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부터 일기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잡고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일기와 그림 모두 나만의 것을 남겨보겠다고 시작한 것이었지만 갈수록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만의 것을 남기자!
말은 뭔가 있어보인다. 실제로도 이르꾸츠크에서까진 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갈수록 억지를 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열차 안에서의 첫날, 현지인 가족들과 얘기하면서 난 무엇을 말할 수 있었나
한국에서 왔다는 것과 혼자 다닌다는 것. 그리고 계획이 없다는 것 이후로 할 말이 없었다.
한다고 해봤자 내가 아는 상식에 관한 얘기였지, 나 자신에 대한 건 아니었다.
찍어놓은 사진도, 그럴싸한 기념품도 심지어 제대로 된 관광조차도 하지 않았으니..
어디어디를 가봤냐는 말에도 무엇을 봤냐는 말에도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계획 없이 왔을 뿐이고, 사진보다 그림같은 것을 남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설픈 그림과 실속없던 헤메임으론 그조차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결국은 도망치듯 2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나
여행이 아닌 기이한 행동, 기행.
한번 그렇게 생각되니 뭘 쓰고 뭘 그려봐도 억지스럽게만 느껴졌다.
꼭 tv에서 김치를 먹으며 맛있다고 말하는 해외 연예인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일기를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궁상맞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4월 7일, 모스크바.
오전에 숙소를 옮겼다.
나름 숙소보다는 일반 아파트같아서, 가정집 같다는 느낌이 있었던 터라 좀 아쉬웠다.
가는 길에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려고 했지만 문을 연 곳이 없었음.
리리와 중간중간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했다.
서로 정말 잘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소통에는 어려움이 없었음.
하지만 내 영어실력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새로 도착한 곳은 호텔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방도 더 넓었으며 가구들도 고급졌다.
솔직히 괜찮다고는 했어도 부담스러웠다.
연애하는 사이도 아니고 내가 도움을 준 것도 없는데 받기만 한다는게 불편했다.
그러고 보면, 무슨 사이지?
궁금했다.
이렇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사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되지도 친하지도 않다.
이게 뭐지?
사귀는거냐고 물어보기도 애매하게 느껴졌다.
물어본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두루뭉실함이 리리에게까지 옮겨갈 것 같았다.
어쩌면 리리도 애매한 느낌을 받고 있으면서, 굳이 표현하지 않는거란 생각이 들었다.
묻어두기로 했다.
굳이 확답을 강요할만큼 스스로 그렇게 잘난 사람도 아니었기에.
무엇보다 나 또한 사랑하냐고 스스로 묻는 질문에 확신이 없었다.
나는 정말 비겁하다.
피곤했다. 그리고 머리가 아팠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2일 전에 부탁했던 비행기 티켓이 결제가 되지 않은 것.
이게 뭐가 문제지? 싶을 수 있다. 한번 설명해 봄.
대행사로 항공권을 예매하는 경우 결제가 제때 되지 않으면 자동 취소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취소된 경우엔 벌금이 발생함.
사실 벌금이야 제치더라도, 항공권 가격이 다시 널뛰기에 그게 문제가 된다.
정리.
티켓을 직접 예매할수가 없던터라 아는 형에게 부탁했는데, 결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더 복잡했던 건, 내가 직접 예매한게 아니었기 때문에 안내문자나 이메일이 형한테 간 것.
계속해서 형한테 물어보고 어떻게 안내받은건지 알려달라고 해야 했다.
직접 문의하자니 이메일은 답장에 시간이 걸렸고,
고객센터는 미국번호인 터라 국제전화 금액이 나왔음.
돈도 크겠지만 당장 국제전화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리리에게도 요금폭탄 맞을까봐 부탁 못함).
일단 문의 이메일을 보내놓고 나름 상황을 파악했다.
1 실시간으로 바뀌는 환율로 예상 티켓비용이 계속해서 바뀐다.
2 그러니까 약 5만원의 티켓을 사려면 넉넉히 7만원정도를 넣어둬야 한다.
3 하지만 형이 당장 돈이 없는 상황이어서 금액이 부족해 결제가 되지 않은 것.
결론은 통장에 돈이 부족해서 그런것이란 결론.
형에게 넉넉히 더 송금한 뒤 한숨 돌리며 누웠다.
쉴 겸 누워 핸드폰에 받아두었던 소설을 읽었다.
횡단열차에서 심심함에 받아두었던 것.
소설이 아니라 관광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누워만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일어나기도 싫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기는 하고..
그러다가 구경 겸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는 말에 일어났다.
리리의 추천은 감자집.
감자를 좋아해서 자주 가는 곳이 있다고 했다.
배도 고프고 나도 감자를 좋아해서 군말없이 향했다.
이름을 3번인가 알려줬는데 길어서 못 외웠음. 크레토스 크레 뭐였지.
가는 길은 선선히 걸어갔다.
티켓 문제도 정리된데다 가면서 구경도 하면 좋지 뭐.
가면서 아르바트라는 거리를 지나갔는데, 한국의 번화가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길 가운데 그림이나 책들을 쌓아놓고 파는 사람도 있었고.
버스킹을 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이국적인 글자와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어딘가 익숙한 번화가.
한국식으로 변한 외국음식을 먹는 듯한 느낌?
혼자였다면 굉장히 낯설거나 긴장도 많이 되었겠지만, 리리는 현지인임.
현지인과 같이 다니니까 긴장되거나 그런게 없었다.
다만, 날씨가 좀 흐렸던게 아쉬웠음.
목적지는 리리가 향하는 곳.
지도도 보여주고 지하철 역 근처였는데, 이름까지는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민망하다 ;;
제대로 다녀온게 맞는지, 여행기라고 쓰고 있기는 한데 여행기가 맞는지..
기억나는 건 역 바로 근처였던 것과 큰 분수대가 있었던 것.
그리고 꽤 큰, 백화점같은 곳이었다는 것.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곳 6층쯤에서 점심을 먹었다.
감자요리라고 해서 상상했던 것.
찐감자라던가 구운 감자라던가 버터감자라던가 그런 것들.
리리의 설명으로는 먹고싶은 재료를 선택하면 감자 안에 넣어서 오븐에 쪄주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주먹밥같은 것을 떠올렸다.
밥 대신 감자를 싼 주먹감자.
근데 아니었음.
써브웨이처럼 여러 반찬같은 재료를 고른다.
그러면 으깨서 구운 감자 옆에 퍼줌.
그러면 같이 올려먹으면 된다. 약간 백반같은 느낌?
뭐 따로 안에 넣어서 다시 굽거나 하진 않았음.
막상 고를 때는 다 맛있어보였는데 내 착각이었다.
애초에 맛있을거란 생각부터가 한국음식과 비슷한 맛일거라는 착각이었음.
외국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비슷한 모양의 재료를 골랐다.
추천받은 2개 + 후추 뿌린 소세지 감자볶음, 잘게 자른 장조림처럼 생긴 2개.
하지만, 당연하게도, 완전히 다른 음식이었다.
다 먹고나니 상당히 느끼했다.
근데 어떻게 눈앞에서 맛없다고 하겠음. 맛있다고는 했다.
저 감자음식을 다 먹고 나서 한바퀴 빙 돌아 나가는 길.
항상 상상했던, 하지만 한번 실패하기도 했던 (4-1편 참조)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중식음식 냄새가 났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홀린 듯 찾아갔음.
가니까 볶음밥과 치킨, 장조림같은 고기볶음이 있었다.
또 맛보기 음식도 줬는데, 리리가 오더니 시켜서 먹고가라고 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꼭 먹고 싶었다.
그래서 시켰던 게 아마 볶음밥하고 고기볶음으로 기억함.
생각했던 맛은 아니었다. 뭔가 상당히 많이 부족했다.
쌀도 동남미 쌀이었고. 그래도 얼마나 반가웠는지..
다 먹고 택시 기다리며 사진을 찍었다.
저 분수대 앞에 앉아있었는데, 리리가 계속 한장 찍으라며 설득했다.
사실 생각은 크게 없었지만 내친김에 찍었음.
그래서, 얻어먹은 것도 있고 해서 한장.
이 이후로도 그렇고 리리 덕분에 남겨온 사진들이 꽤 있다.
덕분에 기억나는 부분도 많고.. 정말 신세 많이 졌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생각해보니까 음식도 다 리리가 사고, 하나하나 알려주기도 했고
뭔가 엄마따라 마트 온 애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착해선 지치고 피곤함에 배까지 불러 낮잠을 잤다.
3시 반쯤부터 잔 듯 했는데 깨어나보니 저녁이었다.
전날에 의심했던 것도 그렇고 항공권도 그렇고 어지간히 피곤했나봄.
리리도 많이 피곤했는지 자고있었다.
일어나 내 옷가지도 정리할 겸 돌아다녔다.
호텔이라 그런지 야경이 참 예뻤음.
직접 볼때는 참 예뻐보였는데.
아래쪽 빛나는게 색깔이 계속 바뀜.
저 너머가 모스크바 대학교라고 했던 것 같다.
이날의 일기.
사실 이날의 일기를 다음날에 밀려쓴 터라 적기가 애매하다.
덧붙여서 쓸 말도 있고, 다음편에 같이 적으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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