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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1월7일 나는 무엇을 했을까?

운영자 2017.05.15 10:24:59
조회 248 추천 1 댓글 1
30년 전 1월7일 나는 무엇을 했을까? 

  

20층 아파트 창문 밖은 그대로 겨울 하늘이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아래쪽 땅에서 네온이 점점 별같이 밝고 화려한 빛을 거리에 뿌리고 있다. 호텔, 노래방, 호프집, 고기집 들의 간판들이 깜박거리고 구르면서 명멸하고 있다. 노년의 일상은 고인물 같이 정체해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둠속에 앉아 지상을 구경하던 자리에 내가 앉아있다. 어머니는 노년의 고독을 잘 견디고 저세상으로 오라고 유언을 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견딜 수밖에 없는 자기 십자가라고 했다. 나는 일찍부터 스스로를 은둔형 외톨이로 만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이 있으면 부담스러웠다. 동창회도 그랬다. 몇십년 혹은 몇 년 만에 만나는 동창이 무슨 의미일까? 그들이 과연 친구일까? 어릴 적 공유했던 추억도 점점 그 빛이 바래져 가고 있다. 아내는 손녀를 데리고 스키장을 갔다. 박사과정에 있는 딸을 돕기 위해 외할머니는 손녀와 놀아주고 있다. 혼자서 영화를 본다. 그런데 영화만 틀어놓으면 잠이 쏟아졌다. 감성이 둔해져서 그런 것일까.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나보다 먼저 지하철 공짜세대가 된 친구는 “극장에 가서 우리 마누라가 졸지 않으면 그게 명화야”라며 낄낄 웃었다. 친구의 부인도 그런 모양이다. 교회를 가면 우리또래 이상의 노인들은 깨끗하게 잘 차려입고 와서 설교시간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깊이 잠들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영원히 잘 때가 멀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졸리운 모양이다. 가까이 사는 친한 친구도 찾아가기가 조심스럽다. 그들의 시간 한가운데 불쑥 침입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적이 있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불렀더니 감기 몸살로 몸이 괴롭다면서 도로 들어가 누워야겠다며 진땀을 흘리는 친구를 봤다.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은 것이다. 무료한 나는 책장을 둘러본다. 책들 사이에 30년이 넘은 낡은 일기장이 있다. 검은 비닐표지의 두툼한 대학노트에 볼펜으로 빼곡하게 글들이 적혀있다. 그 시절의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서 30대 초 인생의 활동을 시작한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나는 일기장을 들추었다. 

  

1986년1월7일 하얀 눈으로 덮인 얼어붙은 호수 옆 콘도미니엄이 나타나고 있었다. 호수가의 골짜기 산비탈에는 하얀 눈 모자를 쓴 침엽수들 가지 사이로 상큼한 겨울바람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열 댓평 정도의 작은 콘도미니엄의 베란다 창을 통해 가족이 보인다. 거실에는 자그마한 천으로 된 소파와 텔레비전이 놓여있는 탁자가 있다. 구석에는 가스테이블과 하얀 접시들과 찻잔이 놓인 찬장이 보인다. 소파 사이로 세 살 먹은 아들 욱이가 혀 짧은 소리로 “아빠, 엄마”하며 강아지 같이 거실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있다. 일곱 살의 정아도 “야호 신난다”라고 소리치면서 동생과 같이 뛰고 있다. 스물아홉살에서 이제 막 서른살로 넘어오는 아내가 앞에 앉아있는 남편인 나를 보고 말했다.

“나도 이런 아름다운 집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내가 소원을 얘기하고 있다. 아내는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라는 눈빛이다. 나는 사법연수원을 다니고 미대를 나온 아내는 동네 꼬마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법 연수원 월급으로는 책값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우리 부부는 돈이 없었다. 그해 겨울 부자인 친구의 콘도를 사정을 해서 빌렸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콘도미니엄을 나와 산자락 평평한 비탈에 처음 만들어진 스키코스로 갔다. 설원의 언덕에서는 빨강 노랑 흰색의 스키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안개를 일으키며 이따금씩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아직 스키가 대중화하지 않았다. 스키장 옆의 스위스 산록의 샬레 같은 정취 있는 목조건물이 스키를 빌려주는 곳이었다. 우리가족은 스키가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대여소의 카운터로 갔다. 털실로 짠 모자를 쓰고 두툼한 국방색 파커를 입은 삼십대 말쯤의 남자가 서 있었다.

“스키 빌리는데 얼마죠?”

젊은 나는 주저하며 그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삼만 오천원이구요 세 시간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망설였다. 그 돈이면 아내가 한 달을 가르치고 한 아이 부모로부터 받는 돈이었다. 쌀이 반 가마 값이었다. 내가 망설이는 걸 보면서 아내가 입을 열었다.

“까짓 것 빌려 탑시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저 눈밭을 달리는 사람들 사이게 끼어봅시다. 나중에 늙어 돈이 있더라도 우리가 탈 수 있겠수?”

나보다 아내가 훨씬 대범하고 배짱이 두둑한 여자였다. 당장 내일 먹을 게 없어도 오늘 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성질이기도 했다.

“에라 모르겠다. 빌려”

내가 용기를 냈다. 각자 스키를 메고 가족 네 명이 눈이 덮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거기서 가족은 스키를 신고 언덕길을 뒤뚱거리며 쪼르르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무서워”

딸 정아가 조금만 거리가 떨어져도 눈물이 글썽해서 소리친다. 스키를 빌린 돈이 아까워 아내는 세 시간동안 끊임없이 언덕으로 아이들을 끌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동작을 반복했다. 

  

녹초가 된 가족이 콘도로 돌아와 쉬고 있다. 땅거미가 내리고 눈 덮인 골짜기의 푸르름이 번져가고 있었다. 눈에 쓰러진 나무들이 가시같이 눈밭 속에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맑은 밤하늘에 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두칠성이 보이고 은하수가 하얗게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아 세 살짜리 아들 욱이와 장난을 하고 있다. 욱이도 좋아서 그런지 잠을 자지 않고 있다. 나는 싱크대 앞 탁자에서 일기를 쓰고 있었다. 사법연수원 졸업을 며칠 앞둔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딸 정아야, 그리고 아들 욱아. 아버지는 이제부터 열심히 땀흘려 일하면서 너희들의 행복을 만들어 줄게. 그리고 우리 가족의 행복지기가 될 께’

  

일기장은 나의 영혼이 30년 전으로 돌아가 공중에서 가족이 있는 눈 덮인 호수가의 집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하는 타임머신이었다. 그 딸이 자라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다시 딸을 낳아 내게 열 살짜리 손녀가 됐다. 아들도 그 당시의 나보다 나이가 먹은 삼십대 중반이다. 혼자 지키는 아파트의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내가 돌아온 모양이다. 이제는 환갑 진갑을 다 넘긴 백발의 아내가 스키복을 벗으면서 얘기를 한다.

“스키장의 경사가 더 이상 경사로 느껴지지가 않아. 나이가 먹었는데도 고난도 코스가 그냥 평지 같은 느낌이 들어. 젊어서 스키를 배운 건 정말 잘 한 일인 것 같아.” 


젊은 시절부터 우리부부는 세상을 바쁘게만 달리지는 않은 것 같다. 그 때 그 때 천천히 가는 도중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잠시 쉬면서 즐기곤 했다. 그런 기억들이 스냅사진 모양으로 한 장 한 장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결국 삶이란 순간순간 바닷가의 시원한 파도도 보고 밤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도 보고 강물에 투영된 반딧불이의 신비한 빛도 보면서 가족이 먹고 마시고 즐겁게 보낸 사랑의 기억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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