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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관과 장관

운영자 2017.05.29 10:03:18
조회 442 추천 0 댓글 1
사무관과 장관

  

  

육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면서 이제는 멀리 흘러가 버린 과거가 어땠나 호기심이 날 때가 있다. 이따금씩 낡은 일기장을 펼쳐 나의 영혼이 30년 저쪽의 청록색 안개 속에 묻혀 있는 과거로 돌아가 사진첩 속의 흑백사진을 보듯 그시절의 모습과 나의 주변을 돌아보는 건 또 다른 재미다.

  

1986년9월1일 화요일 아침의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른네살의 나는 커피를 담은 머그잔을 기울이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서울의 택시노조가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다. 전두환 정권 말의 대규모 사회적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후에는 고교동창인 친구 아이의 돌잔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는 이제 공무원을 시작한지 몇 년 안 되는 친구들이 와 있었다. 잔치 상 위에는 전과 나물 등의 안주가 오이소주가 담긴 도기 주전자와 함께 있었다. 소주에 채 썬 오이를 썩어 마시는 게 유행이었다. 지방도시의 공무원으로 간 친구가 말했다. 

“나는 시가 소유하는 땅의 입찰을 담당하고 있어. 참 엉터 

리 같은 놈들을 많이 보게 돼. 며칠 전 어떤 놈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와서 시 소유의 땅을 자기에게 수의계약으로 넘기라고 으름장을 놓는 거야. 내가 그 땅은 공개입찰이 원칙이라 곤란하다고 하니까 당신 같은 말단이 아무리 버텨도 각하측근에 부탁해서 영향력을 미치면 어차피 일이 성사되게 되어 있으니까 일을 원만하게 하자는 거야. 은근한 공갈이지. 그래서 내가 그 영향력 있다는 분이 누구시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지. 그랬더니 그 친구가 말이 먹혀들어간다고 생각했는지 각하의 육촌인 전장환이란 분이 계시는데 그 분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에 협조하는 게 좋을 거라는 거야”

그런 게 먹혀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그가 잔에 담긴 오이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놓고 말을 계속했다.

“시국이 어수선 하니까 별 망둥이 같은 놈들이 한큐 잡으려고 날 뛰고 있어. 나는 사무관이지만 시장이라는 놈이 하는 짓을 밑에서 보면 한심해. 그저 높은 곳이라고 하면서 전화가 오면 확인도 하지 않고 굽실대. 그리고 밑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거야. 내가 업무를 하면서 정말 한심한 상황을 봤어.”

“뭔데?”

내가 되물었다.

“시에서 지하철을 만들기 위해 들여온 차관도 어마어마해. 그런데 요즈음 한 술 더 떠서 세계은행에서 150억불 차관을 들여오려고 하는 거야. 그거 정부여당이 선거자금 만들려고 하는 짓이야. 정부여당이 1988년 대통령선거를 겨냥하고 요즈음 머리 굴리는 걸 보면 한심해. 선거에서 김영삼이나 김대중에게 정권이 넘어갈 판이라 세계은행에서 빚진다는 건 아무런 관심이 없어. 그저 한 푼이라도 정치자금을 더 끌어들여서 정권을 연장하려고 하는 거야. 은밀한 지시가 위에서 내려왔는데 지하철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세계은행에서 일시불로 차관을 끌어들이라는 거야. 그렇지만 세계은행 입장에서 볼 때 미쳤냐? 돈을 한꺼번에 빌려주게”

“정치자금은 재벌이 대는 거 아니야?”

그 자리에 있던 내가 물었다.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세 후보가 당선가능성이 막상막하니까 약아빠진 재벌들이 어느 한편으로 집중해서 주지 않고 자금을 분산시키는 거지. 그러니 자금이 부족하니까 별 짓을 다 하는 거지. 여의도에 백만명씩 동원하려면 그건 결국 돈이라는 얘기야.”

“그 전의 공화당 정권에서는 어떻게 했지?”

내가 물었다.

“그땐 대량으로 돈을 찍어서 사용했지. 그런데 지금 그 짓을 했다가는 가뜩이나 민심이 정부나 여당을 떠나 있는데 그 카드를 써 먹을 수 있겠어? 민정당은 선거에서 지는 날에는 하루아침에 풍지박산이 날 건데 말이야. 정부와 민정당에서는 민정당원 150만 군대 60만 공무원 경찰 지방농민중 여당세를 합쳐서 700만표를 만들면 계속 집권할 거라고 낙관하는데 글쎄 사실 나도 내무부 공무원이지만 공무원들의 내면은 야당세가 지배적이야 김대중 김영삼이 욕심을 내서 야당표만 분열시키지 않으면 여당인 민정당은 날아갈걸?”

“그렇게 북치고 장구치는 선거는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한꺼번에 해버리지 왜 대통령선거를 하고 그 다음에 국회의원선거를 해서 시차를 두는 거지?”

내가 물었다.

“동시에 선거를 하면 지역구 국회의원 놈들이 대통령선거자금을 그대로 대통령후보를 미는데 쓸 것 같아? 자기 선거운동하는데 쓰지. 그래서 선거에 시차를 두는 거라고. 또 다른 이유는 대통령선거자금을 만들려면 국회의원이 되려는 친구들한테 공천자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야.”

그는 사무관이면서도 벌써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화제를 돌려서 물었다.

“그래 내무부 공무원생활은 어떠냐?”

그는 지방도시에서 아파트를 세 얻어 살고 있었다.

“명색이 내무부 사무관이지만 지금 받는 봉급으로는 입체 풀칠을 하기도 힘이 든다. 그렇다고 관료로 한번 출세해 보려고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정부로 들어온 놈이 뇌물을 받을 수도 없고 말이야. 이런 세상을 견뎌내야지 뭐.”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번에는 외무부 사무관으로 일한지 얼마 안 되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물었다.

“외교관 생활은 어떠니?”

“외무고시에 합격하면 각국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화려하게 살 줄 알았지. 그런데 왠 걸? 외국에 가면 현지의 북한 공관원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내 몸 상하는 줄 모르고 싸워야 해. 그러다 귀국하면 한달에 30만원 받는 가난한 월급장이야. 앞날도 깜깜해. 내 위에 정체된 고참 사무관만 해도 120명이고 윗자리인 서기관은 한정 돼 있어. 거기도 겉으로는 내색들을 하지 않지만 나는 서울대 출신도 아니고 고향도 전라도라 은근히 배척을 하는 거야. 그런 핸디캡을 벗어나려고 아침 일곱시 부터 밤 열시까지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하고 있어. 나 아니면 일이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 외국출장을 갔다 올 때 마다 돈까지 꿔서 몽블랑만년필이나 생활용품을 사다가 수시로 상관에게 바치고 있다. 그런데도 아프리카 밀림구석에 쳐 박힐까봐 전정긍긍하는 게 내 신세다. 한심하지 아파트 대부자금 갚을 일도 깜깜하고 나도 앞으로 주식시세 살피고 이재를 하는데 눈을 돌려야 할 까봐. 그렇게 하지 않고는 앞날이 보장되지 않는데 말이야.”

  

그리고 나서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방도시에서 사무관을 하던 친구는 장관을 끝으로 관료생활을 마감했다. 상사에게 몽블랑만년필을 사다 준다고 했던 외무부 사무관이었던 친구는 차관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종료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들은 한 달에 한번 씩은 만나서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눈다. 이제 우리들은 전부 백발의 노년 나이에 접어들었다. 얼마 전 서초동 뒷골목의 고깃 집에서 친구들이 모였을 때였다. 

“그래 장관을 해 본 소감은 어때?”

내가 장관을 마친 친구에게 물었다.

“지하철에서 더러 예전에 데리고 있던 직원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어. 그 직원들이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거야. 어떻게 장관님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시냐는 거야. 그러면 난 항상 잘 타고 다닌다고 말해주고 있어. 사무관시절에는 그저 공무원 사다리의 한 단계라도 먼저 타고 올라갈려고 그랬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다 한 때 바람잡이 같은 거고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였어.”

“수고 많았다. 부패가 만연했던 이 세상에서 그래도 너 같이 고지식하고 검소하게 공무원생활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장관들 덕에 우리나라가 깨끗해 진 게 아니겠냐?”

나는 친구를 위로해 주었다. 이번에는 외무부 차관을 마친 친구에게 물었다.

“요즈음은 노년을 어떻게 보내냐?”

“나는 퇴직을 했어도 대사라는 명함을 가지고 장사 다니기 바쁘다.”

“장사라니?”

“내가 만든 해외의 연줄을 이용해서 대한민국 경제에 보탬이 되려고 하는 거지. 왜 중동 쪽에 우리 원전이나 그런 것들을 수출하면 좋잖아? 정부에서 그런 일을 돕는 대사를 계속 하라는 거야. 월급은 없어. 그냥 나라에 기여하는 거지. 고시한번 합격한 덕분에 장관 차관 할 때까지 몇십년을 잘 살아온 것 같아. 이만하면 늙어서라도 보답을 할 때가 됐지 뭐. 젊어서는 걱정이 많았어도 말이야.” 

인생은 장거리달리기였다. 집안이나 학벌 같은 배경이 좀 부족해도 성실함 하나로 끝까지 성공한 친구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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