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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장편] 시간을 달리는 안나 -11(完)-

절대온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1.17 0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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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보러가기: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3641936



한 여인이 온통 분홍색으로 장식되어 있는 방의 침대 위에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자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땀을 뻘뻘 흘리고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이 더 흐르자, 그녀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일으켜 세운 채 황급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몸 구석구석을 살핀다.


‘여, 여기가 어디지?’


안나는 주위를 빙 둘러보며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이 어디인지 알아내려 했다. 분홍색의 벽지, 가지런히 또는 조금 거칠게 정리되어 있는 화장대의 화장품들, 남쪽에서 들어오는 햇살과 한쪽 구석 옷장에 걸려있는 코르셋까지 모두 어디선가 보았던 것들이다. 그렇다. 이곳은 그녀의 방이었다.


‘꾸, 꿈이었던 건가?’


안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가져다가 자신의 눈을 비볐다. 하지만 손등으로 느껴지는 축축한 기운에 그녀는 당황스러워했다.


‘그런데 내가 왜 눈물을 흘리고 있지?’


그 순간, 문 쪽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녀장 겔다가 여왕의 침소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좋은 아침입니다. 벌써 일어나 계셨군요?”


“겔다!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세요. 오늘 무슨 요일이죠?”


부드럽게 물어볼 만도 한 질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여왕은 몹시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겔다는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에 주군의 상태가 매우 걱정되었다.


“일요일입니다만, 어디 편찮으십니까? 눈이 충혈되어 계십니다.”


“별거 아니에요, 오늘 며칠이죠?”


“29일입니다.”


“몇월이죠?”


“11월입니다.”


“몇년도죠?”


“당연히 1842년입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안나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아주 괜찮아요. 이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그녀는 문득 시계를 보았다. 바늘이 막 9시 정각을 지나고 있었다.


“겔다! 왜 저 안 깨웠죠?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나갔잖아요!”


“그게...”


시녀장이 여왕의 추궁에 대답하려는 찰나, 검은색 평상복 차림의 남자가 침실 문을 열고 얼굴에는 웃음기를 가득 띄운 채 걸어 들어왔다.


“잘 잤나요, 안나? 좋은 아침! 주말만 되면 여지없이 늦게 일어나네요! 오늘 기록은 8시 59분!”


남편이자 국서인 크리스토프가 낄낄거리며 놀렸지만, 여왕은 그 말을 듣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곤조곤 말했다.


“안나? 오늘 기분 안 좋아요? 표정이 왜 그래요? 나 아직 식사 안했으니까, 같이 브런치 먹어요. 그럼 조금 있다 보아요!”


“자, 잠깐만요! 크리스토프, 어제 저 뭐했죠? 미래로 가지 않았나요?”


크리스토프가 안나의 물음에 잠시 멀뚱멀뚱 서 있다 입을 열었다.


“아, 그 약 먹고 잔거요? 그 꼬마 트롤 녀석이 지가 마법쓰니 뭐니 하면서 준 그 약, 사실 수면제래요. 어제 당신이 그거 먹고 소파 위로 바로 쓰러져서 확인해 봤는데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자고 있던데요? 새벽에 그 트롤 자식한테 뭘 먹인 거냐고 추궁했더니 수면제라고 털어 놓더라고요. 그녀석이 마법을 알리가 없지!  어쨌든 그래서 안나가 오래 잤나봐요, 하하하!”


“식사는 전부 준비됐습니다, 폐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겔다와 크리스토프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안나는 거울로 달려가 뒤늦게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사만다가 아닌 안나 자신이 붉게 충혈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방의 신원을 알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화장대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꿈 치고는 너무 생생했어. 잊어버리기 전에 일기에다 써놔야지.’


그 순간 안나의 배꼽시계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작동했다.


‘밥부터 먹고 해야지.’


안나는 옷을 갈아입은 뒤 간단한 화장만 마치고 곧바로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아렌델 성의 복도를 지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들을 둘러보았지만, 그 자리에 흑백 사진 따위는 한 장도 걸려 있지 않았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아침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얼음으로 만들어진 식탁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나는 여왕의 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는지 서둘러 빵 하나를 집어 입속으로 밀어넣었다. 크로와상의 바삭함과 부드러운 크림의 조화가 입 안에서 춤추며 그녀의 기분을 한결 낫게 해주고 있었다.


“오늘은 뭘 할까요, 안나? 제스처 게임? 아렌델 탐방? 아니면 처형 보러가기?”


크리스토프는 안나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안나도 웃으며 그에게 답해주려다, 문득 무언가 그에게 해야할 다른 말이 머리에서 떠올랐다.


“잠깐만요, 그 전에 당신 나중에 자녀 생기면 스벤이라고 이름 지으려고 했죠? 다 알아요. 그러지 맙시다!”


“앗, 버, 벌써 자녀 계획을...? 그보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크리스토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며 크게 당황했다.


“꿈에서 봤어요. 당신이 우리 손자 이름 순록으로 정해서 평생 놀림 받고 사는 꿈 꿨거든요!”


“아, 알았어요. 그러지 않을게요.”


크리스토프는 오늘따라 알 수 없는 이유로 예민해진 여왕을 쓸데없는 말로 자극시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열심히 둔하기 짝이 없는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안나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크리스토프, 제가 엄청난 꿈을 꿨는데 이야기를 다 들어볼래요?”


“물론이죠.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걸요?”


안나는 곧바로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66년 후의 미래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크리스토프, 올라프, 그리고 같이 있던 시종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이는 경이롭다는 표정을 지었고, 어떤 이는 탄성을 터트렸으며, 올라프는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그녀가 온갖 몸짓과 발짓을 동원하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매우 즐거워했다.


“정말 꿈 같은 이야기군요.”
“신기해요! 알아서 움직이는 마차라니!”
“난 전화기라는 게 더 신기한 거 같은데!”


사람들은 각자 안나의 이야기를 듣고 저마다의 감상을 한마디씩 던졌다.


“개꿈도 참 요란하게 꿨네요, 안나!”


올라프가 짧은 다리를 책상에 애매하게 걸친 채 내놓은 감상평이었다.


“뭐?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올라프?”


안나는 얼굴이 붉어지며 올라프에게 추궁하듯이 물었다.


“소설책에 나오는 표현이던데요? 아 참, 어른이 된 저도 보았나요?”


안나는 대답해 주려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애매한 답변을 해주었다.


“나이를 먹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올라프.”


그때 시끌벅적해진 식당 안으로 시녀 한명이 접시를 들고 여왕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디저트 나왔습니다, 폐하. 오늘은 초콜릿 케이크로 준비했....”


“미안하지만, 다음부터는 초콜릿이나 사탕으로 준비하지 말아주세요. 앞으로 단 것은 거의 먹지 않기로 했거든요!”


안나가 달콤한 갈색 물체가 담긴 접시를 밀어내며 말하자 식당에 있던 모든 인물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크리스토프는 화들짝 놀라며 안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나? 갑자기 왜 그러는 거에요? 어디 아파요?”


“아니, 오히려 이게 건강해지는 길이에요! 전 이제부터 식습관을 바꾸기로 했어요. 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 여기 모인 모든 분들, 다 저의 증인이에요. 혹시라도 제가 단 음식을 입에 가져가거나 하는 모습을 본다면 바로 말려줘요!”




유난히 시끄러웠던 아침 식사가 끝나고 여왕은 방으로 들어가 곧바로 서랍장을 뒤져 일기장을 찾아냈다. 이제까지 꾸었던 모든 안나의 꿈 중 가장 대단했던 꿈이었기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잊어버리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아 참, 펜이 없네. 내가 항상 드레스 주머니에 넣고 다녔지?”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며 가슴 속으로 손을 넣고 뒤적거리다 무언가 손에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딱딱한 원통형의 재질이 아닌, 빳빳한 모서리의 날카로운 무언가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안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가로지으며 그것을 확인했다.


“허어억!”


안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의자에 주저앉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녀의 손은 그 물건을 놓쳐버린 채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물건은 한 장의 흑백 사진이었다.


“꾸, 꿈이 아니었어?”


안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다시 집어 올려 천천히 사진 구석구석을 살폈다. 사진 속에는 사만다, 올라프, 그리고 미래 세계에서 보았던 공주가 그려져 있었고, 오른쪽 구석에는 ‘1908.11.29.’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 순간,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손님이 한 분 찾아오셨습니다.”


“나, 나중에 오라고 전해주세요!”


안나는 재빨리 일기장을 덮고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게...상왕 전하께서 갑작스럽게 찾아오신 터라... 전하께서 폐하를 꼭 보고 싶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뭐라고? 왜 하필 이런 때....“


그녀는 놀란 속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급하게 사진을 일기장의 겉표지에 대충 끼워넣고 서랍 속으로 던져넣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점이 하나 있었다.


사진 속의 사만다는 서서히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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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2월 22일 화요일, 노덜드라.




마법의 숲을 다스리는 정령은 요즘 들어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동생이 현재로 시간여행을 해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꿈 말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정확히 24일 전부터 계속해서 그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보라색 스카프를 어깨 위에 두른 채 몸을 감싸고 있었다. 엘사는 오두막을 벗어나 숲의 바닥에 깔린 눈들을 발로 폭폭 굴렀다. 그것은 그녀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벌써 겨울이구나.”


또 한 해가 가고 있었다. 1908년도 어느덧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엘사는 이제 시간의 흐름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학문에 관한 탐구심과 ‘특수상대성이론’이라는 책이 아니었으면,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몰랐을 터였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새하얀 옷을 입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일 축하해, 언니.”


엘사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가 난 곳에는 그녀의 머리색과 같은 백발을 한 노인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케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엘사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20년을 숲속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같이 살아온 동생인데, 그녀의 91번째 생일인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저 모습이 슬프게 느껴지는 것일까?


“꼭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해, 안나.”


이것이 그녀가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였다. 87세의 안나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거의 울먹이고 있는 언니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약속했잖아? 우린 언제나 함께 있을 거라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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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달안이 끝이 났습니다. 처음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가 프2의 거의 마지막 장면이었던 매티어스가 사진을 보고 신기해하는 장면에서 시작된 것으로, '아렌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에 대책 없이 글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지라 고증을 맞추는 것은 그리 어렵진 않았지만, 현생으로 인해 조악한 필력과 부실한 스토리라인으로 제가 원했던 만큼은 뽑아내지 못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시리즈 대부분이 개념글에 올라가 크게 기쁩니다(갤질도 잘 안하는데;;). 제 글을 1000명 가까이 읽어준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요.

댓글, 추천 모두 감사합니다. 결말에 대해 다들 만족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재밌게 이 글을 읽은 분들이 많았다는 점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장편은 2개 정도 더 구상해 놓고 있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차기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ㅅㅇㅂ, ㅅㄱㅇ ㄷㄹㄴ ㅇㄴ 2)

긴 글 읽기 귀찮으셨을 텐데 봐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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