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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의 독일인앱에서 작성

캡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1.05 12:4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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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나미비아인 

1884년 독일 제국의 식민지가 된 나미비아는 식민지 중 유일하게 다수의 독일인이 정착하였으며 1차 대전 패배로 독일이 나미비아에서 주권을 상실했을 때도 추방당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잔존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2011년 기준 약 2만 명, 나미비아 인구의 약 1%를 차지한다고 추정된다.

대부분의 독일인이 살고 있는 빈트후크의 특정 레스토랑과 호텔에 들어서면 때로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묘사하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식들로, 마치 일부 독일계 나미비아인들이 식민주의 시대를 추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빈트후크 독일 사립학교인 Deutsche Höhere Privatschule (DHPS)에서는 아직도 흑인 학생들이 인종차별과 편견의 피해자이며, 이 학교를 다니는 독일인들은 아직도 흑인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즉 독일의 식민주의는 여전히 나미비아를 분열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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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도발적인 독일 기념물 Reiterdenkmal. 이 기념물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과정에서 발생한 독일군 사망자를 기리고 있다.)

불편한 진실 - 독일인은 어떻게 부유해졌나

오늘날 나미비아 독일인을 포함한 소수의 백인들이 나미비아 상업용 토지의 상당수를 소유하고 있으며, 나미비아 독일인의 다수는 중소기업가를 직업으로 하는 상류층이고 도시에 거주하며, 나미비아 내 관광 산업을 꽉 잡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어떻게 부유해졌을까? 역시 우수한 독일인의 민족성만으로 이룩한 결과일까?

다시 식민지 시대로 돌아가보면, 나미비아는 독일 제국의 경제적 입장에서 처참하게 실패한 식민지였으나 독일의 많은 상인들에게는 가치 있는 사업이었다.

나미비아에 정착한 독일인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추방하며 그들이 소유한 토지의 94%를 빼앗았고, 이것이 그들의 부의 원천이 되었다. 나미비아 독일인 가문인 Woermann의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회사의 수많은 지점과 슈퍼마켓 체인 "Woremann&Block"을 슈유하고 있다.

이런 배경으로 독일계 나미비아인에게 있어 독일의 대량 학살과 식민지 범죄를 인정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이다.

그것이 오늘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유리한 경제적 지위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독일계 나미비아인들은 당시의 잔학 행위를 경시하고, 애써 무시하거나 심지어 부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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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지키기 - 독일의 유산을 보호하라

대량 학살을 부정하는 것 외에도 독일 식민지 문화의 모든 표현을 보호하려는 강한 끈기가 특징이다. 특히 Waterberg에서 식민지 전쟁 묘지의 전사한 독일군을 기념하고 기리는 의식이 나미비아 정부에 의해 금지되면서, 더더욱 그들의 식민지 문화를 강화하려 한다. 주로 그들은 "독일어와 독일 문화를 보호하고 문화 유산을 육성"함으로써 정체성을 확립한다. 독일계 나미비아인이 운영하는 Heimat 박물관에서 독일인의 생활 방식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것도 그 특징이다.

나미비아 정부는 독립 후에도 식민지 유적을 모조리 파괴해버리는 탈식민지 전략은 거부했고, 그 덕분에 여전히 독일의 유산과 기억은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따라서 독일계 나미비아인에게 이러한 유산과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카이저 빌헬름 거리"가 "삼 누조마 거리"로 명칭이 바뀔 때 독일계 나미비아인들은 불같이 항의하고 여러 논란을 촉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황제와 전범에 이름이 붙은 도시와 거리 이름을 지킬 수는 없었다. 지난 30년간 독일어 지명이 바뀔 때마다 독일인 사회는 격렬히 반발했지만,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또다른 주목할 만한 사례는 나미비아에서 "가장 도발적인 식민지의 상징"이었던 Reiterdenkmal의 이전을 둘러 싼 논쟁이다. 말을 탄 독일군을 묘사한 기념물은 도시의 가장 눈에 띄는 지역, 과거 강제수용소가 위치한 언덕에 있었다. 이 도발적인 식민지 기념물은 나미비아가 "독립 박물관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이전되었으나 즉각적으로 독일계의 폭발적인 분노를 일으켰고, "독일의 유산을 훔친다는 것"에 대한 의미심장한 반항을 일으켰다. 그 밖에도 Chistuskirche나 알테 페스테 같은 독일 기념물은 독일계의 정체성이자 공동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집단적 기억의 표식이 되었다.

이러한 독일 기념물은 나미비아의 탈식민지화 논쟁의 쟁점을 보여준다. 이 기념물은 헤레로족이나 나마족 같은 대량 학살 피해자의 후손들에게는 고통의 상징이지만, 독일계에게는 그들의 정체성이자 반드시 지켜야 할 집단적 기억의 표상이 되었다. 나미비아 정부가 독일 식민지 유산과 별개로 나미비아 공동의 동질적인 기억을 만드는 데 열중한다면, 이질적인 독일계는 식민지 유산의 시각적 표현을 유지하는 것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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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당하는 독일 장교의 동상)

식민지 시대를 추억하며

오늘날 나미비아의 독일계 공동체는 식민지 기념물의 물리적 존재와 그들의 독일인 식민지 개척자에 대한 기억에 대한 강한 집착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의 집단적 기억은 나미비아에 도착한 초기 독일인 공동체의 경험에서 시작되며 그것은 "모래와 벼룩만 있는 곳에서 현재를 이룩했다는" 자랑스러운 것으로, 독일의 식민지 기념물에 의해 이러한 기억이 강화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인은 나미비아 정부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식민지 시대의 관행을 이어가며 정체성을 재창조해나간다. 이것은 민간 기업 자본을 통한 기관의 재창조로 이어졌다.

나미비아의 독일인은 식민지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나미비아의 엘리트 계층으로서 항상 다른 공동체보다 나은 삶을 누려왔다. 즉 나미비아의 다른 공동체보다도 민간 자금을 활용해 관광 산업을 할 역량아 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에도 나미비아에 입국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여전히 많은 양의 독일 관광 사업이 제공된다. [독일계 호텔, 식당, 기념물, 박물관, 상점 등등...]

이 독일 공동체의 향수는 "독일" 그 자체보다도 "최초로 나미비아를 개척했다는 독일인의 업적"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이러한 나미비아 최초의 정착민의 기억이 오늘날 독일 공동체의 기억을 형성하고 있다.

"... 식민지 시대에 대한 미화는 아니지만, 좋은 측면을 제시했습니다. 좋았던 옛날을 조금 제시한 겁니다. 그렇죠? 헤레로족이 조상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우리도 역사가 있어요. 많은 독일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알지만, 우리는 나미비아인입니다. 저도 이 나라에서 4대째 살고 있다고요? 우리는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당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가치 있는 성과들을 이룩했습니다."

즉 독일계 나미비아인의 역사적 성찰은 보통 과거의 좋은 시절을 강조한다. 이들은 식민지 역사에 대해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역사적 관점을 갖는다. 그들의 박물관에는 헤레로족이나 나마족에게는 무감각한 독일 문화의 전시품을 전시하기에 나미비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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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하는 공동체

독일의 유산과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30년 간 나미비아의 독일 공동체는 빠르게 쇠락해갔다.

201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제 나미비아에서 독일인의 인구 비중은 1%에 불과하며, 아마 23년 현재는 소수점으로 더 줄었을 것이다. 독일계 나미비아인이 심리적으로 인구 비중 1% 이상을 한계로 인식해온 걸 생각하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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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도시(뤼데리츠)는 겉보기만 독일이고, 아프리카인의 차지죠." - 바바라 무카풀리

나미비아인의 탈식민지 정책은 아직까지 독일인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추방하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아간 적은 없으나, 일부 헤레로족 의원은 신문을 통해 "우리도 무가베처럼 독일인을 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독일 공동체에 대한 반발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공동체는 자신들이 언제든지 수용되거나 추방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불안감이 커질수록 독일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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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의 빈트후크 카니발)

나미비아에서 독일인의 정체성은 그들의 상징에 따라 결정된다. 여전히 그들은 독일어를 말하고 독일 이름과 성씨를 쓴다. 그리고 끊임없이 같은 독일인끼리 교류한다. 종종 독일 TV 방송을 보며 독일의 정치에 대한 토론을 나누고, 저녁에는 식탁에서 만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만나고, 그 밖에도 결혼식, 세례, 장례식 등등.

나미비아의 독일인, 빌헬름 디크만은 저녁마다 독일인들을 자신의 농장으로 초대한다. 독일어로 대화하며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고 대화를 나눈다. 이 대화 내용은 고향에 대한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지에 대한 질문, 빈트후크의 독일인 동상이 언제까지 철거되지 않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와 현재가 격렬하게 충돌하며 감성이 드러나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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