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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쟁 2부 7-9,txt

Neb(116.123) 2014.02.27 23:4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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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 40년 공무원 경력동안 종이 쪼가리가 나를 이토록 괴롭힌 것은 이번이 처음일 거다.”


“제 8년 재정관보 경력동안 제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날은 하루도 없었을 겁니다.”


플래튼은 재정관보의 말을 듣고 난 뒤 그를 한차례 노려보고는, 방금 그가 가져다준 서류들 중 맨 아래에 깔려있는 한 장을 손으로 꺼내 공중에서 흔들었다.


“니는 이걸 보고도 그런 개소리가 나오냐?”


보좌관보는 자신 앞에서 팔랑거리는 붉은 잉크로 도배되다시피 한 결산보고를 봤지만 꿋꿋이 계속 말했다.


“그거랑 제가 8년 동안 매일 똑같은 소리를 들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플래튼은 한숨을 쉰 뒤 그가 8년 동안 매일 했던 후회를 다시 했다. 역시 그냥 일은 좀 못하더라도 혀가 달달한 놈으로 뽑았어야 했어.


“됐다, 내가 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용무 끝났으면 얼른 꺼져봐라.”


그가 휘휘 손을 휘두르며 그렇게 말하자 재정관보가 퇴근할 생각에 화색을 띄며 얼른 방 밖으로 달아났다.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그 등짝을 바라보던 플래튼은 서류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시뻘건 숫자들이 그를 반기며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어서와! 서던과의 전쟁은 처음이지?’ “그래 처음이다, 이 개새끼야.”


업무차 외국에 나가있던 해군사령관이 전쟁 소식을 듣고 달려와 왕궁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우린 이제 다 뒈진 겁니다!’ 라고 절규했을 때까지만 해도 플래튼은 그가 너무 이 전쟁을 과장해 생각한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서던 제도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전쟁이 선포되자마자 얼마 있지도 않던 투자자금이 전부 우르르 타국으로 도망갔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 정도야 사소한 국경 분쟁 때에도 종종 겪었던 일이기도 하고 어차피 오지에 쳐박힌 에렌델의 투자시장은 자그마했으니까. 


그런데 전 세계의 대양에 흩어져 있던 서던 제도의 모든 함선들이 에렌델 배 한정 사략선으로 돌변해 온 바다의 에렌델 상선들을 싸그리 털기 시작하자 에렌델의 시민들은 적군이 근처에 오기도 전에 죄다 굶어죽을 위기에 처했다. 중프리깃 이하 함선들을 전부 내보내고, 몇 척 없는 전열함까지도 죄다 내보내도 부족해서 대형 상선과 여객선까지 징발해 과무장시켜 무역로 보호에 투입하자 그제서야 국민들이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을 수준이 됐다. 


하지만 국가는 밥만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식료품을 제외한 모든 수입품에 무시무시한 공급충격이 들이닥쳤고 그것은 그대로 거대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져 국가경제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접경국과의 육지 무역로를 개척해 근근히 버티고는 있었으나, 바로 그 접경국들조차 전쟁 특수를 조금이라도 더 누리기 위해 관세를 신나게 올려대는 꼬라지를 보면 이 임시방편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뇌가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된 플래튼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이제 긍정적인 측면을 생각해 스트레스를 줄이기로 했다.


그래도 그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먼저 상대는 이 전쟁을 별로 오래 끌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바다의 깡패로 군림하며 식민지를 신나게 털어먹어 말도 안 되는 부를 축적한 그들이 국가총력전으로 전쟁을 끌고 가서 에렌델의 주요 교역국에 돈을 뿌려대 곡물 가격을 폭등시켰으면 지금 자신은 빵 대신 나무껍질을 뜯어먹고 살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닥 큰 도움이 안 될 통치 초보 여왕님이 여기에 없다는 것이다. 아직 부상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엘사가 이 보고서를 봤으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그의 근심이나 더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다 그녀에게 생각이 닿은 플레튼은 그가 봤던 엘사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에렌델의 여왕이 텅 빈 항구에서 작고 꾀죄죄한 상선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전쟁을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던 플래튼은 너무 죄송스러워 그녀를 도저히 똑바로 볼 수가 없었지만, 그녀가 어떤 표정을 했을지는 능히 상상이 갔다. 그러자 플래튼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기 시작했고 그의 정신상태는 거의 미칠 지경에 다다랐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외무관이 들어왔다.


“여기서 뭐하시는 겁네까?”


“니 머가리에는 노크란 단어도 없냐?”


플레튼은 외무관을 탐탁찮게 쳐다보다가 서류와 딥펜을 손으로 들어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리고 눈깔도 삔 거냐? 종이랑 펜으로 뭘 하겠냐. 일하는 거지.”


“흐허, 저는 ‘여기서’ 뭐 하시냐고 물은 겁네다. 섭정이신 분이 뭣 때문에 널찍하고 깔쌈한 국왕 집무실 대신 구질구질하게 이 좁아터진 재정관실에서 일을 합네까?”


“난 어디까지나 임시 섭정이다, 이놈아. 지금 에렌델에는 엄연히 여왕이 있는데 그런 데 가서 뭐하냐? 그리고 난 역시 여기가 편하다. 거기는 공기가 안 좋아. 나도 나이가 있는데 건강 생각을 해야지.”


외무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흐허, 하고 짧게 숨을 내뱉고는, 손에 든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그것을 플래튼 쪽으로 쭉 밀며 말했다.


“정보부 애들이 보낸 서류입네다.”


“그걸 왜 니가 갖고 오냐?”


“애들이 이거 들고 복도에서 비 맞은 치와와마냥 발발발발 떨고 있길래 제가 마침 섭정님께 드릴 말도 있고 해서 가져다주겠다고 했습네다.”


임시 섭정은 그 말을 듣자 보고서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풍겨져 나오는 것 느낌이 들었다. 갖다 주는 것부터 망설일 정도라면 대체 어떤 무시무시한 비극을 품고 있다는 것일까. 그는 이 보고서가 빨간 글씨로 도배된 재정보고보다는 덜 암울한 것이기를 간절히 빌며 시선을 책상으로 향해 천천히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첫 페이지부터 그의 희망을 짓밟는 내용들로 가득했고, 종이를 한 장씩 넘길수록 그의 얼굴도 점점 더 어두워졌다. 마침내 모든 페이지를 다 읽은 플래튼이 시선을 들어 올리자, 눈에 들어온 외무관이 입을 열어 단정하듯 말했다.


“여왕은 에렌델의, 아니 전 세계의 재앙입네다. 하루라도 빨리 에렌델에서 치워내야 합네다.”


플래튼은 그의 말을 도저히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조도 할 수 없었던 그는 대신 다른 방향으로 그를 공격하기로 했다.


“너도 이미 알고는 있겠지만, 네가 일신의 영달에만 급급해 그딴 개소리를 하는 인간이었으면 넌 진작에 다른 쓰레기들처럼 시멘트통에 담가졌을 거다. 나는 네가 국가를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알지만, 계속 그렇게 짖어댄다면 내 인내심이 언제 바닥날지 모르겠다.” 


“제가 국가를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걸 아시는 분이 지금 뭐 하시는 겁네까? 마침 좋은 기회도 왔습네다. 서던쪽 영주파 애덜이 우리 쪽에 접촉해서 전하기를, 우리가 여왕만 넴겨주면 제법 괜찮은 조건으로 정전협상을 할 수 있다고 그랬습네다.”


“마법 뿅뿅 쏘고 다니는 사람을 우리가 무슨 수로 잡냐.”


“그건 우리가 수락만 하면 저쪽에서 방법을 마련해 주겠다고 그랬습네다.”


“그래도 그녀는 국왕이야. 신하가 국왕을 적국에 팔아넘긴다고?”


“흐허, 왕권신수설을 들멕이시기엔 한 100년은 늦으신 것 같은데 말입네다.”


그의 말이 맞다. 에렌델에 있어서 최상의 시나리오는 전쟁의 빌미가 된 왕족 자매를 폐위시킨 후 체포해 서던 제도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정전협상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엘사와 안나, 그 불쌍한 자매는 거의 평생을 갇혀 살던 궁에서 나올 수 있게 된지 겨우 네 달 만에 서던 제도 수도 광장 중앙으로 질질 끌려가 교수형이나 다른 비슷한 방법으로 처형당할 것이다. 아니,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엘사는 더 끔찍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법에 미쳐 있는 인간들이 인체실험을 주저할 리 있나. 


갓난아기일 때부터 이렇게 성장하기까지를 직접 지켜봤던 그녀들을 내 손으로 그치들에게 팔아넘긴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패자에게 잔인한 법이니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다. 광장에서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사지를 버둥거리며 죽어가는 안나와 비명 지르며 산채로 해부당하는 엘사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야 한다.


“…서던 제도 인간들은 신뢰할 수가 없어. 우리가 그놈들한테 뒤통수 얻어맞은 게 몇 번이냐? 여왕을 체포했는데 저쪽에서 말을 바꿔버리면 그때는 무슨 수로 수습할 거냐?”


“영주파도 자기네 군함들이랑 병사들이 아깝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협상테이블로 나오려 할 겝니다. 이해가 일치하는데 못 믿을 이유가 없습네다.”


“그건 모를 일이지. 일단 여왕을 체포하고 나면 우리에게는 전쟁을 이길 어떤 방법도 없으니 분명 말을 바꿀 거다.”


“그랬다가 우리가 미친척하고 도로 풀어줘 버리면 지들까지 좆될 수도 있는데 뭐 하러 그런답니까?”


“체포했다가 풀어주면 여왕님께서 정말 기껍게도 에렌델에 협력하시겠구나, 이 멍청아. 그게 안 되니까-”  “말꼬리는 그만 잡으십쇼.”


플래튼은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그의 말이 맞다.


“플래튼, 당신이 엘사와 안나 자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저도 압네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쇼. 저라고 그녀들이 싫겠습네까? 엘사 여왕은 아름답고, 안나 공주는 사랑스럽습네다. 에렌델의 전 국민이 그걸 압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두 명의 목숨이 에렌델 전체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네다.”


외무관은 필사적으로 역설했다. 흥분한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들과 에렌델을 모두 지킬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저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걸 해낼 겁네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불확실합네다. 서던 제도의 전쟁선포는 흔히 보여왔던 단순한 개지랄이 아니라 주판알을 충분히 튕겨본 뒤에 한 것이었고, 이제 그들은 제대로 된 마법사까지 확보했습네다. 이대로 가다간 단순한 조건부 항복이 아니라 국가가 없어질 지도 모를 노릇입네다. 제가 국가를 생각한다는 걸 아신다 하셨습네까? 정말로 제 심정을 아신다면, 제발, 제발 옳은 선택을 해주십쇼.”


플래튼은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침묵했다. 이번에도 또 다시 그의 말이 맞다. 참으로 구구절절이 맞다. 그는 정말로 그의 여왕과 공주를 좋아하는 한 국민이었지만 그 이전에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고, 그만큼 그의 말투는 처절했다. 함께 일을 해온 세월만큼이나 외무관을 잘 아는 플래튼은 그가 얼마나 괴로운 심정으로 이 말을 꺼냈을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그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플래튼은 그녀들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뜨거운 애국심에 불타 연애도 결혼도 잊은 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던 청년기를 지나서, 냉엄한 현실을 깨닫고 세상은 원래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자위하며 전형적인 보신주의적 관료가 되어가는 중년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는 이성을 신봉했고 비논리로 가득 찬 애새끼라면 치를 떠는 페도포비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국왕은 그를 의례적 만찬이 아닌 가족의 저녁식사에 그를 초청했다. 국왕에게 한창 끔찍할 나이의 딸이 둘이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필사적으로 거절하려 했으나, 그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국왕은 그를 강제로 식탁으로 끌고 와 딸들과 대면시켰다. 그리고 그날로 그의 유아공포증은 사라졌다. 그는 갖은 핑계를 대며 왕녀들이 있는 내실을 들락거렸고, 그럴수록 점점 더 그녀들에게 빠져들었다. 평생을 가족 없이 일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그에게 자매는 자신의 또 다른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엘사의 마법이 동생을 다치게 한 사건이 있은 뒤, 왕궁의 문은 폐쇄되었고 최소한도의 인원만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핵심관료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비록 궁에 들어갈 기회가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국왕은 위험함을 이유로 내세워 그를 내실로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늦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의 전공분야였던 경제 외의 분야들인 정치, 문화, 사회, 철학, 논리학과 자연과학, 대수학, 기하학, 문학까지도 닥치는 대로 익힌 그는 전보다 수백 배는 더 매끄러워진 언변으로 국왕에게 자매는 여러 가지를 익히게 해줄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그는 다시 자매와 만났고, 그녀들의 성장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십수 년 동안 지켜봤다. 그녀들은 그의 딸들이다. 맙소사,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딸을 가서 죽으라고 팔아넘기겠는가. 그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확실한 방법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미안하지만 기각이다.”


외무관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분노를 담은 거친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문이 세게 닫히는 쾅 소리와 함께 재정관실에 정적이 찾아들었고, 동시에 깊은 상념도 그의 머리로 찾아들었다.



온 사방이 그녀들의 적뿐이다. 이대로라면 엘사도, 안나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녀들은 좀 더 성장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엘사, 그녀는 강해져야 한다. 불편한 선상생활을 겪어야 하는 데에다 위험하기까지 한 작전을 여왕에게 승인토록 설득했던 것에는 그녀가 그 모든 과정을 겪고 난 뒤 강해지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도 섞여 있었다. 여러 자잘한 전투를 겪다 보면 필시 사람을 해치지 않고서는 안 될 상황이 올 수밖에 없고, 그것은 그녀의 마음을 담금질할 것이다. 만약 그녀가 끝내 사람을 해치치 못한다면 자신이라도 그 담금질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안나가 필요할 것이다. 감정적인 위로를 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의 정치적 동료가 되어 자매가 함께 뭉쳐 그녀들의 앞을 가로막을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선 뒤 안나의 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8.



이게 정말 그녀의 모국어가, 아니 인간의 언어가 맞기는 한 걸까? 


문자는 그녀가 익히 보아 왔던 그것들이로되, 그것이 모여 이루는 단어는 어느 별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외계어로다. 머리를 쥐어짜던 안나는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용어사전을 뒤적거렸다. 곧 그 단어를 찾아낸 그녀는 그것이 지닌 뜻의 단순성을 알고는 책을 집어던질 뻔했다. 아니, 뭐 하러 쉬운 단어를 냅두고 이런 똥덩어리를 쓰는 거야? 


그래도 그나마 이렇게 뜻을 모른다는 걸 알 수나 있는 경우나, 용어사전을 뒤적거려서 찾아낼 수 있는 경우는 정말 다행이다. 평소 쓰이는 흔한 단어가 이런 책에 있다는 이유로 당최 어쩌다 그런 뜻이 됐는지 알 수 없는 의미로 둔갑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고, 외국어 사전이나 고어사전까지 뒤적거리고 나서야 찾을 수 있었던 단어들도 있었다. 이걸 쓴 인간들은 뭔가 정신병 같은 걸 앓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 ‘조금이라도 더 똑똑해 보이지 못해 안달이 난 병’ 같은, 그런 비슷한 병 말이다. 음, 나도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을 몇 명 알지! 


안나는 두 달 전쯤에 있었던 주 아렌델 대사 초청 만찬을 떠올렸다. 


그런 자리를 싫어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어쨌건 그녀는 왕국의 장성한 공주였고 중요한 행사에 얼굴을 내밀 의무가 있었다. 닫혔던 성문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전에는 그토록 동경했던 파티와 각종 행사들의 실체를 알게 된 안나는 만찬에 참석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으나 엄한 표정의 카이에게 질질 끌려가 결국 자리에 앉혀졌다. 그리고  지옥 같은 인고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그,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뭐시기 국의 대사가 지적 유희랍시고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들을 나불대자 그것을 흥미롭게 듣던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이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저게 왜 그렇게 웃기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분위기도 못 읽는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이기는 싫었던 안나는 그들을 따라 어색하게 웃으며 ‘아하하, 재밌네요.’ ‘와, 정말요?’ ‘확실히 그렇네요.’ 따위의 말들을 내뱉으며 괴로워했다. 


그런데 그 망할 대사가 갑자기 자신을 보며 ‘공주님께서는 !#@%가 %$@#^$%$의 (&#@#을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고견을 들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주변의 시선들이 안나를 향해 모여들고,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했다. ‘어, 저, 그게, 아, 그게 말이죠, 하하하하’ 안나는 긴장으로 혀가 굳어 말을 더듬으며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회장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다 상석에 시선이 닿자, 거기에는 호호호 하는 가식적인 웃음소리를 내면서 그들과 똑같은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그녀의 언니 엘사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공부를 옆으로 치워놓고 다시 잡생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안나는 회상 중에 언니의 모습이 나타나자 양손바닥으로 자기 볼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지금 그녀의 언니는 바다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비유가 아닌, 진짜 전쟁 말이다. 자신은 마법도, 군사지휘도, 전투도 할 수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기초지식과 언변을 길러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언니를 도와야 한다. 그녀는 정신줄을 빳빳하게 하기 위해서 냉수 한 컵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카이-! 여기 얼음 동동 띄운 물 좀 부탁할게요-!”


그러자 문이 열렸고 그녀가 십수 년 동안 지겹게도 봐왔던 익숙한 얼굴의 집사 카이...가 아니라 낮선 얼굴의 남자가 들어와 그녀에게 말했다. 


“얼마나 가져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 맞다. 카이는 엘사랑 함께 갔었지. 그의 태도는 나무랄 곳 없이 정중했으며 예법도 완벽한데다 얼굴까지 잘생겼지만 별 생각 없이 카이가 들어오기를 기대했던 안나는 왠지 실망감이 들었다. 


“아, 한 컵만 가져다주시면 되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그녀는 임시 집사가 나간 뒤 도로 닫힌 문을 바라보며 카이를 생각했다. 안나의 평생을 함께 한 그다. 그가 떠난 지 이제 겨우 사흘째건만, 그녀는 후덕한 인상을 지닌 카이의 얼굴과 푸짐한 몸, 그리고 그 특유의 점잔 빼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카이는 내 담당인데, 왜 언니를 따라서 가버렸을까? 그는 험한 선상생활과 전투의 위험을 이유로 평소 엘사를 돕던 겔다 대신 자신이 그녀의 시중을 들겠다고 자처했었지만 안나에게는 그 이유가 별로 타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엘사는 무적이잖아. 그래서 카이와 그를 말리지 않은 엘사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들이 떠나던 날, 엘사가 배 위로 올라선 뒤 카이는 그녀를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도로 내려와 주머니에서 고급스러워 보이는 골드 닙 딥펜을 꺼내 그녀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었다. ‘안나 공주님, 이걸 드릴 테니 제가 다녀오는 동안 공부를-’


아! 공부! 공부! 그녀는 자꾸 오만가지 잡생각을 끊임없이 뽑아내는 자기 머리를 저주하며 카이가 준 딥펜을 집어 들고 잉크통으로 가져가 살짝 담근 뒤, 노트를 펼쳐 연한 금촉이 상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필기하기 시작했다. 비싼 금촉을 단 펜은 확실히 필기감도 좋은 데다 글씨도 예쁘게 써졌고, 그녀는 그 사실에 약간의 즐거움을 느끼며 노트 위에 글씨를 휘갈기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똑똑 하는 청량한 노크소리가 안나의 귓가를 때리자 필기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갑작스런 소음에 화들짝 놀라 손에 힘을 빡 주고 말았고, 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닙이 우그러졌다. 그 감촉에 다시 한번 놀란 그녀는 입을 열어 “우아아아아-” 하는 침음을 내며 서글픈 눈으로 우그러진 금촉을 쳐다보았다. 그러는 동안 다시 문에서 똑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고,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냥 들어와요!”


곧바로 문이 벌컥 열리며 심각한 표정을 한 플래튼이 나타났다. 의외의 인물의 의외의 방문에 또 다시 깜짝 놀란 안나는 눈을 경악하는 토끼의 그것처럼 동그랗게 뜨고 이 바쁜 사람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을까를 생각하며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그런 안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래튼은 방 안으로 들어온 뒤 문을 천천히 닫고는, 성큼성큼 걸어 책상 앞 의자에 앉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에 서서 그녀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자 안나는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어, 저, 소리쳐서 죄송해요….”


플래튼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손으로 품 안을 뒤적거리다 곱게 접혀진 한 장의 종이를 예쁘게 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안나의 눈이 종이 위를 빠르게 훑자 이런 단어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임명장’, ‘외무관 보좌’,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안나’. 잠깐 동안 패닉에 빠진 그녀는 십수 초 후가 되어서야 정신을 되찾고 황당하다는 투로 플래튼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뭐죠?”


“임명장입니다.”


“아니, 제가 그걸 몰라서 그렇게 물어본 건 아니고요, 왜 여기에 제 이름이 적혀있죠?”


“외무관 보좌 자리는 두 달 전에 전임자가 개인사정으로 퇴직한 이후로 계속 공석이었고, 최근 들어 늘어나는 업무량을 고려하면 누군가를 이 자리에 앉혀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안나 공주님께서 이 역할에 적격이시라 생각합니다.”


안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잠깐, 뭐라고요? 그래서 지금 저를 외무관보로 만든 거예요? 본인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어차피 물어봤으면 거절하셨을 것 아닙니까.”


“당연하죠! 맙소사, 작위를 주는 것도 아니라 실무를 시키겠다고요? 저한테요? 저는 이제 열여덟 살인데요?”


“중세시대에는 십대 중반 왕족 꼬마가 전권대사로 임명된 적도 있는데 뭐 어떻습니까.”


“그건 그거고요! 이건 이거에요! 애초에 아는 게 없는데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저는 공주님 키가 제 허리춤에 오기도 전부터 내실을 들락거리면서 여왕님과 공주님께 왕족이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가르쳤었습니다. 그때 배우셨을 지식을 활용하신다면 외무관 보좌 정도는 하실 수 있습니다.”


“어, 그게, 플래튼 아저씨도 잘 아시겠지만요, 하하, 저는 별로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잖아요?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지는 이제 한 달 남짓 됐다고요. 게다가 경험도 없어요.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외무관보를 할 수는 없어요!”


“괜찮습니다. 원래 일은 직접 해보면서 배우는 겁니다.”


안나는 플래튼이 이미 결심을 굳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로서는 그를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여왕이 궁전 안에 있을 때에도 사실상 정계를 틀어쥐고 있었던 그다. 여왕이 자리를 비운 뒤 임시 섭정으로서 국가를 대리통치하기까지 하는 그는 사실상 에렌델의 전권을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요 행사에 간간히 얼굴이나 비추던 것이 여태까지 했던 정치활동의 전부인 어린 공주가 무슨 수로 저런 대괴수를 물리치겠는가. 


무슨 방법이 없을까 열심히 잔머리를 굴려대던 안나는 딱히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자 그냥 뻗대보기로 했다.


“싫어요. 안 해요! 아저씨가 뭐라 하든 진짜진짜 절대로 안 할 거예요! 어디 한 번 시켜 봐요. 그날로 왕궁 담 넘어서 가출해버린 다음에 한 1년 정도는 흐읍-,”


플래튼의 얼굴에 어린 시절의 안나가 정말 많이 보았던 바로 그 표정이 나타나자 그녀는 유소년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숨을 삼켰다. 안나의 머릿속에 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 똑바로 드시지 않으면 5분 추가입니다, 공주님. 제가 숙제 꼭 하라고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성장기 내내 플래튼 아저씨는 그녀 최대의 적이었으며 공포의 대상이었다. 저런 표정을 보면 그녀는 닥치지 않을 수 없다.


“저도 절대 공주님을 괴롭히고 싶어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상황이 매우 급박하고, 공주님은 좀 더 빨리 제대로 된 정치인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빨리 크는 데에는 그 바닥에서 굴러보는 게 최고죠. 물론 가면 고생 깨나 하실 겁니다. 하지만 거기서 고생하신 만큼 더 빨리 여왕님을 도울 수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끄덕끄덕


“내일부터 공주님은 외무관 보좌입니다. 외무관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뒀으니 아침에 외무부로 출근해서 앞으로 일주일간 외무관에게 직접 보좌업무인계를 받으신 뒤에 실무를 시작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끄덕끄덕


“전부 알아들으셨으면 저는 가보겠습니다.”


끄덕끄덕


그는 왔던 모양새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문 앞에 선 뒤, 문고리를 잡고 문을 벌컥 열고는, 방 밖으로 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안나를 쳐다보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9.



“다음은 새로운 주요 식료품 수입 경로 개발에 관한 안건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아국의 거의 모든 선박이 볼크스 반도 근해를 경유하는 버번 공화국과의 해상무역로를 통한 식료품 수입과 선박 보호에 쓰이고 있는 실정인데, 그로 인해 이때까지 해상 경로를 통해 수입되던  다른 많은 품목들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석탄과 모직물의 부족이 심각한데, 이는 본래 서던 제도와 코로나 왕국으로부터의 수입에 많은 비율을 의지하던 석탄의 공급량 저하로 인해 국내 방직공장의 가동률이-”


상석에 편한 자세로 앉아 나른한 표정으로 재무관보의 발표를 듣던 플래튼은 슬쩍 눈알을 왼쪽으로 돌려 외무관 옆에 있는 신임 외무관보를 훔쳐보았다. 업무인수 기간을 일주일밖에 받지 못하는 폭거를 당한 소녀 보좌관은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준비해온 자료들을 가슴에 꽉 안은 채 긴장으로 바짝 얼어붙어있었다. 


그가 눈알을 좀 더 왼쪽으로 돌리자, 마라톤 풀코스를 두 바퀴 쯤 뛰고 왔나 싶을 정도로 피로한 얼굴의 외무관이 보였다. 혼자 일하는 게 더 편하다고 있던 보좌관도 걷어차던 외무관은, 왕족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빨간머리 철부지 소녀가 인계를 해줄 전임자조차 없는 보좌 자리에 안착하는 걸 봤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것도 하필이면 자기가 적국에 팔아넘겨 죽이려 한 공주가 왔다. 플래튼은 안나가 임명장을 들고 외무관을 찾아갔을 때 그가 지었을 표정을 상상하자 왠지 복수를 제대로 한 것 같은 느낌에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정치는 이렇게 하는 거지.


“-따라서 저는 녹해를 통과하는 해상 경로와 리에투라니아 연합왕국을 거치는 육상 경로를 합친 새로운 안전한 무역로를 통해 버번 공화국으로부터 곡물 등의 식료품을 수입하고, 볼크스 반도 근해를 경유하는 기존의 해상무역로와 버번 공화국을 지나는 육로를 통해 석탄 등을 포함하는 과거 해상 경로를 통한 수입에 의지하던 품목들을 들여올 것을 제안합니다. 이상의 내용에 대한 질문은 안건 전체에 대한 발표가 다 끝난 뒤에 받도록 하겠으며, 이 다음은 외무부에서 구체적 협상안과 돌발 상황에 대한 대응을 알려드릴 겁니다.”


재무관보가 발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자 드디어 외무부가 나설 차례가 되었다. 외무관이 안나에게 무언가를 속삭이자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지고, 그 뒤 외무관이 안나에게서 자료를 건네받아 앞으로 나왔다. 그 광경을 보던 플래튼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저러면 안 되는데. 키우려면 굴려야 하는데. 그는 외무관을 향해 말했다.


“우리 외무관 나이도 있고 요즘 일도 많아서 피곤할 텐데, 새로 오신 외무관보님 발표하시는 것 좀 들어보자.”


그 말을 들은 외무관의 표정이 팍 구겨지고 신임 보좌의 얼굴이 자기 언니보다도 훨씬 더 하얗게 질렸다.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간 외무관이 자료를 도로 안나에게 넘기고, 그걸 받은 안나가 뻣뻣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자리에 선 그녀는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읏-흠” 하는 헛기침과 함께 침착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발표를 시작했다.



“머, 먼저, 리에투라니아 연합왕국과의 관세 협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연합왕국은 서던 제도 측의 전쟁선포 이후 관세를 두 차례 높였으며, 이로 인한 전쟁선포 이전 대비 손실률은-”


그녀의 발표는 나쁘지 않았다. 앞서 여러 차례 연습한 듯 말에 막힘이 별로 없었고, 그래프와 도표를 짚어가는 동작에도 망설임이 없었으며, 간간히 청중을 둘러보는 눈에는 약간의 자신감마저 엿보였다. 플래튼은 그녀가 외향적인 성격을 지닌 만큼 이런 발표에는 강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그의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발표가 끝은 아니다. 진짜배기는 그 뒤에 있다. 그것을 아는 안나의 목소리에도 점점 더 긴장감이 더해졌다.


“-그러므로 우리 측에서 코로나에 연합왕국에 대한 철광석 수출량 감축을 요청한 뒤, 아국에서 연합왕국에 수출할 철광석의 가격을 높이겠다는 경고를 전해 압박을 준다면 앞으로 있을 협상 때 관세 인하에 있어서 충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이상입니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재무관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섰다. 그리고 회의장 안에 침묵이 흘렀다. 대략 1분쯤 됬을까 하는 시간이 지난 뒤, 이 상황을 의아하게 여긴 재무관보가 고개를 돌려 안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안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입을 열어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다다음은 지, 지, 질문 시간 입니, 다.”



플래튼은 기대에 찬 시선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외무관이 살기어린 눈빛을 사방에 쏴대는 장면과 왕족에게 미움을 사기도, 외무관에게 찍혀 고생하기도 싫었던 관료들이 우물쭈물 망설이며 단체로 입을 다물고 외무관과 안나 공주를 번갈아 훔쳐보는 장관이었다. 순간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그들의 입장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던 플래튼은 그냥 자기가 악역을 맡기로 했다. 그가 생각했듯이, 키우려면 굴려야 한다.


“외무관 보좌, 제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불쌍한 안나는 그 말을 듣자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만약 서던 제도에서 해상 향신료 무역로의 차단을 빌미로 잡고 리먼 제국을 조종해 그쪽을 공격할 수 있다는 외교적 압박을 코로나 왕국에 넣어 아국에 대한 수출을 차단할 것을 요구해온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책이 있는지 묻고 싶군요.”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 된 외무관보에게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다. 안나는 그런 질문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안 되는 머리를 데굴데굴 굴려 봤자 답이 나올 리 없었고, 그녀는 전에 뽑아두었던 예상 질문 리스트에 희망을 걸고 손에 든 자료들을 필사적으로 뒤적거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딴 해괴한 상황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그녀는 도움을 바라는 표정으로 외무관을 보았다. 그는 발광하듯 손을 휘두르며 그녀에게 뭔가를 알려주려 노력했지만 안나로서는 그게 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곧 그녀의 얼굴이 토마토만큼이나 시뻘개졌고, 회의장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자살 충동을 일으킬 정도의 거대한 수치심 속에서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목소리로 시인하고 말았다.



“…모, 모르겠습니다….”





다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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