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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 상자

운영자 2019.12.17 09:28:39
조회 121 추천 1 댓글 0
어느 날 집으로 사과 한 상자가 배달되었다. 오래전 장교훈련을 같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세상에서 알던 사람들에게 사과를 선물한 것이다. 가슴에 아련한 파동이 느껴졌다. 얼마 후 그의 장례식장에 갔었다. 그는 영정사진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과 한 상자는 그가 보낸 사랑이었다. 원로 소설가 정을병 씨가 살아있을 때 후배 작가와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소설가협회 일을 하면서 서로 오해와 섭섭한 것들이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 다 만만치 않은 고집이었다. 어느 날 정을병 씨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후배가 말이야, 모르는 척 하고 사과 한 상자를 보내면 모든 게 풀려 버릴 텐데......”

그 말을 들으면서 얼음같이 차가운 관계를 사과 한 상자로 따뜻하게 온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꼭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행동으로도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당뇨로 몸이 약해져 깊은 산골로 낙향을 해서 사과나무를 키우는 친척이 있다. 부부는 몸이 아파도 질 좋은 사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 같았다. 시장에서 버려진 생선내장들을 모아다 황설탕에 버무려 발효시킨 후 나무 옆에 구덩이를 파고 거름으로 주기도 했다. 사과를 골고루 예쁜 빨간색으로 만들기 위해 나무 주위에 은박지를 설치해 가을 햇볕이 골고루 반사되도록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식같이 소중히 키운 사과들이지만 그걸 사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어떤 가게도 어떤 농사도 고객이 없으면 공허하게 된다. 변호사를 하면서 국가에 세금도 내고 교회에 헌금도 하고 사회단체에 기부도 해봤다.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체온이 교류되지 않는 행위는 비닐에 쌓인 과일 조각을 핥는 것 같다고나 할까. 어느 날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평생 내게 가시 같은 존재였다. 젊은 시절 그는 내가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뒤에서 조사하고 다녔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비방한다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나 역시 그가 좋을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여럿 있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경쟁의식을 그 표정에서 본 동창도 있었다. 내가 쓴 글로 인해 오해를 하고 멀어진 친구도 있었다. 죽은 정을병 씨의 말이 떠올랐다. 관계가 비틀어진 사람들에게 사과를 선물로 보내면 이 세상에서 꼬였던 매듭이 풀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나 나나 이제는 지는 해가 수평선에 몸을 담그는 것 같은 육십대 중반을 넘긴 나이가 된 것이다. 그들에게 사과를 보내기로 했다. 먹는 사과가 아니라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사죄의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예수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다. 사과를 팔지 못해 힘들어하는 친척에게도 도움이 될 게 틀림없었다. 같이 훈련받던 동기생들에게 사과 한 상자씩 보내고 죽은 군대 친구가 떠올랐다. 살아오면서 고마웠던 사람들에게도 사과 한 상자를 보내면 좋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까 받기만 했지 줄 줄을 몰랐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으면 메모를 했다. 이제는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서나 거래목적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이름들이 잠재의식을 뚫고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가르치던 아이의 이름도 있었다. 

삼십팔 년 전 전방사단에서 장교로 근무할 때 사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정을 베풀어준 좋은 장군이었다. 그때는 나는 육군 대위였고 사단장은 계급이 소장이었다. 주소들을 알려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가 왔다. 이년 전 내가 벌컥 화를 내고 싸운 친구였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등을 돌렸었다. 

“왜 내 주소가 필요해?”

그가 이상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사과 한 상자 보내려고”

“왜?”

“그냥”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알았어. 사과를 먹는 것 보다 잘 받을께”

전화 저쪽에서 그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는 게 느껴졌다. 삼십팔년 전 육군대위시절 사단장님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엄 변호사 안녕하시지요.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사단장은 이미 팔십대 중반의 노인이었다. 

‘보내 드릴 게 있어서요. 사단장님. 사랑합니다.’

그렇게 써 보냈다.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는 친구에게서 사과를 잘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방광과 신장을 적출하고 눈까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사과를 보낸 대충의 이유를 말해 주었다.

“좋은 걸 배웠네, 나도 죽기 전에 그동안 사랑받은 사람들에게 뭔가 했으면 좋겠네...” 

그의 대답이었다. 이제는 나도 노인이고 받는 사람들도 대부분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 분들이다. 사과 한 상자로 아름다운 마무리 인사를 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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