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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장편] 아렌델행 횡단열차 (8)

서리나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6.02 21:18:52
조회 992 추천 41 댓글 83
														



[통합링크] 아렌델행 횡단열차





아렌델행 횡단열차 (8) ebook으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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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델행 횡단열차


(8)





15-2. 카산드라 / 코로나(Corona)


“당신 동생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군요.”



무슨 의미냐며 엘사는 눈썹을 치켜뜨고 그녀를 돌아본다.



“이렇게 동생을 생각하는 언니라니. 엘사, 당신 그림, 동생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그 그림은 당신이 택한 게 결코 방종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니까.”



생각을 정리하듯 엘사의 눈길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내킬 때 저도 그림 한 번 구경하게 해 줘요. 얼핏 보니까 정말 실제 로윰 역처럼 실감나게 잘 그렸던데. 비록 아렌델을 떠날 수 없을지언정,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당신 동생은 이미 로윰을 한 번 와 본 거나 다름없을 거예요.”

“고마워요, 카산드라. 정말로.”



새벽빛처럼 부연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다. 그 미소에서 카산드라가 찾은 것은 안도감이었다. 하늘을 걷는 뭉게구름 같은 안도감. 힘든 걸음을 멈추고 쉼터에 잠시 몸을 뉘였을 때 이는 편안함.



“신문 하나 사세요.”



땟물이 줄줄 흐르는 신문팔이 소년이 둘 앞으로 다가와 신문을 불쑥 들이민다. 어제 자 신문인데다 눅눅하고 온통 구겨져 있어 상태가 심히 좋지 않다. 카산드라는 팔짱을 끼고 그를 흘기다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물끄러미 신문을 바라보던 엘사는 품에서 동전을 두어 닢 꺼내 건넨다.



“카산드라.”



엘사가 조심스럽게 짧은 침묵을 먼저 깨트린다. 카산드라는 계단 아래, 눈높이와 비슷한 지점에 있는 가스등을 멍하니 바라보던 참이었다. 가스등 안에는 간밤에 불타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방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찢어진 날개가 검게 그을어 있고 날개 분진 조각이 램프에 지저분하게 눌어붙어 있다. 엘사는 받아든 신문을 잠시 들여다보다 곱게 접어 가방에 넣었다. 한참을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입술이 기어코 미뤄 뒀던 질문을 꺼낸다.



“아까 그 오르골은 뭐였어요?”



맛있는 걸 먹자며 꼬드길 적부터 예상한 물음이었지만 마음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출렁 내려앉은 심장을 부여잡곤 카산드라는 머릿속으로 단어를 셈했다. 비눗방울처럼 떠다니는 단어를 향해 몇 번이고 손을 뻗는다. 나비를 좇는 아이처럼 잡히질 않는 비눗방울에게로 헛손질하길 여러 번. 뜬구름처럼 하늘을 떠다니던 비눗방울은 손아귀에서 자꾸만 흘러나가고, 잡았다고 생각한 낱말은 그만 톡 터져버린다.



“엄마.......”



평범한 사람들에겐 집처럼 편안해야 할 그 단어가 눈앞에서 펑, 하고 터진다. 가슴에 뚫린 구멍과 심장을 헤집는 허무는 그 비눗방울의 잔해였던 걸까. 그녀가 찾고 있었던 단어는 거품처럼 오묘한 환각일지도 몰랐다.



“엄마가 제게 선물해줬던 오르골이랑 똑같은 선율을 품고 있었어요.”



평생을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살아왔던 낱말, 엄마. 눈을 꾹 감고 카산드라는 매캐한 숨을 들이켰다.



“제 친엄마는 젊음과 영생을 좇아 한평생을 살아온 마녀였거든요. 라푼젤을 납치한 건 라푼젤이 선드랍이 가진 치유의 힘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고요.”



말을 이을수록 깔끄러워지는 숨결을 버티기가 힘들어 카산드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에 드리운다.



“그 오르골은 제가 항상 엄마에게 되감아 달라고 부탁하던 것이었어요.”



안개가 눈앞을 축축하게 덮는다.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카산드라는 입술을 꾹 짓이겼다. 오래된 이야기가 폐부를 찌른다. 눈물이 흐를까 눈을 차마 깜박일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흐물거리던 안개는 기어코 눈두덩 아래로 넘치고 말았다.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오르골을 감아 주는 그 손길만큼은 오직 나만을 향한 것이니까. 적어도 오르골이 돌아가는 동안만큼은.......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았거든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카산드라는 고개를 돌리고 꾸역꾸역 훔쳤다. 얼굴에 열이 바짝 오른다. 부끄럽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세상은 가까이 있건만 역설적이게도 세상 속에서 카산드라는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찢어진 나방의 날개가 문득 어른거린다.



세상에서 그녀를 밀어낸 건 매서운 겨울이었다. 카산드라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냉혹한 계절 속에서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폭풍이 살갗을 할퀴고 눈꽃 파편에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살얼음에 발바닥이 베이고 돌풍이 지르는 비명에 피가 식는다. 얼음 호수에 비친 제 모습은 창백하고 푸르뎅뎅하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아직도 라푼젤을 미워해요?”



엄마, 그 따스한 단어가 잔인한 현실을 일깨웠다, 그녀가 걷고 있는 건 화사한 들이나 아름다운 숲이 아닌 혹독한 겨울이었다는 사실을. 볼에 묻은 눈물을 훔치며 카산드라는 마음을 냉정히 가라앉히려 애썼다.



“잘 모르겠어요.”

“어젯밤 당신이 잠꼬대하는 걸 봤어요.”

“어떤.......”



머릿속에 짚이는 바가 있어 카산드라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묵직했던 다리가 아직도 쥐가 난 듯 저릿저릿하다.



“그건 그저 당신의 꿈에 불과하잖아요. 라푼젤이 정말 했던 말이 아니라.”

“아뇨.”



카산드라는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퀸과 폰에 비유한 건, 정말 했던 말이었어요.”



나머지 기억이 현실의 자취인지 미몽의 허상인지 그녀는 이제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세월이 흐르고 몸이 멀어지자 기억이 자꾸만 왜곡되고 편향된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치졸한 자기 방어로 무장한 습관이 자꾸만 생각을 앞선다. 무의식적으로 뒤틀리는 심보를 저조차 믿을 수 없어, 이제 카산드라는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사족을 붙인 건 없구요?”

“무슨 말이에요?”



검지 마디를 입술에 괴고 엘사는 재미난 일이라도 회상하듯 빙긋 웃는다.



“이거 한 번 읽어볼래요?”



하며 엘사는 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 하나를 꺼내 건넸다. 뜻밖에도 그것은 카산드라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수배령 포스터였다. 낯이 화끈거려 카산드라는 차마 그 전단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라푼젤, 제발, 또 무슨 엉뚱한 짓을 벌인 거야.



“부끄러워하지 말고 얼른요.”



눈꺼풀을 들썩여 그 틈으로 카산드라는 겨우 포스터를 읽었다. 『Please Only Alive』라는 활자가 굵게 찍힌 오래된 포스터. 비바람에 젖은 끝자락이 꼬깃꼬깃 울어 있고, 모서리가 찢어진 커튼마냥 아무렇게나 헤져 있다. 종이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카산드라는 포스터 맨 하단에 적힌 낙서를 손끝으로 쓸었다.


‘이걸 보면 코로나에 한 번만 들러줘.’


라푼젤의 부드러운 필체.


‘캐스, 네가 없으니 티격태격할 사람이 없어 심심하네.’


휘갈긴 글씨는 유진의 것.


‘내 딸아, 네가 무척 보고 싶구나.’


코로나의 전 경비대장이었던 양아버지가 쓴 글도 보인다. 밤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많은 문구들을 헤자니 또다시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받는다. 소매를 들어 카산드라는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훔쳤다. 모두가 너무 그립다. 그 따스한 품이, 아늑한 집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너무 그립다.



“카산드라, 이들은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당신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고, 이제는 문스톤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



펜을 들어 문구를 새겨 넣는 라푼젤과, 체스판 앞에서 그녀를 비꼬아대던 라푼젤이 겹쳐진다. 감정이란 건 무척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지라, 분명 자신의 것인데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곤 했다. 그 변덕스러움에 카산드라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라푼젤이 한 말은 그럼 뭐예요?”



내뱉은 후에야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에 카산드라는 엘사의 안색을 서둘러 살폈다. 풀잎을 쓰는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웃음이 그녀에게서 물결친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던지라 도리어 당황한 건 질문을 던진 쪽이 되어버린다.



“카산드라, 폰이 체스판 끝까지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카산드라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엇이든, 그보다 더 높은 것이요. 비숍이나 룩이 될 수도, 나이트가 될 수도 있고, 퀸이 될지도 모르죠.”



환풍구에서부터 스며든 순백색 광채에 엘사의 턱선이 부드럽게 빛난다. 순간 제 호흡이 멈춘 줄도 모르고 카산드라는 그녀의 입에 집중하고 있었다.



“힘겨운 난관을 헤치고 그 끝에 도달한 자만이 지위를 쟁취하는 것이죠. 맞아요, 카산드라. 라푼젤은 퀸이지만 당신은 폰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무엇이 될진 오로지 당신에게 달렸겠죠.”

“라푼젤도 그런 의미였을까요?”



제 마음에도 뚜렷한 확신이 섰으면 하는 마음에 카산드라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물론이죠. 라푼젤을 한 번 만나 보지 그래요? 5년간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면서요.”

“제가 무슨 낯으로 라푼젤을 보러 가요.”



얇게 다문 입술 위로 잔잔한 미소가 물든다.



“코로나를 떠나고 5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요. 오히려 퇴보하기만 했다고요. 이런 절 보면 다들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다들 아무 생각 없을 거예요. 당신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다들 반가워할 거예요.”

“저 자신이 스스로 부끄럽단 얘길 하고 싶은 거예요.”

“부끄러울 필요 없어요, 카산드라. 전 당신을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당신이라는 사람에게서 수없는 매력을 엿봤는걸요. 당신의 모든 순간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당신을 이룬 거예요. 카산드라, 의미 없는 시간은 없어요.”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며 곰곰이 되짚어보다 카산드라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제 모든 순간은 그 의미가 0에 가까운걸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카산드라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마지막 와플 조각을 털어 넣는 엘사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다.



“늦은 게 아니라 조금 멀리 돌아간 것뿐이에요. 카산드라, 그런 방황이 당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거예요.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더욱 넓은 곳을 항해한 셈이니까.”



카산드라는 혼탁하게 웃었다. 쓴맛이 아직 입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마치 겪어본 것처럼 말하네요.”



엘사의 얼굴에도 카산드라의 것과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저 역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했었거든요.“

“그럼 지금은 어때요, 삶의 의미를 찾았어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은 거예요? 그게 열차를 탄 이유인가요?”

“아뇨.”



카산드라의 질문 세례에도 엘사는 결코 동요하는 법 없다. 어깨로부터 팔에 이어진 선을 타고 브루니가 작은 발걸음을 옮긴다. 손바닥에 배를 붙이고 앉아 그는 둘을 번갈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회상에 잠겨 그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엘사가 문득 불투명하게 웃는다. 브루니의 자취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카산드라는 문득 그녀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를 발견했다.



“아직도 저는 엉뚱한 곳에서 헛걸음만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아렌델을 떠나 로윰으로 왔던 건 동생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었어요. 동생에게 가업을 물려준 이후에도 저는 동생을 수차례 찾아가 일을 도와주었어요. 하지만 제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누구나 위험에 처하더군요.”

“그래서 당신 집을 떠났어요?”

“그게 동생을 위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입술을 안으로 말고 엘사는 읊조린다.



“하지만 저는 또다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네요.”

“당신도 아직 저처럼 삶의 어느 지점에서 헤매고 있다는 거네요?”

“글쎄요. 하지만 곧 방향을 찾을 거예요. 과거에도 그랬던 적 있었고, 이젠 방법을 아니까.”



검지 마디를 입술에 괴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다 엘사는 문득 카산드라와 눈을 마주하며 묻는다. 소매가 흘러내리며 은팔찌가 황혼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인다.



“카산드라, 우리 삶은 책과 같다고 생각해요. 책 읽는 거 좋아해요?”



느닷없이 꽂히는 섬광에 눈을 찡그리며 카산드라는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몸을 쓰는 편이 더 낫긴 했지만 독서를 영 싫어하는 쪽은 아니었다.



“책은 마지막 장까지 와서야 완전한 의미를 남기고, 독자들은 그 여운을 곱씹으며 되새기죠. 우리 삶도 그래요. 불을 좇는 나방처럼, 허망한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것 같다가도, 마침내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되살아나는 거예요.”



문득 이른 날갯짓을 하는 나방이 그녀 주위를 맴도는 것만 같다. 환풍구에서 쏟아지는 황혼이 엘사를 붉게 물들인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카산드라는 장밋빛 소녀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품은 산들바람이 뺨을 간질인다. 그것은 먹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광명 같은 찬란한 초월의 빛이었다.



초연히 웃는 엘사를 응시하다 카산드라는 문득 은팔찌로 시선을 옮겼다. 팔의 움직임에 맞춰 붉은 음영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구가 차츰 또렷해진다.



『 Anna. my sister....... 』



손목을 감싼 문구가 문득 낡은 기억 하나를 깨운다. 손을 벌려 그 기억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꽉 붙잡곤,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찢어진 실마리를 살펴보았다. 문구에 새겨진 두 음절 이름이 뇌리에 또렷이 박힌다. 카산드라는 고개를 들었다.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엘사는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며 그녀를 보드랍게 바라보고 있다.



“저, 엘사-”



입술을 떼어 물음을 뱉으려는데 별안간 커다란 기적 소리가 공간을 우렁차게 메운다.



“횡단열차 ‘파스칼’, 곧 출발합니다!”



빠르고 투박한 바리안의 말투. 입술 끝에 맺힌 말을 삼키곤 카산드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열차의 증기가 차츰 거세지고 있었다. 벌건 황혼에 이어 옅은 땅거미가 환기구에 드리운다. 구 코로나에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도착할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항해의 방향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무작정 막막한 대해를 떠도는 게 아닌, 항로를 곧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16. 카산드라 / 구 코로나(Old Corona)


달은 어제보다 조금 더 얕은 곳에서, 아직 천정의 중심까지 떠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사방에 어둠이 내렸는데도 엘사는 달빛을 등불삼아 그림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다. 카산드라는 회중시계 대신 작은 차통 하나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말린 식물 뿌리를 빻아 만든 가루가 안에 가득하다. 엘사는 상기된 얼굴로, 약초를 채취하여 빻고 말리기까지 모두 자신이 직접 한 것이라며 자랑스레 말했었다.



그 통을 건네받은 건 하늘이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시점에서였다. 해가 바다 너머 모습을 감추고 마침내 그 붉은 자취마저 사라지자 투명한 하늘과 맑은 바다의 경계선이 무너지며 이윽고 하나가 되는 시점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묽은 안개처럼 땅거미가 퍼지고 별이 바다 위에 쏟아지자 엘사는 문득 그림그리기를 멈추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무심코 통을 열다 향긋한 냄새가 강렬하게 코를 때리는 바람에 카산드라는 한참을 콜록거렸다.



“쥐오줌풀 뿌리 말린 거예요.”

“뭔....... 뭔 오줌이요?”

“오줌이 아니라 쥐오줌풀 뿌리요.”



엘사는 입꼬리를 실룩거렸으나 웃지는 않았다.



“진정 효과가 있어요. 차로 우려 마시면 불면증이 한결 나아질 거예요.”



카산드라는 반신반의하면서도 통을 받아 챙겼다. 굳이 효능을 따지지 않더라도 차는 귀한 선물이었고, 직접 만들었다는 걸 내치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날이 더우니 차가운 물로라도 차를 타 마시면 좋을 것 같았다. 차통을 브랜디 병 사이에 끼워 넣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엘사가 한 마디 보탰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구요. 얼굴 상해요, 그러다.”

“됐어요. 당신이 무슨 내 엄만가.”



결국 카산드라는 엘사에 관해 거의 물어보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고 말하는 게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굴던 첫인상과는 달리 엘사는 개인적인 질문에 응하는 데 얼핏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햇살이 따갑게 박히는 대낮에도 망토를 깊이 뒤집어쓴 그녀의 모습이 질문을 내뱉으려는 입을 자꾸만 틀어막았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카산드라는 구태여 티를 내지 않았다.



회중시계의 초침이 걸음을 성큼 옮긴다. 두 번째 자정이 되었다.



카산드라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5호차로 슬며시 이동했다. 그림에 몰두하느라 문 여는 소리가 귀청을 찢는데도 엘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통로를 넘어 5호차로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다. 텅 빈 의자만 그녀를 맞이할 뿐, 5호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등불조차 들지 않고 카산드라는 의자를 짚어 중심을 잡으며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갔다. 한스에게 따져 물을 것들을 머릿속으로 곰곰이 되새겨봤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먼저 따져 묻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언질이 올 가능성이 높았다. 구름이 달을 삼키자 세상이 완전한 어둠에 잠긴다. 만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금, 카산드라는 아직도 그녀의 편을 명확히 정하지 못했다.



“.......그 놈은 당신이 열차를 탄 걸 아나?”



시각이 사라지자 청각이 온 세계를 구성한다. 열차의 울림 사이로 카산드라는 낯익은 속삭임을 분명히 들었다.



“아니, 그 아둔한 놈이 알 리 없지.”

“그래야겠지. 아니면 내가 당신을 당장 죽일 테니까.”

“어이쿠, 그것 참 무서운 걸?”



사납지만 앳된 목소리가 거칠게 일갈한다.



“내 원래 고용주가 누구였는지 잊지 말길 바라.”

“암, 당연히 기억하고말고.”

“언제쯤 저 마녀를 죽일 수 있을지, 이제는 알려 주셔야겠어.”

“꽤 안달 난 듯 보이는 걸?”



톱니바퀴 회전음이 머리칼을 베고 귓가를 스친다.



“그래, 난 네 마음 다 이해해. 이해한다고. 그렇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성급함만으로 모든 일이 처리된다면 서던 제도고 아렌델이고 이미 내 손에 떨어졌겠지. 지금 네게 승산이 있다고 보나?”

“.......‘퀘이사리움’을 손에 넣은 이상-”

“바위거인의 잔해를 얻었다고 자만하지 말길 바라. 세 개 중 넌 고작 하나를 얻었을 뿐이니까.”



상대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퀘이사리움이라니, 그 바보 같은 이름은 대체 누가 붙인 거야?”



대화가 갑자기 끊긴다. 긴 적막 끝에 한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군. 하지만 잘 들어. 진정한 도박꾼은 확신이 있기 전엔 행동하지 않아. 전략적으로 접근할 문제라는 거지.”

“네 말이 맞길 바라. 아니면 네가 다음 타겟이 될 테니.”



더 참지 못하고 카산드라는 식당 칸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우윳빛 안개에 뒤덮인 등잔불 위로 희미한 실루엣이 드러난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치고받았던 목소리와는 달리 그 곳에 서 있는 건 한스 혼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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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노래

Waiting in the Wings (Reprise) - 카산드라


오르골 장면을 쓰며 들은 노래야.

뮤비도 유튜브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보면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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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공지>

우선 '아렌델행 횡단열차'를, 8화까지 읽어 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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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8화까지 모두 읽었다면 7만 2천자를 읽은 셈이네.

한 주에 고작 두세번 연재하는 작품을 함께하기 쉽지 않을 텐데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꾸준히 횡단열차를 읽어 주는 프붕이들을 위해 나눔을 하나 하고자 해.


우선 정확한 나눔 구성품(아렌델행 횡단열차 포카 / 2002 문학대회 포카)은 저번 7화를 참고하길 바라.




1. 나눔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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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첨 프로그램으로 8명을 우선 추첨하고, 남은 사람들 중 16명을 추첨할 생각이야.

총 스물 네 명 추첨하는 셈이지? 나눔 수량이 부족할 거라 생각하진 않아. 오히려 나눔 지원자가 적으면 어떡하나 고민이다ㅋㅋㅋ



2. 나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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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참여 방식은 정말 많은 고민을 했어.

문학을 읽어주는 프붕이들에게 고마워서 하는 나눔이지, 감상평을 구걸하거나 강요하는 방식으로 하고 싶진 않았거든.

그럼에도 감상평 댓글을 단 프붕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정말 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얼핏 봐서는 구별이 잘 안 가서 그래. 물론 내가 댓글을 계속 보고 대댓을 달아주고 있어서 어떤 프붕이가 글을 읽는지 대강은 알고 있지만, 형평성을 위해서이니 양해 부탁할게 ㅠㅠ


문학추나 디시콘은 미안하지만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할게. 물론 문학추나 디시콘도 문학러에겐 큰 힘이 돼. 다음 번 나눔에는 전 댓글을 대상으로 진행하도록 할게.


나눔 폼 바로가기

http://naver.me/xLvCBKAq



참여자가 많으면 좋겠다. 내 문학으로 포카를 만들어서 나눔하니까 뭔가 낯부끄럽고 그렇네....ㅋㅋㅋㅋㅋㅋ

내가 나눔이 처음이라 좀 서툴고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는데 미리 양해 구할게 흑흑


아렌델행 횡단열차는 총 15화+a로 있을 것 같아.

여러모로 부족하고 부끄러운 글이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해

혹시 나눔에 관해서라도 궁금한 점 있으면 댓글로 질문 달아줘.


1


다음화는 금요일에.

추천 비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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