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점심시간 무렵 전화가 왔다. 선배 박 변호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빨리 오 선배 사무실로 오시요.”
그의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변호사라기보다는 시인이다. 변호사로 목에 풀칠을 하고 문학의 제단에 시를 모셔놓고 있다. 이웃의 선배변호사 사무실에서 몇 명이 모여 간단한 티타임을 가지곤 한다. 잠시 후 선배 오 변호사의 사무실에 네 명의 변호사가 모였다. 실장이라는 이름으로 오 변호사를 돕는 부인까지 다섯 명인 셈이다. 평생 그늘에서 남편을 내조해 훌륭한 판사로 만들고 남편이 변호사 개업을 한 이후에는 함께 노년까지 기부와 봉사를 그치지 않는 분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등이 굽은 시인 박 변호사는 신선 같은 인상을 줄 때가 있다. 광주사태 때 회사원으로 있으면서 시위현장의 맨 앞에 섰던 분이다. 헝클어진 세상에 대한 분노로 뒤늦게 사법고시를 보고 인권변호사가 됐다. 그 길로 일생을 걸어왔다. 정치를 기웃거리거나 정권이 바뀌었을 때 어떤 자리를 탐내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도 이제 병이 들고 늙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성지순례를 갔다 왔는데 호텔 방에 지팡이를 두고 왔어. 그런데 이 지팡이가 주인을 찾아 왔단 말이야. 나이를 먹으니까 자꾸만 잃어버리고 이상해져. 엊그제 경주에 갔다 왔는데 커피를 시켜 손에 들고 가는데 그게 옆으로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 옆의 다른 사람이 알려 줬어.”
“이제 우리는 봉사하는 나이가 아니라 봉사 받아야 할 나이로 바뀌었죠. 나도 어제 주민센터에 갔더니 간호사가 어르신 대하듯 이것저것 검사하고 도와주려고 애를 쓰더라구. 복지를 보면 이제 우리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해.”
내가 말했다. 삶에서 감사할 줄 알면 또 다른 싱싱한 색깔의 인생이 보석같이 빛난다고 믿는다. 모인 우리들은 모두 나이가 육칠십대로 모두 세상이라는 숲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이 있던 그 숲을 보는 입장이 됐다. 숲속에 있을 때는 나무와 돌멩이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숲 전체의 윤곽이 보이는 것 같다. 옆에 침묵하며 있던 선배 오 변호사의 부인이 겸손한 태도로 한마디 했다.
“전부 귀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인데 이제는 그것들을 써서 법조 후배나 세상에 더러 알려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판사 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법원을 나온 방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에 판사를 할 때 말이예요. 변호사들이 와서 왜 그렇게 벌벌 기고 저자세로 나오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어요. 판사실로 찾아오는 분 중에는 선배 법관들이 많았는데 해도 너무 한 거예요. 비굴할 정도였으니까. 처음에는 내 태도를 조심하면서 저 분이 왜 저렇게 당당하지 못할까 했는데 시간이 흐르니까 변호사들의 그런 태도가 당연한 것처럼 나도 세뇌가 되더라구. 그리고 거꾸로 법정에서 자기주장을 당당하게 하는 변호사를 보면 판사한테 반항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존경받지 않으면 무시당한다고 착각을 하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있던 선배 오변호사가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부장판사와 법대교수로 있었다.
“그게 다 돈 때문이예요. 의뢰인에게 많은 돈을 받고 거기에 코가 꿰었으니 무슨 짓을 못하겠어? 나도 부장판사를 하다가 변호사가 되어 내가 데리고 있던 배석판사가 있는 방으로 간 적이 있지. 부장과 배석은 법원에서는 절대적인 상관과 부하 관계 아니야? 그런데 이 배석판사의 눈빛이나 말 중에 흘러나오는 게 당신이 예전에는 상관이었지만 이제는 내 앞에서 사정을 하고 비는 사람이지 하는 그런 메시지더라구. 내가 부장일 때에는 틈만 나면 부장님 존경합니다. 부장님은 저의 멘토이십니다.라고 하던 사람이 말이야. 마음이 먹먹해 지더라구.”
다시 방변호사가 말을 받았다.
“부장이 저에게 총무를 시키더라구요. 그 당시 총무가 뭐를 하느냐 하면 관내 변호사들한테서 실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걷는 일이예요. 그 돈으로 판사들이 밥을 먹고 술을 먹는 비용이죠. 그런데 매일 점심이나 저녁이 되면 변호사들의 차가 순번을 정해 법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판사들을 태우고 고급호텔 레스트랑에 가거나 요정에 가서 매일 밥 먹고 술 먹고 대접을 하는 거죠. 내가 거둔 돈을 부장에게 주면 슬쩍 자기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 같더라구. 도대체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법원이 썩은 거지. 뇌물 봉투나 받고 말이야. 그래서 판사들이 구내식당에서 밥 먹자고 주장했었지. 그랬더니 나만 왕따를 만들더라구. 그 다음부터는 회식이 있어도 나만 소외시키는 거야. 내가 법원에 있을 때는 어떻게 저런 인간이 판사가 됐나 하는 경우도 참 많이 봤어. 어떤 부장판사들을 보면 아예 관내 변호사들을 양치는 개처럼 휘몰아 버리는 걸 보기도 했지.”
“지금은 그래도 법원이 많이 좋아졌잖아?”
선배변호사가 두둔했다.
“시대가 디지털로 발전했는데 예전 같이 판사실로 들어갈 필요가 뭐 있겠어요 스마트 폰으로 영상통화를 하고 회원제 룸쌀롱으로 가면 은밀히 모든 걸 얘기할 수 있는 시대인데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이 바뀌어야 하는 거지.”
나는 그런 법원의 환경 속에서 전관이라는 자격이 없이 30년 동안 천덕꾸러기로 변호사 생활을 해 왔다. 비굴한 로비가 아닌 당당한 싸움의 길을 택했다. 어떤 판사는 법정의 의뢰인이 보는 앞에서 도대체 이따위 변론서가 뭐냐고 타박했다. 또 다른 재판장은 방청석의 의뢰인을 일어나게 해서 저 변호사를 당장 갈아치우라고 하기도 했다. 변호사는 그런 오만과 편견을 가진 사법 권력과 정면으로 싸우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다. 살자니 문제가 있지 굶어 죽겠다고 각오하면 문제가 아니라고 결심을 하기도 했다. 내가 쓰는 변론서에는 한 인간의 눈물겨운 삶을 압축해 넣으려고 애썼다. 그럭저럭 청춘의 산맥을 넘고 장년의 강을 넘어 노년의 산기슭에 이르러 지고 오던 짐을 내려 놓았다. 편안하다. 부정적인 것 보다는 감사한 게 더 많이 떠오른다. 나쁜 사람보다는 정의를 위해 밤새워 기록을 읽고 코피를 흘리면서 판결문을 쓰는 좋은 판사가 훨씬 많았다. 그들 때문에 나는 가족과 굶지 않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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