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체 뭘 본 걸까? 지금 나는 진흙 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처럼 흥분해 있다. 정말이지 세상에는 재밌는 만화가 너무나도 많다. 아가페이즈 같은 만화도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이런 기분은 몇 년전에 호시쿠즈 나나를 보고 난 뒤로 오래간만이다.
- 첫인상
첫 인상은 무척 기묘했다. 98년 연재된 이 만화는 2000년에 1권이 발매됐다. 그래서 초반부에는 그때 특유의 오래된 번역이 산재해 있다. 내용 자체도 무척 충격적인데, 주인공 - 미즈키 유리는 게이다. 바로 그 내용부터 시작된다. 첫 페이지부터 진입장벽을 세우는 그 과감한 행보는 애초부터 대중성과 결여된 듯 하다. 하지만 나는 이게 대체 뭘까 싶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얼마 안가 어떤 등장인물들이 나오는가 대강 요약하면, 먼저 게이인 유리가 짝사랑하는 남자. 레즈인 척 하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하는 라이벌. 음악인 유리를 사랑하는 미소녀. 그 미소녀를 사랑하는 레즈. 홍석천을 닮은 풍수사. 그야말로 혼돈이다. 이들이 명랑만화스러운 그림체로 종알거리며 특유의 부산스러운 텐션으로 떠들어 댄다.
화룡정점은 바로 풍수. 그 풍수지리다. 쇠말뚝을 꽂아 정기를 해치는 그런 오리엔탈릭한 이야기. 주인공 유리는 사랑하는 토라키의 꿈, 고시엔 우승을 위해 풍수를 통한 마구 투수(?)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이 무슨 해괴한 조합인가?! 그러니까 이 만화의 주요 소재는 <BL + 야구 + 풍수> 라는 거다. 이 무슨 조합인가....
그래서 처음에는 이거 뭐 완전한 괴작인가 싶었다. 한데 신기하게도 재미는 있었다. 다채로운 표정들과 기본적으로 훌륭한 화력이 마음에 들었고, 요새 보기 어려운 역동적인 컷 배치도 많다. 거의 전위적일 정도로 명랑만화와 극화를 넘나들며 그럴 듯한 명대사를 툭툭 뱉어내는데, 이게 참 재미있었다.
하지만 아가페이즈는 단지 그뿐인 만화가 아니었다. 이 만화의 진가는 본격적인 야구를 시작하며 폭발한다.
- 아가페이즈는 BL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이참에 BL에 대해 생각해본다. BL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비겁한 장르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어쩌고저쩌고라는 문제로 저들끼리 맺어지지 못해 눈물짓는데 BL은 무엇보다 공고한 벽을 사이에 둔다. 아주 기본적으로 금단의 사랑을 깔고 간다. 금단의 사랑이라는 건 항상 눅진한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나는 BL이라는 장르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접한 많은 BL 뭐시기들은 대부분이 아주 자연스럽게 남자와 남자가 연애함이 당연하고, 사고의 흐름이 이질적이고, 가끔은 임신도 하는. 그런 xy염색체에서 거부하는 장르였다. 브로맨스라던가. 미소년이라던가는 감사히 퍼먹곤 하지만. 아무튼 남-남간의 찐한 우애란 노골적인 BL 야오이보다는 평범한 NL물에서 은근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아가페이즈는 BL이 아니다. BL은 맞지만, 그 이상이다. 주인공 유리는 토라키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짝사랑이다. 토라키는 또 누구와. 누구는 또 누구와. 그런 엄청난 삼각사각 너머의 복잡한 관계가 작중에서 표현된다. 그래서 이거 '막장드라마'아니야? 싶기도 하다. 하지만 뭐 맞다. 막장드라마 맞고,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품도 맞고, 야구를 아주 우습게 아는 사이비 풍수만화도 맞다. 그 이상한 요소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 Boys Love가 아닌 그냥 Love. 때문에 만화는 BL이 아닌 L이다.
유리는 주인공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아가페이즈, [Agape] + [s]. 큐세이 고교 야구부의 핵심은 총 다섯 명.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인물들이 엮여나가며 만화에서는 아가페라는 사랑을 논한다.
- 아가페,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
개인적으로 표지에서 주제가 드러나는 걸 좋아하고 어떻게든 주제를 끝까지 끌고나가 관철시키는걸 좋아한다. 그래서 아가페이즈가 좋다.
아직 고시엔에 진출도 안했거늘, 피를 흘리고, 픽픽 쓰려져대며,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분투하는 아이들. 특히 풍수라는 치트키는 알고 보니 파우스트의 거래였고, 비극의 장치가 된다. 유리는 사랑하는 토라키를 위해 한 단계씩 강해져 가며 자신의 전부를 잃어만 간다. 보다보면 생각하게 된다. '대체 왜 이렇게 하는 거냐' 라고. 일견 이해가 가질 않는, 자신을 버리는 사랑. 헌신적인 사랑.
그것은 초반에 다소 포함되어있던 명장면들이 몇번이고 속출하는 중후반부로 갈수록 극대화된다. 끝내는 거의 탐미주의적 작품처럼 보이게 된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아가페를, 작품은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놓는다. 그건 정말이지 아름다운 결론이다.
사실 그 주제가 은근히 숨어있다거나 하지 않다. 되려 직접 언급되며, 언급하기도 전에 이거구나... 싶게 한다. 뭐 그러면 어떻겠냐만은. 아무래도 좋다. 끝의 비유도 정말 좋았고... 여러 캐릭터들이 각자의 결말을 가진다. 이걸 어딘가에서는 캐릭터의 보자기를 접는다고 하던데, 아가페이즈는 모두 훌륭하게 접어냈다. 되려 풍수라던지, 유리의 사랑이라던지. 심지어 야구까지도. 초반부의 충격적인 요소들은 모두 작품 수준에서부터 부정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끝에는 사랑만이 남았다.
- 기타등등
보면서 어떤 장면에서는 울었다. 후반부였는데, 내 몇 안되는 기억들에서 손에 꼽힐 만한 명장면이었다. 미친 고점이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굉장해지던 만화다. 그 한 장면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작화가 정말 굉장하다. 임팩트 있는 장면장면도 좋고, 사실 명랑만화의 발랄한 그림체도 엄청나게 마음에 든다. 일본만화들은 정말이지 중요한 순간에는 엄청난 임팩트를 준다. 완전히 빠져버렸다. 이 나쁜 그림체 때문에 유리가 귀엽고 섹시하게 보일 정도다. 글썽이는 얼굴이 섹시한 만화.
참... 뭐랄까, 사도 만화였다. 기이한 무언가들이 엮여 괴작으로 남았어야 했건만, 무언갈 뚫고 폭발해버린 개성있는 만화였다. 매력적이다. 완전 내 취향이다.
아가페... 아가페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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