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마녀사냥
18
후손의 感想
우리를 태운 지프차는 줄포로 향하고 있었다. 조선 말 김씨가가 쌀 무역으로 갑부가 됐다는 포구였다. 차창을 통해 모내기를 준비 중인 드넓은 논이 시야에 들어왔다. 100여 년 전 이 지역 일대가 모두 김씨가 문중의 땅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증조부가 가지고 계셨던 전답이 얼마나 돼?”
내가 차창 앞 광경을 보고 있던 김병진에게 물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이 고창과 장성 일대의 땅들은 전부 우리 김씨가의 소유였다고 그래. 수십 개의 부락민들 자체가 우리 집안에서 소작을 부쳐 먹고 살던 사람들이지.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네. 말해 줄까?”
그가 싱긋 웃으며 나를 뒤돌아보았다.
“뭔데?”
“내가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여기 오면 사실 특별한 대접을 받았어. 40년 전인 그때는 아직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도 않고 또 차도 없을 때야. 그런 때 방학이면 염전 소유 지프차로 여기를 오곤 했지. 한번은 마을 근처 삼거리에서 순경이 내가 탄 차를 세우는 거야. 나는 뭔지도 모르고 겁을 먹었지. 그런데 그 순경이 나를 보고 도련님이라고 하면서 경례를 붙이는 거야. 그 순경의 아버지랑 할아버지 집안이 우리 김씨가 소작인이라고 하더라구. 그런 시절이 있었어.”
눈앞에 다시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담장마다 해바라기, 국화, 그리고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에도 시원하고 큼직큼직한 노란 국화가 능숙한 솜씨로 그려져 있었다. 마을 앞에는 ‘미당 서정주의 묘’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저 마을 뒤쪽 산 위의 묘가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묘야.”
김병진 회장이 손가락으로 야산 등성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서정주의 수필집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정주 시인이 첫 번째로 쓴 시는 ‘나의 아비는 머슴이었다’였다. 그의 아버지가 고창 김씨가의 마름이었다고 미당의 전기에는 기록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산과 들이 다 조상 땅이었는데 소감은 어때?”
내가 김병진에게 물었다.
“우리 집안의 흔적을 자손들이 보존하려 노력하고 있어. 고택(古宅)의 안내자도 우리 집안에서 고용한 사람이야. 그렇지만 항상 걱정되는 건 겉으로 하는 칭찬보다 그 사람들이 진짜 마음속으로 우리 집안을 어떻게 생각해 주느냐는 거지.”
수많은 배신을 당해 본 김씨가의 내면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
내가 김연수 회장에 대해 자연스럽게 물었다.
“할아버님은 카리스마가 강하고 권위주의적이었지. 윗대인 아버님이 벌벌 떠니까 손자인 우리들은 아예 무서워서 특별히 오라고 하지 않으면 접근하지 않았다니까. 내가 입시를 통해 중학교에 합격했을 때였어. 속으로 할아버님이 아주 칭찬해 주실 줄 알았지. 그런데 할아버님이 우리 모자(母子)를 부르시더니 어머니께 한 말씀만 하셨지. ‘에미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게 말씀의 전부였어. 그런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밖에는 나지 않아.”
“조선 최고의 재벌 자손으로서의 삶은 어땠어?”
그는 희비의 감정이 교차되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안의 남자들은 사실 그런 걸 느끼기가 힘들었어. 증조부님은 철저한 검약으로 유명하셨지. 할아버님도 마찬가지셨어. 남들에게는 후하셨는데 가족에게는 철저하게 무서우셨어. 할아버님은 6·25 무렵 김상협(金相浹) 둘째 숙부님을 빨치산이 득실거리는 이 부근 해리(海里)로 보내 염전을 개발하게 하셨지. 또 셋째 아들인 김상홍(金相鴻) 작은아버님도 공직에 충실해야 한다면서 피란길에 데리고 가지 않고 도로 적지(敵地)로 보내셨지. 할아버님은 그런 분이야.
여섯째 아드님도 경기고등학교를 나오시고 똑똑한 분이었어. 그런데 군대에 가서 사고를 당하셨어. 우리 집안은 어떤 아들도 병역면제를 받은 사람이 없어. 군대 가서 기합을 받다가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는 바람에 크게 다치시기도 했지.
나도 대학 2학년을 마치고 1976년 졸병으로 군대엘 갔지. 그때만 해도 저녁이면 구타가 없는 날이 없을 정도였어. 몇 대 맞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지. 그렇게 군대생활을 3년 동안 꼬박했어. 사실 그 무렵 밥술이나 조금 먹거나 행세하는 집안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어. 嚴 변호사도 같은 세대라 잘 알잖아?”
길 오른쪽으로 은빛의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줄포와 변산반도 사이의 곰소만이었다. 넓게 농지가 펼쳐져 있고 사이사이 빨강색, 파랑색의 지붕을 가진 집들이 보였다.
“잠깐만요.”
김병진 회장이 운전을 하던 성 지점장에게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잠시 서자는 신호를 보냈다. 차창 앞쪽으로 산그늘을 깊게 드리운 넓은 저수지가 보였다. 잠시 후 우리가 탄 차는 저수지 한 지점에 다가가 섰다.
호수 같은 저수지는 수량이 가득했다. 발밑까지 맑고 투명한 물이 올라와 기슭을 핥고 있었다. 저수지의 반대편에는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김병진 회장이 차문을 열고 내리면서 말했다.
“할아버님께서 이 저수지를 만드시는 바람에 이 넓은 평야가 전부 논이 될 수 있었던 거야. 저 끝없는 들판이랑 산이랑 모두 우리 집안의 전답(田畓)이었지.”
저수지의 한쪽 기슭 앞에 나룻배 한 척이 유유히 떠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보면서 김병진이 말했다.
“내가 대학시절까지만 해도 가끔 이리로 내려와서 바로 저기 배가 떠있는 기슭에서 낚시를 하곤 했지. 그런데 1960년대 하고 1970년대는 세상이 확연히 다르더구만. 1960년대는 지역순경이 중학교 1학년인 나보고 도련님이라고 하면서 경례를 붙였다고 했잖아? 그런데 1970년대 중반쯤 돼서 여기를 내려와 보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더라구. 한번은 내가 대학졸업 무렵 내려와서 이 저수지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어. 옆에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낚시를 하는데 아주 잘 잡더라구. 그래서 내가 그 아이보고, ‘너 나한테 낚시를 팔래?’ 하고 물었지.
그때 그 아이의 엄마가 다가와 나를 옆눈길로 슬쩍 보더라구. 내가 누군지 아는 눈치였어. 그 여자 역시 이 근처에 오랫동안 뿌리를 박고 산 사람 같은 느낌이었어. 그렇다면 우리 김씨가의 땅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틀림없는 거지. 벌써 나를 경계하는 게 뚜렷했어. 그 여자는 아들을 막 야단치더라구.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나중에야 그 여자가 내게 뭐라고 하지 못하니까 아들에게 그렇게 하는구나 하고 알아챘지. 그렇게 세상 인심이 달라지더라구.
1980년대는 이 지역 부락민들이 아예 서울로 떼지어 올라와서 땅을 자기들에게 무상 분배하라고 시위를 벌였어. 그 무렵 김상협 둘째 숙부님이 국무총리였고, 김병관(金柄琯) 육촌 형님이 동아일보 회장이었어. 여기 농민들이 동아일보사로 달려가 시위를 한 거야. 그때 거의 거저 주다시피 그 사람들에게 땅을 넘겼어.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많은 부분이 뒤에서 시위를 조종한 좌파단체 쪽 사람들에게 넘어갔다고 하더라고.”
그의 얼굴에 분노가 은은히 피어올랐다. 잠시 후 우리는 줄포 안으로 들어왔다. 조선 말에 번성했다는 항구 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그곳은 시간이 정지된 마을이었다.
일제시대 때 지어진 정미소가 빨갛게 녹이 슨 양철지붕을 머리에 얹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한 낡은 단층건물의 가게들이 좁은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조그만 다리 위에서 차가 섰다. 다리 아래로 거무튀튀한 갯벌이 보이고 군데군데 개울에 탁한 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동네 개천 같았다.
“여기가 조선 말의 선착장이야, 증조부님이 여기서 배에 쌀을 실어서 군산항으로 보내셨지.”
“여기가 항구였단 말이야?”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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