작했니?”

“아니요. 제가 펼치는 것은 다 대연검이에요. 너무 열심히 했더니 다른 검법이 손에 익지 않아서요.”

“그래..그랬구나. 난 가주님이 불러 가보마.”

“지도비무 감사했습니다.”


질투가 생기지도 않았다. 전신을 감싸오는 무력감에 강희찬은 다시 한번 하늘을 봤다.
싸늘한 12월의 대기를 넘어 하늘엔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 태양같은 아이도 있고,
나같은 사람도 있는 법이지. 내게 남은 일이라곤 겨우 이제 그 아이의 뒤에
서서 날아오는 칼이나 대신 맞는 일밖엔 없겠지.

제왕전엔 이미 남궁세가의 원로란 원로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강희찬이 제왕전에
들어서자 마자 이런저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시끄러웠다. 강희찬은 그저 애검 평송을 들어,
대연검의 전 7초를 천천히 펼치기 시작했다. 오전에 검강을 발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검이었다. 피어나는 빛처럼 하얀 빛을 뿌리던 활기찬 검식이 지는
해를 닮은 황혼의 붉은 빛으로 터져 나와서 온화하게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그 검식이 폭풍대주 황혼검객 강희찬의 마지막이 되었다.

생명을 짜내 펼친 핏빛 검식에 모두들 경악할 때쯤, 강희찬은 무너지듯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

“닮지 않았어?”

“뭐가?”

“죽은 너네 대주랑, 우리 소가주님이랑.”

“얘는 경을 칠 소리를 하니.”

“아니. 그냥 그때 그 마지막 뒷모습이 하도 비슷해서.”

“언제.”

“강대주님이 죽기 전에 우리 소가주님이랑 마지막 비무를 하고,
말없이 제왕전 쪽으로 걸어가셨는데 말이야. 그 때 그 뒷모습이 꼭 우리 소가주님이
가주님께 청혼단자 보내자고 했다가 욕먹고 돌아설 때 모습이랑 꼭 같았거든.”

“어디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큰일 나. 너네 소가주님은 뭐하고 계시다니.
우리 대주님 마지막 가는 길도 보지 않고. 그렇게 따랐으면서...”

“몰라. 그냥 술마시더라. 저번에 내원에서 훔쳐온 술 있잖아. 그거. 중얼중얼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무슨 말인데?”

“몰라. 그냥 그러더라. 같이 가려고 기다렸는데, 자식이 효도를 하려고 해
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그 말만 계속 하더라. 역시 이상하지...”




후회 2


그 자는 어떤 걸 보고 있었을까? 남궁세가의 가주 뇌룡검제 남궁척은 지금은 공석이
되어버린 폭풍대주 강희찬의 방에서 창문을 열고 희찬이 보고 있던
그 달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그 낙화대연검을 만들어 냈을까?
강희찬이 시전한 대연검 전 7초는 세가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몰고 왔다.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그 준엄하고 장렬한 검초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세가의 최고수였던 전 가주 창룡검왕 남궁훈조차도 강희찬의 검을
보고선 일흔 노구를 이끌고 다시 폐관에 들었을 정도니, 절정의 초입에서 겨우
한 발짝 걸음을 뗀 남궁척이 느끼는 자괴감은 너무 컸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술을 좀 가져 오너라. 그리고 그 때 그 시비아이도 좀 불러오고.”

대기를 하고 있었던 듯, 조촐한 술상을 들고, 시비 양청이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보니 좁군. 창문을 열어놓은 방은 겨우 두어 사람이나
앉을 만한 혼자서 눕기라도 하면 그만일 정도로 단출했다. 시비아이가 들어오니
불을 켜놓은 등잔이 무척 어두웠다. 그래도 대 남궁세가의 폭풍대 대주의 방인데. 너무 좁군.


“네가 그 전날, 방문 앞을 지켰다는 그 아이냐?”

“예. 그러합니다. 가주님.”

“왜 그리 하였느냐? 네가 아니라도 그 밤에 이 곳을 드나들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날 대주님은 너무 쓸쓸했습니다. 너무 쓸쓸해서 혼자 둘 수가 없었습니다.
술을 가져오라 해서, 술상을 이렇게 봐 들고 밖에서 기침을 해서 인기척을 냈는데도
말씀이 없으셔서 살짝 문을 열어보았더니 달을 향해 고개를 들고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주안상을 물린 다음 앞을 지켰습니다.
시비교육때 이런 비슷한 상황이 오면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자리를 지키라고 배웠었습니다.”

“시비 교육때? 누가 그리하라고 시키더냐?”

“소가주님 전의 행화언니가 그렇게 하라고 처음 세가에 막 들어왔을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래. 이만 됐다. 나가 보너라.”


강희찬이 그렇게 죽을 줄은 몰랐다. 그 강건했던 사람이 한 번의 위대한
칼질로 인생을 마무리할 줄이야. 난 이젠 더 이상은 아무 것으로도 그에게 앞설 수 없게
된 것인가? 뭐지. 이 기분이 안도감인가? 왜 내가 안심을 하는 거지. 난 강대주에게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 때의 그 일인가? 그래 그 때가 그 한 순간의
실수가 모든 것을 바꿔놓고 말았어.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훗. 그렇다면 녀석에게
걸아을 맡긴 건 정말로 잘한 일인가? 무사의 삶이 어때야 하는 지 보여주고 세상을 떠나버렸으니까.


노호채의 공심은 너무 강했었다. 지금도 가끔 그자가 휘두르는 대감도의 도세에
뭉텅뭉텅 팔다리가 잘려가던 남궁세가의 무사들의 비명이 생각날 정도니까. 그래.
그 때부터 강희찬은 빛이 났었다. 내가 강희찬과 나를 비교했을 땐 언제부터였을까?
 걸아녀석과 같이 대연검을 배우던 때 부터였나. 아니, 걸아녀석이 나대신 강희찬의
팔에 매달려 함박웃음을 지었던 때부터였나. 아니다. 그래 그녀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희찬을 몰래 훔쳐보던 그 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평생의 사랑, 악절리. 내 부인.


객쩍은 생각이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망령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어쨌거나 강희찬은 죽어 버렸다. 죽은 사람은 힘이 없다.
그 죽음이 아무리 화려하고 숭고했다 해도. 걸아녀석이 그 것을 봤어야 하는데.
녀석이라면 분명히 그 낙화대연검의 검보를 만들어서 내게 싱글거리면서 줄 수 있을 텐데.


“진천!”

“예. 가주님.”

“걸아는 어떻게 하고 있나? 아직도 술인가?”

“예. 아직 49재가 지나지 않았다고. 그 전까지는 강요하기 힘든 분위기입니다.”

“제 애비라도 죽었다더냐? 그렇게 술을 마시다간, 몸이 상할 텐데.”

“안 그래도 총관에게 일러, 몸을 보하는 탕제를 조석으로 올리라 분부해 두었습니다.”

“알았네. 가세 이만. 이곳에서 종일을 있어도 보이지 않는 군. 역시
보이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는 것 같군.”


바앙, 바앙, 인경이 밤하늘을 울렸다. 벌써 자정인가. 집무실인 제왕전으로 가기
위해선 폭풍대의 소연무장을 지나야 한다. 자정인데도 다들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대연검을 수련하고 있다. 저 자가 누구지? 기세가 강대주와 비슷한데.

“진천.”

“예, 가주님.”

“저기. 저 구석에서 대연검을 수련하고 있는 무사는 누군가? 처음 본 듯한 자인데.”

“저도 처음 보는 자입니다. 설부대주를 불러 물어 볼까요?”

“아니다. 그저 눈이 갔을 뿐이다. 그 기세가 놀랍구나. 마치 희찬의 젊은 시절 검 같구나.”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강대주는 참 안되었습니다.”

“생명을 다한 검었으니 그만한 위력을 냈겠지. 그렇지 않느냐. 가자. 새벽공기가 차구나.”

“예. 가주님.”


제왕전의 집무실 옆엔 침전이 따로 딸려있다. 뇌력검제 남궁척은 무척 부지런한
사내였던 것이다. 딸린 식솔 5천을 모두 통솔하는 자리인 남궁세가의 집무실은 언제고
불이 꺼질 틈이 없을 정도였다. 침전에 들자마자 옷을 벗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무리에 대해 참오했다. 대연검이라. 언제 배우고 그만 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기본검술인데.
거기서 그만한 위력의 검술이 튀어나오다니. 대연검이라.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찾을 사람이 없는데. 재빨리 옷을 갖춰 입으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호위인 진천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린다.


“가주님. 가모님이 오셨습니다. 들일까요?”

“그리하라.”

이 시간에 절리가 웬일일까? 너무 늦은 시간인데. 혹시 또
걸아녀석 때문에 잠을 설친 것인가? 아니면 죽은 강대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일까.
바보같이, 이 나이를 먹어서도 정인에 대한 질투를 죽은 사람에게까지 갖다니.


“오, 부인 어쩐 일이시오.”

“달밤이 너무 밝아 잠이 오질 않습니다. 상공.”

“하긴 나도 잠시 전 강대주의 방에서 달을 오래도록 보고 왔다오.
강대주가 보았을 그 무엇인가를 나도 보고 싶어서. 하지만, 허락하질 않으시더군.
하늘은. 아무래도 난 재능이 없나보오. 못난 남자가 떠난 사람을 아직도 질투를 하니 말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공은 평생의 제 유일한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걸아를 저대로 저렇게 두실 생각이십니까?”

“어찌하오. 마음을 붙일 자리가 없는데. 이 못난 아비에게라도 와서
투정이라도 부렸으면 좋겠지만, 그런 아이가 아니질 않습니까 부인.”

“차라리 그 아이에게라도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가주님. 그 제갈가의....”

“그건 아니 될 말이오. 첩의 자식에게 대 남궁가의 장자를...그냥 두고 보시오.
걸아는 일어날거요. 비온 뒤의 땅이 더 단단해지는 것만큼 철혈의 마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날 거요. 부인 당신과 나의 아이오. 실망을 시키진 않을 거요.”

“밤이 깊었습니다. 침소에 드시지요.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러시오.”


제왕전을 나와 천동문을 지나 기거하는 내원 애화각까지 걷는 내내, 남궁세가의 가모,
악절리는 짙은 하늘에 별도 없이 떠있는 작은 손톱달이 오직 자기만을 비추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부침이 많지 않던 인생이었다. 부질없던 열정을 불태우던
그 짧은 추억의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도 않다. 그저 집이 너무 컸다. 걷기에도
운신을 하기에도 집이 너무 컸다. 마지막을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할 줄은 몰랐다. 모두에게 미안했다.
술을 먹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도, 밤새 무리를 참오하며 자신에게 자기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남편에게도, 이미 잃어버린 그 사람에게도.


“소희야. 먼저 가서 방안에 화롯불을 좀 높여주지 않으련. 난 좀 더 걷고 싶구나.”

“안됩니다. 가주님께서 언제나 마님에게서 시선을 떼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았다. 대신 조금만 더 걷자. 걸아에게 가 볼까?”

“소가주님은 지금 주무실 겁니다.”

“그래. 들어가자. 종일 밤길을 걸어봐야 세가의 담 안이고, 어디서 본들 달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소가주 남궁걸이 깨어나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 본 것은 흰 자기그릇에
담겨진 꿀물이었고, 그 꿀물을 쥔 손가락에 끼여진 조잡한 문양의 은반지였다.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그만 하거라. 이제 됐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다.
넌 5천 식솔의 미래를 맡아야 할 세가의 보물이다. 어미로서, 더 봐 줄 수가 없으니 이젠, 일어서라.”

“그리 하겠습니다. 앞으로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남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다만 앞으로 하루만 더 절 그대로 봐 주세요.
지금은 강대주가 마지막으로 남긴 검을 수습해야 하니까요. 그 일은 저밖엔
하지 못하는 거니까요.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그 검격을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넌 마지막 그 검을 보지 못했잖니?”

“아니에요. 봤습니다. 센 바람에 통째로 떨어지는 목련 꽃 같은 그 대연검을,
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친 것도 저와 강대주님이었죠.
눈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아들이라고. 물론, 진짜로 알고 하신 말씀은 아닌 걸
저도 압니다. 하지만, 세상에 마지막 남겨진 강대주님의 흔적을 수습하는 건 역시 제 일 같아서요.”


눈물로 얼굴이 흐려진 악절리가 방을 뛰쳐 나가고, 혼자 남은 남궁걸은 검대에서
평송검을 꺼내 대연검 일초 비격천뢰를 천천히 시전하기 시작했다. 남궁걸의
눈에서 피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꽉다문 입가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검격은 흐트러졌고, 남궁걸은 평송검의 검날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낙화 대연검에는 냉정하고 때로 껄렁하고, 늘 자신을 지근에서 지켜보던
그 따뜻한 강희찬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소룡전이 붉은 검기로 가득해지더니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장지문이 터져나갔다.
소룡전 시비 앵화가 급히 수문위사 정철을 찾아, 제왕전에 사람을 보냈다.
급히 도착한 뇌력검제 남궁척이 본 것은 강희찬처럼 온 생명력을 검격에
쏟고 있는 남궁걸의 모습이었다. 저대로 둔다면 남궁걸 역시 죽을 것이다.
두 번 그녀의 눈물을 볼 수 없지. 뇌력검제는 평생 다시오지 않을 각오로
그 핏빛 검격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베어졌다.

뇌력검제는 날아오는 평송검의 강기가 어제 봤던 달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후회는 들지 않았다.

후회는 한 번으로 족했다. 정말로 그랬다.




2차 무단대에는 심사위원이 아니라 참가자로서 한 번 참여해 볼까 해서 단편소설을
구상하다가 예전에 써뒀던 후회가 생각나서 2부를 써봤습니다.
2차 무단대가 언제 할 지 꽤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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