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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82 - 京城 거리의 모던 보이들

운영자 2019.07.29 10:26:37
조회 102 추천 1 댓글 0
친일마녀사냥


82


京城 거리의 모던 보이들


경성 거리에 변화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었다. 뉴욕과 파리의 유행이 동경을 거쳐 바로 경성에도 퍼져나갔다. 극장가가 붐볐다. 종로에는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조선인 관객을 놓고 3파전을 벌였다. 지금의 명동, 을지로 쪽으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남촌에는 황금관, 대정관 같은 극장들이 일본인 관객들을 끌고 있었다. 극장들이 관객을 조선인·일본인 따로 받은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설명하는 변사(辯士)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뉘어지면서 자연스레 관객도 갈라졌다. 조선 민중에게 불을 붙인 영화는 프랑스 영화 ‘몽파리’였다. 

1930년 4월2일자 조선일보는 영화 ‘몽파리’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불란서 영화 몽파리의 세례를 받은 청춘남녀는 모든 것에 있어서 최첨단이어야 한다는 이 1930년이다. 이 땅 경성의 청춘남녀의 옷차림이나 걸음걸이는 확실히 영화 몽파리에 나오는 그것이다. 거미줄보다도 더 설핏한 옷 사이로 움직이는 모던 걸의 몸뚱아리 그 여자들은 큰 길거리를 그런 벌거벗은 몸으로 쏘다닌다. 수십 수백의 벌거벗은 여자들의 관능충동의 변태적인 딴스, 그것은 잔인 음탕한 현대인의 신경을 자극시키기에 족하다.’ 

경성 거리는 숱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로 넘쳐났다. 서양 음악이 들어와 대중화되면서 경성 거리는 댄스가 유행했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저마다 재즈나 블루스 혹은 왈츠의 춤바람에 빠져들기도 했다. 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 해 팔리는 레코드가 120만 장이었다. 그중 40만 장은 조선의 소리판이었다. 경성의 레코드업계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영화산업도 발달하고 있었다. 영화 ‘춘향전’이나 이어서 제작된 ‘은하에 흐르는 정열’ 등이 흥행에 성공했다. 경성은 상업중심의 근대도시로 탈바꿈해 가고 있었다. 

1934년 4월18일 저녁 무렵, 경성의 장안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밤 벚꽃놀이를 가기 위해 돈화문에서 창경원에 이르는 거리는 인파로 뒤덮였다. 벚꽃이 만발하는 봄이었다. 전국적으로 벚꽃놀이가 유행이었다. 경성 사람들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서울로 올라와 전차를 타고 창경원을 갔다. 종로 4가에서 원남동으로 가는 길도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거리를 밝힌 1만 개가 넘는 오색영롱한 전등불이 축제의 분위기를 띄었다. 수백 명의 경찰관이 출동하여 호루라기를 불며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화사하게 핀 벚꽃나무 아래서 사람들은 찬합에 싸온 김밥들을 먹고 사이다를 마셨다. 

창경원 근처에 김연수와 경성방직에서 함께 분투하는 매제 김용완(金容完)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퇴근하고 돌아온 김용완에게 아이들이 창경원 밤 벚꽃놀이를 가게 해 달라고 졸랐다. 엄마에게 아무리 말해도 구경을 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보채는데 당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벚꽃놀이 갔다 와.”

김용완이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김연수 사장의 여동생 점효(占效)였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희들 왜 우니? 엄마가 벚꽃놀이까지 시켜줬는데, 뭐 먹을 걸 안 사주던?”

김용완은 아이들을 달래면서 물었다.

“엄마가 창경원에 들어가지도 않고 담 밖으로 빙빙 돌면서 안으로 보이는 벚꽃만 보게 했어, 그리고 돌아왔어.”

아이들은 계속 훌쩍였다. 남편 김용완은 기가 찼다. 김씨 부인은 조선의 이름난 갑부집 딸이었다. 그리고 김용완도 자신의 부모로부터 200석을 추수하는 땅을 물려받아 여유 있는 편이었다. 김씨 부인은 창경원에 들어가는 입장료 5전이 아까워 그렇게 한 것이다. 

김씨 부인은 지독했다. 처가의 말을 들어보면 고창 김씨가(家)를 일으킨 정씨 할머니를 꼭 닮았다는 것이다. 김씨 부인은 고기를 사도 살코기 대신 힘줄이 많이 들어가 가격이 싼 고기를 사 먹었다. 김치를 많이 넣은 비지찌개를 잘 끓였다. 휴지를 아끼느라 싸구려 마분지를 쓰고 그걸 잘라서 남편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했다. 

김씨 부인은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논과 밭을 사들였다. 결혼한 뒤 몇 해 사이에 200석이던 땅을 600석으로 늘렸다. 친정보다 더 잘살아 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김용완은 처남 김연수 사장으로부터 월급으로 100원씩을 받았다. 당시 쌀 한 가마에 5원 정도였다. 쌀 스무 가마 값의 월급이면 당시로서는 고액 소득자였다. 그런데도 김씨 부인은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는 모든 돈을 저축했다. 김씨가의 구두쇠 정신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경제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연수의 사는 모습은 어땠을까. 

김연수는 경성의 종로구 봉익동 141번지에 구식한옥을 장만하고 줄포에 있던 가족들은 경성으로 이사하게 했다. 단성사 뒤편에 자리한 이 집은 궁중내관의 소유였었다. 그 집에서 다섯째 아들 상하(相廈)가 태어났다. 김연수는 이제 다섯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열다섯 살에 결혼해 25년 동안 상준(相駿), 상협(相浹), 상홍(相鴻), 상돈(相敦), 상하(相廈)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집안의 어른인 김경중(金暻中) 옹도 아들을 따라 경성으로 올라왔다. 손자들의 교육은 할아버지 김경중의 몫이었다. 김경중은 손자들 앞에서 낟알 한 톨, 밥풀 한 알이라도 손수 주우며 근검절약을 가르쳤다. 김연수 역시 자식들에게 엄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였다. 

김연수는 아들인 상준, 상협, 상홍, 상돈을 집 근처에 새로 세워진 삼광 유치원으로 보냈다. 김연수는 아이들을 동네에 나가서 이웃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했다. 맏아들 상준은 이웃아이들과 동네 공터에서 연날리기, 자치기를 하면서 놀았다. 김연수는 아이들에게 농구코트를 만들어 줄 정도로 적극적인 아버지였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농구를 했다. 이웃동네의 아이들과 고종사촌 형제들이 모여들었다. 멤버가 한둘일 때는 골 넣기를 했고, 여럿일 때는 편을 짜서 시합을 했다. 

김연수는 평소 아들들의 행동을 보면서 수첩에 각각의 장단점을 메모해 두었다. 아들들에게 훈계할 때면 조용히 그 메모장을 꺼내서 하나하나 지적해 주었다. 아들들은 그런 치밀한 아버지 앞에서 감히 한마디도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김연수는 다른 사람들이나 회사 직원들에게는 관대했지만 자식들에게는 아주 엄격했다. 김연수는 아들들에게 수시로 잔소리를 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명령하고 끌고 가지 않았다. 과묵한 아버지였다. 웬만해서는 말은 고사하고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많은 자식들 중에 누구를 더 귀여워하거나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쉽사리 누구를 칭찬하는 일도 없었다. 희로애락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김연수를 옆에서 가깝게 지켜본 이희승(李熙昇) 박사는 중앙학교 학생시절 김연수가 조직한 야구단에서 함께 운동을 한 친한 사이였다. 그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김연수 사장은 아이들을 부잣집 아이처럼 곱게 키우면 장래를 망친다고 생각했어요. 옷도 가난한 집들처럼 남루하게 입혔고 먹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집안 생활비도 아내에게 월급제로 얼마를 주곤 그만이었어요. 그 습관은 늙어서까지 변함이 없었을 겁니다.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김연수는 가정경제의 모범을 보여 주었어요. 그런데 남들에게나 회사 직원들에게는 마음 씀씀이가 자상하고 후했어요. 말하자면 가족들에게는 냉정했지만 남들에게는 따뜻했죠, 한마디로 하면 가족과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근검절약하는 생활철학을 김연수는 한평생 내내 솔선수범했죠.’

김연수는 지나치게 근엄한 자신의 성격을 솔직하게 시인하며 이렇게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내가 자식들을 그렇게 길렀어, 내 잘못일 거야. 하지만 자식에게도 허튼 말을 하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곤란해. 예의가 인간생활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근본이거든.”

당시 경성 상계(商界)를 잡고 있던 일본인 기업가들은 진고개와 남촌에 웅장한 저택을 짓고 미국에서 수입한 승용차들을 타고 다니면서 부(富)를 과시했다. 경성방직의 김연수 사장도 새로 집을 짓기로 했다. 조선인 기업가로서의 위세와 자존심을 살릴 목적이었다. 그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41번지에 대지 2400평을 사들였다. 본래 그곳은 한성부 동부 숭인방의 일부로서 성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성북리라고 했다. 산 높고 골 깊고 물 좋고 공기 좋은데다 사철 경치가 아름다운 그곳은 교통이 불편한 것이 흠일 뿐 주거환경으로는 그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김연수는 그곳에 성(城) 같은 집을 지었다. 

본채는 이층 양옥으로 이층의 면적은 134평에 방이 다섯 개였다. 본채는 올려다 보이도록 높이 지었고, 거기서 계단으로 내려가면 제법 넓은 안마당이 펼쳐지고, 거기서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면 꽃들로 가득찬 화단이 보이게 만들었다. 화단 아래로는 채마밭이 있었고, 주변에는 철철이 꽃들이 피게 했다. 성북리의 산비탈은 봄이면 개나리와 진달래로 화려했다. 

김연수 내외는 본채 옆에 지은 한옥에 기거했다. 그리고 그 옆의 부속건물에는 김연수의 스태프들이 머물도록 했다. 본채 위쪽 산자락에는 조그만 일식 건물이 운치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여기서 김연수는 친지들이나 사업상의 주요 내객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한국인 기업가 김연수의 집은 당시 잡지 <삼천리>의 취재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잡지에 실린 김연수 사장 저택의 묘사는 이랬다. 

‘시외 성북동 산 절벽에 좋게 말하면 산악지대의 별장이고 나쁘게 말하면 꼭 병원 같은 외관의 양옥 이층이 김연수 사장의 집이다. 공기 좋고 냇물과 바위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성북동 일대에 살아서 별로 아침에 운동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의 아버지 김경중이 외출할 때 아들인 그는 자동차나 인력거도 타지 못하고 도보로 출근한다. 조선 최고의 부자인 그의 아버지 김경중은 5전이 드는 전차 값이 아깝다고 성북동에서 20리나 되는 계동의 맏아들 집까지 걸어다니니 자식 된 도리에 김연수는 자가용이 있어도 차를 탈 수 없는 것이다.’

김연수는 미국제 승용차 뷰익을 구입했다. 아버지 김경중은 그 차를 한 번도 탄 적이 없었다. 사업용인데 자신이 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김경중은 아들 김연수의 공장에서 생산된 고무신만 신고 걸어 다녔다. 당시 풍성함 속에 소박한 김씨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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