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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소신발언?)20화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함.

루까스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6.05 02:42:03
조회 7940 추천 97 댓글 129
														

오히려 난 이번 화가 굉장히 완성도 높은 에피소드라고 생각함.


왜냐하면, 이번 화는 스페시언의 어시언 착취와 양측의 갈등으로 유지되는, 델링, 새리우스, 빔을 비롯한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낸 구조가 어떻게 양 측의 신세대에게 악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굉장히 압축적으로 잘 보여줬음. 즉, 수성의 마녀의 근본적인 주제의식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이번 20화라고 생각함. 동시에, 슬레타가 최종적으로 영웅으로 각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에피소드였다고 봄.


이번 에피소드에서 가장 큰 갈등구조는 일단 크게 둘로 나뉨.


1. 구엘 대 샤디크


이 상황에서 단순히 샤디크의 찌질함만 이야기가 나오지만, 사실 샤디크가 구엘에게 하는 일갈 자체는 틀린 게 없음. 실제로, 샤디크는 전쟁 쉐어링의 피해자가 맞고, 그 전쟁 쉐어링을 이용하는 당사자인 새리우스에 의해 타인을 짓밟는 방식을 강요받았으며, 힘이 없으면 구조를 바꾸기는 커녕 반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말은 정론이 맞으니까. 거기에 사비나의 말대로, 구엘 제타크는 '바라지 않아도 주어지는' 기득권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우니까.


여기서 새리우스가 샤디크에게 나름대로 잘 대해줬다느니, 얘들이 그레도 그래슬리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느니, 그런 건 사실 샤디크 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음. 객관적으로 봐도 샤디크가 새리우스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는 별로 없고.


왜냐하면 자신들을 전쟁 고아로 만든 그 구조 자체를 설계하는 데에 그래슬리도 한 몫을 거들었고, 새리우스 개인의 인격이 어떻든 간에, 그 역시 마찬가지로 개인의 인격에 인간미가 있었던 델링, 빔과 마찬가지로, 그 설계를 통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위선자일 뿐이니까. 샤디크의 입장에서는 말이지. 간디나 네루도 영국 유학파였고, 심지어 네루는 아예 친영파였지만, 그렇다고 식민주의가 정당화되는 것도, 이 둘이 영국에 감사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거하고 똑같은 거임.


노레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어느정도 보충하겠지만, 샤디크와 사비나가 '비겁하게' 구엘에게 둘이서 덤비는 것도, 이 둘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정당한' 선택임. 구엘 같은 기득권이야 '정정당당하게' 싸울 여유가 있지만, 한 번 실수하면 곧바로 어시언이라는 굴레가 발목을 잡을 이 둘은 비열하고 추잡한 수단이라도 거리낌없이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지.


왜? 애초에 그 '정정당당해질 수 있는' 규칙 자체가 스페시언이 만든 것이니까. 본인들이 지구를 오염시켜놓고 정작 우주로 도망가자 '우주 쓰레기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실탄 사용을 금지하는, 마치 현대의 환경 사다리 걷어차기를 시전하는 선진국들이 만든 것과 같은 규칙을, 어시언인 샤디크와 사비나가 지키면서 '정정당당하게' 페어 플레이를 하고 싶을까? 이들에게 그러한 당위가 당위로써 느껴질까?


하지만, 이번 화에서는 동시에 샤디크의 한계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남. 샤디크의 계획은 의회 연합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 결국 프로스페라의 계획에 이용당하면서 스페시언이 어시언을 칠 명분만 만들어줬을 뿐 아니라, 어시언 기숙사를 비롯한 동포들을 더 위험하게만 만들었음.


이건 결국, 시스템 안에서 자라나 폭력과 경쟁만을 채화한 샤디크와 샤디크 걸즈는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미오리네에 집착하는 개인적인 셩격 결함까지 겹쳐져 근본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게 애초에 불가능했으며, 비극적이게도 본인들 스스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거임.


그런데, 샤디크팸이 미처 예상 못한 게 있음. 이들은 구엘을 여전히 도련님이라고 폄하하지만, 정작 구엘은 이미 지구의 참상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그 경험을 통해 현재의 체제 모순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았다는 거임.


실제로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게 샤디크에 대한 구엘의 반응임. 구엘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샤디크에 분노하면서, '테러에 가담한 역적'이라고 부르지만, 막상 샤디크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전쟁 쉐어링이고, 타인을 짓밟는 방식을 자신에게 강요했으며, 힘이 없으면 구조를 바꾸기는커녕 반항도 불가능하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샤디크의 말 자체는 부정하지 않음.


왜나고? 구엘은 이미 샤디크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시시아의 죽음을 통해 직접 체험했으니까.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구엘은 '죄를 감당하는 것은 저지른 자의 몫이다'라며 담담하게 그 반응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미 지구에서의 경험으로 '빼앗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자신 나름대로의 답을 얻었기에, 샤디크와 당당히 맞설 수 있었음.


이건 폴드의 새벽을 비롯한 어시언 과격파와 샤디크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시언들에게 '빼앗으면서' 지금의 체제를 유지해 온 스페시언 역시 잘못되었다는, 양측 모두를 경험한 구엘이 할 수 있던 통렬한 자기 반성이었다고 생각함.


하지만, 구엘에게도 한계가 있음. 우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들 여전히 아버지를 살해한 원죄가 계속 구엘을 압박하고 있고, 거기에 가족과 제타크 사를 소중히 여기는 구엘은 결국 그 이해관계에 묶일 수밖에 없기에 한계가 있음.


그리고 라우더가 빔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구엘을 향한 마지막 시련으로서 구엘 본인의 이런 한계가 그의 앞에 닥쳐올 거라는 암시는 이미 주어졌음. 과연 구엘이 미래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시련을 이겨내고 이전보다 훨씬 나은 체제를 만들 수 있을지, 아니면 결국 마지막 순간에 꺽여서 쓰러질지 생각해 보는게 앞으로 구엘 서사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함.


2. 노레아(어시언) 대 학원 학생들(스페시언)


노레아는 분명히 악질 테러범임. 하지만, 과연 노레아와 같은 환경에 어릴 적부터 노출된다면, 적나라하게 말해서, 당연히 누려야 할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전쟁과 폭력에 노출된 소년병이 된다면, 노레아와 같은 악질 테러범이 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말로는 다들 쉽게 '그래도 폭력은 안 돼!' 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편안한 환경에서 누리는 중산층의 위선이 아닐 사람이 정말로 몇이나 될까 하는 거임. 폭력이 일상화된 현실에 사는 사람들에게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말만큼 공허한 게 또 있겠음? 실제로, 미국의 어떤 래퍼는 자신의 가사에 마약과 폭력이 가득하다는 비판에 이렇게 답한 적 있음. 자기 친구들 중 태반은 그렇게 감옥에 갔다. 자신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라고.


흔히 소년병 하면 건담에서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일단 건담 파일럿 대부분이 소년병이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세츠나이지만, 사실 이 세츠나조차도 객관적으로 보면 만화적으로 미화된 요소들이 한가득이고, 실제 소년병은 소피나 노레아, 어쩌면 철화단과 더 비슷할 거임.


실제로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소년병들은 나중에 구출되더라도, 열에 아홉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범죄에 몸을 담다가 비참하게 사망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함. 노레아의 악행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노레아가 그 하나가 아니라고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없음.


그리고 이런 노레아의 테러에 희생되는 학원 학생들은 언뜻 보면 무고한 희생자처럼 느껴지지만... 잘 생각해보샘. 아스타카시아 학원이 애초에 뭐하는 곳인지. 여기는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조선총독부 고관이나 군인, 고위급 친일파들의 자제들을 모아놓고 식민지배를 위한 관료나 군인으로 양성하는 학교나 다름없음.


거기에, 이미 작중에서 학생들과 선생들이 어시언에 대한 차별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지배계급의 지배논리를 학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암시 역시 주어지고 있고.


하지만, 의외로 이들 스페시언 학생들의 개인 성정 자체는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음. 구엘은 특권 의식에 가득차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정당당한 면모가 있었고, 라우더, 페트라, 페르시는 어시언인 츄츄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경험을 통해 어시언에 대한 편견을 상당히 떨쳐내는 모습을 보였음.


하지만, 그 전에 이들에게 어시언에 대한 차별의식 자체가 아예 없다고 볼 수 있었을까? 당장 구엘이 미오리네에게 화가 나서 어시언 비하발언을 하며 화원을 부수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느꼈던 게 이들임. 작중에서 순수 스페시언으로 나온 비중있는 학생 중, 어시언에 대해 차별의식을 조금이라도 드러내지 않았던 건 기껏해야 세실리아와 로지 정도밖에 없음.


그리고 이건 스페시언 기성세대들도 마찬가지임. 빔과 델링은 표현방식이 서툴렀을 뿐,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고, 새리우스는 비록 샤디크를 다른 후보자들과 경쟁시키긴 했다지만, 작중 묘사로 볼때 충분히 아버지로서 인간적인 도리를 다했고, 오히려 패륜을 저지른 것은 샤디크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전쟁 쉐어링을 통해 무기를 팔아 이익을 챙기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죽음의 상인이요, 억압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고, 이들이 현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그런 폭력적이고 위선적인 구조를 후세대에 그대로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음.


그리고 그 '폭력과 체제 모순의 대물림'을 가장 충실히 실천하는 기관이 다름아닌 아스타카시아 학원임. 결투라는 지극히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승부를 가르며 폭력과 전투에 익숙하게 만들고, 베네리트 그룹의 기득권 구조에 봉사할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 어시언에 대한 스페시언의 차별이 일상화되어 있고,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공간, 그게 아스타카시아 학원의 본질이라는 거임.


결국, 이 학원 자체가 근본적으로 현재의 지배구조, 그리고 그 지배구조에 대한 편견을 신세대에게 기성세대가 학습시키는 공간이었던 거임.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슬레타가 학원에 전학오기 전까지의 구엘의 행태, 미오리네의 처지, 4호의 존재 등에서 암시되듯, 아스타카시아 학원은 그 역할을 아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음. 사실, 현실에서도 어떤 나라든 공교육이란, 한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채득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하다는 걸 생각한다면...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인 묘사지.


그렇기에, 비록 테러와 수많은 학생들의 죽음이라는 과격한 방식이었지만, 메타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이 학원은 그 자체가 신세대에게 강요한 것과 똑같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현 체제가 만든 괴물인 샤디크와 노레아의 손에, 가장 끔찍한 마녀인 프로스페라와 에어리얼이 벌인 짓의 나비효과에 의해 파괴되어야만 했음.


어시언에 대한 멸시와 잘못된 체제에 대한 안주를 학습하고, 결국에는 '무고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릴 스페시언 아이들을 위해서도, 가혹한 환경 속에서 증오와 분노, 또는 체념만을 학습한 채 과격하고 극단적인 행동이나, 순종을 통해 악순환만을 반복할 어시언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 학원은 어른이 만들어낸 폭력에 의한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과 함께 파괴되어야만 했음.


실제로, '학원 학생들이 희생되어야 의회 연합이 움직일 거다'라는 샤디크의 발언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메타포임.


그동안 대안이 없다는 핑계로, 전쟁 쉐어링이라는 구조를 통해 어시언들의 죽음을 만들고, 수많은 어시언 전쟁고아를 양산하며 자신들의 가치관을 후세대에게 주입시키려던 수마 세계관 기성세대들의 안일함이 결국 그들에게 희생된 이들 중 하나였던 샤디크나 노레아, 프로스페라와 에어리얼에 의한, 자신들의 아들, 딸들의 죽음으로 돌아왔고, 그 사실을 기성세대가 인식해야만 현재 수마 세계관의 모순된 구조가 바뀔 수 있다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음.


하지만 새리우스가 샤디크를 어리석은 아들놈이라고 한탄하는 것, 그리고 프로스페라가 같은 일을 경험한 벨메리아 등에게도 마녀라고 불리는 것에서 보이듯, 이 학원의 파괴, 즉, 기존 체제의 파괴가 마냥 해피앤딩은 커녕,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올 것 역시 암시하고 있음.


당연한 거임. 앞서 말했듯, 샤디크의 방식은 결국 본인도 인정했듯, 이 전쟁 쉐어링이라는 체제 내에서 학습한 것임. 자식인 슬레타에게 가스라이팅을 시전하며 복수의 도구로 이용한 프로스페라의 행동도 마찬가지고. 그 체제가 내포한 폭력을 이미 온 몸으로 채화한 이상, 대의를 위해 사랑도, 같은 동족도 모두 짓밟는 인간이 되어버린 샤디크나, 아예 대안을 제시할 생각도 없이 모든 것이 불타길 바라는 프로스페라가 대안을 제시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던 거임.


3. 정말로 수마 세계관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가?


이렇듯, 수마 세계관은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폭력과 착취구조가 어시언과 스페시언 양 측의 신세대에 대물림되는, 소름끼칠 정도로 현실적인 디스토피아임. 하지만, 작중의 상황이 마냥 암울하냐 하면 그건 그렇지 않음. 슬레타 세대, 즉, 작중 보여지는 현재의 신세대들 사이에서는 분명히 변화의 씨앗이 다양한 형태로 자라나고 있음.


당장 기득권이었다가 지구의 상황을 경험하고 성장한 구엘이나, 어시언에게 목숨을 구원받고 어시언에 대한 태도를 바꾼 제타크 3인방, 어시언에 대한 차별을 경험했음에도, 전쟁과 폭력을 대물림하는 것을 거부하고 건드 의료기기 사업이라는 길을 스페시언인 미오리네에게 제시받음으로서 평화적인 길을 택하고, 작품 초기에 보였던 스페시언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 대신 협력을 택한, 츄츄를 비롯한 어시언 기숙사 아이들, 폭력을 대물림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음에도 소피와 노레아와는 달리 그 연쇄를 끊으려고 하는 니카,


그리고 비록 본인은 스페시언으로 분류되는데다 베네리트 총재의 영애라는 기득권의 핵심이면서도, 어시언의 피가 섞여 있으며 본인 역시 어시언에 대한 차별의식이 없고, 어시언 기관인 바나디스 그룹의 건드 의료라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념을 이어가려는 미오리네의 모습이 대표적임.


하지만 이들 역시 한계는 존재함. 구엘은 앞서 말했듯 자신의 원죄가 남아있고, 미오리네는 자신의 이상이 최악의 형태로 좌절되면서 이미 한번 실패했으며, 어시언 학살자라는 오명까지 썼음. 그리고 어시언 기숙사 아이들은 학생이라는 한계에 갇혀서 실질적인 힘이 없음. 위에 언급되었듯이 샤디크는 현실주의라는 명목 하에, 본질적으로는 자신이 당했던 구조를 조금 비튼 방식 외에는 상상하지 못하고, 프로스페라는 아예 모든 것을 에리를 위하여 파괴하려고 함.


그리고 이렇게 각자의 배경 속에서 다른 답을 내놓고, 그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현실 앞에서 좌절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정말로 백지 상태에서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채화한 인물이 있음.


다름아닌 슬레타임.


4. 슬레타는 경계인이자, 그로 인해 깨달은 자이다.


근본적으로 슬레타는 경계인임. 슬레타는 엄밀히 말해서, 스페시언도, 어시언도 아님. 태생만 따지자면 우주인 수성에서 태어났으니 스페시언이지만, 부모는 어시언이고, 결정적으로 슬레타 본인이 스스로를 어시언이나 스페시언, 어느 쪽으로 규정하는 의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도 슬레타는 자신은 물론, 타인 그 누구도, 어시언이나 스페시언이라는 말로 정의하려 들지 않음.


왜냐면, 복수에 미친 엘노라 사마야, 프로스페라의 입장에서 슬레타는 에리크트를 위한 '도구'였고, 따라서 도구에게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정의하는,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주입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즉, 체제의 모순에 의해 가장 뒤틀려버린 괴물이 된 프로스페라의 딸인 슬레타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정체성을 누군가에게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체제가 만들어내는 모순의 대물림에서 가장 자유로운 순수한 존재였던 거임.


실제로, 작품 초기의 슬레타는 어시언과 스페시언 양측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음. 어시언 기숙사 아이들에게는 일단 출생만 따지면 수성 출신인 스페시언이기에 니카를 빼면 껄끄럽게 여겨졌고(특히, 츄츄는 노골적으로 적대했지), 스페시언인 학교 주류에는 홀더가 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수성 촌뜨기'라며 작품 중반이 넘어가도록 멸시당했음.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슬레타는 기존의 체제가 만들어낸 편견 없이 어시언과 스페시언 양측과 교류할 수 있었음.


갈 곳 없던 슬레타는 어시언 기숙사에 정착하여 어시언인 동료들과 친구가 되지만, 동시에 스페시언과 어시언 혼혈인 미오리네의 신랑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쌓아나가고, 스페시언인 구엘이나 샤디크 등과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며, 스페시언인 척 위장하고 있지만 본질은 어시언인 4호와 진심으로 소통함으로써 양측의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 시작했음.


왜냐하면, 슬레타 본인의 정체성은 백지에 가까우니, 기존의 체제가 만든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얽메일 필요가 없으니까. 슬레타 머큐리를 정의하는 정체성은 프로스페라의 딸이자 에어리얼의 동생, 그리고 미오리네의 신부, 이 셋이면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슬레타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 단순히 프로스페라와 에어리얼에게 주입받은 지식만 존재하는 실질적인 생각의 백지에서 자신의 생각을 쌓아나가고, 또 그렇게 쌓아간 생각들을 다른 경험과 맞닥뜨리며 계속 수정해 왔음. 건담에 대한 생각이 대표적임.


처음에는 건담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에, 슬레타는 에어리얼이 건담이라는 사실을 부정했음. 프로스페라의 말을 믿었고, 주변의 생각을 그대로 흡수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고, 에어리얼은 건담이 맞았음.


그러자, 방황하던 슬레타는 미오리네와 지구 기숙사 아이들에 의하여, 주식회사 건담과 건드 의료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받게 되고, 이것을 통해 '건담은 사람을 구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라는 인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수정함.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 '사람을 구하는 도구'를 이용해 미오리네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말고, '사람을 구하는 도구'로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소피 플로네와 노레아 듀노크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면서, 그러한 생각은 깨지게 됨. 그렇게 처음으로 슬레타는 체제가 만들어낸 깊은 모순과 직접 대면하게 됨.


그리고 슬레타는 프로스페라, 에어리얼, 그리고 미오리네, 자신을 규정했던 모든 존재들로부터 버려졌지만, 동시에 에어리얼을 통해 자신의 기원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직면할 수 있게 되었음. 그렇기에, 지구 기숙사에서 자신의 모든 정체성이 부정당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은 생존의지를 가진 존재로써, 슬레타 머큐리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음'.


그리고 자신을 버렸지만 그래도 의지했던, 사실상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프로스페라와 에어리얼이 저지른 행동을 보면서, 그 둘이야말로 이 체제가 만들어낸 최대의 모순이자 뒤틀림 자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신부가 그 뒤틀림에 휩쓸려 무고하게 희생당할 것이라는 것 역시 '깨달음'.


하지만 슬레타는 어머니인 프로스페라와 에어리얼과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누구보다도 오래 있었던 사람인데다, 에어리얼을 통해 자신의 정체는 물론, 프로스페라와 에어리얼의 목적에 대해 직접 전달받았음. 그렇기에 단순히 단편적인 뉴스만 보고도 그 둘이 뭘 하려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세상에 모든 것을 잃은 그 둘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거임.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로스페라가 '왜' 복수하려는지 지난날 함께 했던 경험과, 에어리얼이 보여준 기억을 통해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슬레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막상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만큼 소중한 자신의 신부가 위험에 처했으니까' 정도의 답밖에 내릴 수 없었을 거임. '미오리네를 구하기 위해서 뭐든지 해도 된다'는 것은, 이미 살인을 저지른 자신을 보던 미오리네의 태도에 의하여 부정되었으니까.


이번 화에서 슬레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수업을 들으면서 '할 수 있는게 이것 뿐이다'라고 푸념하는 것은 이런 부분에 대한 메타포라고 생각함. 슬레타는 어머니를 막아야 하는 건 알고, 미오리네를 구해야 하는 건 알지만, 왜 어머니를 막아야 하는지, 그리고 미오리네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동안 해왔던 학원에서의 일상을 반복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을 거임.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를 제하고도 말이야.


그리고 마녀인 엄마와 언니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돌아왔는지 이번 화에서 슬레타는 자신의 몸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죄와 마주보면서 마침내 마지막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음.


편견에서 벗어나 성장하려던 페트라가 희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슬레타는 체제의 폭력이 어떻게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자신과 같은 신세대에게 대물림될 수 있는지 온몸으로 경험한 거임. 동시에, 프로스페라와 에어리얼의 행동을 통해 저질러진 '살인'을 직접 대면하고, 본인이 그 희생양이 될 뻔 하면서, 자신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질렀던 살인의 무게를 마침내 마주할 수 있었던 거임.


그렇게, 슬레타는 '스페시언'도 '어시언'도 아닌 남겨진 '사람'을 구한다, 아직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라는 자신만의 행동양식을 확립할 수 있었던 거임. 이로써 슬레타는 어머니와 언니가 '왜'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어머니와 언니의 응당한 복수심에 어떻게 맞서야 할지를 깨닫고, 진정으로 프머니의 계획을 본질적인 부분에서 완전히 이해하기에, 그 계획을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인물로 거듭났다고 생각함.


그렇기에 이번 화는 슬레타가 마침내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고, 스스로의 행동 양식을 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에피소드이자, 슬레타의 비중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슬레타의 서사에서 제일 중요한 에피소드가 될 거라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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