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내용 싸악 스포일러 주의임. 자전적인 만화니까...
* 징집되어 일본 육군 제38사단 229연대에 편성된 미즈키 시게루.
* 38사단에서 차출한 나루세 지대(成瀬支隊)의 지대장 나루세 요시타미(成瀬懿民) 소좌(少佐 ; 소령).
대대 규모의 지대는 헨리 레이드 만(Henry Reid Bay)의 즌겐(Zungen)에 주둔했지만, 바이엔(Baien)에 코다마 2중대 예하 1개 분대(分隊)가 경계부대로 주둔했는데, 미즈키 시게루는 이 분대의 병사였음.
뉴브리튼 섬의 대략적 지도. 미즈키가 최초로 배치된 곳이 오르포드 곶(C. Orford)의 바이엔.
1944년 4월, 라바울(Rabaul)을 거점으로 가젤(Gazelle) 반도에 방어선을 구축해 둔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공격이 호주군을 주축으로 시작되었음. 당시 뉴브리튼 섬의 일본군 전력은 제8방면군 예하 17, 38사단 등등이었고, 연합군 전력은 제5호주사단이었음.
호주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기 전에 일본군 해안초소들부터 정리작업에 들어감. 장교 5명, 부사관 10명 등 소수의 호주군 유격대원이 적진 뒤로 침투한 후 현지인 게릴라를 훈련시켜 여기저기 흩어진 일본군 소부대들을 격파하는 식이었음. 호주군 유격대 지휘관은 뉴기니 출신의 페어팩스-로스(B. Fairfax-Ross) 대위였음.
* 공수된 물자로 무장한 현지인 게릴라들.
1944년 4월, 호주군 스키너(R.I. Skinner) 대위가 지휘하는 게릴라들은 자퀴노트 만(Jacquinot Bay)의 팔말말(Palmalmal)과, 더 북쪽에 떨어진 바이엔을 습격함. 호주군 유격대는 일본군 23인을 사살하고 포로 3인을 획득. 자퀴노트 전초는 말 그대로 전멸했고, 바이엔 전초도 괴멸되다시피 했음. 단 2명이 살아서 밀림(Milim)의 일본군 초소에 경고를 전했음.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미즈키 시게루. 미즈키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 말고 또 하나의 생존자는 적전탈주 혐의가 씌워져 처형당했다 함.
6월 5일, 화이트(White) 중위가 이끄는 미군 정찰대 등도 가세했고, 아투-아울(Atu-Awul) 지역의 일본군은 6월 24일까지 북쪽으로 모두 철수함. 6월 17-18일, 연합군 항공력이 와이드 만(Wide Bay)의 끝단에 위치한 일본군 거점 밀림(Milim)에 대규모 야간공습을 수행. 총 500명 규모였던 나루세 지대는 2중대 200명을 밀림에 남기고 가젤 방어선 쪽으로 철수를 결정함.
* 와이드 만 최남단에 보이는 밀림이 다음 집결지.
2중대에 다시 합류한 미즈키 시게루가 다음으로 실전을 겪게 된 건 9월 17-18일. 페어팩스-로스 대위의 카만드란(Kamandran) 정찰소대와 일본군이 조우전을 치뤘을 때. 호주군 유격대는 무(Mu) 강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고, 나루세 지대의 나머지 병력이 증원되며 호주군은 도로 내륙으로 밀려났음. 이에 10월 6, 7, 8일에 연합군의 공습이 밀림을 집중 타격, 도로 일본군을 가젤 쪽으로 밀어냄.
1944년 12월 27-28일, 칼드웰(Caldwell) 중령이 지휘하는 호주군 제14/32대대가 삼푼(Sampun)에 상륙하고 북상을 시작함. 곧이어 후속하는 제6여단의 나머지도 상륙. 적의 규모가 나루세 지대에 비해 압도적이라 오판한 사단 참모는 철수를 지시. 따라서 미즈키가 소속된 2중대 등은 호주군과의 교전 없이 즌겐 주진지(主陣地)까지 퇴각함. 이러는 와중에 칼라이(Kalai)에서는 2월 15일에 호주군 유격대한테 퇴각 중이던 나루세 지대의 일본군 이십여 명이 컷당함.
* 1944-1945년도 뉴브리튼 중부전역의 작전도.
1945년 2월 27일, 호주군 제5사단장 앨런 램지(Alan Ramsay) 장군은 제1군 사령관 버넌 스터디(Vernon Sturdee) 장군에게 와이타발로-톨(Waitavalo-Tol) 지역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수령함. 이에 따라 3월 3일, 램지 장군은 호주군 제6여단에게 울우트(Wulwut) 강을 도하하여 일본군이 요새화해둔 진지를 함락시키란 지시를 내림. 이것이 바로 미즈키 시게루가 있는 즌겐 주진지, 나루세 지대의 4-500인 가량 되는 수비대였음.
* 즌겐 주진지(主陣地). 나루세 지대의 최후 요충지.
3월 5일, 메이틀랜드(Maitland) 소령이 지휘하는 제19대대를 앞세워 공세가 개시됨. 3월 6일, 스테인레이(Stainlay) 대위의 중대가 일본 방어선 최외곽 거점인 가파른 경사, 가칭 케이크 고지(Cake Hill)를 공격. 전사자 1인 부상자 4인을 내며 1030시에 고지를 함락시킴. 일본군은 전사자 9명을 낸 채 론트리 고지(Lone Tree Hill)로 퇴각함.
하지만 케이크 힐 이후로는 호주군 포병대(제2/14야전연대)를 방열할 만한 마땅한 개활지가 없었고, 일본군 척탄통들은 험지에 쓰기 적격이었음.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내리며 울우트 강이 불어났고, 호주군 공병대가 가설한 부교가 휩쓸려 내려감. 호주군은 이미 도하를 개시한 선봉, 제19대대 위주로 나머지 고지들의 공략에 나서게 됨.
그래도 상태 쌩쌩하고 보급 충분한 호주군은 이미 반병신된 일본군을 상대로 고지들을 빠르게 함락시킴. 3월 7일 론트리 고지가 뵘(Behm) 대위의 중대에 떨어졌고, 9일에는 암스트롱(Armstrong) 소령의 중대에게 무스 고지(Moose Hill)가 함락됨. 저항은 적었는데, 일본 수비대 대부분이 더 동쪽, 고지 능선으로 후퇴했기 때문이었음.
10일, 암스트롱 소령이 이끄는 1개 중대 3개 소대는 영 고지(Young's Hill), 페리 고지(Perry's Knoll)를 연달아 함락시킴. 일본군 전사자는 적어도 시체 13구 이상이 세어졌고, 호주군의 피해는 전사 2 부상 10이었음. 부상자 중 암스트롱 소령을 포함한 4인은 전투를 속행함.
그날 저녁 7시 20분 경, 나루세 지대는 페리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역습을 감행했지만, 영 고지에 거치된 기관총 사격으로 쉽게 격퇴됨. 일본군 적어도 25인 이상이 전사. 여태까지 사상자 누계 23인의 꽤 큰 피해를 본 암스트롱 중대는 후방으로 빠졌고, 뵘 중대와 캐쓰(Kath) 중대가 빈 자리를 메웠음.
3월 15일, 제6여단장 샌도버(Sandover)는 피해가 누적된 19대대를 쌩쌩한 14/32대대로 교체하는 작업을 마쳤고,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버팅기는 베이컨 고지(Bacon Hill)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준비함.
그리고 이때, 17일에 지대장 나루세 소좌가 라바울 사령부에 "옥쇄(玉砕)" 전신을 보내고 만세돌격을 감행함.
* 지대원들에게 옥쇄, 즉 포로로 잡힐 바에야 옥처럼 아름답게 깨어지며 절개를 지켜 죽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나루세 소좌.
문제는 호주군 전사에는 반자이 돌격의 언급이 일언반구도 없음.
고로 무슨 소리냐.
총검 앞세워서 뛰어가다가 가시거리 들어오기도 전에 탈탈 털려서... 막상 적군측에선 어? 쟤네 돌격하긴 함? 이렇게 나왔단 뜻...
여기서 코다마 중대는 나루세한테 ㅈ까라를 시전, 우덜은 옥쇄 안하고 유격전을 치르겠다며 따로 떨어져 나감. 그래서 약 일백 정도가 얀마(ヤンマー, Jammer)로 퇴각에 성공하는데, 일본군 지휘부는 벙쪄했음. 니네 지휘관이 분명히 다 뒤지겠다고 전신을 보냈는데, 너넨 왜 살아 있느냐고. 그래서 코다마한테 오지게 꼽줘서 할복시킴...
* 나루세 소좌에게 항명하는 코다마 중위.
부대 재건을 담당한 마츠우라(松浦) 중좌(中佐 ; 중령)는 현지인 유격대를 이끌던 오카모토 요시로(岡本義郎) 대위를 지휘관으로 얀마 수비대를 재편함. 4월 11일, 나이트(Knight) 중위가 이끄는 제16대대 정찰대가 재머 만(Jammer Bay) 정찰에 나서고, 기존의 첩보대로 꼴랑 20인 규모의 수비대를 예상했다가 깜짝 놀람. 적어도 일백 명의 일본군이 야전축성 중이란 정보를 얻은 호주군 수뇌부는 재머는 그냥 내버리고 라바울 쪽이나 압박하기로 결정함.
* 재편 담당관 마츠우라 중좌. 실제로 마츠우라가 2중대 생존병들에게 '재옥쇄'를 지시하는 일은 없었고, 생존자들은 얀마 수비대에 편입됨. 단, 나루세 지대의 생존 위관장교 2인은 '퇴각하여 목숨을 부지한 죄'로 직위 해제당했음.
그렇지만 내버린다는 게 아예 안 건드린다는 건 아니었고, '섬 뜀뛰기'의 작은 스케일 버전처럼 얀마 수비대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택한 거였음. 그래서 공습은 허구한 날 때려 대었고, 미즈키 시게루도 연합군의 공습에 크게 부상당해 왼쪽 팔을 절단해야 했음. 미즈키는 다른 부상자들과 함께 라바울로 후송되어 8월 25일, 포츠담 선언에 따라 종전을 맞이하게 됨. 끗.
일케 보니까 존나 파란만장하네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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