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쩌면 "콩 3부작"의 완결?
〈고질라 대 콩〉부터가 콩 비중이 과하게 높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었는데 이번에는 정도를 지나친 듯하다. 이쯤 되면 콩 단독 영화에 고질라가 찬조 출연해놓고 이름만 올린 수준이다. 원래 〈콩의 아들(Son of Kong)〉이라는 제목의 속편이 예정되었다는 옛날 뉴스를 떠올리면 고질라의 어중간한 비중이 기분 탓은 아닌 것 같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를 〈콩: 스컬 아일랜드〉. 〈고질라 대 콩〉에서 이어지는 "콩 3부작"의 완결편으로 간주하고 평가한다면 어떨까?
몬스터버스 내의 콩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가진 공통적인 주제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집 찾기'요, 다른 하나는 '쇠사슬 끊기'다. '집 찾기'는 〈콩: 스컬 아일랜드〉에서 콩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로컬 히어로로 설정되며 시작된다. 〈고질라 대 콩〉은 해골섬을 빼앗긴 채로 절규하던 콩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할로우 어스로 진입하고 터를 잡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함께 살 동족이 없기 때문에 콩은 여전히 이방인 신세다. 그렇기 때문에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에서 콩의 싸움은 보금자리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의 의미를 갖는다. 그가 목숨을 건 이유는 고향과 동족을 구해내지 못하면 자신의 삶 또한 더 이상 무의미하단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쇠사슬 끊기'는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쇠사슬에 묶인 유인원'의 이미지를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콩: 스컬 아일랜드〉에서 난파선 쇠사슬에 엉켜버리는 장면이나 〈고질라 대 콩〉에서 항공모함에 연결된 쇠사슬을 끊는 장면이라든가 말이다. 그에 반해 이번 작품은 동료들의 쇠사슬을 끊어주는 이야기이기에 의미가 크다. 폭군을 제압하고 동족들을 구원하는 일련의 전개가 그 자체로 쇠사슬로부터의 해방을 암시한다. 의외로 가장 중요한 장치는 시모의 존재인데, 다른 게 아니라 진짜로 쇠사슬에 묶여있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우 전투는 스카 킹의 패배뿐만 아니라 시모가 족쇄에서 풀려났다는 점에서 콩의 진정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쇠사슬에 묶인 괴수의 대명사였던 콩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박해받던 가련한 짐승을 해방시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는 오리지널 킹콩을 비틀고 몬스터버스 콩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법이다. 원래 킹콩은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쇠사슬에 묶인 채로 끌려와 이역만리 타향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피해자였다. 그러나 몬스터버스는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의 속성을 괴수를 통해 형상화하는 시리즈이므로 콩에게는 다른 결말이 준비되어있다. 콩은 동족과 함께 살 약속의 땅을 찾았고 손수 그들에게 매인 사슬을 풀어주어 자발적인 복종을 얻어냈다. 스카 킹은 킹콩이 맞닥뜨렸던 인류 문명의 어두운 단면을 상징하는 악당이기에, 그의 시체를 박살내는 결말은 몬스터버스뿐만 아니라 킹콩 프랜차이즈 전체로 넓혀도 의미가 남다르다. 이제 그는 멸칭으로서의 "킹콩"이 아닌 진짜 왕이 되었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더 준비되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킹콩으로 거듭나는 콩의 이야기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4. 상실과 회의,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는 사랑
"Let love clasp grief(사랑이 비탄을 붙들게 하라)."
콩만 거론하면 매정하니 이번에는 고질라, 모스라, 그리고 인간들까지 아우르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해석해보자. 이 영화는 상실과 회의에 절규하던 영혼들이 마침내 떠나가는 인연을 다시 붙잡는 이야기이다. 콩은 동족인 유인원들과 친구 지아를 포기할 수 없어 도박에 가까운 싸움을 시작한다. 고질라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모스라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살랐다. 아일린과 지아 모녀, 그리고 버니는 세상을 구함과 더불어 가족 간의 유대감을 회복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한다.
모든 단서는 타이탄보다 오히려 인간 측 서사를 담은 오프닝 크레딧에 있다. 크레딧 속 강연의 내용은 이 영화의 정서를 암시한다. 지아는 신의 대리인이 되는 숙명을 타고나서인지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랬던 지아가 이위족을 다시 만나 삶의 의미를 되찾은 모습을 보며 양엄마 아일린은 딸을 놓아줄 결심을 한다. 그런 엄마에게 지아는 "엄마가 있는 곳이 집이다."라며 떠나지 않을 거라 답한다. 뿌리가 다르더라도 애정으로 이어져있는 아일린과 지아의 관계는 포탈로 연결된 지상과 할로우 어스와 닮아있다. 오프닝 크레딧 속에서 "두 세계는 사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라고 설명하던 아일린은 이미 문제의 본질을 알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좀 더 시야를 넓히면 이 대사는 지아가 할로우 어스에 사는 콩과, 그리고 고질라가 생사의 경계를 넘어 모스라와 재회하리라는 것 또한 암시한다. 할로우 어스가 액션의 배경을 넘어 거자필반의 정서를 담은 공간으로 승화한 것은 이 영화에서 몇 없는 낭만 중 가장 커다란 부분이다.
5. 시작과 끝맺음: 오프닝과 엔딩의 명료함
음모론으로 시작해 포효로 마무리하는 몬스터버스 영화의 경향성은 윈가드의 작품들에서도 변함없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괴수의 존재가 하나의 배경으로 기능했던 기존 작품들에서는 거대한 사건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느낌이었다면, 윈가드의 작품에서는 인격체로 다뤄지는 괴수들의 행적을 정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격정적으로 시작해 안정적으로 끝난 〈고질라 대 콩〉의 오프닝과 엔딩은 고질라와 콩의 서사를 규명하는 역할을 한다. 오프닝은 상술했듯 집을 잃은 콩과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은 고질라를 비춘다. 콩의 영화의 부제가 "스컬 아일랜드", 즉 그의 집이고 고질라의 영화의 부제가 "킹 오브 몬스터", 즉 왕의 지위를 나타낸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적절히 표현했다. 엔딩은 그야말로 정석이다. 콩이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한 고질라는 바다로 돌아간다. 콩은 마침내 할로우 어스에 터전을 잡고 포효한다. 〈고질라(2014)〉와 〈콩: 스컬 아일랜드〉의 엔딩을 재현한 것이다. 몬스터버스를 1차적으로 마무리하는 영화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고질라와 콩은 그들다웠다.
전형적이었던 전편의 엔딩과 비교하면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의 엔딩에는 은유와 위트가 있다. 게으른 독재자 고질라는 그 모든 아수라장을 벌여놓고도 오래된 제국의 잔해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만족한다. 젊고 자비로운 지도자 콩은 자신이 이끌 동족들을 향해 새로운 제국의 출발을 알리며 포효한다. 주목할 부분은 고질라와 콩이 각각 콜로세움과 스카 킹의 본거지로 향했다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병치한 이유는 사실 그 두 장소가 같은 곳이라는 의미다. 콩의 동족들이 있던 그 곳이 바로 콜로세움의 은유이다. 이곳에서 도끼를 들고 사슬에 묶여 폭군에게 조종당하는 짐승과 싸운 콩은 곧 검투사였다. 눈치 챘겠지만 이러한 콩의 서사는 스파르타쿠스를 인용한 것이다. 이 장치로 인해 콩은 액션 히어로와 지도자, 해방자의 이미지를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의 엔딩은 콜로세움에서 잠든 고질라의 이미지만으로도 강렬하지만 고질라와 콩이 서로의 결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재치가 있다.
6. 잘한 점, 조진 점
이렇게만 써놓으니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영화인가 싶지만, 이 영화는 보이는 게 전부이고 그만큼 얄팍하다. 제일 꺼림칙한 부분은 전반적으로 급조한 기획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제작 허가가 떨어지고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영화 보는 내내 든다.
"〈고질라 대 콩〉이 꽤 성공했으니 몬스터버스는 연장하자. 근데 그렇다고 엄청 번 것도 아니잖아? 괜히 힘 줬다가 실패하면 큰일 나니까 비슷한 거 하나 더 만들고 예산도 줄이자고. 감독은 전에 했던 애 다시 불러오면 되잖아. 걔는 뭐 콩의 아들 그런 거 하고 싶어 한다고? 콩이 원숭이들이랑 노는 영화가 팔리겠냐? 각본 다시 뜯어가지고 고질라 들어갈 자리 만들라고 해. 상대가 안 되면 악당 원숭이한테도 고질라 비슷한 거 하나 달아주면 되잖아. 모스라? 그건 일단 놔둬, 토호한테 허가를 받아야 넣을 수 있어."
솔직히 이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근래의 유니버스 광풍 때문에 그렇지 속편은 원래 반응 살펴가면서 조심스럽게 만드는 게 맞다. 애초에 속편 만드는 의도가 안정적인 흥행을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이 영화에 퍼져있는 진부함과 소극성, 어설픔은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당장 괴수들의 활용도 그렇다. 고질라와 시모를 인간이 바라보는 자연으로 포지셔닝하고 액션을 책임지게 한 것은 나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 고질라가 낄 자리를 만들어 놓으니 역설적으로 '콩이 없어도 이기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관객들을 괴롭힌다. 시모는 독자적인 매력과 개성은 딱히 없고 위력에 비해 연출상 수혜를 받지 못했다. 모스라의 재등장은 반갑지만 그녀를 둘러싼 배경과 특수효과는 원래 그녀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위화감이 든다.
몬스터버스의 고질적인 문제인 인간 파트는 다른 형태로 눈엣가시다. "괴수 영화에 인간이 설 자리는 없다"는 팬들의 의견이 대세지만, 이 영화는 오히려 인간 파트가 필요악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제일 큰 이유는 위기감과 절박함의 부재이다. 세계를 구하는데 목숨을 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후반부가 김새는 이유로 악역의 애매한 카리스마와 휘뚜루마뚜루 마무리되는 싸움을 많이들 거론하지만 인간들의 문제도 상당히 크다. 〈고질라 대 콩〉이 인간 파트를 극한으로 배제한 모범사례로 꼽히는 모양인데, 이 영화도 챙길 만큼은 챙겼다. 네이선 린드는 자신의 집착과 욕심이 콩을 괴롭히고 세계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죽음을 각오하고 콩을 살린다. 지아는 소생한 콩을 반기면서도 메카 고질라의 악함을 간파하여 고질라를 구해달라고 콩에게 호소한다. 최종전의 절박함은 이렇게 조촐하게라도 유지한 인간 캐릭터들의 감정선의 수혜를 받은 것이다. 마치 테마파크에 놀러온 것처럼 유람하던 이번 영화의 인간들에게 이러한 처절함이 있었나?
효율적인 각본의 미덕은 퇴색됐지만 애덤 윈가드가 선사하는 괴수액션의 맛은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최고의 액션은 고질라와 콩의 할로우 어스 진입 이후의 충돌과 반중력 전투이다. 마치 마상시합하는 기사처럼 서로에게 돌진해 덤벼드는 네 괴수를 한 프레임에 담고 순차적으로 얼굴을 비추는 연출은 이런 영화에 필요한 게 뭔지 감독이 제대로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영화"처럼 똘마니들은 구석에 치워두고 대장끼리 싸우는 건 도리가 아니다. 다대다 전투라면 마땅히 한 테이크에 모든 인물이 엉키는 액션이 나와 줘야 한다. 그리고 반중력 전투는 윈가드식 액션을 위한 완벽한 무대다. 마치 중력을 무시한 것처럼 종횡으로 뒤집어지거나 대상의 표면을 미끄러져 들어가는 카메라 워크가 감독의 장기인데, 중력이 뒤집어지는 곳이라면 대놓고 멍석이 깔린 것 아닌가. 이게 거대 괴수에게 어울리는 액션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만 일단 오락성과 스펙터클은 확실하다.
치명적인 결점인 동시에 장점인 부분은 아무래도 보는 내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시련과 고난, 어둠이 없고 모든 일은 원하는 대로 풀린다. 승리는 예정되어 있으니 괴수들은 뒷일 생각 안 하고 시원하게 때려 부순다. 이렇게 관객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요소가 없으니 그만큼 이야기에 이입할 수 없다. 아일린 일행이 모스라를 찾아가는 과정이 대표적인데, 재미를 느낄 만한 난관도 없는 주제에 말로 설정을 설명하는 실책까지 범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괴수 액션 영화가 줄 수 있는 단순무식한 쾌감은 보증한다. 솔직히 허접한 영화임은 틀림없으나 "얘도 나오고 얘도 나오고 막 싸우고 그러는데 즐겁지 않냐?" 식의 재미는 부정할 수 없다.
7. 결론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는 완성된 것만으로도 절반의 과제는 해낸 영화다. 엄밀히는 속편 제작을 이끌어낸 〈고질라 대 콩〉의 공이 크지만, 뒤집어 말하면 속편이 제작되어야만 그 영화의 공이 되는 거니까. 그럼에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어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의 후일담 격인 영화의 후일담을 또 만드는 안일함, 그리고 급조된 것이 눈에 선한 소극적인 기획은 아쉽다. 하지만 여전히 기발한 발상과 배신하지 않는 오락성, 괴수들만 존재하는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집념은 유효하다. 고질라 영화 → 킹콩 영화 → 올스타전 → 크로스오버로 할 수 있는 건 다 한 시리즈에서 어떻게든 소재를 찾고 탐구할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완성도뿐만 아니라 시리즈 내 입지에서도 이중적인 지위를 가진다. 윈가드의 스타일이 괴수들에게서 신비주의를 뺏어 프랜차이즈의 생명을 단축시킨 건지, 아니면 괴수들의 행동 제약을 없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 도운 건지 아직까진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이번 영화는 즐길 만했으니, 다음에 나올 딱 한 편은 더 기대해 볼만하다. 속편이 나온다면 적어도 다음 10년을 내다보는 계획은 들고 나오길 바란다. 타이탄의 목적이 생존이듯이 몬스터버스의 최대 과제도 생존과 번영이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밝히자면, 이 영화는 딱 초등학생 시절 생각하던 괴수 영화 같다. 고질라랑 킹콩이랑 손잡고 다 때려 부수고, 고릴라랑 검은 공룡 나오니까 악당은 오랑우탄이랑 하얀 공룡 집어넣는 그런 결의 발상이 보인다. 덕분에 다른 영화들에서 느끼지 못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을 내내 느낄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 이미 사이클을 돌아버린 나이에 9살짜리가 쓴 것 같은 영화를 보고 즐기니 이것이야말로 길티 플레저가 아닐 수 없다. 정작 그 시절에 본 영화는 봉준호의 〈괴물〉과 피터 잭슨의 〈킹콩〉과 같은 희대의 명작들이었는데…. 그 정도의 장인정신과 독창성을 갖춘 괴수 영화를 다시 만날 날이 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총평: 21세기 괴수액션영화의 방향성과 유사 히어로영화의 한계를 동시에 제시하다.
8. 잡설
- "알을 낳기 위해 피를 빠는 녀석들이니 나눠줘야지." 이딴 걸 대사라고…. 딴에는 정신 나간 수의사 트레퍼의 성격 표현과 암컷 곤충형 괴수인 모스라의 등장 암시를 위한 대사 같은데,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멍청하고 덜떨어질 수가 있나.
-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윈가드는 멋있는 그림을 더럽게 못 만드는 감독이다. 이전의 감독들은 액션과 각본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로 한 폭의 그림 같은 컷을 만드는 데는 저마다 일가견이 있었다. 반면 윈가드는 동세와 화려한 카메라 워크에 강점이 있으나 멋있는 구도에는 참 재능이 없다. 〈고질라 대 콩〉에서 콩이 메카 고질라의 아가리를 잡는 순간에는 '이 중요한 장면에 저렇게 멋대가리 없는 구도를….'이라며 경악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딱 한 장면 건졌다. 옥좌에 앉아 있는 스카 킹의 첫 등장 장면이다. 윈가드스럽지 않게 회화적인 질감과 부하 유인원들의 배치로 얻은 입체감이 인상적이다.
- 몬스터버스 최저 제작비라더라. 악조건 속에서도 이 정도로 신나게 치고받는 영화를 완성한 건 뛰어난 성과가 맞다. 그래도 쪼들리면서 찍은 티가 곳곳에 드러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설마 단역 섭외할 돈도 없어서 딸랑 민간인 4명만 돌아다니게 설정한 건 아니겠지?
- 몬스터버스가 십년대계를 내다볼 정도로 이 영화가 성공한다면 좀 더 깊고 어두운 고질라 삼부작을 보고 싶다. 고대의 타이탄은 좀 물리니까 돌연변이나 실험체 괴수 위주로 적을 설정하면 적당할 것 같다. 삼부작 끝에 고질라가 인류에게 완전히 질려버리고 최종보스로 등극하는 전개를 한 번 보고 싶다. 그러니까 가렛 에드워즈는 외도 그만하고 좀 돌아오라고.
- 매디슨 러셀의 퇴장은 그렇다 쳐도, 첸 박사의 역할까지 지아에게 몰아준 건 의외였다. 원래도 별로 중국색이랄 건 없는 시리즈였는데 이젠 아예 디커플링을 시도하는 걸까. 〈콩: 스컬 아일랜드〉에서 레전더리 괴수 영화의 적폐인 경첨을 단역으로 돌리고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도 중국 문화의 신비주의만 차용한 수준이라 중국 눈치 보는 장르임을 감안하면 괜찮았는데 말이다. 하기야 모스라의 친구는 섬 원주민의 역할이 맞으니 도리어 순리에 따른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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